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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震翰 宣諭 五十二年 진한 선유 52년.

浩氏三十二歲 32세

마침내 호씨가 도성에 입성하자 도성에서 변고가 끊이지 않았다. 성종이 몸져눕고 사흘연속 이어진 폭우로 도성의 뒤를 받치던 용성산(龍城山)이 무너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가옥 수십여채가 무너지고 백여명이 목숨을 잃어 도성에 곡소리가 진동하였다.

호씨는 그런 곡소리를 밟으며 당당히 도성땅을 밟아 진성왕을 찾아가 제가 용성산 아래 살던 자인데 하루아침에 집을 잃었다며 거짓으로 하소연 하였다. 하소연을 하는 호씨의 곁에 아름다운 여인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이가 바로 훗날 진성왕의 총비가 되는 유씨였다. 유씨는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가난 때문에 호씨에게 팔려와 그의 아내가 된 여인이었는데, 호씨는 유씨를 아내로 맞자마자 그녀를 다른 사내들의 품으로 보내 돈을 벌곤 하였다. 순진한 유씨는 그런 제 처지를 비관하였지만 워낙에 타고나기를 순종적으로 타고나 제 지아비가 된 호씨의 말에 순순히 따르며 하루하루를 지옥같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옥같은 생활속에서도 유씨의 미모는 빛을 바래지 않아 진성왕 앞에 이르렀을 때 유씨의 미모는 그야말로 가련한 꽃처럼 만개하였다.

진성왕은 한눈에 호씨의 곁에 있던 유씨의 미모에 반하였다. 그리고는 호씨에게 그녀가 누구인지 묻자 호씨가 그녀를 제 처라 대답하지 않고 누이라 답하였다. 그리고는 은근히 하루아침에 집을 잃은 신세가 되어 누이의 지참금이 없어져 앞날이 참으로 걱정스럽다며 진성왕을 충동질하였다. 유씨의 미모와 딱한 처지에 마음이 동하였던 진성왕은 호씨의 말에 판단력을 잃고 그녀를 제 아내로 맞겠다 약조하였다. 이로 인해, 진성왕의 앞날에 시커먼 먹구름이 드리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호운이 유란란과 복치운을 이끌고 도성에 들었을 때 도성의 분위기는 예상과 달랐다. 아이들을 이끌고 커다란 성시도 전전해 보았던 호운이었기에 도성은 좀 더 거대하고 웅장하고 화려하고 요란하리라 짐작했었지만 그런 예상은 도성의 웅장한 문을 지나며 여지없이 깨졌다.

도성이 큰 것은 맞았다. 규모 자체가 호운이 이러할 것이다 짐작했던 것의 몇배였고, 건물은 높고 많았다. 뿐만인가. 거리를 지나는 사람의 수는 인파에 압사를 당할 지경으로 많았다. 도대체 어디서 이리 많은 사람이 나와 걷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규모를 가지고도 도성은 조용했다. 요란함이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묘하게 가라앉은 어두컴컴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한 나라의 수도라면 조금 더 활기차도 되련만 지금 도성은 마치 크나큰 흉사를 앞두고 있는 것처럼 어둡게 찌푸려져 있었다. 풍문에는 얼마전에 비가 내려서 산사태가 일어 수백이 목숨을 잃는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 사고의 흉흉한 기운이 도성까지 미쳐온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 도성의 분위기에 호운과 복치운은 압도당했지만 유란란은 태연자약했다. 그녀는 평소처럼 익숙하게 빈집을 찾아내 빌리고 제 몸을 치장했다. 그리고는 밤이 오자마자 호운의 손을 이끌고 기루와 다관이 밀집한 곳으로 향하였다. 그리고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객잔에 가장 눈에 띄는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 화려한 차림의 미녀가 부러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이유는 고래로부터 하나밖에 없었다. 제 몸을 팔겠다는 신호다.

유란란은 언제나 기루나 다관을 기웃거려 제 치마폭에 싸일 대상을 물색하고는 하곤 했다. 예전에는 포주와 일을 했지만 요즘은 직접 대상을 물색하는 편이었다. 사실 직접 시선을 끌어 사내들을 만나는 것 보다 부자들과 연이 닿아있는 포주에게 제 신상을 맡기는 것이 일을 하기는 편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성공확률이 높은 대신 위험부담이 따랐다. 가끔 질이 나쁜 포주에게 걸리면 천하의 유란란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2년 전 양주에서는 유란란은 포주에게 속아 감금당한 채 사내들에게 윤간을 당하기도 했다. 만약 호운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그녀를 구하러 가지 않았다면 지금도 유란란은 어딘가의 매음굴에서 뒹굴고 있을 터였다.

그 후로 유란란은 포주와는 일을 하지 않았다. 대신 시일이 걸리더라도 직접 사람을 골랐다. 보통 여인네라면 한번 그런 일을 당하면 움츠러들 테지만 오히려 그 일로 유란란은 더욱 강해졌다. 그녀는 한번 당한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고 제 몸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사흘이 갔다. 그 사이에 유란란에게 접근한 포주나 사내들은 여럿이었지만 모두 그녀의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나 유란란은 어디까지나 느긋이 기다렸다. 그녀는 성급함이 일을 그르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마침내 도성에 도착한지 나흘째 째 되던 날. 유란란은 제 눈에 차는 사내를 만났다. 유란란을 보는 사내의 눈은 정욕이라고는 한 톨도 들어있지 않았고 그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품평하는 눈빛을 보냈을 뿐이다. 그렇게 유란란을 꼼꼼히 살핀 사내는 더도 덜도 말고 한마디의 말만을 건넸다.

"하룻밤에 금 오십냥이다. 생각이 있느냐?"

"제 몸을 금 오십냥으로 품으려 생각하시다니 참으로 섭섭하군요."

유란란은 느긋했다. 옥이 반짝이는 피대(皮帶)로 상대의 재력은 어느 정도 파악한 터다. 이런 사람이 모시는 자라면 겨우 금 오십냥에 벌벌 떨 리가 없다. 그저 하룻밤 쾌락을 위한 푼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터였다.

"처녀도 아닐텐데 그 이상을 바라는 건가?"

"처녀를 밝히는 것은 뭘 모르는 자들이지요. 과일도 설익으면 맛이 없는 법이랍니다."

백주대낮에 주고받기에는 참으로 낯 뜨거운 대화였지만 그들은 담담했다. 오히려 그 곁에 앉은 호운의 안색이 슬쩍 달아 올랐다. 유란란의 대답에 사내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그녀의 곁에 앉은 호운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자는 누구인가?"

"저의 오라버니입니다."

보통 기루에 소속되지 않고 몸을 파는 여인네들은 혼자 일을 하는 것은 드물다. 그들은 혹시나 있을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보통 사내를 한명쯤은 달고 다니는데 그들을 종종 제 오라비나 아비라고 소개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오라비인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이 기둥서방이거나 포주였다. 유란란은 그런 사내의 눈빛을 알면서도 모른 체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오라버니의 탄주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한답니다. 한번 보시겠어요?"

사내의 눈이 호운의 무릎위에 기대어진 작은 금(琴)으로 향했다. 그러나 곧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만약 네가 내 주인을 만족시킨다면 언젠가는 그 또한 볼 날이 있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그럼 오늘은 어찌하시려구요."

"금 백냥. 부족하다 여기느냐?"

사내의 말에 유란란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금 백냥이라면 어마어마한 거금이었지만 이미 유란란은 그에 흔들릴 정도로 어리석은 여자가 아니다. 그러나 고민이 길면 상대가 유란란을 포기할 가능성도 있어 그녀는 상대가 포기하지 않을 정도로만 뜸을 들였다.

