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震翰 宣諭 五十二年 진한 선유 52년.
浩氏三十二歲 32세
호씨가 진성왕부에 자리를 잡은 이래 진성왕에게 크나큰 흉사가 닥쳤다. 진성왕의 정비(正妃) 옥씨가 아이를 낳다 그만 세상을 뜬 것이다. 이에 진성왕의 눈과 마음이 흐려졌는데 호씨는 이틈을 놓치지 않고 진성왕에게 제 아내를 총비로 봉해달라 간청하였다. 마침 정비 옥씨의 죽음에 심난하였던 진성왕은 호씨의 청에 그의 아내를 총비로 맞아들였다. 이 소식에 진성왕의 모후인 호성황후 옥씨가 몸져누우니, 이 또한 진성왕에게 닥친 흉사의 하나였다.
이 시기 진성왕은 마음이 심난하여 어쩔 줄을 몰라하였는데, 호씨가 이런 진성왕을 위로한다며 연일 연회를 벌여 소란을 피워대 도성 안에 호씨를 탓하는 원성이 자자했다.
호운은 호화로운 복장의 남자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지 이틀이 지나자, 유란란이 진성왕에게 소개하겠다며 호운을 이끌었다. 사실 왕 같은 고귀한 자들에게 거부감이 있는 호운은 그런 유란란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한동안이라도 진성왕부에서 지낸다면 그에게 인사정도는 해 두어야 한다 생각해 점잖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 곁에 복치운도 함께 서 있었는데, 그는 진성왕부에 들어선 이래로 계속 굳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전하, 제 오라비와 동생입니다."
호사스러움의 정수처럼 벽을 보석으로 장식한 방의 한 가운데에 진성왕은 서 있었다. 진성왕은 참으로 호방한 외모의 사내였다. 커다란 덩치는 보통의 사내들 보다 머리 하나 이상만큼 컸고 거뭇한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이 호랑이처럼 강렬했다. 그 본인의 외모가 그리 강렬한데 거기에 금으로 만든 비녀로 관(冠)의 양쪽에 보석을 늘어트리고 금사(金絲)로 수놓은 장포를 걸친 진성왕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처음에는 멍하니 진성왕의 얼굴을 보던 호운은 곧 그것이 실례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라."
진성왕의 말에 슬그머니 고개를 든 호운은 깜짝 놀랐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안은 눈치채지 못했는데, 진성왕이 생각보다 그에게 가깝게 접근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호운과 복치운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 손을 뻗어 호운의 턱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생각보다 란란을 닮지 않았구나."
순간, 반사적으로 그 손을 떨칠뻔한 호운은 이성을 총동원해 그런 충동을 억눌렀다. 마치 품평하는 듯한 시선에 호운은 얼굴을 굳혔다. 그것은 그의 곁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복치운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너는 란란을 닮았구나. 이 입술도, 하얀 피부도. 콧날은 오히려 란란보다 날렵하군."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진성왕의 얼굴에 호운의 등줄기가 굳었다. 이는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나이가 몇이냐?"
"서른…둘입니다 전하."
"서른 둘? 하, 고작해야 스물 다섯쯤 보았는데 생각보다 나이가 많구나."
당장 코가 닿을 듯 가까운 진성왕의 얼굴에 호운의 몸이 잘게 떨렸다. 그 떨림을 진성왕이라고 느끼지 못했을리 없건만, 그는 태연하게 호운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점차 호운의 떨림이 숨길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유란란이 재빨리 진성왕의 팔을 낚아챘다.
"전하, 그리 오라버니를 놀리시면 싫어요. 제게는 아버지 같은 오라버니예요."
진성왕의 팔을 제 가슴골 사이에 묻으며 유란란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성왕은 순순히 유란란이 하는대로 호운에게서 손을 떼고 물러섰다. 그는 아직 굳은 채 자신을 보고 있는 호운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란란이 나의 총비가 된 이상 그대들도 나의 가족이다. 허니 왕부를 집처럼 여기고 편안히 지내도록 하여라."
"예, 전하."
"…감사합니다 전하."
겨우겨우 떨림을 억누르고 호운이 대답하자 뒤이어 복치운이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그런 복치운의 입술은 호운처럼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호운과 복치운은 유란란을 진성왕과 함께 남겨둔 채 퇴실하였다. 가족인 그들이 앞에 있는데도 유란란의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한 진성왕의 태도로 보아 그들이 퇴실한 후에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것이 유란란 나름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런식으로 직면하게 될 때면 상당히 피곤해졌다.
진성왕의 앞에서 퇴실한 호운과 복치운은 서로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평소라면 복치운이 호운에게 무어라 말이라도 건넸을 시점이지만 어쩐 일인지 복치운은 왕부에 들어온 이래 부쩍 말수가 줄었다. 단지 유란란의 행동에 대한 불만이라기에는 좀 지나친 감이 있는 복치운의 그 태도에 호운은 의아함을 느꼈다.
"치운아."
호운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자 복치운이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진성왕의 총비가 된 유란란의 가족답게 복치운의 차림도 그에 상응하는 것이 되어 있었다. 건장한 체구의 복치운이 성장하자 그 또한 무척 볼만한 것이 되었다.
"대체…."
호운이 이유를 묻기 위해 말을 이을 찰나, 차르릉. 맑은 구슬소리가 들렸다. 낯선 그 소리에 호운이 고개를 돌리자 방금 전 본 진성왕에 버금가는 화려한 차림의 여인이 수많은 시종을 거느린 채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유란란 만큼은 못했지만 제법 깊은 눈매가 인상적인 그 여인은 양손으로 자신의 배를 감싼 채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 여인의 배는 마치 커다란 수박이라도 넣어 놓은 것처럼 커다랗게 부풀어 올라 있었는데, 여인은 그 배를 강조하듯 허리춤에 작은 방울이 매달린 띠를 달고 있었다. 처음의 그 맑은 소리는 그 띠의 방울이 마찰하며 나는 것이었다. 여인은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다 호운과 복치운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곁에 서 있던 노녀(老女)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홍부인, 저기 있는 저 천것들은 무엇이오?"
"아무래도 최근 전하께서 들인 천것의 가족들인듯 싶습니다."
"아아, 그 천박한 것의 가족이란 말이오?"
호운과 복치운에게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인 여인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찌 저 천것들이 이리 당당히 왕부의 복도에 서 있단 말이오? 뱃속의 왕자가 저 천것들로 눈을 버릴까 두렵소."
"예, 얼른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뭣들 하느냐! 썩 물러나지 않고!"
노녀의 말에 복치운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러나 호운은 그런 복치운의 손을 이끌고 얼른 복도의 구석으로 가 고개를 숙였다. 호운과 복치운이 길을 비키자 여인은 보란듯이 코웃음을 치고 방금 전 호운과 복치운이 나온 방향을 향해 걸었다. 이윽고 방울소리가 멀어지자 호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쉽지 않구나 이곳은."
호운의 그 말에 복치운이 갑자기 홱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돌리더니 걷기 시작했다. 호운은 갑작스러운 복치운의 행동에 당황해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았지만, 복치운은 그런 호운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치고 그대로 복도를 걸어가 버렸다. 생전 처음 겪는 복치운의 거친 행동에 호운은 멍한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진성왕부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왕부라는 말에 잔뜩 위축이 되기도 했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호운의 이해를 넘고 있었다. 먼저, 진성왕에게 첩이 마흔명이 넘는다는 사실 자체가 호운을 경악시켰다. 그 첩들 대부분이 아이를 낳았으며 현재 임신중인 처첩만 네명이라는 사실에 호운은 그저 입만 벌렸다.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운 일이었다.
그 처첩들 중에는 유란란처럼 그저 진성왕이 마음에 들어 들인 여인들이 있는가 하면 도성의 내로라하는 집안의 여식으로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고 진성왕부에 들어온 여인들도 있었다. 그날 복도에서 마주쳤던 여인은 진성왕과 정식으로 혼례를 치른 여인의 꼭대기에 선 진성왕비 옥씨였다. 도대체 어찌 알았는지 그날 복도에서 벌어진 일을 낱낱이 알고 있던 유란란은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리듯 말했다.
"꼴에 왕비랍시고 기세등등하지만 전하의 총애를 받지 못해 성혼한지 십년만에 처음 임신한 거랍니다. 그러니 애가 타겠죠."
"란란아, 상대는 왕비마마다."
"오라버니. 저도 왕비예요."
