〈 93화 〉위기가 뭔가요
문자는 인아에게서 온 것이었다.
맞춤법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한 다급한 문자 한통에 난 깊은 고뇌에 빠지고 말았다. 젠장, 동네북도 아니고.
우리 육노예들께서 도와달라고 아주 난리시네. 그나저나 이정도 다급함이라면 거의 생명의 위협까지도 느끼는 건가. 아니면 그때 얘기했던 것처럼 또 성접대?
성접대라면 그녀가 이토록 다급한 문자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상세히 내게 문자를 보냈었겠지.
고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는 건데, 우선 경현상가가 어딘지 검색해보기로 했다.
"5분거리? 가깝네?"
생각보다 가까운 곳이었다. 그리고 외진 곳이기도 했고. 2라는 말은 2층을 뜻하는 걸까, 아니면 방번호 같은 걸 말하는 걸까.
한숨을 내쉰 후, 네비를 그곳으로 설정하고 핸들을 잡았다.
"에휴, 내 팔자야. 마컨으로 나를 개조할 수는 없으려나. 양심이라곤 개나 줘버린 희대의 썅놈으로."
그런 말이 있다.
어중간하게 나쁜 놈이 될 바에야, 완전히 나쁜 놈이 되라는 말인데 제법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나처럼 어중간한 놈은 결국 좋은 일을 하고도 욕이나 처먹는 동네북이 되고 마니까.
그래도 그간 떡정도 있고, 정수아를 잡아들이는데에 큰공을 세워주신 육노예니 우선 무슨 일인지나 확인해보기로 했다.
사컨과 마컨이란 든든한 쌍두마차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겠는가. 거기다 인간의 한계에 다다른 육체까지 있기에 크게 위협이 될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아무 일 없어야할텐데.."
나도 모르게 그녀 걱정을 하며, 어느새 경현상가에 도착했다. 외벽 페인트도 벗겨진 허름한 상가였다.
그렇게 늦은 시간이 아님에도 인근의 상가들은 모두 불이 꺼져있었다. 2차선 길은 휑했고, 드문드문 세워진 가로등마저도 껌뻑대고 있다.
굉장히 을씨년스러운게 뭔가 불길하다. 난 긴장감으로 몸을 굳히며 상가 안으로 들어섰다.
우선 현황판으로 각층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해보았다.
1층은 편의점과 은행, 카페, 술집이있었고 2층은 노래주점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는데 리모델링으로 영업은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뭐지?"
우선 2층으로 향했다.
발소리를 죽이고 숨소리도 옅게 내뱉었다.
어떤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젠장, 우리 육노예 덕에 이게 무슨 짓이람.
2층으로 완전히 올라선 난 주변을 예의주시하며 계속 걸었다. 만약 근력증강으로 육체가 강화되지 않았다면 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상가에 다시 발걸음을 돌렸을 것이다.
드라마에서 보아도 구도상, 그리고 전개상으로 주인공에게 무슨 일이 닥치기 딱 좋은 상황이지 않은가?
-자박..자박…
2층은 노래주점뿐 아니라 전체가 다시 리모델링 중인지 공허했다. 먼지와 돌가루들이 밟히며 자박대는 소리를 내었다.
'젠장, 헛짚은 건가?'
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돌리려던 그때, 드디어 인기척이 느껴졌다. 인아의 목소리였다.
뭔가 흐느끼는 듯했는데, 웅얼거려 잘 들리지가 않았다. 난 반사적으로 소리의 진원지로 바삐 걸음을 놀렸다.
모퉁이를 돌아 진원지에 가까워지자 리모델링을 하는지 다시 재개발을 하는지 모를 공사현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진부한 장면이 시야에 펼쳐졌다.
우선, 차분히 살펴보니 당대표나 인아의 아비는 없는 듯했다. 죄다 40대 아래짝으로 보이는 남정네들이었으니까.
대충 스무명정도 되어보였는데, 검은 정장들을 멋드러지게 빼입고 있는게 딱 봐도 조폭들이었다. 그중, 가장 인상이 험상궂게 생긴 녀석이 나의 육노예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서있었다.
흠, 장르변경인가?
액션느와르?
인아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있었는데 여신의 미모 덕에 그 모습마저 아름다웠다.
다행히 그녀의 신변에 큰 문제는 없어보였다. 짱돌을 잠시 굴러본 결과, 놈들은 당대표와 인아의 아비에게 지시받은 자들일 것이고 그렇기에 인아를 집단윤간하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흠, 아비 뇌가 히토미에 절여있으니 했으려나.
"어이ㅡ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냐."