"그러면 좋아요. 먼저 확인 하시겠어요?"

"그래야겠지."

그러고는 사내는 품안에서 금자를 꺼내 호운의 앞에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고 유란란의 손을 잡았다. 유란란은 나긋하니 사내의 품에 안겨들었다. 유란란을 안은 사내는 이층의 객실로 망설임없이 올라갔다.

남겨진 호운은 탁자위에 놓인 돈을 보다 품 안에 넣었다. 이제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고 있었기에 호운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호운은 유란란의 야망을 알았다. 모든 사내를 자신의 발 아래 두겠다는 그녀의 깜찍한 야망은 이미 물이 오를 대로 올라있었다. 처음에는 고작 창녀주제에, 라며 유란란을 얕보던 사내가 달포도 지나지 않아 그녀의 발에 입을 맞추며 애원하는 모습을 본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해서 유란란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 호운은 자신을 포주라고 수군거리는 사내들의 시선을 감내하며 이층 객실로 들어선 유란란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란란은 사내와 함께 다시 내려왔다. 올라갔을 때나 내려왔을때나 사내나 유란란의 모습은 변화가 없었지만 약간 상기된 유란란의 볼을 보면 위에서 사내가 무엇을 확인했는지는 뻔했다. 애초에, 사내가 호운에게 준 것은 유란란의 몸값이 아니라 일종의 담보였다. 유란란은 그 담보를 위해 제가 사내의 혼을 빼어 놓을 수 있는 몸뚱이를 지닌 여자라는 것을 증명해야했다. 그 증명이 어떤식으로 이루어지는지 호운은 알고 싶지 않았다.

"내일 너를 데리러 갈 것이다. 어디로 가면 되느냐."

"북변 대로의 끝에 있는 다관이에요. 붉은 기와가 얹어진 집이라 찾기는 쉬울 거예요."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품안에서 돈을 꺼냈다. 이번에는 전표였다. 오십냥이 찍힌 전표를 내려놓은 사내는 말없이 사라졌고 호운의 입가에 쓴것이 떠올랐다.

"오라버니, 가요."

유란란은 그런 호운의 표정을 못본 체 하며 그의 손을 이끌었다. 이것이 유란란이 도성에 와 한 첫 장사였다.

그 후로 유란란은 한동안 바빠졌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는 밤마다 자신을 모시러 온 마차를 타고 어디론가 갔다 새벽이슬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호운은 그녀 나름의 삶의 방식이라며 수십번 자신에게 타일렀던 것을 타이르며 유란란을 맞이했다. 연일의 음행(淫行)에 지칠 법 한데도 유란란의 얼굴은 나날이 피어나는 꽃처럼 빛이 났다. 마치 사내들의 품안에서만 피어나는 꽃처럼 점차 화사해지는 유란란의 얼굴을 호운은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도성에 도착한지 보름째 되던날, 유란란은 평소처럼 집을 나섰다. 그러나 그녀는 그날 새벽이 깊어지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호운은 걱정이 되어 그녀를 백방으로 찾아다녔지만 그녀의 흔적을 찾을길이 없었다. 그녀는 마치 하늘로 꺼져버린 사람처럼 종적이 묘연했다.

마침내 유란란이 사라진지 열흘이 지나자 호운은 제 누이가 사라졌다며 관에 신고를 했다. 허나 뚜렷한 연고지가 없는 유란란의 실종에 포쾌들은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속이 타들어가는 것은 호운과 복치운 뿐이었다. 

호운은 비에 푹 젖은 전신을 두꺼운 피풍의(皮風衣)로 가린 채 대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란란의 소식이 끊긴지 벌써 보름째였다. 처음에는 발만 동동 구르다 주변의 다관이나 기루를 헤매며 유란란의 소식을 찾으러 애쓰던 호운의 발길은 이제 고관대작이나 부자들이 몰려 산다는 남쪽 대로 근처를 향해 있었다. 호운은 이곳을 어슬렁거리며 유란란을 모셔갔던 마차를 찾았다. 별 특징이 없는 마차였지만 마차와 바퀴가 닿는 아랫쪽에 작은 매화가 음각되어 있어 본다면 한눈에 알아 볼 터였다.

때문에 호운은 요즘 시간이 날 때 마다 대로 한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지나가는 마차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이틀째였지만 유란란을 데리러 왔던 마차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렸다. 결국 오늘도 해가 질 때 까지 대로에 버티고 서 있던 호운은 주변에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 내릴 때 서야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종일 비를 맞은 몸이 으슬으슬 추웠지만 지금쯤 유란란이 어디선가 고초를 당하고 있다 생각하니 가만 있을수가 없었다.

호운은 비에 젖은 몸으로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옷이 사지에 감겨들고 한기가 들었다. 그러나 실망한 마음보다는 차라리 몸이 편했다. 

호운은 지친 몸을 이끌고 기거하는 다관으로 돌아왔다. 주인이 폐병으로 죽은 뒤 문을 닫은지 십년이 넘은 다관 내부는 거미줄과 먼지로 지저분해져 있었지만 이곳 도성에서의 호운과 남매들의 보금자리였다. 호운은 입구에 들어서자 피풍의를 벗고 물기를 말렸다. 피풍의 아래로 드러난 호운의 얼굴은 창백한데다 많이 지쳐 보였다.

"오셨어요?"

호운이 피풍의를 터는 사이 다관 안쪽에서 훤칠한 체구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아직 소년이라 부를 수 있는 아이였지만 부쩍 사내같은 태가 나는 그는 이제 청년기의 초입에 선 복치운이었다. 이미 16세때 호운과 비슷한 키가 된 그는 19세인 지금은 호운을 내려다 볼 정도로 키가 커졌다. 식욕도 왕성해져 호운의 두배를 먹었으니, 그리 큰 체격이 되는 것도 어찌되면 당연했다.

그는 호운이 혼자 온 것을 보고 잠시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먹었다. 너는?"

"형님께서 주고 가신 돈으로 먹었어요."

복치운의 대답에 호운은 젖은 피풍의를 손으로 짜면서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먹은 게 맞느냐?"

"정말이에요. 그보다, 형님께서도 제대로 식사를 하신게 맞겠지요? 안색이 창백해서 꼭 죽은 사람 같아요."

복치운이 걱정스러운 듯 호운을 보다 그가 손에 든 피풍의를 받아 챙겼다. 피풍의를 받아들자 손끝으로 냉기가 전해졌다. 그 차가운 기운에 복치운이 인상을 쓰고 말했다.

"이러실게 아니라 얼른 목욕하세요. 목욕물을 준비해 두었어요."

"치운아, 그런 일은 할 필요 없다고 했지 않느냐."

말이 쉬워 목욕물을 준비하는 것이지, 물을 데우고 일일이 목욕통에 담는 것도 일이다. 거기에 물을 길어 오는 것도 노동이다. 호운은 복치운이 힘든 일은 하지 않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런 호운의 말에 복치운은 더욱 인상을 썼다.

"뭐가 그런 일이예요? 동생이 형님을 위해 이 정도 일도 못 하나요?"

"치운아."

"그러지 말고 이리로 오세요."

복치운은 냉기에 굳은 호운의 몸을 억지로 이끌고 안쪽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커다란 목욕통이 있는 방에 들어선 복치운은 제 손으로 호운의 옷을 벗기려는 듯 손을 뻗었다. 복치운의 손이 제 가슴팍에 닿자 호운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짝!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고 기묘한 정적이 일었다.  호운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한 일을 깨닫고 어색한 얼굴로 복치운을 보았다. 제 가슴팍에 닿은 복치운의 손을 호운이 쳐낸 것이다. 호운은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미, 미안하다 치운아. 그저 놀라서…."

