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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93)화 (93/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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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은 그렇게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정의했다. 지금 이토록 정안궁이 신경 쓰여 애꿎은 발걸음만 늦추고 있는 건 그저 그가 다쳤으니까. 아프니까. 몸이 약한 이니까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것뿐이었다.

“들어가자.”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이한이 말했다.

이미 드러나는 마음의 흔적은 차고도 넘치건만 애써 그것을 보지 못한 척 돌아서는 이의 마음이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

살면서도 단 한 번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좋은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황제는 그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마마, 이만 안에서 편히 기다리세요. 폐하께서 언제 오실지도 모르는걸요.”

침전의 문간에 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던 화운이 아진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당황한 표정으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폐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냥 답답하여 밖을 조금 보고 있던 것뿐이야.”

“아, 그러셨어요? 저는 또… 제가 잘못 알았네요, 마마.”

아진은 그의 반박에 곧장 고개를 숙이며 말을 정정하였으나 살그머니 웃는 얼굴은 어쩐지 저의 말을 제대로 믿어 주지 않는 것 같아 화운은 얼굴이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정말이다. 그냥 산책을… 어서 산책을 하고 싶어서 보고 있었던 거야.”

“예, 마마. 알겠어요. 그래도 이따 산책하시려면 벌써부터 무리하시면 안 되니까 이만 안으로 들어가셔요.”

알겠다고 순순히 대답하는 아진의 표정에는 여전히 애매한 미소가 남아 있었다. 여기서 더 물고 늘어져 봐야 제 말만 더 이상하게 들리는 꼴인 것 같아 화운은 괜히 눈치를 보며 아진을 따라 침실 안으로 돌아왔다.

태의는 십여 분을 과하게 넘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걷는 것을 전제로 아주 조금만 걸으라고 하였다. 몸을 움직이면 여전히 상처에서 아픔이 느껴졌으나 화운은 제가 충분히 견딜 만한 정도라고 강경하게 말했고 이쯤이 되어서는 아진도 더 이상 화운의 산책을 막을 명분이 없었다.

무엇보다 폐하께서 함께 산책을 하시겠다 약조를 하셨으니 이제 와서는 오히려 산책을 하시라 장려를 해야 할 판이 아니겠냔 말이다.

“편히 누우세요, 마마. 마마께서 아파 보이시면 폐하께서 산책을 금하실걸요.”

침실로 들어오면서도 자꾸만 뒤에 걸리는지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 밖을 바라보던 화운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마음이 뜨끔하여 꾸물꾸물 아진의 말대로 침대로 가 몸을 기대어 앉았다. 하루 종일 잠도 자고, 서책도 들여다보고, 아진과 서서와 번갈아 수다를 떨어보아도 해는 왜 아직 중천에 걸쳐 있는 것만 같고 시간은 영영 멈춰버린 것만 같은지. 실제로 어느새 창밖의 해는 뉘엿뉘엿하는 모양새건만 화운은 여전히 한낮처럼 느껴졌다.

황제가 온다 하면 불안하며 마음을 떨던 때가 있었다. 갑작스럽게 남의 몸을 차지하고 앉은 터라 무엇을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서 초조했던 날이 있었는가 하면, 폐하께서 오신 건 분명 나를 꾸짖으려 오시는 걸 테니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미리 가늠해 보려 안간힘을 쓰던 날도 있었다.

그래서 화운은 문득 그 자신을 바라본다. 이제나저제나 폐하께서 오신다는 소리가 들릴까 귀를 열고 자꾸만 시선을 돌려 문 쪽을 바라보고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설렘이라는 감정을 알았을까. 자연스럽게 황제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을까. 분명히 화운 그 자신이 겪어온 변화인데도 도무지 그것이 믿기지 않았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잠이 들면 악몽을 꾸었다. 어느 날은 죽은 연화운이 연못가에 앉아 울었고, 어느 날은 폐하와 아진이 저를 향해 우리를 기만하였다며 손가락질을 했다. 이따금 젖고 썩어버린 시체의 꼴로 바닥에 버려져 있는 하운의 모습을 볼 때면 그 시체가 네가 본래 있어야 할 자리는 여기라고 꾸짖는 것만 같았다. 처음 죽은 연화운을 꿈에서 보았을 땐 완전히 무너져 호되게 앓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꿈에서 괴로워하다가도 눈을 떠 하루를 시작하면 저를 보러 오신다는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죄책감이 사라진 것도 아닌데. 여전히 소리 없이 사그라진 삶이 안쓰럽고 미안하여 마음이 사무치는데. 그런데도 화운은 지금도 언제 다시 폐하께서 정안궁으로 오실까 이리 발을 구르며 기다리고 있다.

화운의 손이 아진이 덮어준 이불 위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비단천의 감각은 더 이상 연화운이 되어 처음 느꼈던 날처럼 대단하진 않았다. 정안궁에서 먹는 음식은 매번 놀랄 만큼 맛있었으나 처음 먹었던 그날만큼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굳이 그러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이 삶에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 계속 벌어질 일이고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어쩌면 화운은 지금 제가 느끼는 죄책감에도 무뎌질지 몰랐다. 이제는 더 이상 악몽을 꾸고도 울며 쓰러지지 않는 것처럼, 언젠가는 그 악몽조차도 꾸지 않게 될 날이 올지도 몰랐다.