호운의 말에 유란란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물론 유란란의 말처럼 그녀 또한 진성왕의 비(妃)다. 하지만, 아무리 무식한 호운이라도 첩지를 받지 않은 유란란과 그녀가 동급이 아니라는 것도, 그리고 비에도 직급이 있어 그녀가 조금 더 높은 지위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란란은 자신만만했다. 차라리 그녀가 진성왕의 아이라도 임신해 이리 자신만만한것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아직 진성왕과 함께한지 달포가 되지 않은 그녀에게는 태기가 없었다. 호운은 도대체 유란란의 저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수가 없었다.
"오라버니는 그저 저만 믿으시면 되요."
유란란은 호운의 속을 뻔히 알면서도 태연하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러나 호운은 영 가슴에 내려앉은 불안을 지울수가 없었다.
유란란의 자신감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왕부에는 손님이 찾아왔다. 붉은 갑주를 입은 병사들이 우르르 도열한 가운데 푸른 옷을 걸친 노인이 금줄로 봉인된 두루마리를 들고 찾아왔다. 소곤거리는 시종들의 목소리로 호운은 그가 황상을 오랜 세월 보필해온 내관(內官:내시) 목현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진성왕부의 거의 모든 사람의 이목이 목현상에게 집중된 가운데 그는 입을 열었다.
"진성왕 전하를 모시는 유씨는 나와서 명을 받으시오!"
내관들이 가느다란 목소리를 가졌으리라는 호운의 선입견과 달리 두루마리를 든 목현상의 목소리는 장부처럼 당당했다. 목현상의 목소리에 유란란은 턱을 치켜든 채 당당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목현상의 앞으로 가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황상의 명에 따라 유씨를 진성왕 전하의 정일품(正一品) 비(妃)에 봉하니 앞으로 전하를 모시는데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오."
"악!"
목현상의 말에 누구 하나가 자지러지는 비명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유란란은 태연히 목현상이 건네는 두루마리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란란은 부른 배를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진성왕비 옥씨를 보며 보란듯이 미소지었다. 아닌척 하면서도 유란란이 어떤 첩지를 받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그녀는 목현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핏기가 하나 없이 창백했으며 입술은 새파랬다.
"어, 어찌 저 천것에게…!"
"마마, 괜찮으십니까 마마?!"
옥씨의 시종들이 수선을 피워댔지만 옥씨의 시선은 오직 유란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처음 총비니 뭐니 수선을 피워 댔을 때만 하더라도 설마 정말 첩지가 내려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은 옥씨였다. 그런데 저 천것이 자신과 같은 정일품 비에 봉해지자 피가 역류하는 것도 당연했다.
"악…!"
옥씨는 창백한 얼굴로 자신의 배를 부여잡았다. 시종들은 그런 옥씨의 모습에 대경해 의원을 부르고 얼른 옥씨를 들쳐 업었다. 유란란은 시종들에게 업혀 자리를 뜨는 옥씨를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습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된 것은 호운이었다. 옥씨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만삭인 옥씨가 받은 충격이 태아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왕부에 산파와 의원 십수명이 몰려왔다. 산일이 멀었는데도 옥씨의 파수가 시작된 것이다. 심적 충격으로 갑작스레 시작된 파수로 진성왕부는 벌집을 쑤셔놓은 꼴이 되었다.
아아아악! 아아아악!
옥씨의 처소와 멀리 떨어져있는 호운의 방 까지 옥씨의 비명이 들릴 정도였다. 술시부터 시작된 옥씨의 진통은 하루를 넘겨 새벽인 인시(寅時)가 된 지금까지도 쭉 이어지고 있었다.
전하는 어디 계시냐! 전하, 전하는!
숨넘어가는 비명이 끊기는 사이 사이 옥씨는 비명처럼 진성왕을 찾았다. 그러나 이내 그런 옥씨의 외침은 제 비명에 묻혀 사라졌고 다시금 살 떨리는 비명이 이어졌다.
아아아아아악!
처음에는 단지 고통을 시사하던 옥씨의 목소리는 차츰 당장 숨이 끊기려는 자의 긴박한 비명으로 변모하였다. 소리만으로도 절절히 전해지는 고통에 호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지붕을 뚫을 듯 요란한 비명을 끝으로 한동안은 침묵이 감돌았다. 마치 왕부 전체가 그 침묵에 전염된 것 처럼 기분나쁜 침묵이 이어지고 멀리서 큰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그 소란에 이끌리듯 호운은 방을 박차고 나섰다.
"마마, 마마 정신을 차리십시오 마마, 마마!"
"의원, 아기씨는? 아기씨는 아직 숨을 쉬지 않으십니까?"
"일단 피를 멎게 하여야 합니다!"
이미 왕비 옥씨의 처소 주변에는 구름 같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깊은 새벽이라 모두 잠들었어도 될 시간에 뻔히 깨어있던 그들은 닫힌 문 너머로 들리는 외침들에 일이 단단히 틀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왕비 옥씨를 적대하던 일부의 사람들은 대놓고 기뻐하는 표정을 짓지는 못했지만 입가에 웃음이 맺혀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고 아직도 들리지 않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긴박감이 더해졌다.
"길을 비켜라!"
위사들이 왕비의 처소 주변을 둘러싼 시종들을 헤치고 길을 텄다. 그 사이로, 왕비 옥씨가 그토록 찾았던 진성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은 커녕 이 밤에 이리 나와야 한다는 사실에 그저 불만만 가득한 얼굴을 한 진성왕은 옆구리에 유란란을 끼고 있었다. 횃불에 비춰지는 유란란의 나른한 얼굴이나 흐트러진 차림으로 보아 그들이 이 시간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뻔했다. 그 모습에, 관계없는 호운 본인이 숨이 턱 막혔다.
"문을 열어라."
진성왕은 기분 나쁜 침묵에 감싸인 왕비의 처소에는 들어갈 생각도 않고 처소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곧 문이 열리고 멀찍이 선 호운의 눈에도 참담한 처소 안의 풍경이 보였다. 평소라면 우아하게 정돈되어 있을 처소 안은 바닥에는 피에 젖은 수건이 뒹굴고 있었고 처소의 주인 옥씨는 침상에 얼굴을 묻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천장에서 침상으로 길게 내려온 꼬인 줄에 맺힌 피가 옥씨의 고초를 말해주는 듯 했는데 땀에 절은 얼굴의 산파와 의원들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진성왕은 창백한 얼굴로 누운 제 아내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고개를 조아린 의원에게 물었다.
"아이는?"진성왕의 목소리에는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기씨는…흐으윽, 전하."
한 의원이 무릎을 꿇자 연이어 옥씨의 시종들과 산파, 나머지 의원들이 무릎을 꿇었다. 가장 먼저 무릎을 꿇은 의원이 내민 흰 강보가 꽁꽁 싸여있는 모습이나 우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뻔했다.
"마마께서 충격이 크셨는지 그만, 그만…!"
채 말을 잇지 못하는 의원을 보며 진성왕은 무뚝뚝한 어조로 물었다.
"죽었나?"
어찌 제 자식의 이야기인데 저리 싸늘할 수 있는지. 호운은 그 목소리에 등줄기에 소름이 다 돋는 듯하였다. 진성왕의 물음에 의원들과 시종, 산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그들이 통곡하는 모습에 진성왕은 무심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등을 돌렸다.
"전하?"그런 진성왕의 행동에 왕비 옥씨를 모시던 노녀가 얼른 앞으로 나섰다. 옥씨가 흘린 피로 소맷자락이 물든 그녀는 진성왕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전하, 어찌 그냥 가시려 하십니까? 마마께서는 전하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시체를 낳은 것이 칭찬받을 일이라도 되는거냐. 만약 여염집이었다면 불길하다고 내쳐도 할말이 없는 일이다."
아직 달이 채 차지 않아 유산을 하는 것과 죽은 아이를 낳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달랐다. 의원들은 뱃속의 아이도 사람과 같아서 병에 걸려 죽을수도 있다고 설명을 하곤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를 사산(死産)하는 산모들이 시체를 낳는 흉한 운명의 여인이라고 생각하였다.
진성왕의 쌀쌀한 말에 노녀가 고개를 번쩍 들고 외쳤다.
"전하, 눈을 뜨십시오! 진정 마마의 뱃속 아기씨가 그리 된 것이 누구 때문인지 모르시겠습니까? 저 천것 때문입니다, 저 천것이 왕부로 들어와 그리 된 것입니다 전하!"