이들 중 보스인 듯한 놈이 인아의 머리끄덩이를 거칠게 놓으며 말했다. 인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흘렸다. 아마 나를 유인했다는 생각에 괴로운 듯했다.
어휴, 착한 것.
난 딱히 쫄리는 기색없이 놈들에게 다가갔다.
"아~ 그냥 니놈들이 누구한테 사주받았나해서."
"그건 알 거 없고, 니가 알아야할 건 여기가 니놈 무덤이 될 거란 거다."
턱을 쓰다듬으며 바닥을 심각하게 쳐다보았다.
"흐음… 무덤치곤 너무 딱딱한데. 땅이나 팔 수 있겠어?"
예전의 나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너스레였다. 나를 죽이겠다 엄포하는 장정들의 앞에서 말이다. 예전의 나였다면 지금쯤 좆빠지게 도망치고 있었을 터. 아니, 애초에 이곳에 오지도 않았겠지.
"미친새끼.. 정신줄 놨냐?"
"근데 이러는 이유나 좀 알려주라. 저세상 가는 마당에 이유 정돈 알려줄 수 있잖아?"
"뭐ㅡ 이유랄 것 있겠냐. 그분들 심기에 거슬리는 짓을 했으니 죽을 뿐이지."
그때, 무리 속에서 작은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야야, 저사람 야신 작가 아니야?"
"어.. 맞는거같은데? 헐 좆되네."
"점마가 야신 작가라고? 나도 그거 봤는데."
'야신'은 바로 초대박 난 미니드라마의 제목이었다. 자식들, 야신의 애청자들인 듯했다. 고마움에 그쪽으로 손을 흔들어보이며 말했다.
"오이오이ㅡ 나 맞아. 야신 봐줘서 고맙다고."
나의 너스레에 무리에서 일동열중쉬엇을 하며 침묵했다. 제 큰형님이란 작자의 진노한 눈빛이 닿은 탓이다.
"이 씹새끼들이 얼빠진 소리나 해대고 말이야. 아니, 아무튼! 넌 여기서 뒤질 줄 알아라."
"흠, 죽기엔 너무 추운데. 좀 따뜻해질 때 죽으면 안 되려나. 추운건 질색이라."
나의 거듭된 장난기에 결국 험상궂은 놈이 칼을 꺼내들었다. 그리곤 인아의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젖히곤 칼로 그녀의 목선을 그을듯 위협했다.
인아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역시, 인질로 쓰면서도 제 딸에게 생채기를 내지말라는 주문은 넣지 않은 모양이다. 성노리개에 이어 인질노릇까지, 참 박인아란 여자도 인생 허벌나게 굴곡진 듯싶다.
그래서 더 정이 가는 거겠지.
젠장.
"이 씨벌년 뒤지게 만들지마라. 곱게 끝내자."
"흐음… 어쩔 수 없군."
만약 사이킥 컨트롤이 없었다면 꽤나 골치 아픈 상황이겠지만 이제 뭐, 크게 감흥도 없다. 위기가 위기다워야 위기지 않겠는가.
어디 고구마 백개를 들고와바라, 사이다 이백개를 마셔줄 테니까.
시스템만 있다면 솔직히 신이 나타나도 따먹을 수 있을것만 같았다.
왼손을 주머니에 넣고 오른손은 언제든 핑거스냅을 할 수 있게끔 모션을 취한다음, 몇걸음 움직이며 말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에 나오는 진짜 멋진 대사였다.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한다더라.. 야신 애청자들은 나가. 나가 뒤지기 싫으면."
물론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영화속 주연처럼고맙다, 태식아, 하며 나갈 용자가 이곳에 어디있겠는가. 그저, 각자 무기를 든 채 공격각을 재고 있었다.
민망함이 조금 머쓱한 뒤통수를 근질였다.
장난은 이만하고, 저 험상궂은 놈이 내 육노예에게 흠집을 내기 전에 끝을 보아야겠다.
"자ㅡ 다들 주목."
공허한 공간을 울리는 나의 외침에 모든 이목이 집중되었다. 어차피 공격각을 열심히 재느라 모든 이목이 쏠려있었었다. 인아의 눈빛까지 몰렸음을 확인한 난, 새차게 핑거스냅을 튕겼다.
-딱ㅡ!
"됐나? 모두 손 들어."
스무명이나 되는 인원에게 거는 첫 사컨이기에 확인은 필수다. 역시나, 모든 손이 들렸다.
"자~ 지금부터 모두 내말 잘 듣습니다. 남자분들은 절대 제 몸에 위해를 가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제 주먹에 맞으면 무조건 기절합니다. 알겠습니까."
