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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92)화 (9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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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진 일 이후 연빈마마께서 바뀌었다는 소문이 돈다는 이야길 들었을 때도 저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내 배가 아파 낳은 아이고 내 손으로 길러낸 아이입니다. 누구보다 제가 가장 잘 아는 아이이지요. 그리 변할 수 있는 아이였다면 지금껏 폐하의 냉대를 당하면서도 제 성질을 고집해왔을 리가 있겠습니까.”

“부인….”

“헌데 숙비마마를 감싸다 다쳤답니다. 대인. 우리의 아들이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질 않아요.”

“…….”

“대인께서는 믿기십니까?”

주원은 숙진의 눈동자에서 불안을 읽었다. 물에 빠졌다 살아났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비통해할지언정 이토록 불안해하지는 않았던 숙진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부인의 불안함에 괜스레 함께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주원은 애써 그것을 모른 척하며 입을 열었다.

“…기억을 잃었다고 하질 않소. 그러니 우리가 보기엔 낯설기도 할 테지.”

“기억을 잃으면 천성이 달라진답니까?”

“부인.”

“정말로 몰라 묻는 것입니다. 궁금하여 묻는 것입니다, 대인. 기억을 잃으면… 그러면 본래 제가 한 번도 가지고 있지 않던 것을 가지기도 하는 것입니까? 그럴 수도 있다면 다행인 일입니다. 헌데 정말… 그렇습니까?”

주원에게 거듭 묻는 숙진의 얼굴은 절박해 보였다. 숙진은 정말 차라리 주원이 확신에 가득 차 그러하다고 대답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허면 지금 느끼는 이 이유 모를 불안함을 떨쳐낼 수가 있을 테니까. 하늘의 뜻이 그러하여 저의 아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었다고, 차라리 그리 안심을 할 수도 있을 테니까.

한동안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주원이 이윽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오. 폐하께서 잘 보살펴 주고 계시는데 내게 무슨 명분이 있어 그 아이를 보러 후궁의 처소에 드나들 수가 있겠소.”

참으로 비정하고 비정하십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폐하께는 그토록 지극하신 분이 대인의 피와 살을 나누어 태어난 아들에게는 어찌 이리 냉정하십니까.

숙진의 마음이 울었다. 하지만 절절하게 마음을 토해내 보아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음을 이미 여러 번 경험한 숙진은 그저 입술을 한 번 깨물고 주원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대인께서는 그 말대로 연빈마마께서 무탈하시길 바라셔야 할 것입니다.”

“…….”

“아니라면, 제 마음의 원망은 시간이 지나도 옅어지지 않을 것이니.”

숙진은 때때로 제 아들이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힘없는 이들의 원망을 두려워했다. 쌓이고 쌓인 그 원망들이 거대한 업보가 되어 제 아들의 숨통을 틀어쥘까 봐 걱정이 되었다. 누구의 탓을 할 수도 없는 일임을 잘 알았다. 제 아들의 손에 죽어나간 이들을 떠올려 보면 제가 이리 아들을 염려하고 있는 것도 또 하나의 업을 쌓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해도 부모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미의 마음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전부 아들의 잘못인 것을 알면서도. 아무리 물건이나 다름없이 취급당하는 종이라고 할지라도 엄연히 그들에게도 피와 살이 있고, 생명이 있으며,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니 하늘 앞에 천만번을 빌어도 그가 피로 쌓은 죄를 다 거둘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제 아들이 느낄 고통과 눈물은 이리도 마음이 쓰여 불안하니.

굳은 표정을 한 주원을 앞에 두고 숙진은 몸을 돌렸다. 귀한 장손을 얻었다며 자그마한 아이를 품에 안고 답지 않게 함박웃음을 짓던 주원의 얼굴과, 남들보다 작고 연약하게 태어난 아들이 행여나 부는 바람에도 잘못될까 품에서 놓지 못하던 오래전 자신의 모습이 차례로 바람을 타고 흘러갔다.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두려운 서러움만 쌓여가는 날들이었다.


연회장을 덮친 사냥매 사건은 생각보다 일이 커졌다. 궁에서 훈련시키며 키우던 매가 왜 갑자기 밖으로 탈출했는지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폐하께서 직접 사냥에 이끌고 나가실 매들이 학대를 당한 정황이 밝혀진 것이다.

구구절절 변명은 많았으나 결국 정리하자면 지속적으로 당한 학대로 인해 상태가 좋지 않았던 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날따라 사육장 관리가 소홀해진 틈을 타 제대로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탈출을 하였단다. 그리고 연회장의 음악과 등불, 음식 냄새, 모여 있는 사람들까지 그 모든 것에 흥분하여 연회장을 공격하였다는 말이었다.

감히 폐하께서 직접 이끌 동물들을 학대하고 관리를 소홀히 한 죄는 결코 작지 않으니 황제는 관련된 이들 전부를 엄벌에 처하라 명했다. 절대로 과하지 않은 처사였다. 그 탓에 지엄하신 황제 폐하께서 소란에 휩싸여 위험할 수도 있었다. 이것은 천하의 대역죄라 하여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 일을 두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강력한 처벌을 내리라 명을 내린 제 마음의 이면에 어린 분노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이한은 알았다. 이한은 자신이 처했던 위험한 상황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사실 일이 벌어지자마자 황제는 시위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으니 그깟 매 하나 때문에 크게 위험해질 상황도 아니었다.