그런 노녀의 눈은 진성왕의 곁에 선 유란란에게 박혀있었는데, 유란란은 피에 젖은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노녀를 보고 인상을 찌푸린 후 곧장 진성왕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보란듯이 진성왕의 품에 안겨드는 유란란을 보며 노녀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외쳤다.
"저것은 흉한 것입니다, 요물입니다! 얼른 저것을 내치지 않으면 전하 또한…!"
노녀의 외침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진성왕이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노녀의 목을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백근은 족히 되어 보이는 노녀의 모가지를 쥐고 한손으로 들어올린 진성왕은 노녀를 제 눈높이까지 끌어올리고 말했다.
"방금 무엇이라 말했느냐. 흉한 것? 요물이라 하였느냐?
켁켁! 노녀가 숨이 막혀 버둥거리는 모습을 보고도 진성왕은 그 손을 놓지 않았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는 가운데 진성왕의 냉랭한 말이 이어졌다.
"감히 내 비(妃)를 요물이라 하다니. 네년이 옥씨의 세를 믿고 날뛰더니 눈에 뵈는 것이 없구나!"
그리 외치고는 노녀를 바닥에 패대기 친 진성왕은 주변을 둘러싼 병사를 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지금 당장 왕비의 처소에서 저것들을 모두 끌어 내 모조리 참하여라! 감히 황손을 해한 놈들이다!"
"저, 전하!"
갑작스러운 진성왕의 명에 왕비의 처소에서 고개를 조아리던 사람들이 깜짝놀라 외쳤다.
"의원이고 산파고 가릴 것 없이 왕비가 아이를 낳을때 처소 안에 있었던 것들을 모조리 참하여라!"
"전하! 살려주십시오 전하!"
사태가 괴이하게 돌아가자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의원들은 체면도 불구하고 진성왕의 앞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었지만, 곧 병사들에 의해 포박되었다. 순식간에 왕비 옥씨의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끌려 나와 포박되자 방 안에는 옥씨가 홀로 남았다. 간신히 가슴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으로 보아 숨은 붙어있는 듯 보였지만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진 안색을 보아서는 그녀의 상태가 어떤지는 짐작이 갔다. 당장 의원의 처치가 없으면 생명이 위중한 상태였다.
그러나 진성왕은 그런 왕비의 얼굴을 뻔히 보고도 냉랭하게 명하였다.
"황손을 해한 죄를 왕비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당장 왕비 옥씨의 처소를 봉하여 앞으로 내 명령이 있을 때 까지 누구하나 접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진성왕의 명에 감히 이견을 제시하는 자는 누구도 없었다. 진성왕은 왕비의 처소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빙 둘러보고는 제 품에 안긴 유란란을 끌어안으며 거칠게 발걸음을 돌렸다. 시종들은 진성왕이 자리를 뜨자마자 재빨리 활짝 열려 있던 왕비의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것이 호운이 본 진성왕비 옥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호운이 옥씨의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삼일이 지나서였다. 뒤늦게 사태를 안 황후가 직접 황궁에서 진성왕부를 찾아와 옥씨를 만나게 해 달라 간청하여 사흘만에 옥씨의 방문이 열렸는데, 그때 이미 옥씨는 숨이 끊긴 후였다. 황후는 바닥에 넘쳐흐른 피가 굳어있는 가운데 비참히 죽어있는 자신의 며느리이자 육촌 조카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 아이를 낳은 후 출혈이 멎지 않아 그대로 숨졌어도 충분히 비참할 것인데, 옥씨는 침상에서 기어 나와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죽어 있었다. 침상에서부터 문 앞까지 옥씨가 흘린 피가 마치 비오는 날 달팽이가 기어간 흔적처럼 붉은 궤적이 그려져 있었고 방문에는 옥씨가 남긴 것으로 보이는 긁힌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그 모습에 비명을 지른 황후는 이내 혼절해 시종에게 업힌 채 황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황후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꼬박 하루가 지난 후였다. 그녀는 분기를 숨기지 않고 진성왕을 황궁으로 불렀지만 진성왕은 몸이 불편하다고 말하며 그 부름을 거절하였다. 거기에 황후는 또 한번 분노해 길길이 날뛰어댔지만 진성왕은 귀가 먹은 사람처럼 황후의 모든 부름을 거절하고 자신의 집 대문을 걸어 잠궜다. 거기에 뒤늦게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옥명천이 집으로 찾아왔는데도 옥씨가 진성왕의 비로 황실의 일원이니 이는 황실의 일이라며 문전박대하였다.
그 일을 모두 지켜본 호운의 표정에는 나날이 근심이 깊어졌다. 가볍게 여기기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너무나 무거웠다. 처음 유란란이 진성왕의 비가 되리라 이야기 했을 때부터 느낀 불길함이 점차 가시화되는 듯 스멀스멀 호운의 목구멍을 옥죄었다.
그러나 왕비가 그리 비참하게 죽은 후 유란란은 마치 갓 우화(羽化)한 나비처럼 왕부 여기저기를 거닐었다. 수많은 첩을 거느린 진성왕의 유일한 비라는 권력은 왕부 안에서 유란란을 대적할 이가 없게 하였다. 거기에 그녀가 진성왕부로 들어온 이래, 진성왕은 단 하루도 다른 여인과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녀의 권력을 더욱 강하게 하였다.
원래 진성왕은 하룻밤에 한 여인으로 만족 못할 정도의 정력가라, 대부분 여인들은 하룻밤 왕을 모시면 이삼일은 앓아눕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유란란은 마치 사내를 받아들이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진성왕의 침실에 들고서도 다음날이면 꽃처럼 피어나 생생하게 왕부 안을 거닐었다.
그와 함께 왕부에서 호운의 위상도 나날이 높아져 왕부 사람들은 호운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했다. 마치 자신이 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인 양 벌벌 떠는 사람들의 태도에 호운은 오히려 한숨을 쉬어야 했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왕부의 시종들이 알아서 호운에게 옷을 지어다 바쳤고 첩들 중에는 호운에게 재물을 바치는 자들도 있었다. 호운은 그 모든 것을 물렸지만, 호운이 물린 것 모두를 유란란이 다시 받아 호운의 방에 채워 넣었다.
왕부에 들어선지 채 한달도 되지 않아 호운은 저도 모르게 왕부의 실세가 되어 버렸다. 진성왕파의 사람들은 호운이 마치 유란란을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인양 그에게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며 재물을 바치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은 호운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어났고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흘러가는 상황에 결국 호운은 입을 다물어야했다.
그날 진성왕부는 아침부터 요란했다. 왕부의 실세라는 이름을 얻은 후 오히려 자중하듯 내궁 안쪽에 숨어있던 호운에게도 전해질 정도로 부산스러운 소음에 싫어도 무언가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유란란이 호운에게 붙여준 시비 송연을 봐도 확연했다. 송연은 열다섯살 짜리 계집아이로 진성왕부의 시종들 중 그나마 품계(品階)가 높은 송씨의 딸이었다. 시종이 무슨 품계냐 할 수도 있지만 왕을 모시는 시종쯤 된다면 어지간한 지방의 관리들 보다 수준이 높고 품계까지 받는다면 도성의 관리도 부럽지 않을 정도다. 송연은 그런 송씨의 딸이다 보니 왕비 유란란의 오라비인 호운을 대하는데도 무서움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호운의 성격을 간파한 후에는 그에게 투정을 부리거나 애교를 부릴 정도였다. 송연이 좀 더 나이가 들었다면 호운의 눈에 들어 호의호식하는 미래를 꿈꾸고 그러하다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송연은 그저 나이가 많은 오라비를 대하듯 호운을 편히 대했다.
"밖에 무슨 일이니?"
호운의 물음에 아침나절부터 입이 툭 튀어나와있던 송연이 대답했다.
"왕부에서 연회가 벌어진대요."
"그런데 왜 그런 얼굴이야. 그런 표정을 지으니 귀여운 얼굴이 미워지지 않니."
호운이 부드럽게 달래자 송연이 살짝 수줍은 듯 고개를 돌렸다.
"연회라면 연이 너도 즐겁겠구나."
"즐겁지 않아요."
"아니 왜?"
"전하께서 내궁의 사람들은 연회장엔 얼씬도 말라고 엄명을 내리셨는걸요."
시무룩한 송연의 말에 호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송연이 그런 호운을 향해 하소연하듯 말했다.