""네."""
암시는 간단했다. 일전에 느낀 손맛을 또 느껴보고싶은 나의 작은 욕망이 담겨있었다. 무력으로 누군가를 제압하는 그 쾌감의 손맛.
물론 정당한 대결은 아니지만, 정당한 대결은 애시당초 저쪽에서 어기지 않았던가. 그리고 암시 능력없이 일전에 고딩을 상대했던 것처럼 더 현실적인 쾌감을 느끼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아직 피부조직이 날카로운 금속을 견딜만큼은 되지 못했다.
"아, 그리고 박인아의 몸은 털끝하나 건드리지 못합니다."
-딱ㅡ!
사컨을 풀었고, 놈들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피식, 조소를 지은 난 놈들에게 거침없이 다가가 멈춰섰다. 스무명의 장정들이 원형으로 나를 에워싼다.
"저 새끼 족쳐ㅡ!!"
큰형님의 고함에 장정들이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부웅, 휘익, 슉, 다양한 파공음이 무수히 들려왔지만 내 신체에 닿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하나같이 때리는 시늉만 하고 겁에 질려 뒤로 빠지기 일쑤였다.
-퍼억, 퍽, 퍼퍽.
난 마치 핵을 쓴 버그게이머마냥 양민을 학살해댔다. 복부에 맞아도 기절, 팔뚝에 맞아도 픽픽, 볼링핀이 쓰러지듯 놈들은 기절하며 고꾸라졌다.
재밌어.
새로워.
짜릿해.
놀라워.
무림의 절대고수가 된 것처럼 한 방에 한 명씩 놈들을 처리하자 기어코 한 놈이 남았다. 왜소한 체구에 살짝 어벙하게 생긴 놈이었는데 나무 각목을 든 채 벌벌 떨고 있었다. 나무 각목 따위야 이제 내 신체에 딱히 흠집도 내지 못할 것이다.
"불쌍한지고, 쯧쯧. 원래 부하는 오야지를 잘 만나야 오래 사는 법이지. 가는 길에 빠따나 한번 시원하게 후리고 가라."
머리를 선뜻 내어주며 말했고, 놈이 떨어대다 이내 결심했는지 입을 앙 다물며 각목을 힘껏 휘둘렀다. 당연히 각목은 타격직전에 멈춰버릴 것이다.
그런데, 빠각! 하며 각목이 내 머리를 후려쳤다. 크게 몸이 휘청인 난 급히 무게중심을 잡으며 욱씬대는 머리를 문질렀다. 놈 역시 동료들을 장난감 가지고 놀듯 쓰러뜨리던 나의 머리를 후려쳤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운지 휘둥그레 뜬 눈으로 부러진 각목을 잡은 채 굳어있었다.
"으윽..!? 아파라. 이 씨발. 뭐야. 야이, 씨발. 어떻게 한 거야."
"그, 그냥.. 휘둘렀는뎁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사컨에 걸려 모든 장정들이 손을 들었었다. 숨은 자도 분명히 없었었다.
만약 그랬다면 갑자기 내 명령에 손을 들고 대답을 하는 동료들에 가만히 있지 않았겠지. 근데 대체 어떻게 내 머리를 후린거지? 암시에 걸리지 않았다는 건데, 그렇다고 어벙한 얼굴이 딱히 정신력이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데.
"흠.. 가만.."
설마, 암시를 이해하지 못하면 걸리지 않는 그런 설정이 있는 거였냐..? 또또또, 물어보니까 이제야 대답해주겠네. 건방진 NPC같으니라고, 메뉴얼 책자 같은 거 좀 있으면 내놔봐.
[ 네. 당연하죠. 이해를 하지 못한 대상자는 암시에 걸릴 수가 없습니다. 당연한 소리를.. ]
진짜 내 앞에 나타나기만 해봐라, 이제껏 당한 수모를 다 갚아주마.
[ 네네. ]
그나저나, 만약 근력증강으로 두피를 강화시키지 않았다면 지금쯤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져 허무하게 인생하직할 뻔 했군.
"야, 너."
각목이 부러질 정도로 정타로 맞아놓고도 머리 몇번 쓱쓱 문지르는 것으로 회복한 나의 모습에 놈이 벌벌 떨어댄다. 부러진 각목이 부들부들 흔들렸다.
"뭐라 안할게. 이리와봐. 너 혹시.. '위해'라는 단어 뜻 아니?"
놈이 고개를 급하게 가로젓다가 뭐라도 생각났는지 잔을 드는 시늉을 했다.
"….위하여?"
"…"
건배사인가......
-퍼억!
-털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