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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16)화 (116/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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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아무리 황제의 명으로 정당하게 뽑힌 사람들이라고는 하나 황궁 내에서 서천이나 자문 같은 천민 출신 시위들은 근본적으로 대우가 달랐다. 물론 황제는 혹시라도 제 손으로 뽑은 이들이 신분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거나 하는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대놓고 이들을 학대하거나 짐승 취급하듯 구는 궁인들은 아직까지 없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겪는 불공정한 일들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다른 곳도 아닌 후궁의 처소이다. 남자인 시위들은 각별히 조심해야 하는 공간이라는 말이다. 지금까지야 냉궁이나 다름없었으니 다른 곳보다 덜 조심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정안궁에 대한 황제의 인식이 달라진 지금은 더더욱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서천은 자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상해. 잠시 다녀올게.”

뒤에서 자문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것을 무시한 서천은 발걸음 소리를 죽인 채 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단순히 핑계가 필요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번 연빈을 만나면서 느꼈던 미묘한 찝찝함을 해소하지 못한 서천은 무엇이든 실마리를 잡고 싶었고 어떻게든 그와 한 번 더 마주치고 싶었다.

뜰 안쪽으로 좀 더 깊이 들어서자 서천은 자신의 촉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저만치 앞쪽에 분명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누가 이곳에 있는 걸까. 은근하게 차오르는 기대감을 모르는 척하고 숨을 죽인 채 시야를 막고 있던 커다란 나무 하나를 지나친 서천은 보았다.

깊어진 달빛 아래에서, 아주 느리고 서툰 몸짓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던 정안궁의 주인, 연화운을.


“스승님이 보신다면 기가 막혀 혼도 내지 못하시겠네.”

화운은 도무지 제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몸뚱이를 실감하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연화운의 몸은 터무니없이 약한 것뿐만이 아니라 운동 능력이 아예 없는 것이 분명했다. 지난 며칠간 틈이 날 때마다 목검을 쥐고 수련, 아니 수련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운동을 해왔던 화운은 언젠가 이 검을 들고 전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길 바랐던 자신의 기대감이 산산이 무너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보통 높으신 집안의 자제들은 기본적으로 검술을 배우는 게 아니었나. 아니면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기 때문에 배울 여유가 없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가지 않을 일은 아니나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그럴듯하게 검을 휘둘러 볼 수가 있을지 앞이 막막했다.

마음이 번잡하여 모두가 잠든 틈을 타 검을 들고 나왔던 건데 막상 검을 휘두르고 있으려니 오히려 더 생각이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허공으로 뻗은 저의 가느다란 팔이 볼품없이 덜덜 떨리는 것을 바라보다가 화운은 이내 가만히 검을 거두곤 자세와 호흡을 정리하며 깊은 숨을 내쉰다. 뭘 얼마나 움직였다고 숨은 이렇게 차는 건지. 어이가 없어 자조적인 웃음을 한 번 흘리려는데 갑자기 저만치 앞쪽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누…….”

누구냐고 물으려 했던 화운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끊겼다. 달밤의 그늘 사이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이는 다름 아닌, 서천이었다.

“어떠… 어떻게….”

서천은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화운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시위로서는 당연히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서천은 지금 법도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제대로 된 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혀끝으로 지금 불러서는 안 되는 이름 하나가 자꾸만 넘어왔다. 이 모든 게 연화운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순찰이라는 명목으로 뜰 안쪽까지 들어온 서천은 그곳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연빈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이 새벽에 무술 연습이라도 하는 건가 생각했지만 아주 조금만 지켜보아도 그의 움직임이 검술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발을 내딛는 방식이라든가 하는 것들은 무언가 보법을 지키고 있는 것 같기는 했으나 그 움직임이 하도 느리고 어설퍼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그건 그냥 검을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서천이 그를 지켜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연빈은 그 터무니없는 행위를 그만둘 생각이었는지 뻗어내었던 검을 회수하며 자세를 정리했다.

심장을 누군가의 손에 콱, 하고 쥐어짜이는 것 같은 충격을 느낀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랫동안 검을 쥐고 살아왔던 이들은 같은 검법을 펼칠 때에도 개개인 특유의 자세나 습관 같은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특히나 수련을 마치고 검을 다시 회수하며 자세를 정돈하는 움직임은 각자 습관처럼 굳어진 바가 달라 개개인의 개성이 고스란히 담기는 순간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서천은, 제가 하운과 수없이 대련하며 보아왔던 하운 특유의 습관을, 검을 회수하는 방식을 보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하운을 죽음에 이르도록 만든 연빈, 연화운에게서.

“마마… 마마께서, 어, 어떻게….”