"정말 심하지 않아요? 이런 큰 연회인데 내궁 사람들은 시종들도 연회장 근처에는 얼씬도 하면 안 된다니. 너무 심해요."
이상한 이야기였다. 보통 이런 큰 집에서 벌어지는 연회라면, 특히나 진성왕처럼 아름다운 첩들이 즐비한 자라면 제가 거느린 여인들을 자랑하게 마련인데 그들을 연회장에 부르지 않다니. 그러나 그런 의아함은 이어진 송연의 말로 해소되었다.
"아무리 총비마마를 소개하기 위한 자리라지만 너무하잖아요!"
송연의 말에 호운은 이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아마도 자신이 소개되는 자리에 혹여 다른 아름다운 여인네가 끼어들어 초를 치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워 유란란이 부탁했을 것이다. 어찌보면 억지같은 부탁을 순순히 들어주는 것을 보면 진성왕이 유란란에게 얼마나 마음을 주고 있는지는 확연했지만 호운은 그것이 어쩐지 찜찜했다.
처음 도성으로 가자는 유란란의 말에 호운은 100일 동안만이라고 단서를 달았다. 그에 유란란은 쾌락하였다. 유란란의 성격상 단지 도성으로 가기 위해 그런 제안에 거짓으로 수락할 리가 없는데 그녀는 너무나 가볍게 100일이라는 기간을 수락하였고, 그러면서도 지금은 진성왕의 총비가 되어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걸까.'
호운은 최근에는 얼굴조차 보기 힘든 유란란을 떠올리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호운이 생각에 잠긴 사이에도 송연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내밀고 있었다. 호운은 이 퉁명스런 얼굴을 한 아이가 그래도 제법 마음에 들었던지라, 아이의 마음을 달랠 것이 없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곧 한동안 손에서 떼어 놓았던 금을 꺼냈다.
송연은 호운이 금을 꺼내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운이 사용하는 금은 요족이 사용하는 것처럼 폭이 좁고 길이도 사내가 팔을 쭉 편 것만큼 짧다. 그러나 그 만큼 소리가 높고 청명해 화사하게 춤추는 유란란과 잘 어울리는 음색을 가지고 있었다.
호운은 가볍게 금의 줄을 손보고 천천히 금을 뜯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호운이 무엇을 하나싶어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송연은 곧 호운이 연주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연주가 이어질수록 송연은 음악에 점점 몰입하였다.
호운이 탄주하기 시작한 것은 서남에서 한때 유행하였던 연가였다. 서남을 지배하던 월왕의 모친인 요족공주를 주인공으로 한 이 노래는 발랄하면서 우아하고 동시에 슬펐다. "바람이 부는 땅에서 핀 꽃이 거센 바람이 휘날려 눈 내리는 정원에 터를 잡았네" 로 시작하는 노래는 요족공주의 한 많은 인생을 바람에 날려온 꽃에 비유해 풀어낸 노래였다. 그녀는 요족의 공주로 태어나 정략결혼으로 선황의 아내가 되어 월왕이라는 아들까지 낳았지만 요사스러운 사술로 황상을 저주하였다는 죄목으로 결국 냉궁(冷宮)에 갇혀 굶어 죽었다. 이 노래의 시작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노래가 유행한 곳이 월왕의 봉토가 중심이다 보니 막연히 월왕이 제 불쌍한 어미의 처지를 천하에 알리기 위해 지은 노래가 아닐까 추측될 뿐이었다.
호운이 연주를 끝내자 송연은 감탄한 것 처럼 입을 벌렸다.
"와, 대인께 이런 재주가 있는지 몰랐어요!"
"듣기 나쁘지는 않았나보구나."
"나쁘기는요! 여태 여러 사람이 연주하는 걸 들었지만 이렇게 부드러운 연주는 생전 처음 들었어요!"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송연은 진정 즐거워하는 표정으로 조잘거렸다. 그 얼굴에는 아까까지 떠 있던 불만스러운 기색이 많이 가신 뒤였다. 호운은 쉽게도 표정을 바꾸는 송연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때 방문 앞에서 작은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호운이 고개를 들어보자 유란란을 시종이 방문앞에 서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마마께서 연회에 참석해 달라고 하십니다."
"연회에…?"분명 방금 전 송연이 화를 내며 내궁안의 자들은 참석해서는 안된다 하지 않았던가 싶어 호운이 미간을 찡그리자 시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인의 금에 맞춰 춤을 출것이니 그 준비를 해 달라하십니다."
시종의 말에 호운은 무의식중에 무릎위의 금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회에서 금을 연주하는 일도, 유란란의 춤과 함께하는 일도 드문일은 아니지만 도성에서 그리해야 한다니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유란란의 요청을 거절하고 싶지도 않아 호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는 술시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황실의 하나뿐인 적통(嫡統)이자 도성의 세도가 진성왕의 연회답게 연회의 규모가 아주 웅장하였다. 커다란 연회장에는 수백명이 앉을 연석이 마련되었고 곳곳에 밝혀진 불로 해가 떨어졌음에도 대낮처럼 밝았다. 보통 연회의 시작을 알리기도 전에 이미 수백석의 연석은 꽉 들어차 있었고 그들 대부분이 황궁에 등청하는 관리인지 관복을 입고 있었다. 붉고 푸르고 검은 관복을 입은 이들이 뒤엉켜있는 모습은 그만큼 진성왕의 세력이 크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동시에 관리의 정점인 각 부(部)의 수장이 입는 청의를 걸친 자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의미심장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모르는 자들이 보면 이 연회는 그저 화려하고 웅장한 연회일 뿐이었다.
잔을 높이 든 진성왕의 건배로부터 시작된 연회는 서서히 소란스러워졌다. 호운은 익숙지 않은 호사스러운 옷에 자꾸만 어깨가 아래로 처지는 것 같았다. 금을 쥐는 손도 무거웠다. 유란란은 평소에도 화려한 복장을 즐겼지만 오늘은 한층 더 화려했다. 당당한 체구의 진성왕의 어깨에도 닿지 않는 작은 키를 가진 그녀지만, 존재감만큼은 이 연회장의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확연했다.
아닌척 하면서도 연회에 참석한 자들은 흘끔흘끔 유란란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 진성왕이 있어 대놓고 그녀를 바라보는 자는 없었지만 대부분이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와 친해지는 것이 진성왕과의 관계에 어떤 도움이 될까를 계산하는 듯 눈을 굴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끈끈한 음심(淫心)이 섞인 눈으로 그녀의 몸을 훑는 자도 있었다. 좋고 나쁜 시선들 모두가 뒤섞여 유란란 단 한 사람에게 쏟아지는 광경에 호운의 미간은 펴질줄을 몰랐다.
그러나 호운이 인상을 쓰거나 말거나 연회는 이어졌다. 유란란은 진성왕의 품에 안기다시피 하여 웃음을 흘리고 있었고 객들 또한 품에 계집 하나씩을 끼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점점 술이 오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유란란이 진성왕의 품을 깊게 파고들어 무어라 속삭이는 모습이 보였다. 거리가 멀어 무어라 속삭이는지 알길이 없지만 그녀의 속삭임을 들은 진성왕이 음탕하게 웃으며 옷위로 그녀의 가슴을 만지는 모습에 호운은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가슴을 만져진 유란란은 당당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연회장의 한 가운데 마련된 자리로 사뿐사뿐 걸어갔다.
차르릉, 차르릉.
익숙치 않은 소리가 어디선가 들린다 싶어 보니 유란란의 허리에서 나는 소리였다. 유란란의 허리에 둘러진 것을 본 호운은 저도 모르게 낮게 신음했다. 그것은 호운에게도 낯이 익은 물건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 죽은 진성왕비 옥씨가 만삭의 배에 두르고 있던 금령(金鈴)이었다. 그것을 마치 원래 자신의 물건인양 차고있는 유란란의 모습에 현기증이 이는 듯 했다.
그러나 호운은 곧 유란란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가 움직이기 쉽도록 자리를 띄워 앉았다. 유란란은 호운이 자리 잡고 앉자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전하의 연회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감사를 보답하기 위해 제가 여러 대신들께 춤을 바칠테니 흔쾌히 받아주시면 좋겠네요."
마치 진성왕부의 안주인이 된다는 듯 당당한 유란란의 말에 작게 술렁거림이 일었다. 왕비 옥씨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이다. 그러나 진성왕은 이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안주인으로 행동하는 그녀의 행동을 묵인하는 것이다.