이한이 정말로 화가 난 건. 정말로 참을 수가 없었던 건 제 눈앞에서 흘러내리던 화운의 피였다. 품에 안아 올린 마른 몸에서 흘러나와 저의 두 손을 적시던 연화운의 피와, 이한의 귓가에 들려오던 고통에 가득 찬 연화운의 신음소리였다. 맡은 바 소임을 다하지 못한 이들 때문에 화운이 이런 큰일을 당하였으니 몇 번을 거듭 생각해도 그 화가 다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짐작이나 할까. 사실 황제가 그 어떤 이보다 가장 격렬하게 분노를 느끼는 대상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음을. 일이 벌어질 때까지 안일한 생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온갖 핑계만 대며 연화운이 다치는 꼴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던 자기 자신에게 가장 분노를 느끼고 있던 것을. 그것은 이한 자신도 다 깨닫지 못한 마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목련이 이미 모두 져버렸구나.”

분명 얼마 전까지 꽃이 만발한 것을 본 것 같건만 어느새 복스러운 꽃이 전부 떨어진 자목련 나무를 바라보며 이한이 중얼거렸다. 황제는 오랜 시간 동안 한자리에 앉아 정무를 보다가 오 태감의 권유로 잠시 숨을 돌리려 밖으로 나와 발길 닿는 대로 안정전 정원을 걷는 중이었다.

“꽃이 지는 것은 본래 금방인 법이지요.”

“전에는 예에 있는 것이 자목련이었는지 같은 건 알지도 못했건만….”

누구 들으라는 것도 아니고, 이한은 그저 혼잣말로 허전해진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사실이었다. 꽃이 만발한 자목련 나무 아래에 서 있던 연화운을 보기 전까지, 이한은 안정전 화원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던 그 나무들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이한이 화원을 산책하는 일을 즐기긴 하였으나 그것은 다만 조용하고 한적한, 풍경이 아름답고 청량한 곳에서 지친 심신을 달래고 생각을 정리하기를 좋아했을 뿐이었지 그곳에 핀 꽃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길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그런 이한이 그날 이후엔 수도 없이 봤던, 그 붉은 목련 하나가 자꾸만 눈에 밟혀서 오다가다 생각이 나면 시선을 두었으니 그 또한 황제의 달라진 모습 중에 하나였다.

“…아쉽군.”

저도 모르게 그런 감상이 절로 흘러나왔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해가 지면 달이 뜨는 것처럼 꽃이란 것이 본디 계절과 함께 오고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그 꽃 몇 송이 다 져버린 것이 어째서 이리 마음을 헛헛하게 만드는지 모를 일이다.

“정안궁에 핀 것도 전부 져버렸을 텐데….”

자연스럽게 그는 아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날 그 모습을 떠올려 보면 자목련 꽃을 꽤나 어여쁘게 보았던 것 같은데, 이리 한순간에 다 져버린 꽃이 지금 자신이 느끼는 것처럼 아쉬워 마음이 허전하지는 않을까 싶었다.

바스락, 하고 황제의 발아래에서 모래알이 으깨졌다. 황제가 저도 모르게 걸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가고 싶은 곳이 있는 사람처럼 미련이 철철 넘쳐 저도 모르게 몇 걸음을 무겁게 내디뎌 나는 소리였다.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니건만. 심지어 잠깐이지만 어제 저녁에도 그 얼굴을 보고 왔건만. 몇 시간 후면 미리 약조하였던 대로 정안궁으로 걸음을 할 수가 있건만 어찌 이리 애가 타고 마음이 초조한지 모를 일이다. 마음 같아선 남아 있는 일이고 무엇이고 전부 내버려 두고 우선은 그 얼굴을 보고 싶었다.

허나 그래서는 안 되지. 황제가 되어 어디 나랏일에 우선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지. 하물며 그것이 한낱 후궁에 지나지 않는다니 말도 되지 않는 것이지.

이한은 속으로 그런 말을 몇 번이나 되새기고 또 되새기며 발걸음을 되돌린다.

연화운을 대하는 마음이 전과 같지 않음은 이미 차고 넘치도록 느끼고 있었다. 제아무리 뻔뻔하게 굴어 보아도 되돌리기엔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한은 지금의 연화운을 다시 보았고, 믿고 있으며, 신경을 썼고, 지난 며칠간의 심정을 살펴본다면 그를 썩 아끼고 있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차마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한 감정이다.

하여 이한은 그리 납득을 하는 것이다. 수많은 날과 수없이 많은 일들을 돌고 돌아 연화운과 자신은 이제야 겨우 평범한 황제의 후궁 사이가 된 것이라고. 이제는 연화운에게도 다른 후궁들에게 그러했듯 황제가 응당 자신의 비빈에게 주었어야 할 관심을 주고 있는 것뿐이라고. 황제가 되어서 타인에게 그 이상의 감정을 가지는 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니 연화운 역시 딱 그만큼의 의미가 된 것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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