이렇게 늦은 밤 사적으로 황제의 후궁에게 다가가는 것이 죽을죄라는 것 따위는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서천은 그야말로 경악하고 있었다. 우연일까? 대충 보아도 연빈은 생전 검을 처음 배워 보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어떻게 보아도 그는 오랜 시간 동안 검술을 배운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이가. 수백, 수천 개의 방법들 중에서. 하필이면 하운이 늘 취하던 것과 같은 자세를 취하는 것이 과연 우연일 수가 있는 걸까? 마치 거대한 태풍에 휩쓸린 것처럼 귓가가 윙윙 울렸다.

연빈마마가 달라지셨다고 온 황궁을 떠들썩하게 하였던 소문들이 태풍의 틈을 타 서천의 주변을 맴돌았다. 다정하기 그지없는 분이 되었다던 믿기 힘든 그 말들. 어느 궁녀의 다친 손에 감겨 있던 연빈의 손수건과 지금도 서천의 품에 있는 하운의 손수건. 며칠 전 저를 보고 무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놀라 흔들리던 눈동자와 그때 느꼈던 미묘하게 익숙한 감각들. 그 모든 것들이 숨 쉴 틈 없이 서천의 폐부를 찔러오는 기분이었다.

당황한 건 화운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늦은 시각이라고는 하나 궁에는 언제나 잠들지 않은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하여 몰래 나왔어도 누군가에게 곧바로 들킬 수 있을 거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그게 서천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 서천의 상태는 단순히 뜻하지 않게 후궁 하나를 마주쳤을 때 나올 수 있는 반응이 아니었다.

그는 화운을 보고 너무나도 놀란 것 같았고, 동시에 무언가를 두렵게 느끼고 있는 것도 같았다. 화운도, 서천도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마치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흘렀고 그런 두 사람 사이의 숨 막히는 적막을 깨트린 건 저만치서 ‘마마!’ 하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소정의 목소리였다.

“마마! 이 새벽에 어찌 예까지 나와 계세요!”

“아… 소정….”

하지만 놀라 달려오던 소정의 표정은 화운의 앞에 서 있는 서천을 발견하자마자 싸늘하게 변했다. 화운의 앞을 몸으로 막아서며 소정이 서천을 향해 말했다.

“이 시간에 어찌 여기에 있소? 지금은 순찰 시간도 아닌데.”

“나, 나는… 안에서….”

소정의 시선이 날카롭게 서천의 얼굴을 훑었다. 말을 제대로 잊지 못하는 서천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너무나 수상해 보였다. 게다가 이곳은 다른 어디도 아닌 후궁의 처소였다. 아무리 정안궁을 보호하는 시위라고 하더라도 멋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이 결코 아니었다. 소정이 몸을 돌려 화운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저자가 혹시 마마께 무도하게 굴었습니까.”

그때까지도 멍하게 눈만 깜빡거리고 있던 화운이 소정의 물음에 크게 놀라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아니, 아니다. 그런 게 아니야.”

“저자가 멋대로 정안궁 안을 돌아다녔다면 이는 큰 죄가 됩니다. 포박하라 이를까요.”

소정은 언제 화운의 앞에서 주눅이 들어 몸을 움츠렸나 싶을 정도로 매섭고 단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운은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야. 그게 아니라… 내가… 내가 불렀어.”

“…마마께서요?”

“그래. 내가 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잠깐 부른 거니까. 신경 안 써도 돼.”

갑자기 말을 꾸며 하려니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안 그래도 조금 전 화운으로서는 너무 과도하게 움직여 숨이 차올랐던 상태인데 놀라고 당황한 일이 연속으로 벌어지니 의지와는 상관없이 호흡이 가빠왔다. 화운은 서둘러 여전히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서 있는 서천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제 되었으니 그만 가 보거라.”

다행히 화운의 대처에 서천 역시 정신을 조금 차렸는지 여전히 어색한 얼굴을 한 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예, 마마. 허면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여전히 서천의 목소리는 수상할 만큼 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언가 이상해 소정이 ‘잠깐…!’ 하고 물러가는 서천을 부르려 했으나 그보다 조금 더 빠르게 화운의 손이 소정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고개를 돌린 소정은 완전히 창백하게 질려 있는 화운의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황급히 그를 부축했다.

“마마!”

“괘, 괜찮아…. 그냥 숨이 좀… 숨이 좀 차서 그래. 안으로 들어가자….”

연화운의 약한 몸에 아직까지 면역이 없는 소정은 화운을 부축하며 정안궁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진 낭자! 아진 낭자!”

안 그래도 잠이 모자를 아진을 굳이 깨우는 소정의 소란이 마음에 걸리긴 하였으나 지금 중요한 건 소정이 조금 전 서천이 보여주었던 행동을 잊게 만드는 것이었으므로, 화운은 그저 연약하게 숨을 헐떡이며 소정의 품에 몸을 기대었다.

늦은 새벽, 생각지도 못한 난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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