"…아니예요."

복치운은 신경쓰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리고는 곧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후끈하게 김을 뿜어내는 목욕통 앞에 혼자 앉은 호운은 아직 경직되어 딱딱한 제 몸을 알아차렸다. 아직 심장이 덜덜 떨렸다. 복치운이 제게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도 심장이 미친 듯 요동쳤다.

호운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다 떨리는 손으로 옷을 벗었다. 이윽고 젖은 옷자락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메마른 호운의 몸이 드러났다. 그래도 한창때인 10대와 20대 때는 그 몸에 조금이나마 붙어있던 살점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의 몸에서 사라지더니, 이제 그의 몸은 뼈가 툭툭 불거져 나와 있었다. 어깨뼈와 쇄골, 갈비뼈가 도드라진 호운의 몸은 마치 늙은 망아지처럼 비루해 보이고 볼품이 없었다. 호운은 그런 제 몸을 보고 한숨을 쉬며 목욕통 안으로 들어갔다.

따스한 온기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얼어있던 몸에 이제야 피가 도는 것 같아 호운은 뜨거운 물로 얼굴을 씻었다. 온기가 퍼져나가 굳어있던 몸이 풀어지자, 점차 자신이 한 행동이 떠오르며 굳은 얼굴로 방을 나선 복치운의 얼굴이 떠올랐다.

도대체 언제부터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호운은 타인이 제 몸에 닿는 것을 끔찍하게 실어하게 되었다. 호운은 제 몸에 닿는 타인의 온기가 끔찍하게 싫었다. 옷이 덮인 부분까지는 그나마 견딜만 했지만 맨살에 누군가의 손이 닿는다는 상상만을 해도 소름이 돋았다. 

덕분에 호운은 아내를 떠난 이래로 누군가와 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없었다. 누군가가 제 몸에 닿는 상상만을 해도 소름이 돋는데, 누군가를 품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호운은 쌓인 욕구를 혼자 처리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 욕구의 처리 빈도도 매우 낮아 겨우 몇 달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정도였으니, 보통의 호운 또래 사내가 본다면 그를 고자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는 상태였다. 더군다나 호운이 자위를 할 때 떠올리는 것은 이미 헤어진지 십년 가까이 되는 아내 진부용이었다.

'바보같구나.'

진부용과 호운사이에 벌어진 일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안다면 융 정도가 알고 있을까. 하지만 그 외의 사람은 모를테고, 설령 안다 해도 호운이 누구를 생각하며 절정에 달하는지 호운의 머릿속에 들어와 보지 않고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호운은 진부용을 떠올리며 절정에 달하는 자신의 꼴이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유린당하는 것이 아닌 온전한 관계로 성을 나눈 것이 진부용이 유일하니 어쩔 수 없는 결과라 하더라도 과거를 떨치지 못하는 제 모습이 한심했기 때문이다.

"들어가도 돼요?"

"어, 응!"

멍하니 상념에 잠겨있던 호운은 갑작스러운 복치운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 복치운의 손에는 호운의 옷과 수건이 들려 있었다. 그 배려에 호운은 방금 전 자신이 했던 행동이 떠올랐다.

"치운아."

"여기 놔둘게요."

"미안하다."

"괜찮아요. 형님이…싫어하는 걸 잠시 잊었던 제 잘못이니까."

"미안하다…."

"신경쓰지 마세요. 전 먼저 잘 테니, 형님도 목욕하고 얼른 주무세요."

복치운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말하고 방을 나섰다. 그러나 호운은 그 말을 표면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말을 하는 도중에도, 복치운은 호운을 한번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심한 놈.'

복치운 처럼 어린 아이에게마저 저런 표정을 짓게 하는 스스로가 견딜수 없었다. 호운은 눈을 감고 그대로 물통 속에 머리끝까지 잠겼다. 그러자 마치 어미의 뱃속에 있는 것처럼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날도 비가 내렸다. 호운은 무거운 비를 토해내는 하늘을 멍하니 올려보다 다시 대로로 시선을 돌렸다. 이리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한번은 유란란을 데려갔던 그 마차가 다시 올 것이라 그는 믿었다. 아니, 믿었다기 보다는 소망했다. 이대로 유란란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호운은 걱정에 심장이 뭉개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호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은 연신 무거운 비를 토해냈고 대로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없었다.

한참 대로에 선 채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호운은 멀리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묵직하게 땅이 울리는 소리로 보아 제법 많은 수의 말이 지나는 소리였다. 호운은 비루한 차림의 자신이 이처럼 고관대작의 집이 즐비한 곳에 서 있다가 어떤 봉변을 당하는지 잘 알았기에 담 사이로 몸을 감췄다. 이윽고 붉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말을 탄 채 마차 하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많은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한치도 흐트러지지 않고 대열을 유지하고 다가오는 마차의 모습에 호운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행렬은 곧 있으면 호운이 몸을 숨긴 담에 도착하리라 짐작되는 지점에서 멈췄다. 호운은 어찌해 그들이 멈춰섰는지 의아했지만, 곧 두명의 병사가 말을 몰고 자신이 숨은 곳으로 다가오자 심장이 멎을 듯 놀라고 말았다. 호운은 일순 달아나야 할까를 고민했지만 담의 뒤는 막혀있어 달아날 구멍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병사들이 호운의 앞으로 다가와 창을 코앞에 들이밀며 물었다.

"네놈은 어찌 이런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냐."

"…저, 저는…."

호운은 코앞에 들이밀어진 창에 놀라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그런 호운의 태도에 병사의 표정이 사나워진 찰나, 말의 투레질이 들리더니 또 한명의 병사가 호운이 숨은 담으로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병사는 앞선 두 병사와 달리 검은 피풍의를 두르고 있었는데 붉은 용이 수놓아진 모양새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러나 그 범상치 않은 피풍의보다 호운의 눈을 잡아 끈 것은 투구 아래로 드러난 병사의 얼굴이었다. 마치 눈빛으로도 사람을 도살할 수 있을 것 처럼 선명하고 날카로운 눈빛. 세월이 흘러 이제는 단단한 사내가 되어 있었지만 잊을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융…?!"

호운의 입에서 경악을 숨기지 못한 음성이 흘러나오자 그의 앞에 서 있던 두명의 병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흑마에 올라탄 채 가만히 호운을 내려다 보고 있는 사내, 융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융은 그저 말 없이 호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리는 비도 두 사람의 시야를 방해할 수 없었고 호운은 홀린 것 처럼 융과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 주륵주륵 내리는 빗소리마저 멀어지는 시간은 마치 영원처럼 흘렀다.

"서장군, 무슨 일인가."

비를 뚫고 멀리서 들린 목소리에 호운의 등이 절로 떨렸다. 그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부러 기억 저 편으로 묻어두었던 공포가, 목소리와 함께 생기를 가지고 호운의 등줄기를 훑었다. 잊고 싶어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는 음성이었다. 32년의 인생 동안 단 세 번, 삼일을 마주쳤던 사내이지만 호운은 저 음성의 주인을 죽을 때 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오왕의 음성이었다.

공포에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떨고 싶지 않은데 절로 몸이 떨렸다. 다리가 후들거려 제 자리에 서 있기도 힘이 들었다. 아마 지금 거울로 제 얼굴을 본다면 새파랗게 변했을 것이라 호운은 짐작했다. 융은 그런 호운의 모습을 가만히 보다 곧 호운의 앞에 창을 들이민 병사들에게 말했다.