그녀는 술렁거리는 실내를 자신만만한 미소로 둘러보고 호운에게 눈짓을 했다. 호운은 심호흡을 하고 금에 손을 댔다. 그 순간이었다.
"오왕 전하 납십니다!"
다급한 시종의 외침에 연회장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그러나 얼어붙은 것은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오왕이라는 말에 호운은 한계까지 벌어졌다. 고개를 돌리고 싶고 바라보고 싶지 않은데, 호운의 고개는 그대로 허둥지둥 시종이 달려온 방향을 향해 고정된 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관을 쓴 진성왕과 대조적으로 차분한 색조의 장포를 걸친 사내가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그 모습에 호운은 숨이 턱 막혔다. 9년만이지만 단번에 알아볼수 있었다. 분명, 눈앞에 나타난 자는 오왕이었다.
그것을 인식한 순간 호운의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숨이 막힌 호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호운의 귓가로 진성왕의 음성이 울렸다.
"…네가 예까지 어인 일이냐."
"이런 형님. 소제가 형님이 연회를 벌이셨다기에 찾아왔습니다만, 무언가 잘못되었습니까?"
그날, 그 빗속에서도 단번에 알아들었던 목소리가 이 자리에서 다시 울렸다. 호운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등 뒤로 식은땀이 나고 눈앞이 흐릿해졌다.
"잘못되었다더냐. 그저, 너는 이런 연회를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알았는데 갑자기 찾아와서 당황했을 뿐이다.""그렇습니까 형님. 하지만 오해십니다. 전 이런 연회를 아주 좋아한답니다. 그런데…."
오왕은 말이 말을 끊자 호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호운은 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오왕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쿵! 쿵! 쿵!
심장이 미친듯 요동쳤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달려나가고 싶을 정도로 뛰는 심장에 호운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오왕의 시선은 호운을 스쳐 유란란을 훑은 후 다시 호운에게로 돌아왔다. 그렇게 호운을 가만히 바라보던 오왕은 곧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기, 저 남녀는 누구입니까? 금을 가진 것으로 보아 재주를 파는 자들 같기도 한데."
"재주를 파는 자라니 무례하군. 나의 총비와 그 오라비다."
"아아. 얼마전에 형님께서 들이셨다는 총비가 저 여자입니까. 생각보다 어리군요."
"어디 너의 총동(寵童)들 만큼 어릴까. 나의 비는 아이가 들어설 정도로 성숙하였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팽팽한 형제의 대화에 관리들은 숨을 죽였다. 실상 정적인 진성왕의 연회에 오왕이 참석한 것 자체가 예정외의 일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이 연회에 오왕이 참석하리라 짐작한 이는 없었다. 오왕은 이 연회의 불청객이었다.
그러나 불청객이면서도 오왕은 당당했다. 그는 사람들을 헤치고 단숨에 진성왕의 근처에 마련된 장석에 가 자리를 잡았다. 그 자리는 혹시나 올지도 모를 각 부의 수장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였지만 자리에 앉는데 오왕은 거리낌이 없었다.
"보아하니 무언가 여흥을 할 기세였던 듯 한데, 계속하지요. 저 때문에 형님의 연회를 망쳤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분위기를 주도하는 오왕의 태도에 진성왕이 혀를 쯧, 찼다. 그러나 계속 지체해봐야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연회장 중앙에 나가 선 유란란에게 눈짓을 했다. 그 눈짓을 받은 유란란은 미소를 지은 후 가볍게 진성왕과 오왕에게 나란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 후 춤을 추기 위한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들려야 할 음악이 들리지 않았다. 유란란이 흘긋 호운을 보니,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오라버니?"
혹시나 그가 졸고 있는 것인가 싶어 유란란은 목소리를 낮추고 그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 호운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바고 있는 유란란과 시선을 마주쳤다.
"왜 그러세요?""아…아니다."
호운은 심호흡을 하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세를 잡은 유란란을 따라 금위에 손을 넣었다. 곧 느린 속도로 탄주가 시작되었다. 느릿느릿한 호운의 탄주가 시작되자 유란란이 마치 붉은 나비처럼 너울너울 옷자락을 날리기 시작했다. 마치 옷자락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듯 팔을 가볍게 움직이던 그녀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려하게 움직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연회장 안의 사람들은 순식간에 유란란의 춤에 시선을 빼앗겼다. 평소라면 호운도 탄주를 하는 중간중간 유란란의 모습을 살폈지만 오늘은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혹시, 다시 고개를 들어 시선이 마주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아직 심장이 두근거렸다.
호운은 고개를 숙인 채 탄주에 집중했다. 실수를 해서는 안 될 자리임에도 자꾸만 손가락이 굳었다.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탄주이건만 오늘은 이 짧은 탄주가 너무 힘들었다.
어떻게 탄주를 끝냈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탄성과 박수가 쏟아지는 소리에 호운은 정신을 차렸다. 겨우겨우 탄주가 끝난것이다. 유란란은 춤을 추는 사이 살짝 흐트러진 옷매를 가다듬고는 나비처럼 우아하게 진성왕과 오왕에게 절을 했다.
"정말 훌륭하구나!"
그러자 진성왕은 크게 기꺼워하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홀린 듯 유란란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자들 또한 덩달아 술잔을 높이 들었다. 진성왕은 연회장의 이들이 유란란의 미모와 춤솜씨에 탄복한 듯 보이자 기분이 좋아졌다.
마침내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잦아질 때 쯤, 느릿느릿한 박수소리가 연회장을 갈랐다. 그저 손바닥과 손바닥이 부딪히는 평범한 소리임에도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박수소리가 난 곳을 향하였다. 뒤늦게 박수를 치기 시작한 것은 진성왕과 마주보는 연석에 앉은 오왕이었다.
"형님이 어이해 그녀를 총비로 맞아들였는지 알겠군요. 두 남매가 합쳐 만든 춤으로 정말 눈과 귀가 즐겁습니다 형님."
입에 발린 말일지도 모르지만 오왕의 칭찬이 딱히 듣기 싫지는 않았는지, 진성왕의 입술이 올라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어진 말에 그 미소는 순식간에 걷히고 말았다.
"가능하다면 제 궁에서도 보고 싶군요. 형님, 시간이 나실 때 총비 남매를 제 궁으로 보내 주시겠습니까?"
오왕의 말에 연회장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어차피 암암리에 적대하고 있던 그들이었기에 좋은 말이 오가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토록 대놓고 무례한 말을 오왕이 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 오왕의 말에 진성왕은 순간적으로 화가 치솟아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곧 미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보는 오왕의 얼굴을 보며 화를 억누르며 애써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내궁(內宮)에 내밀하게 숨겨 놓아도 모자랄 비를 어찌 집 밖으로 보내겠느냐. 오왕의 농이 짓궂구나."
"그게 어찌 농이 된단 말입니까? 형님께서 이처럼 사람들을 불러놓고 비의 춤을 보여주신 것은 총비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싶으셨던 것 아닙니까? 해서 그 자랑에 대한 찬사로 형님이 자랑하는 총비의 춤을 종종 보고 싶다 청하는 것인데 어찌 농이라 하십니까."
"내 앞으로도 이같은 연회를 종종 벌일 터이니 춤을 보고 싶다면 그때마다 참석하면 될일이 아니냐."
"형님, 저도 그리하고 싶지만 최근 부황을 대신하여 보는 정무가 막중하여 앞으로는 연회에 참석하는 것이 불가능할듯 싶습니다."
말은 그러했지만 표정은 알듯 모를듯한 미소가 떠올라있어 오왕의 말은 결국 진성왕의 속을 긁기 위한 것이었다. 그 말에 진성왕은 파르르 주먹을 떨었다. 그러나 이미 옥씨일가에게서 등을 돌린 자신이 지금 오왕을 대적하기에는 무리라는 것을 아는 진성왕은 분을 참고 숨을 들이쉬었다.
아무래도 오왕이 작정을 하고 진성왕을 망신을 주려 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모인 고관대작들 중에는 아직 진성왕과 오왕, 어디에도 붙지 않은 자도 있으니 진성왕은 여기에서 기지를 발휘해야 했다.
"내가 그 일을 잊었구나. 생각해 보니 네 말도 맞다."
