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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75)화 (75/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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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이만 침수에 드셔야 합니다.”

이미 새벽이 다 되었건만 연빈의 곁에서 떠나지 않은 채 머물고 있는 황제를 보다 못한 오 태감이 다가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연빈은 여전히 황제의 침대에 엎드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곁에 걸터앉아 연빈을 바라보고 있는 황제의 손에는 때때로 연빈, 화운의 이마에 맺히는 식은땀을 닦아 주던 손수건이 들려 있다.

오 태감을 비롯한 그 누구도, 심지어 황제 자신조차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다.

“그래.”

황제, 이한은 그렇게 대답했다. 대답은 했다. 태의와 궁녀들이 잘 돌보아 줄 것이니 폐하께서는 이만 쉬시라 오 태감이 몇 번이나 계속 권했을 때도 이한은 알겠다, 그리 하겠다, 대답은 했었다.

하지만 막상 몸을 일으켜 자리를 뜨려 하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연약하게만 들리는 화운의 숨소리가 걸렸다. 여전히 통증이 심한지 약한 숨소리 사이사이에 들리는 끙끙 앓는 소리가 자꾸만 마음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

그 신음을 듣고 나면 지난번 몸이 아파 정신을 잃고 앓아누웠을 때도 오로지 ‘폐하’ 하고 저 하나만을 찾던 연화운의 모습이 불현듯 되살아나서. 혹여나 제가 자리를 뜨고 난 뒤에 그때처럼 화운이 저를 찾으며 앓지는 않을까 그런 걱정이 들어서 이한은 도무지, 정말 도무지 자리를 뜰 수가 없는 것이다.

“폐하….”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있다 가겠다.”

오 태감이 채근하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이 밤에 무슨 일이 있든 황제는 내일 다시 새벽같이 일어나 하루의 국사를 이끌어야 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다음 날의 몸 상태에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 황제의 건강은 곧장 국가의 다른 문제로도 이어질 수가 있는 중차대한 일이었으니 일개 후궁 때문에 이리 밤을 새우고 있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임을 누구보다 황제인 이한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조금만….”

그러니 그걸 알면서도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연유는 과연 무엇인가. 행여나 새벽녘 그가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깨어날까 봐 염려가 되는 마음은 또 무엇 때문인가.

그가 눈을 떴을 때. 고통 속에 끙끙대며 정신을 차렸을 때. 그때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얼굴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이한, 그 자신의 얼굴임을 바라게 되는 건.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그것은 도대체 어떠한 마음에서 비롯된 감정인가.

“흐읏….”

그사이 잠결에 살짝 몸을 움직인 화운이 다시 한 번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자 오 태감은 그 앞에서 단번에 무너져 내리는 황제의 얼굴을 보았다. 수년간 황제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온갖 모습을 전부 다 보아온 오 태감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 마주한 얼굴은 그런 오 태감의 등골마저도 오싹하게 만들 정도로 낯설었다.

심지어 오 태감은 그 누구도 모르는 황제의 새벽을 아는 인물이다.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제 손에 묻혀야만 했던 형제들의 피에 괴로워하고, 한평생을 질투와 모멸의 감정에 잠식되어 병상에 누워서까지 그때의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태후의 모습에 서러워하는 황제의 밤들까지도 전부 보아왔던, 그런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지금 오 태감의 눈에 비치는 황제의 얼굴은 그런 날들의 감정과는 무엇 하나 같지 않은 색을 띠고 있었다. 낯설고도 서늘한 감각이 오 태감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오 태감이 감히 그 감정이 무엇인지 쉬이 짐작하지 못한 채 숨을 죽이는 사이 이한은 손을 뻗어 화운의 이마에 맺힌 땀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고, 등 위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천천히 거두어 정돈해 주며 입을 열었다.

“쉬이, 괜찮다. 내가 여기에 있어.”

세상 천지에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듯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황제의 침실에 울려 퍼졌다. 그다음에는 수건을 쥐지 않은 황제의 손끝이 조심스럽게 화운의 창백한 뺨을 쓸어 주었다. 그가 이토록 홀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무엇 하나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이한의 서러움이 손길을 타고 화운의 뺨 위에 덧그려진다. 이한은 이미 오 태감이 이곳에 있다는 것 자체를 잊은 듯 오로지 화운에게만 온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황제가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곁에 있어 주마….”

그와 동시에 아픔에 일그러져 있던 화운의 표정은 마치 황제의 손길을 느끼고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잠시 평온하여지니.

황제와 그 후궁이 지금 나누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오 태감은 스스로 알기를 바라지 않아서. 혹여나 그것이 저의 황제 폐하께서 일평생 경계하던 감정이라면 종이 된 도리로 그러한 말을 어찌 전해야 할지 아무리 경험 많은 태감이라 하여도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아서.