"왕야께 가 고해라. 그저 비렁뱅이가 하나 있었다고."

"장군?""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가는 네놈들의 목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병사들은 살기가 깃든 융의 목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얼른 마차를 둘러싼 대열로 돌아갔다. 세찬 빗소리에 가려져 병사들이 무어라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아마도 융이 고한 대로 그대로 고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해 숨을 몰아쉬는 호운을 보고 융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행렬이 다 지나갈 때 까지 바닥에 엎드려 있어. 숨을 죽이고, 절대로 고개를 들지 마. 내 반시진, 아니 그 보다 빨리 돌아올 테니 그때 까지 이곳에 있어라. 그렇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위협하듯 으르렁거리는 융의 목소리에 호운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덜덜 떨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융은 호운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적룡이 수놓아진 피풍의가 크게 펄럭이는 모습을 신호로 다시 마차와 말이 이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호운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이마를 바닥에 찧을 정도로 고개를 숙인 호운은 그 자세 그대로 굳은 것처럼 숨소리조차 죽였다.

이윽고 희미한 말발굽 소리도 멀어졌을 때 쯤에야 호운은 긴장이 풀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슬금슬금 주변을 살펴보자, 이미 병사들이나 마차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잔뜩 긴장했던 것이 풀리자 호운은 제 몸이 떨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푸들푸들 손을 떨던 호운은 곧 융이 돌아온다 말했던 것을 떠올리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호운은 융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융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래전에 헤어진 아내 진부용이 떠올랐다. 그러나 방금 전, 아무래도 융은 호운을 도와준 듯 싶었다. 말하자면 은인인 셈이다.

호운은 입술을 깨물고 서 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질타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누가 볼 새라 몸을 낮추고 얼른 그곳을 떠났다. 융에게 제 아내를 빼앗긴 원한이 있다. 그러니, 이처럼 사소한 은혜는 그 원한으로 충분히 상충되는 것이다. 호운은 스스로를 그리 타일렀다.

그렇게 융을 마주친 이래 호운은 대로에 나서는 것을 멈췄다. 융이나 오왕을 다시 보게 될까 두려워 그런 것도 있었지만 놀란 상태로 비를 맞아서인지 그날부터 열이 펄펄 끓어 올라 도저히 나갈 만한 상태가 안 되었다. 앓아 누운 호운을 보고 놀란 복치운이 데려온 의원은 그저 심로(心勞)에 피로가 겹쳐 그렇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고 호운의 열은 내려갈줄을 몰랐다. 이에 복치운의 시름은 깊어졌다. 

그렇게 호운이 앓고 복치운은 걱정하는 사이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후 유란란이 멀쩡한 얼굴로 다관으로 돌아왔다. 나갔을 때 보다 더욱 호사스러운 복장으로 돌아온 유란란은 뒤로 세 사람을 거느리고 돌아왔다. 그 복장조차 예사롭지 않은 사람들은 마치 유란란이 제 주인이라도 된다는 듯 예의바른 태도로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유란란을 타박하려던 복치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님 도대체 어디 갔다 온 겁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은 다 무엇입니까?"

"그보다 오라버니는?"

질문에 대답하기 보다 호운을 묻는 유란란의 말에 복치운의 미간에 깊은 근심이 서렸다.

"형님께서는 지금 앓아 누우셨습니다."

"뭐? 어째서? 어디 다치신 거야?"

유란란이 놀라 묻자 복치운은 그녀를 나무라듯 말했다.

"누님이 사라져서 형님께서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압니까? 누님을 모셔갔던 마차를 찾느라고 남대로의 부촌 앞에서 하루종일 버티고 서 계시다가 이틀 연속으로 비를 맞고 들어오시더니 그대로 자리보존 하고 누우셨습니다."

"왜 그런 미련한 짓을 하신 거야."

호운이 호들갑스럽다는 듯 말하는 유란란을 보며 복치운이 눈에 쌍심지를 켰다.

"누님, 형님께서 걱정하다 앓아 누우셨다는데 할 말이 그것 뿐입니까."

"뭐? 치운이 너, 지금 나를 탓하는 거니?"

"형님 성격을 아시지 않습니까? 가만히 앉아 누님을 기다릴 분이 아니라는 걸요. 그런데 연락도 없이 사라지셨으니 형님이 오죽 걱정하셨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데 그렇게 신경질 좀 내지 말아주겠니? 그보다 오라버니는 어디 계시니?"

귀찮다는 듯 복치운의 말을 자른 유란란은 호운이 어디있냐 재촉하였다. 뻔뻔한 유란란의 태도에 복치운은 질린 표정을 지었지만 곧 한숨을 쉬며 그녀를 안내했다. 유란란이 복치운을 따라 방으로 들어서자 파리한 안색을 하고 색색 숨을 몰아쉬는 호운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마른 몸은 며칠 간 앓는 사이 더욱 핼쓱해져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람!"

유란란은 인상을 찡그리고 호운의 곁에 가 앉았다. 이마에 손을 대어 보자 뜨거울 정도로 열이 끓고 있었다.

"의원을 안 불러오고 여태…""의원을 불러보았지만 그저 심로와 피로라는 말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돈도 없는데 뭘 어찌 합니까."

복치운의 말에 유란란은 인상을 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어서 오라버니를 모시지 않고. 이대로 두었다가는 큰일이 날지도 모르니 얼른 왕부로 모셔야겠다."

유란란의 말에 그녀의 뒤를 따라왔던 자들이 앞으로 나서 호운을 들쳐 맸다. 

"누님?!"

복치운은 유란란의 말에 순순히 따르는 사내들의 행동이나 그녀가 언급한 왕부라는 말에 깜짝놀라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설명대신 얌전히 선 시종들에게 명령을 하느라 바빴다.

"짐은 나중에 챙기면 되니 지금은 오라버니를 모시는게 급선무다. 너, 너는 남아 치운이와 함께 짐을 챙기거라."

유란란이 한 시종을 가리키며 말하자 그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자신을 보는 복치운에게는 설명도 하지 않고 그대로 호운을 업은 시종과 다관 밖으로 나가 버렸다. 허둥지둥 그녀를 따라간 복치운은 다관 앞에 선 호화로운 마차의 모습에 입을 쩍 벌렸다.

검게 정돈된 마차의 문이나 곳곳에 박힌 금장식이 아무리 보아도 그저 그런 부자들이 탈 마차 같지가 않았다. 유란란이 말한 왕부라는 단어와 마차의 모습, 그리고 절도있는 시종들의 모습에 복치운의 표정이 근심으로 물들었다.

유란란은 저를 보는 동생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태연하게 마부에게 명했다.

"어서 왕부로 돌아가자, 어서!"

유란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부가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마차의 모습은 복치운의 눈앞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모습을 감췄고 남겨진 것은 마차가 달리며 피어오른 노란 흙 먼지 뿐이었다.

"누님…."

홀로 남은 복치운이 유란란을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호운은 마치 긴 꿈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차렸다. 잠들어 있는 사이에 무언가 꿈을 꾼 듯 한데도 무슨 꿈을 꾸었는지는 기억나는 바가 없었다. 멍하니 눈을 끔뻑거리던 호운은 곧 자신이 있는 곳이 낯선 곳이라는 것을 깨닫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거친 회벽에 익숙해진 호운에게는 잘 정돈된 실내의 모습이 낯설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호운이 눈을 끔뻑거리는 가운데, 익숙한 인물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보름이 넘도록 자취를 감추었던 유란란이었다.