진성왕이 마치 오왕에게 한수 물러주는 듯 입을 열자 그를 지지하는 자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러나 진성왕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 처를 동생인 너의 궁으로 보내었다간 세간에 너의 평이 어이될지 두렵구나. 하지만 나 또한 정무에 지친 너를 위로해 주고 싶으니…."
진성왕은 말을 하며 금을 무릎위에 올린 채 고개를 숙인 호운을 가리키며 말했다.
"왕비의 오라비인 그를 네 궁으로 보내주마. 비록 내 아름다운 비의 춤이 빠진다 하더라도 그의 탄주라면 정무에 지친 너의 귀를 편안하게 해 줄 것이다."
진성왕의 말에 오왕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것은 진성왕이 최대한 머리를 짜내 내린 결론이었다. 이러면 요청을 받는 진성왕의 체면은 상하지 않으면서도 오왕의 요청이 결코 들어줄 수 없는, 무리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오왕을 보는 진성왕의 눈빛에는 살기가 감돌았지만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찌하겠는가, 오왕."
진성왕의 거듭된 물음에 오왕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못해라는 기색이 역력한 그의 얼굴을 본 진성왕의 입가에 진짜 미소가 떠올랐다. 진성왕은 선명한 미소를 지은 채 술잔을 높이 들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자, 모두들 건배를 하게! 오늘은 기쁜 밤이니!"
모두들 술잔을 높이든 가운데, 두 왕들의 신경전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이 결정된 호운은 그저 창백한 얼굴로 자신의 무릎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연회가 파하지도 않았건만 오왕은 자신의 수하들을 이끌고 자리를 떴다. 아마 창피를 당했기에 더 연석에 있을 생각이 없는 것일것이라 진성왕은 짐작했다. 그런 오왕의 곁에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호운의 모습이 있었다. 진성왕은 자신의 말에 불만을 표하면서도 호운을 굳이 데려가는 오왕의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진성왕의 신경을 긁겠다고 호운을 데려가는 모양새가 우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성왕에게 있어 호운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사랑하는 비의 오라비, 그것뿐인 자였다. 설령 지금 오왕의 곁으로 가 목숨을 잃는다 해도 별다른 타격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가 목숨을 잃어 준다면 오히려 진성왕으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그것은 진성왕에게 오왕을 공박할 빌미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란란은 호운이 오왕의 곁에 선 사실이 못마땅하기 그지없었다.
"전하. 어찌 저의 오라비를 오왕전하께 보내시는 겁니까. 혹시 오라버니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불안한 기색으로 말하는 유란란을 보며 진성왕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걱정말아라. 오왕은 절대로 네 오라비를 해할 수 없으니."
"하지만…목숨은 잃지 않아도 오라버니께서 고초를 당하실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불안합니다."
유란란의 거듭된 요청에 진성왕은 미간을 찡그렸다.
"사내가 하는 일에 어찌 아낙인 그대가 자꾸 끼어드 는것인가."
미미한 불쾌감이 섞인 진성왕의 어조에 유란란은 입을 다물었다. 유란란은 진성왕을 쥐락펴락하고 있었지만 그가 상당히 기분이 들쑥날쑥한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분이 좋을 때는 한없이 관대해지지만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쁘면 상대를 가만히 두지 않는 자가 그였다. 그것은 지금 현재 그가 가장 총애하는 총비 유란란이라도 마찬가지다. 유란란은 곧 표정을 고치고 진성왕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전하, 화내지 마시어요. 그저 오라버니가 걱정되어 그랬을 뿐이예요."
사근사근 말하며 안겨오는 그녀를 보고 진성왕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유란란은 나긋하니 진성왕의 품을 파고들면서도 자꾸만 오왕의 뒤로 고개를 숙인채 따르는 호운을 향하는 시선은 어이하지 못했다.
오왕은 그길로 바로 황궁 안의 자신의 궁으로 돌아왔다. 정궁으로 도착할 때 까지 호운은 말이 없었다. 말 대신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지금 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이자를 어찌할까요."
정궁안으로 들어오자 수하 중 한 사람이 물었다. 그들은 오왕이 호운을 데려온 것이 단지 진성왕을 약올리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기에, 호운의 앞으로의 처우를 물었다. 그러나 오왕은 수하의 말에 의외의 대답을 했다.
"침전으로 가자."
"예?"
무례하게도 수하는 그만 왕의 하명을 되묻고 말았다. 그러나 오왕은 기분이 좋은지 미소를 지은 채 그것을 탓하지 않고 거듭 말했다.
"침전으로 가자하였다."
말을 하면서 오왕은 호운을 보았다. 오왕의 말에 그렇지 않아도 창백하였던 호운의 얼굴에 더욱 핏기가 사라졌다. 창백해진 호운과 달리 수하들은 순순히 호운을 사방에서 압박하여 침전으로 이끌었다. 마치 죄수를 호송하듯 오왕의 뒤를 따른 무리들은 호운과 오왕이 침전안으로 들어가자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섰다. 오왕이 침전으로 들어서자 내관들이 서둘러 그의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목욕물을 올리겠습니다."
"되었다."
대답하며 오왕은 호운의 어깨를 앞으로 밀었다. 그가 민 방향이 침상을 향해있다는 것을 안 호운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 자리에 가만히 버티고 서 있었는데, 그러자 오왕이 혀를 차더니 호운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억!"
순간적으로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목이 끌린 호운은 무릎이 꺾여 질질 끌리듯 침전 안을 끌려갔다. 그리고는 채 저항도 해 보기 전에 침상에 내팽개쳐졌다. 그리고 자신의 몸 위로 오왕이 자연스레 올라타자, 호운은 비명을 내질렀다.
"이, 이러지 마십시오!"
호운은 오왕의 어깨를 밀쳤다. 두렵기도 하였지만 오왕이 할 짓은 더욱 두려웠다. 손끝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오왕의 양어깨를 밀었지만 오왕은 그런 호운의 저항을 가볍게 억눌렀다. 처음과 달리 호운도 이제는 다 큰 사내였지만 오왕과는 아예 아이와 어른 정도로 체격이 차이가 났다. 그러나 호운은 포기하지 않고 오왕의 어깨를 밀었다.
"저 따위를 더럽힌다고 진성왕 전하가 눈 하나 까딱 하실…!"
호운이 다시 외친 순간 철썩!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고 호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오왕은 순간적인 타격에 정신을 못 차린듯 눈을 끔뻑거리는 호운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내 고작 진성왕 따위 때문에 네게 이러는 줄 아느냐."
마치 자신을 조롱하는 듯한 그 말에 호운은 덜덜 떨며 물었다.
"그, 것이 아니라면…무엇입니까."
호운이 시선도 맞추지 못하고 덜덜 떨며 묻자 오왕은 낮게 코웃음 쳤다. 사실 그 또한 자신의 행동에 적잖게 당황한 상황이었다. 진성왕의 곁에 서 있던 호운을 본 순간 본능처럼 열기가 치솟았다. 이는 근 몇 년간 느끼지 못했던 충동이었다. 연회장에서 그 충동을 숨기며 태연하게 행동하느라 애쓴 자신을 생각하면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 충동을 숨길 이유도 없으니 손이 닿는 대로 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하면 그만이긴 한데, 이 묘한 충동은 뭐란 말인가.
사내의 몸에 손이 닿자 전신에 불이 붙은 것처럼 열기가 치솟았다. 혹시나 이 사내가 미혼분(迷魂粉)같은 음약을 사용했나 일순 의심했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사내의 피부에 닿는 순간 그저 심장이 벌벌 뛰었다.
오왕은 제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눈앞의 사내에게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생각이 없는 오왕은 그저 눈앞의 호운에게 손을 뻗었다.
"싫습니다, 차라리 죽이십시오! 싫습니다!"
그러나 호운은 제 몸에 닿은 것이 오왕의 손이라는 사실에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전혀 관계가 없는 다른 자가 손을 대어도 소름이 끼치는 판에 제게 이런 정신적 상흔을 남긴 사내가 손을 댄다 생각하니 반응이 거세 질 수 밖에 없었다.
"싫습니다, 싫습니다! 싫습니다!"
철썩!
요란한 소리가 나고 호운의 고개가 다시 홱 돌아갔다. 그러나 호운은 오왕의 어깨를 밀며 소리를 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마다 반복적으로 날아오는 따귀에 눈앞이 핑핑 돌았지만 호운은 끝까지 소리를 질렀다. 첫 밤에는 그저 오왕의 폭력이 두려워 입을 다물었지만 이제는 그가 제 몸에 손이 닿는다는 것이 더욱 두려웠다. 오왕은 계속해 소리를 지르는 호운을 보고 인상을 쓰다 침전 앞에 고개를 조아린 시종에게 명했다.