괜찮은 걸까. 이대로 연화운의 삶을 제 것처럼 받아들여 익숙해져도 되는 것일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정말 모든 것이 괜찮아지는 걸까.

하여 화운의 눈동자가 서서히 비에 젖듯 깊은 색으로 어두워지고 있을 때. 지금껏 화운이 연신 힐끗거리며 바라보던 바로 그 길에서 우렁찬 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 납시오-!”

언제나처럼, 이한이었다.


“폐하께서는 오늘도 정안궁에 가셨대요….”

정빈, 송현이 저와 마주 앉아있는 숙비, 비영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잠시 말이 없던 비영의 시선이 그제야 선명해진 상태로 송현을 바라보았다. 연빈이 다치고 난 후 비영이 언제나 말이 없고 조용해져 송현은 너무나도 걱정이 되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송현을 보던 비영이 이내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쥐며 말했다.

“그러하냐. 잘되었구나.”

“폐하께서 자주 걸음하시니 연빈도 기쁘겠지요. 그러니 언니도 그만 기운 내요. 언니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걸요….”

연빈이 다친 것은 송현으로서도 너무 마음 아픈 일이었고 언제쯤이면 자신이 병문안을 갈 수 있을까 매일 매일 손꼽고 있기도 하였으나 그와는 별개로 송현은 이 일로 비영이 너무나 움츠러들어 있는 것이 마음 아팠다.

물론 입장을 바꿔 송현이 저를 구하려는 연빈의 손을 뿌리쳤는데 그 때문에 연빈이 대신 크게 다쳤다고 하면 죄책감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어버릴 것 같긴 하였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게는 친언니 같은 비영이 이 일로 며칠간 이리 괴로워하니 그 또한 보기 힘들어 마음이 아픈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 그럴 테니 너도 내 걱정은 말아라. 지금 걱정할 건 연빈이지 내가 아니니.”

“…저는 두 분 다 걱정이 되는걸요.”

송현은 오리의 부리처럼 입술을 쭈욱 내밀며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송현과 비영이 이 정도로 가까워질 수 있었던 데에는 연빈의 공이 아주 컸다고 할 수가 있었다. 안 그래도 둘 다 위로는 황후를 마음 깊이 존경했고, 서로는 황제의 총애를 크게 다투어 투기를 나눌 만한 성정이 아니라 좋은 사이를 유지할 수 있던 두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서 연빈이 공공의 적까지 되어 주니 둘은 더더욱 가까워져 하나로 뭉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송현은 문득 지금 이렇게 비영과 마주 앉아 연빈의 몸을 걱정하고 있는 이 상황이 몹시도 낯설고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어쩌다 일이 이렇게 흘러와 버린 걸까.

여전히 아이처럼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송현이 입술을 내밀고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그 얼굴이 절로 웃음이 흘러나올 만큼 귀여워 비영이 그제야 아주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곤 송현을 향해 말했다.

“그래그래. 나도 기운을 낼 테니 너도 그만 울적해하렴.”

“네에. 몸이 조금 더 나아지면 연빈은 분명 언니를 찾아와 괜찮다고, 조금도 미안해할 필요 없다고 그리 말할 거예요.”

이제는 아주 비영의 손을 꼬옥 잡아오며 말을 덧붙이는 송현의 얼굴을 보며 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 일로 저들의 사이가 어떤 식으로든 변하게 될 것은 자명해 보였으니. 비영은 이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였다.


“정말 괜찮겠느냐.”

밖으로 함께 걸어 나오는 잠깐 사이에도 이한은 몇 번이나 화운에게 물었다. 여러 번 괜찮다고 대답하는 것이 짜증날 법도 한데 그때마다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띤 화운이 다시 한 번 대답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폐하. 태의도 짧게라면 걸어도 괜찮다고 하였는걸요.”

그러자 이한은 조금 물러나 따라오고 있는 아진에게 그 말을 확인하기라도 하듯 시선을 보냈다. 아진은 황제의 시선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굽혔고 이한은 그제야 안심한 얼굴을 했다. 무조건 자기는 다 괜찮다 대답하는 화운을 이미 다 파악한 것 같은 황제의 행동에 아진이 남몰래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잠시 있거라.”

그때 이한이 잠시 화운을 붙들어 세웠다. 전각에서 뜰로 내려서는 계단 앞이었다. 순간 멈춰 선 화운이 영문을 몰라 이한을 바라보는데 덧붙이는 말도 없이 계단을 노려보듯 내려다보던 이한이 갑자기 화운의 등 아래를 살며시 감싸더니 제게로 당기며 속삭였다.

“내게 기대.”

그러더니 화운이 상황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그의 두 다리 아래로 다른 손을 넣어 그대로 안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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