"란란아."

호운이 놀라 유란란을 부르자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얼른 호운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이마를 쓸었다.

"오라버니!"

멍하니 유란란의 얼굴을 보고 있던 호운은 곧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너 여태 어딜 갔다 온 게냐."

"지금 그게 문제예요? 어디, 아픈 곳은 없어요?"

인상을 찌푸린 유란란의 말에 호운은 눈을 끔뻑거렸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보니 유란란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근심이 서려 있었다.

"왜 그러느냐?"

"지금 왜 그러는 말이 나와요? 오라버니가 죽을 뻔 했는데."

"내가?"

"열이 펄펄 끓어서 나흘이 넘도록 정신을 못 차렸어요. 자칫 잘못했으면 그대로 죽을수도 있는 상태였다구요."

"나흘?"

유란란의 말에 호운은 그저 눈만 끔뻑였다. 그는 그저 비오던 날 잠든 기억밖에 없었다. 잠들기 전에 조금 으슬으슬 춥다고는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날로부터 나흘이 흘렀다니. 유란란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호운의 얼굴을 보다 혀를 차고 자신의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송의원을 불러오너라."

유란란의 시선을 따라 그녀의 뒤를 본 호운은 깜짝 놀랐다. 유란란의 등장에 놀라 눈치채지 못하였는데, 그녀의 뒤에는 고운 복장의 여인이 마치 시종처럼 주르륵 늘어서 있었다. 아니, 태도를 보아 마치 시종처럼이 아니라 진짜 시종일 것인 분명한 그녀들이 유란란의 뒤로 나란히 서 있는 모습에 호운은 위화감을 느꼈다. 더욱이 유란란의 말에 얼른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서는 여인들의 모습은 그녀들이 유란란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의혹이 어린 호운의 시선을 눈치 채고 유란란이 말했다.

"궁금하신게 많을 테지만 일단 몸조리부터 하세요. 걱정하실 일은 이제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유란란의 말에 호운은 납득하지 못했다. 오히려, 말을 아끼는 그녀의 모습이 더욱 의심이 커졌다. 그러나 유란란이 한번 입을 다물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아는 호운은 그저 그녀가 말을 해 줄때 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호운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다음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유란란은 호운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후에야 사정을 설명했다.

"이곳이 진성왕부란 말이냐?"

유란란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설명에 호운은 경악했다. 그 동안 자신을 대하는 시종들의 태도나 주변이 조용한 점, 그리고 화려한 실내의 모습에 제법 그럴듯한 대가댁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하니 왕부(王府)라니. 그것도 차기 황제 후보중 하나인 진성왕의 왕부다. 생전 들어설 일이 없으리라 믿은 굉장한 장소에 호운이 입을 다물지 못하자 유란란이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겨우 그것에 그리 놀라시면 다른 사실을 아시면 까무러치실 것 같네요."

유란란의 불길한 말에 호운은 은근히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다른 사실이라니."

"앞으로 오라버니와 치운이, 저 세사람이 여기에 기거하게 되었거든요."

"우리가 왕부에? 이게 어이 된 일이냐?"

깜짝 놀라 묻는 호운을 보며 유란란은 차분히 상황을 설명했다.

"간단해요. 제가 진성왕 전하의 곁에 있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혹 진성왕 전하의 첩이 된 것이냐?"

호운의 물음에 유란란은 눈웃음을 쳤다. 그 웃음이 호운의 불안감을 부추겼다.

"제가 왜 그 동안 연락을 못 하였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물론 궁금하지."

"그건 보름 전에 진성왕전하께서 저를 첩으로 맞고 싶다 청하셨기 때문이예요."

"?"

이해할 수 없는 유란란의 말에 호운은 눈살을 찌푸리자 그녀가 차근차근 설명했다.

"헌데 제가 그 요청을 거절했거든요. 그러자 그분이 화가 나셔서 저를 집안에 가두셨죠. 연락을 할 수 없었던 것은 그 탓이예요."

유란란의 말에 호운은 깜짝 놀랐다. 유란란은 그런 호운의 걱정을 눈치챈 것 처럼 말했다.

"오라버니께서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없었으니 안심하세요. 그야말로 극진히 대접받았어요. 단지 자유가 조금 제한된 것 뿐이니까요."

"그런데 거절해 감금하였었다면 너를 풀어준 것은, 네가 첩으로 들어간다 수락했단 말이냐?"

호운의 물음에 유란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거절했어요."

"하지만 방금 전에 네가 그러지 않았느냐. 진성왕 전하의 곁에 있게 되었다고. 그 말은…."

"그랬지요. 하지만, 저는 첩이 되는 것은 거절했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단지 첩이라는 이름으로 진성왕전하 곁에 있을 생각은 없었거든요."

알 수 없는 유란란의 말에 호운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적어도 비의 첩지가 아니면 싫다 하였어요. 그래서 이리 시간이 걸린 거죠."

유란란의 여상스러운 어조에 호운의 입이 쩍 벌어졌다. 지금 유란란이 무엇이라 한 것인지, 그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제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비(妃)라 하였다. 비라니. 왕의 첩조차 쉽사리 들어갈 자리가 아니건만, 분명 그녀는 지금 비라 하였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냐?"

자연스레 호운의 목소리가 떨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유란란의 말에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적어도 비가 아니면 싫다고 하였다 했어요. 그게, 이상한가요?"

"란란아!"

깜짝 놀란 호운이 새삼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그의 침상 주변에는 유란란이 데려온 시종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방문 밖에도 위사(衛士)로 보이는 자들이 서 있었다. 그들 또한 유란란의 말을 다 들었다 생각하니 등줄기에 서늘한 것이 스치는 듯 했다. 주변의 눈을 살피는 호운과 달리 유란란은 오히려 태연한 태도로 말했다.

"저 정도를 첩으로 맞아들이는데 비 자리가 아깝다면 차라리 집으로 아니 들이는게 나을것이라 말씀드렸어요. 오라버니, 저는 저를 잘 알아요. 고작 첩으로 들어가도 가만있지도 못해 분란을 일으킬게 뻔해요. 그럴 바에는 비라는 그럴듯한 자리를 쥐어줘야 조금은 조용하지 않겠냐고 전하께 말씀드렸어요."

"그 말에 전하께서는, 무어라 하시더냐…?"

호운이 떨리는 음성으로 묻자 유란란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제가 이리 오라버니를 모셔온 것을 보면 모르겠어요?"

호운은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는 듯 했다.

"그러면, 네가 지금…."

"네, 진성왕 전하의 총비(寵妃)가 되었어요. 아직 정식으로 첩지는 받지 않았지만 전하는 허언을 하실 분이 아니거든요. 곧 첩지를 받고 정식으로 그분의 비가 될 거에요."

유란란의 말에 호운은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도성에 도착한지 이제 겨우 한달여가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 어이 그 짧은 사이에, 왕의 총비라는 자리를 꿰찼단 말인가. 아무리 유란란이 매력적인 여인이라 하더라도 너무 빠르다.

그러나 호운은 그보다 더욱 신경이 쓰이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란란아. 진성왕 전하는 금상 전하의…."

"황상의 유일한 적자이시고 가장 유력한 태자 후보시지요.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태연한 유란란의 말에 호운의 얼굴이 굳었다.

"란란아."

굳은 얼굴로 저를 부르는 호운을 보며 유란란이 새침하게 말했다.

"오라버니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건 제 일이예요. 오라버니께서 참견할 일이 아니라구요."