"입을 막아라."
오왕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시종들이 침상으로 다가와 호운의 입에 수건을 말아 넣고 재갈을 물렸다. 곧 호운의 비명소리가 잦아들고 실내에는 억눌린 숨소리만 가득 찼다. 오왕은 입이 틀어 막혀서도 버둥거리는 호운을 기막힌 눈으로 바라보다 침상 곁에서 대기하는 시종들을 다시 불렀다.
"팔을 묶어라. 아니, 눌러라."
처음에는 팔을 묶으라 명했던 오왕은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팔을 묶으면 자세를 고칠 때 번잡스러우니 시종들을 시켜 누르면 그만이란 생각이 든 탓이다. 이미 시작부터 한번으로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기름을 부을까요."
늙은 시종이 고개를 조아리고 묻자 오왕은 고개를 젓고 손을 내밀었다.
"기름을 이리 다오."
오왕은 호운의 배 위에 걸터앉은 채 기름을 받아 자신의 손가락을 적셨다. 그리고 호운의 바지의 끈을 풀고 쉽사리 하체를 드러냈다. 호롱아래 드러난 양 다리는 평소 햇볕을 받지 못해 매우 창백한 색을 하고 있었다. 오왕은 잠시 그 다리에 시선을 빼앗겼지만 곧 자신을 받아들일 비소로 시선을 돌리고 손을 뻗었다.
기름이 묻은 손가락이 호운의 구멍을 슬금슬금 파고들었다. 빡빡한 안은 기름덕분에 겨우 들어갈 정도였지만 쉽사리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손가락을 조이는 감각이 마치 사내에게 처음 안겨본 자의 그것과 같아서 오왕은 그 동안 호운이 다른 사내와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호운은 겨우 손가락 하나에 숨을 멈추고 사지를 경련시키고 있었다. 사실 이는 고통에서 오는 것 보다 심리적인 공포가 더 큰 태도였지만, 이를 오왕이 알 리가 없었다.
"마치 처녀같구나."
오왕은 그런 호운을 칭찬하듯 말하며 손가락으로 안쪽을 헤집었다. 마치 호운의 안쪽이 어이 생겼나 확인해 보기라도 하려는 듯 느긋한 동작으로 손가락으로 안을 헤집던 오왕은 곧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자신의 성기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손가락으로 느껴지는 압박감에 성기가 팽팽해져 어서 제가 정복할 길을 찾아들어갈 것이라 아우성을 치는 모습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그러나 지금 상태로는 절대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오왕은 천천히 손가락의 개수를 늘리며 호운의 통로에 기름을 발랐다. 이윽고 안이 세 개의 손가락을 겨우 받아들일 만큼이 되자 오왕은 손가락을 빼고 호운의 양 다리를 잡았다. 그렇게 저항하며 아우성을 치더니 이제 기운이 빠졌는지, 호운은 시체처럼 축 늘어진 채 오왕이 하는 대로 있었다. 오왕은 그런 호운의 얼굴을 흘긋 보고 자신의 하의를 스스로 풀어 아까부터 고개를 치켜세우고 있던 양물을 꺼내 망설임 없이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입구에 들이밀었다.
세 개의 손가락도 겨우 들어가던 곳에 그보다 굵은 성기를 밀어넣으니 호운의 몸이 파들파들 경련했다. 밀어넣는 오왕의 미간에도 깊은 주름이 졌다. 마치 안에서 터트릴듯한 압박감이 들어 고통도 일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쾌감이 오왕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오왕은 고통과 쾌감이 섞인 침입을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던 오왕의 아랫배가 마침내 호운의 엉덩이와 딱 맞는 순간, 오왕은 저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흐읍.
겨우 넣는 것 만인데도 등줄기가 짜릿한 쾌감에 휩싸여 오왕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 호운의 허벅지를 잡은 자신의 손바닥에 전해지는 떨림에 천천히 눈을 떴다. 여전히 재갈이 물려진 호운은 비명도 못 지르고 푸들푸들 떨고 있었는데, 벌써부터 얼굴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열기에 댄 것처럼 달아오른 그 얼굴을 보자 오왕의 욕구가 다시금 용솟음쳤다.
철썩철썩!
마치 볼기를 치는 것처럼 젖은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오왕의 침실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오왕은 호운의 양 다리를 붙잡은 채 격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때마다 호운은 경기를 일으키듯 경련했지만 사지가 붙들린 채라 그의 반응은 그저 잔떨림으로 오왕의 몸으로 전해질 뿐이었다.
한참동안 살이 마찰하는 소리와 끈적한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 끝에 오왕이 끄응, 낮은 소리를 내며 움직임을 멈췄다. 허벅지를 강하게 그러쥔 손이나 찡그린 미간으로 보아 그가 절정에 이르렀다는 것은 명백하였다. 마무리를 하듯 강하게 허리를 밀어올렸던 오왕은 만족스레 탄성을 울리며 호운을 보았다.
이미 호운은 저항할 기력조차 잃은 채 두 눈을 단단히 감고 있었다. 반응없이 늘어져있는 성기나 호운의 태도로 보아 그가 오왕과의 정사에서 별다른 만족을 얻은 것은 아닌게 분명해 보였다. 하긴, 처음에도 그랬고 두 번째도 그랬으니 세 번째라고 별다른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오왕은 그런 호운의 모습이 이상하게 못마땅했다. 그러나 못마땅한 시선으로 호운을 바라보는 오왕의 시선을 무엇이라 착각한 것인지 침실 주변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관(女官)이 고개를 조아리며 물었다.
"침수드시겠습니까?"
그 말은 침대위의 호운을 치우겠다는 말과 동의어였다. 그 말에 오왕은 작게 코웃음을 쳤다. 어디, 이 몸을 한번 가지고 만족할 수 있단 말인가. 오왕은 사정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호운의 몸 안에서 단단히 굳어가는 제 성기를 느끼며 호운의 얼굴을 보았다.
그때, 목이 마른 것처럼 호운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 모습에 오왕은 홀린 것처럼 호운의 몸에 기대어 목울대에 입을 댔다. 입술에 닿는 피부가 마치 저를 오왕을 반기듯 촉촉하게 감겨들었다. 뛰어난 산해진미(山海珍味)가 그러하듯 입술에 닿는 감촉이 식욕을 동하게 하여 오왕은 목울대를 자근자근 깨물고 그 아래로 혀를 움직였다. 제 숨통에 닿는 입술의 느낌에 호운은 저도 모르게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것은 급소에 타인이 접할 때 오는 본능적인 거부반응이었다.
오왕은 호운의 목울대에서 시작된 혀의 움직임을 천천히 쇄골과 목덜미, 어깨로 옮겨갔다. 입술에 착착 감기는 피부의 감촉이 좋았고, 땀을 흘려 미미하게 짠맛이 나는 것도 좋았다. 분명 오왕도 사내이니 가끔 욕정에 못 이겨 계집들을 상대할 때 입술을 대기도 하였다. 그러나 입술에 닿는 그 부들부들한 감촉이 흥을 깨 최근에는 입술은 커녕 손도 상대에게 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 묘하게 딱딱하며 끈적한 피부가 오왕을 자극했다. 자꾸 입술을 대고 싶고 핥고 싶어졌다.
어차피 자신의 손에 들어왔으니 자신의 것이란 생각에 오왕은 망설임 없이 호운의 피부를 헤집었다. 단지 핥기만 하던 동작이 달라져 피부를 빨아먹을 것처럼 당겨대고 이를 세워대자 순식간의 호운의 피부 곳곳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그 모양새가 맞아 부은 뺨보다는 보기 좋아 오왕은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점차 급해지는 동작에 맞추듯 호운의 피부를 빠는 오왕의 동작도 더욱 격해졌다. 그런 오왕의 동작에 속절없이 흔들리며 호운은 희미하게 눈을 떴다. 그러나 이내 눈을 떠도 보이는 것은 흥분해 자신을 덮쳐오는 사내의 얼굴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두 눈을 단단하게 감았다.
모든 일이 끝난 후 호운은 창백한 얼굴로 축 늘어졌다. 창백한 피부 곳곳에 자신이 남긴 붉은 자국들이 영역표시를 하듯 번뜩거리자 오왕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정리를 하겠습니다."