오 태감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며 뒷걸음질을 쳐 침실에서 조용히 물러나고 만다. 처음 황제가 변한 연빈에 대해 특별한 반응을 보였을 때는 오 태감 역시 그저 가볍게 보고 말 호기심 같은 감정이라고 생각하여 그런 황제를 감히 귀엽게 보았다. 그러나 지금에서야 다시 온전히 마주한 황제의 감정은 그때와 비견할 수 없이 넓고 깊어져 끝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가 되었으니, 마음이 혼란스러워진 것은 오 태감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용히 침실을 나서는 오 태감의 걸음마저 무겁게 내려앉은 밤이었다.


달빛조차 없는 아주 깜깜한 곳에, 하운은 홀로 서 있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던 건지 기억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몇 번이나 몸을 움직여 이리저리 둘러보았으나 사위는 모두 그저 어둡기만 하여 눈에 제대로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흠씬 두드려 맞은 것처럼 온몸이 무거웠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깨와 등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는데 어째서 이렇게 몸이 아픈 것인지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운은 우선 걷기로 했다. 온통 어둡기만 한 주변의 풍경이 조금 겁났기 때문이다. 딱히 하운을 위협하는 무언가가 나타난 건 아니었으나 이토록 넓고도 고요한, 어두운 곳에 홀로 있다는 게 괜스레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시에 하운은 외롭기도 했다. 왜 나는 혼자일까. 왜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나는 원래 혼자였나. 원래 내 곁에는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던 건가. 원래 혼자 이렇게 어두운 길을 헤매고 있었던 건가.

그래서 하운은 어딘가를 향해 계속 걸었다. 제 어둠을 밝혀 줄 빛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외로움을 사라지게 만들어 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홀로 어둠을 헤매지 않게. 홀로 아픈 것을 견디지 않아도 되게. 그런 빛이. 그런 사람이 있기를 바라며 하운은 어둠 속을 걷고 또 걸었다.

누군가가 그런 하운의 팔을 다급하게 붙들어 끌어당긴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깜짝 놀라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들자 웬 남자가 하운의 어깨를 붙들곤 그를 내려다본 채 서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절로 감탄이 나올 만큼 대단한 미남자가 입을 열었다.

‘무얼 잘했다고 멋대로 홀로 돌아다니는 것이냐.’

남자는 마치 하운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표정은 얼핏 화가 난 것처럼 보였으나 그 짧은 사이에도 하운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는 눈동자에서는 옅은 염려의 감정이 묻어났다. 알던 사이인가. 내가 이런 사람을 알았던가. 하운은 그저 눈만 깜박이며 남자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누군지 생각은 나지 않는데. 그가 누구인지는 좀처럼 떠올릴 수가 없는데. 그런데도 이상하게 익숙한 감각이 전신을 가득 채워 저도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마치 오랫동안 그리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하운이 내도록 어둠 속을 헤매며 찾고 있었던 것이 사실은 눈앞의 남자라도 되었던 것처럼 안도가 되었다.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아 하운은 입만 벙긋거렸다. 당신은 누구냐고, 어떻게 나를 찾았냐고 묻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벌어진 입으로는 아무런 말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하는 하운을 두고,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만 돌아가자.’

그 말을 듣는데 이유도 없이 왈칵, 눈물이 솟았다. 돌아가자니. 나에게 돌아갈 곳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그와 함께 돌아간다는 게 더없이 안심이 되어 다리가 풀릴 지경이었다. 행여나 제가 주저앉아 남자를 놓칠까 봐 떨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주고 한 걸음을 내딛던 하운은 이내 남자의 발 앞에 달빛이 비추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어디에도 별빛 하나 보이지 않던 이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 오로지 남자에게만 비추는 그 빛은 이제 화운의 발끝에도 닿아 있었다.

그리하여 이제야, 하운은 문득 깨닫고 마는 것이다.

이 사람이구나. 내가 계속 찾고 있던 이가 이 사람이었구나. 나는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그리도 외롭고 어두운 길을 계속 헤매고 또 헤매었던 것이구나.

그 순간, 눈이 부실 정도로 광활한 빛이 사위를 전부 집어삼켰다.


“……!”

화운은 숨을 크게 몰아쉬며 눈을 떴다. 깊은 늪에 잠겨 있던 몸이 한 순간에 끌어올려진 듯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흐릿한 시야를 다잡기 위해 눈을 몇 번 깜빡이는 와중에도 머릿속이 혼망했다. 꿈을 꾸었는지, 아니면 지금이 꿈인지 알 수 없었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도 같았다. 저도 모르게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키려 팔에 힘을 줌과 동시에 어깨와 등에서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윽…!”

“가만히. 움직이지 말거라.”

하지만 화운은 제가 느끼는 고통이 어디에서 비롯된 건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제가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익숙한 목소리가, 더없이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이 화운을 감싸왔기 때문이다.

행여나 화운이 깨지기라도 할까, 단단한 남자의 손이 그의 몸을 천천히 일으켜 바로 앉을 수 있도록 도왔다. 어지럽기만 하던 화운의 시야가 그제야 천천히 정리가 되었고, 그 순간 화운의 눈동자 안에 담긴 건.

“폐하….”

하늘과 땅 사이에 유일한 그의 황제, 성이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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