어차피 유란란이 몸을 팔기 시작한 다음부터 호운의 말을 들은 적이 없다. 그렇기에 호운은 여태 유란란의 행동에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이것은 아니었다.

"여태까지는 내 가만 있지 않았니, 하지만 란란. 상대는 왕야다. 황족이야. 네가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오라버니."

호운의 걱정스러운 말을 유란란이 싹둑 잘랐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웃으세요. 이제 오라버니가 고생하실 일은 없을 테니까. 저와 치운이를 키우느라 오라버니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아는 저인걸요. 이제부터 제가 오라버니를 행복하게 해 드릴 거예요."

자신만만한 유란란의 말에도 호운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그토록 걱정하던 유란란이 무사히 나타났음 에도 호운의 마음은 개이지 않았다. 오히려, 유란란의 등장과 함께 호운의 마음은 새카만 걱정으로 물이 들고 말았다.

"진성왕이 또 첩을 들였다고?"

보고를 받은 황후의 고운 이마가 찡그려졌다. 그녀가 이 같은 보고를 들은 것은 올해 들어 벌써 세 번째였다. 원래 영웅은 호색하고 황제가 된다면 수백까지는 아니라도 수십의 처첩을 두니 상관이 없지만 진성왕의 호색은 그 정도가 심했다. 아직 왕인 진성왕이 한명의 비와 마흔다섯명의 첩을 가지고 있으니 처첩의 수로만은 현 황제를 능가할 정도였다. 거기에 그 처첩들이 줄줄이 낳은 자식들의 수만도 벌써 20명을 넘어섰으니, 진성왕이 황제가 된다면 후계싸움이 피를 튀길 것이 뻔히 예상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올해 들어 두 번째로 진성왕이 들인 첩의 보고로 이미 불만이 목 끝까지 차올라 있던 황후는 올 들어 세 번째 반복된 보고에 이제는 머리가 어찔거릴 정도였다.

"그렇지 않아도 황상께서 누워 계신 와중에 또 첩이라니. 계집이 부족한 것도 아닐텐데 지금 그 아이가 지금 제 정신인 것이냐."

황후의 말에 시종은 그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한참동안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황후는 한숨을 길게 쉬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소식은 없느냐?"

"송귀빈이 또 회임하였다고…."

"송귀빈은 그것은 아들을 낳은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회임을 하였단 말이냐?"

황후는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의자의 팔걸이를 내려쳤다. 진성왕이 어렸을 때야, 장자 태평왕을 흉한 일로 잃고 난 후로 진성왕이 색에 빠른 시일에 눈을 떠 후계자를 안겨주기를 희망하였다. 그리고 첫 손자가 태어났을 때는 뛸 듯이 기뻤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손자의 수가 점차 양손으로 꼽을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슬슬 황후는 상황이 걱정스러워졌다.

자녀 수도 자녀 수지만, 정작 진성왕은 왕비 옥씨와의 사이에서는 후사가 없었다. 진성왕비 옥씨는 황후의 사촌오라비인 옥명천의 외동딸로, 옥명천은 조정을 양분하는 커다란 세력을 가진 조정대신이다. 황후가 진성왕비로 옥씨를 내세운 것도 결국 자신의 친정인 옥씨 일족이 득세하였으면 해서였는데, 정작 자식을 낳아야 할 옥씨는 아들은 커녕 딸도 낳지 못한 상황에서 이리저리 첩에게서 얻은 자식만 스무명이 넘어가니 진성왕은 실속은 못 차린 채 분란의 씨앗만 늘인 셈이다. 

다행히 작년 가을에 옥씨가 임신해 다음달이 산월(産月)이긴 하지만, 아직 옥씨가 낳을 것이 아들인지 딸인지 모를 상황에서는 방심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임신한 아내를 두고 올해 들어서만 첩을 셋이나 들인 진성왕의 행동은 결코 칭찬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언제부터 진성왕이 저리 비뚤어진것인지. 

한탄을 하는 황후는 새삼스레 세상을 뜬 태평왕을 떠올렸다. 비록 어렸지만 태평왕의 영특함은 진성왕과 비견되지 않아 그야말로 황제의 재목이었다. 거기에 황후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잘 듣는 귀여운 아들이었다. 그렇기에 어렸을 때부터 황후는 태평왕의 양육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그런데 그 귀여운 아들이 그리 허망하게 갔다. 태평왕을 생각할 때마다 황후는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나 곧 황후는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그런 신세를 한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오왕은 무엇을 하고 있다더냐?"

"정궁(正宮)에서 집무를 보고 있다 합니다."

그 대답에 황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미 오왕이 황궁에서 집무를 보는 모습이 별달리 특별한 모습이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처음 오왕이 왕으로 봉해졌을 때만 하여도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다. 황후는 금상보다 다섯 살 연상이인데, 보통의 황족들이 그러하듯 그녀와 금상 또한 서로가 애틋한 감정을 가져 맺은 부부의 연이 아니었다. 그저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오른 금상이 옥씨일족의 등살에 못 이겨 정략적인 이유로 황후를 아내로 맞아들였을 뿐이다. 처음부터 금상은 저보다 다섯 살 연상인 아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때문에 의무로 그녀를 안아 태평왕와 진성왕이라는 두 아들을 얻은 후 그녀의 처소에는 발길을 뚝 끊었다. 어차피 황후 또한 금상에게 애정이 없었으니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별다른 감상은 없었다. 허나, 나날이 다른 여인들의 품을 떠도는 금상의 행각에 여인으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졌다.

오왕은 그런 금상이 가장 총애했던 여인의 자식이었다. 그 여인을 향한 금상의 총애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황후에게는 목걸이 하나 선물하지 않았던 금상이 그녀를 위해 궁을 지어 선물했을 정도였다. 보애궁(寶愛宮)이라 이름 붙은 그 궁은 황궁 내에서 가장 아름답고 호화롭게 꾸며졌다. 정작 황후궁은 찾지도 않는 금상이 보애궁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니 황후의 부아가 치밀었다. 만약 그녀가 죽지 않았다면 황후가 그녀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할 정도로 그녀를 향한 금상의 총애는 남달랐다.

그러니 그런 여인의 자식이 황후에게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금상은 어린 나이에 어미를 잃은 오왕을 불쌍히 여겨 황후에게 그를 맡겼지만 제 배로 낳은 자식도 아닌 연적의 자식을 황후가 온건히 키울리 만무했다. 때문에 오왕은 거의 방치되어 자랐다. 황상의 아들임에도 일곱 살이 될 때까지 글 한줄 배우지 못했고 옷은 언제나 천것들이 입는 무명옷만 입혔다. 만약 어느날 우연히 황후궁을 찾은 황상이 그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오늘의 오왕은 없을 것이다.

'그 천것이….'

오왕을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돌았다. 소싯적 오왕은 언제나 황후의 눈치나 살피던 천것이었다. 소심한데다 패기가 없어 황후가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높이면 어쩔줄을 몰라하던 놈이었다. 그러던 놈이 황후궁을 떠난지 단 사년만에 군(君)으로 봉해지더니 열다섯 무렵에는 왕(王)으로 봉해져 이제는 조정을 쥐락펴락 하는 세력가로 성장했다. 

처음에 그가 왕으로 봉해졌을 때 까지만 해도 황후는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옛 연인에 대한 향수로 마음약한 금상이 그러했으리라 생각했을 뿐이다. 제 아무리 총애받는 아들이라 하더라도 적자인 진성왕과 옥씨일족을 무시할수는 없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태평왕이 죽은 후 달리 태자를 정하지 않은 황상은 자신의 몸이 아직 건강해 태자를 빨리 정할 필요가 없다 말했다. 황후는 처음에는 그것이 태평왕을 잃은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그런 것이라 착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차일피일 태자책봉을 미루던 황상이 갑자기 쓰러지자 오왕에게 대리청정을 명하는 것을 보면 그의 의도가 분명했다.