여관이 조심스레 오왕의 눈치를 살피며 호운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가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생전 처음보는 오왕의 태도 때문이었다. 한명을 상대로 몇 번이나 사정을 하는 모습도 그렇고 상대에게 입술을 대는 모습 자체가 여관에게는 낯설었다.
"이 분은 어디로 모실까요."
조심스레 묻는 여관을 보며 오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축 늘어져 정신을 못 차리는 호운의 모습은 만족스러웠지만 여관이 그에게 손을 대고 있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왕은 그런 자신의 어이없는 생각에 이내 혀를 찼다."서쪽에 방이 비어 있을 테니 그쪽으로 데려놓아라."
"네 오왕전하."
더 말을 했다가는 깨끗하게 씻기라는 둥 하는 쓸데없는 말이 나올 것 같았다. 오왕은 겨우 욕구를 풀어줄 사내를 상대로 이상하게 신경을 쓰는 자신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워낙에 상대가 자신의 손을 잘도 빠져나갔던 자라 알 수 없는 조바심이 든 모양이다. 그러나 이미 그가 있는 곳을 확인하였고 총비의 오라비라는 것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이미 그는 손안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다.
오왕은 다급해지려는 제 마음을 가라앉히며 미소지었다. 덕분에 한동안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호운이 진성왕부로 돌아간 것은 그로부터 꼬박 열흘이 흐른 후였다. 초췌한 얼굴로 돌아온 호운의 뺨에는 붉은 자국이 남아 손찌검을 당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시종들은 그런 호운의 얼굴을 뻔히 보고도 못본척 하였다. 오직 송연만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를 반길 뿐이었다. 그 곁에는 창백한 얼굴을 한 복치운이 서 있었다. 호운이 자신의 두발로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본 진성왕부 정문까지였다.
결국 정문을 지나며 호운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복치운에게 업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정신은 멀쩡했지만 익숙지 않은 행위로 점철된 나날덕분에 호운의 몸은 많이 피폐해진 상태였다. 호운이 방에 당도해 침상에 자리를 잡고 누운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호운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유란란이 그의 방으로 왔다. 방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 이게 다 무어랍니까!"
말을 하는 그녀의 어조는 부들부들 떨리고 날카로워져있었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호운에게 다가와 그의 뺨을 조심조심 어루만졌다. 그런 유란란의 모습에 복치운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따지듯 말했다.
"누님께서는 형님께서 오왕과 왕부를 나설 때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하셨단 말입니까?"
평소라면 자신에게 건방지게 구는 복치운에게 따끔한 말을 돌려주었을 유란란이지만 지금은 그저 홀린듯 호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부어오른 뺨을 몇 번이고 쓰다듬던 그녀는 곧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송연이 너는 어서 의원을 불러와라, 어서!"
송연이 허둥지둥 방을 나서자 호운이 눈을 힘겹게 뜨고 말했다.
"의원은 필요없다."
"의원이 필요없다뇨! 오라버니께서 이리 다치셨는데…!"
"아니 괜찮다. 그러니 의원은 불러오지 말아라."
"오라버니…혹시 화나셨어요?"
유란란이 흠칫거리며 호운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호운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혼자 있고 싶다."
"하지만 오라버니."
"란란아. 지금은…정말 혼자있고 싶다."
호운의 말에 유란란은 멈칫거리다 결국 고개를 떨구고 방을 나섰다. 호운은 유란란이 방을 나섰음에도 아직 자신의 곁에 선 복치운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치운아, 너도 나가보거라."
"형님."
"혼자 있고 싶다고 말했잖니. 부탁이다."
호운의 가라앉은 어조와 부탁이라는 말에 결국은 복치운 마저도 그의 방을 나섰다. 문밖에서 복치운과 유란란이 무어라 다투는 소리가 들렸지만 호운은 그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호운의 머릿속에 지난 열흘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것이 온통 저를 압박하던 사내의 얼굴로 귀결되자 호운은 결국 이불을 뒤집어쓰고 의식을 닫으려 애썼다.
지금은 그저 잠들고 싶었다.
호운은 이틀이 지난 후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틀을 푹 쉬고 났더니 몸도 어느정도 회복되었고 얼굴의 붓기도 빠졌다. 그런 호운에게 진성왕이 보냈다는 의원이 찾아왔다. 형식적으로 호운을 살핀 의원은 잘 정양하면 될 것이라는 상투적인 말을 남기고 방문을 나섰다. 그 누구도 호운이 오왕에게 당한 일을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다. 그저,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운이 오왕에게서 고초를 당했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그 짐작이 호운은 고마웠다. 호운은 진성왕부로 자신을 돌려보내던 오왕의 말을 기억한다. 지난 열흘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호운을 겁간한 오왕은 마지막으로 토정하고는 호운을 침상에 내팽개쳐 둔 채 그리 말했다.
"이자를 진성왕부로 돌려보내라."
그의 말에 시종들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호운의 몸을 단장시켜 진성왕부로 마차로 실어 날랐다. 몸은 찢어진 것처럼 아팠지만 안도가 들었다. 겨우 오왕이 제게 질려주었구나 하는 안도가 들었다.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고 괴로웠지만 일단 끝났다는 안도가 컸다. 비록 자신의 집은 아니지만 여기에는 유란란도 있고 복치운도 있다. 그리고 오왕이 제 손으로 저를 놓아주었다. 그 덕분에 호운의 마음은 이틀 전 보다는 훨씬 가벼웠다.
호운이 자리에서 털고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유란란은 한달음에 달려와 그의 손을 잡았다.
"오라버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거에요."
"괜찮다 란란아."
"정말 미안해요 오라버니."
유란란은 아직 붉은 기가 남은 호운의 뺨을 보며 자신이 뺨을 맞은 것처럼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호운은 그런 유란란을 향해 그저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러나 그런 호운의 미소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날 밤, 오왕이 보낸 마차가 진성왕부 앞에 당도했다. 마차에서 내린 내관은 호운의 앞에 서서 당당하게 오왕께서 부르신다는 말을 했다. 호운의 안색이 나빠지는 것을 본 유란란이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무슨 권리로 오왕전하께서 오라버니를 찾으시는거냐. 지난 열흘로 충분하지 않느냐!"
"금을 찾아가라는 말씀이십니다."
그러고 보면 금을 가지고 갔던 호운이 돌아올대는 빈손이었다.
"그런 것이라면 심부름꾼을…."
"직접 오라는 오왕전하의 명이십니다."
내관의 대답에 유란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렇다면 그냥 가지시라고 고해라! 그깟 금, 얼마든지 드린다고!"
유란란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비록 뒷배도 없는 자라지만 명색이 왕의 총비인데도 내관은 지지않고 대답했다.
"오왕전하께서 만약 거부한다면 총비전하를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연회에서 약조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낼 수 없는 총비전하 대신 저 자를 보낸다고 말이지요…."
내관의 말에 유란란의 얼굴이 핼쓱해졌다. 이건 협박이고 억지였지만 이미 그날 연회에서 오고간 말이 있었다. 유란란은 지금이라도 진성왕에게 달려가 애원해볼까 고민했지만 그날, 연회에서 불쾌한 기색을 보였던 진성왕이 호운을 위해 거기까지 움직여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호운을 다시 보냈다가는 지난번처럼 또 시체 꼴을 해서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것은 싫다는 생각에 유란란은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들었다.
"거절한다 전해드려라."
"마마. 이건 마마께서 결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진성왕 전하와 오왕 전하의 말이 걸린 일입니다."
내관이 한치도 지지 않고 대답하자 유란란은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네가 지금 나를 무시함이냐!"
유란란의 날카로운 일갈에도 내관은 형식적으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유란란이 다시금 외치려는 찰나, 유란란의 손목을 호운이 붙들었다.
"그만해라 란란아."
"오라버니."
유란란의 눈빛이 불안으로 흔들거렸다. 그러나 그 불안이 단지 호운이 어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안위 또한 포함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 호운은 짧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내가 가마."
"오라버니…."
유란란은 뭐라 말을 못 하고 호운을 보았다. 호운은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더라도 자신의 마음이 아파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 그리 걱정 말아라."
어떤 것을 선택해도 자신이 가지 않음으로 인해 유란란이 곤란해지는 것은 싫었다. 결국 유란란은 더를 호운을 붙들지 않았다. 호운은 스스로 먼저 입을 열었다는 사실에 안심하며 내관을 따라 진성왕부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