보위를 오왕에게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금상은 무작정 태자 자리를 오왕에게 주어 분란을 만들기 보다는 오왕 스스로 주변을 정리하고 확고부동한 후계자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게 분명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황후는 전율했다. 어찌하여 대 진한의 황제 자리를 저런 천것의 피가 섞인 서출 따위에게 물려주려 한단 말인가. 정당한 후계자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분해 황후는 견딜수가 없었다.

"황상께서는 어찌하고 계시냐?"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시고 있다고 합니다."

"의식은 있으시겠지?""예 마마."

"황상께 가자."

황후는 신경질적으로 팔걸이를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하지 않더라도 황상의 곁에 붙여 어서 진성왕을 태자로 책봉하라 말해야 한다. 또 누가 아는가. 몸이 약해진 황상이 황후의 말대로 순순히 진성왕을 태자로 책봉해 줄지. 

자리에서 일어난 황후를 따라 수십명의 궁인들이 뒤를 따랐다. 황후가 길을 걷자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 분분히 고개를 숙였고 그럴수록 더욱 황후의 턱은 꼿꼿이 치켜세워졌다.

이때 눈앞의 권력에 눈이 멀어 있던 황후는 자신이 들은 최초의 보고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로 인해 이틀 뒤에 애꿎은 시종의 목을 치며 펄펄 날뛰게 되었지만, 이 시점에게 그 보고는 그저 문란한 제 아들이 또 계집 하나를 들인 이야기에 불과했다. 

황궁의 심처(深處)에 위치한 정궁(正宮)은 원래는 금상의 조부되는 태종이 모후를 모시기 위해 지은 궁으로, 사십여개의 방과 거대한 정원을 가진 일종의 별궁(別宮)이다. 정궁은 황궁내에 있으면서도 황궁과 사이에 높은 담이 가려있어 황궁의 사람들이 쉽사리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라 일종의 작은 요새와도 같았는데, 도성에 거처가 없는 오왕을 위해 황상이 하사해 이제는 오왕의 궁이 되었다.

그 정궁 한 구석에서 대낮부터 끈적한 신음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요사스러운 신음의 근원은 정궁의 주인인 오왕의 집무실이었다. 환한 태양빛이 내리쬐는 집무실 안에서는 대낮과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응, 아! 아!"

신음의 근원은 거대한 서탁에 기대어 선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이 집무실과 정궁의 주인인 오왕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작은 체구의 소년이었다. 오왕의 어깨에 겨우 닿을 아담한 체구의 소년은 벌거 벗은 채 의자에 앉은 오왕의 위에 앉아 끊임없이 신음을 울리고 있었다.

제게 몸을 비비며 요란하게 신음을 울리는 소년과 달리 오왕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그의 표정은 정사를 즐기는 사람이라기에는 싸늘했고 두 눈동자 또한 열기가 아닌 따분함에 싸여 있었다. 

사실 오왕은 지금 무척 따분했다. 아비인 황상이 쓰러지자 오왕에게 대리청정을 요구한 것은 미래에 벌어질 일을 미리 앞당긴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오왕의 주변인들은 이제야 오왕 전하가 태자로 인정받은 것이나 진배 없다며 좋아 날뛰었고, 황후측에서는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길길이 날뛰어댔지만 오왕은 그 일에 전혀 감흥이 없었다. 그저 원래 일어날 일이었으니 일어났다는 감상이 컸다. 때문에 최근들어 슬금거리며 신경을 긁는 일들이 늘어난 것이 그저 짜증스러웠다.

그나마 정적이라 할 수 있는 황후도 황상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감히 오왕에게 덤벼들지 못할 테고, 머저리 같은 진성왕은 그저 제가 황제가 되는것이 당연하다 믿고 있을테니 아무 행동을 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이는 마치 폭풍전의 고요와 다름없어서 금상이 오늘에라도 붕어한다면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갈 테지만 그때까지 오왕은 할 일이 없었다. 그저 때를 기다리는 것은 무척 지루한 일이라 오왕의 따분함은 극에 달했다.

때문에 오왕은 그 따분함을 타파하고자 자신의 봉토인 하남 오왕부(吳王府)에 있던 첩들을 모두 도성으로 불러들였다. 지금 오왕의 위에 걸터앉아 요란하게 허리를 흔드는 소년도 그런 오왕의 첩 중 한 사람으로 도성에 오기 전 까지는 오왕이 가장 자주 침실로 불러들였던 소년이었다. 하지만 근래에 오왕은 이 소년에게 조금 식상한 기색이 있었다. 

"네 나이가 몇이냐?"

오왕은 제게 기대어 요란하게 허리를 흔드는 소년을 보며 물었다. 한참 열중해 허리를 흔들던 소년은 뒤늦게 오왕의 물음을 깨닫고 흥분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열, 여섯입니다 왕야."

하악, 학. 밭은 숨소리를 내는 상대의 목소리는 예전같이 높지 않고 낮았다. 변성(變聲)이 진행되고 있는 증거였다. 아마 몇 달이 더 지나면 완연히 사내의 음성이 될 것이다. 그 소리에 오왕의 미간이 찡그려졌지만 그런 오왕의 모습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오왕의 위에서 허리를 흔들며 나를 좀 봐 달라며 애원하듯 교태를 부렸다.  

그때 얇은 휘장 너머로 집무실 앞을 지키던 시종이 조용한 목소리로 고했다.

"왕야. 서장군 드셨습니다."

"들라 이르라."

오왕은 대답과 동시에 자신의 위에서 열정적으로 허리를 흔들던 소년을 밀쳐냈다. 갑작스러운 오왕의 동작에도 소년은 놀라지 않고 흐트러진 오왕의 바지를 바로 잡아 주고, 자신도 얼른 장포를 걸쳐 입었다. 비록 장포로 몸은 가려졌지만 방안에 가득한 풋내와 달아 오른 소년의 얼굴을 보아 이 방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가릴 정도는 아니었다. 

곧 얇은 휘장이 걷히고 훤칠한 청년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9년 전 보다 훨씬 당당한 체구가 된 서융이다. 그는 정사의 흔적이 선명한 소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오왕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내 오후에는 쉰다 했는데 예까지 온 것을 보면 무척 급한 일이겠구나."

"진성왕이 새 첩을 들이는데 첩지를 내려달라는 요청이 올라왔습니다."

"하, 그게 무슨 특별한 소식이라고 이리 직접 달려와 보고씩이나 하는 것이냐."

오왕이 코웃음을 치자 서융이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그 첩에게 비(妃)의 첩지를 내릴 것이니 윤허해 달라는 요청이 올라왔습니다."

코웃음을 치던 오왕은 뜻밖의 이야기에 고개를 돌렸다.

"뭐? 비? 어느 집의 여식이라더냐?"

"어느 집의 여식이 아니라 얼마 전에 도성에 흘러들어온 창기(娼妓)라고 합니다."

오왕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비도 비 나름인지라 품계가 달리 있지만 일단 비라는 칭호가 붙으면 황실의 족보에 까지 이름이 올라가기에 함부로 거론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라니. 그것도, 창기 출신의 여인을.

"그놈이 드디어 미쳐 제 무덤을 파는구나. 창기에게 비라니. 황후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소리를 할 리가 없지."

한심하다는 듯 말하면서도 오왕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흥미가 섞여있었다.

"그래서 황후 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아직 비의 첩지를 요구한 것은 모르고 있는 모양입니다. 진성왕도 황후가 들으면 경을 칠 일이라는 것을 아는지 아주 조용히 요청을 해 왔습니다."

서융의 말에 오왕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이리 유쾌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수려한 얼굴을 한 오왕이 웃음을 짓자 방 안이 한순간 꽃이 만개한 듯 화려해졌다. 구석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소년도 오왕의 웃음에 넋을 잃었다.

"참으로 재미있구나, 참으로 재미있어! 이제 보니 진성왕 그놈이 나를 웃기는 재주가 있구나!"

우스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웃던 오왕은 곧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윤허해 주어라. 황상의 직인이 필요하다면 직인도 찍어주어라. 하고 싶다는 대로 해 주어라! 이 일을 알면 황후의 얼굴이 볼만해 지겠구나!"

"네 왕야."

곧 서융이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서자 오왕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방금 전 까지의 시큰둥한 얼굴은 온데간데 없고 오왕의 얼굴에는 화사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소년은 무릎걸음으로 오왕의 앞으로 다가가 장포를 벗고 그의 앞에 등을 보이며 엎드렸다. 열네살에 오왕의 첩이 되어 벌써 이년이 넘도록 그를 모셔왔기에, 그는 이럴 때 오왕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고 있었다. 오왕은 소년이 개처럼 납작 엎드리자 곧 그의 몸에 덮였다. 방금 전 까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던 곳에 오왕이 파고들자 소년의 허리가 절로 흔들렸다.

"움직이지 말아라."

오왕은 그런 소년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낮게 말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고 허리를 흔들려는 제 본능을 억눌렀다. 오왕은 꼼짝 않는 허리를 잡고 자위를 하듯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긋하게 시작된 동작은 점차 거칠어졌고 그에 맞춰 소년의 허리도 움찔거렸다. 그때마다 오왕은 소년의 허리를 강하게 틀어쥐고 움직임을 막았다. 본능적으로 튕기는 허리를 억누른 채 제 욕심을 채우는 오왕의 행동은 강간이나 진배없었지만 그 아래의 소년의 목소리 또한 흥분으로 얼룩졌다.

가끔 오왕은 한 사내를 떠올리는 일이 있었다. 아니, 실상은 자주 있었다. 누군가를 안는데 그만한 충족을 느꼈던 것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기에 오왕은 종종 그를 떠올렸다. 단 두 번, 그것도 근 십년 전에 접한 것이 마지막이었던 그 사내가 때때로 오왕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짧지만 강렬한 충족감을 느꼈던 그때를 떠올리며 오왕은 그 충족감을 재연하고자해 어느 순간부터 오왕의 첩은 계집보다 어린 사내아이들의 수가 많아졌다. 그러나 누구도 그러한 충족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상대를 안으면 안을수록 그때 느꼈던 만족과의 괴리가 느껴져 기분이 나빠질 뿐이었다.

'살아있다면 이제 서른쯤 되었겠군.'

오왕은 서융이 나이를 먹은 만큼 그 사내 또한 나이를 먹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필시 지금쯤이면 오왕을 자극했던 젊음은 흔적을 감추고 비루한 사내가 되어있음이 틀림없다. 오왕이 그 사내를 닮았다 느끼고 첩으로 들인 대부분의 소년이 그리 되듯 말이다.

오왕은 소년의 위에서 격하게 움직이며 기억만으로 그를 흥분시키는 그 사내를 상상했다. 이제는 비루해져 시시해졌을 그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잘 상상이 되지를 않았다. 그의 기억 속에는 그저 제 아래서 울며 발버둥치던 젊은 사내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 상상이 오히려 열기를 자극해 오왕의 움직임이 더욱 격해졌다. 그 움직임을 따라 날카로워지는 소년의 교성이 정궁안을 요란하게 울렸다.

서융은 멀어지는 교성을 귓전으로 흘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러 오왕의 집무실까지 찾아가 봤지만 허탕이었다.

서융은 비오는 날 우연히 호운과 마주친 이래 그를 찾고 있었다. 지난 9년 동안 서융은 호운의 행적을 계속해 추적했지만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다. 그래서 최근에는 어쩌면 영영 마주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며 포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설마하니 9년이 지난 지금, 도성에서 마주칠 줄이야. 예상한 재회와 전혀 다른 상황에 서융은 일순 숨이 멎는 듯 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서융은 자신의 감정이 무뎌졌다 생각했다. 들끓던 분노와 정욕은 시간과 함께 잦아들었고 이제 남은 것은 아릿한 옛 추억 같은 희미한 감상뿐이었다. 때문에 서융은 호운을 찾으면서도 어쩌면, 그를 다시 마주치면 예전 같은 느낌은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서융은 빗속에서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보던 호운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비에 젖어 파리한 얼굴은 예전보다 말라 날카로움이 더해져 있었고, 이제는 앳된 느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완연한 사내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젖살까지 빠진 지금 호운에게서 사랑스러움이나 계집 같은 포근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보는 순간 심장이 떨렸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때 오왕의 목소리가 울리지 않았다면, 서융은 상황도 잊고 눈앞의 호운에게 달려들었을지도 모른다. 오왕의 목소리가 서융을 제 정신으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자신의 감상을 반추한 서융은 직감적으로 오왕이 호운과 마주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또 다시 그를 빼앗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렇기에 호운에게 고개를 숙이도록 말했다. 절대로 고개를 들지 말라 강조하는 서융의 목소리에는 집념이 서려있었다.

호운에게 반시진 내로 돌아오겠다 한 서융은 정말 그 안에 그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호운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자리에 있으라는 자신의 말에 호운이 순순히 응하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말 호운이 사라진 것을 보자 헛웃음만이 흘렀다. 그리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가진 힘을 서융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그는 예전과 달랐다. 이제 서융에게는 믿을만한 수하가 수백명이 있었고, 그 수하들은 또 수천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 도성내에 못 찾을 이가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헌데, 찾을 수가 없었다. 근 열흘이 다 되어 가는데 얻은 단서라고는 그와 엇비슷한자가 포주 노릇을 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뿐이다. 그 보고에 서융은 단번에 그것은 호운이 아니라 확신했다. 그가 알기에 호운은 포주를 할 작자가 못 되었다. 그럴 담이 없는게 아니라 생리적으로 그쪽과는 맞지 않는 작자였다. 호운과 닮은 자에 대한 정보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에 서융은 조바심을 느꼈다. 그리고, 어쩌면 이미 오왕이 그를 먼저 찾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몰렸다. 그래서 일부러 오왕의 집무실을 찾았는데 오왕의 곁에 있는 것은 전혀 엉뚱한 소년이었고, 오왕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따분함이 묻어나왔다. 그 표정에 서융은 그가 호운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단 그것을 확인하고 났으니 안심이었다. 그러나 정작 호운의 단서가 전혀 없다는 사실은 김이 빠지는 것이었다.

'설마, 도성을 빠져나간 건가.'

배제할 수 없는 가능성이 고개를 쳐들자 서융은 인상을 썼다. 서융과 사이에서 그런 일이 있었으니 어쩌면 서융을 보고 도성에서 달아났을 수도 있다. 그러면, 모든 일은 원점이다. 어쩌면 이대로 평생 그를 다시 마주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서융은 불길한 예감에 혀를 찼다. 

'아니, 이건 분명 운명이다.'

운명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넓은 천하에서 다시 마주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분명 호운과 자신은 운명이다. 서융은 그리 믿었다. 

그리, 믿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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