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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39)화 (39/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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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궁에 가신다고 하셨습니까, 마마?”

“그래. 오찬을 들기 전에 먼저 다녀올 것이다.”

“하오나 마마....”

황후의 명에는 좀처럼 토를 다는 일이 없는 선이답지 않게 망설임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자 황후, 자란이 그런 선을 가만히 바라보며 가만히 웃었다.

“어찌 그러느냐.”

“그것이... 마마. 연빈이 아프다고 엄살을 부렸던게 한두 번이 아닌데 굳이 황후마마께서 가실 연유가 있겠는지요....”

“으음....”

“어차피 폐하를 모셔가려 부리는 수작일 텐데 마마께서 가신다고 반기기나 하겠습니까.”

선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연빈을 향한 깊은 불신이 가득 차 있다.

각 비빈들을 모시는 측근 궁녀들 중에 연빈을 향해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가 누가 있겠냐만 선은 어느 궁의 그 누구도 자신만큼 연빈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이는 없을 거라 자부했다.

황후란 어떤 존재인가. 자고로 황후란 만백성의 어머니로 당당하고 유일한 황제의 정궁이자 내명부의 수장이었다. 아무리 공신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언감생심 불경함을 품어서는 안 되는 그런 존귀한 분이시라는 말이다.

헌데 그런 황후마마께 연빈의 태도는 어떠했다. 존경과 어려움으로 황후마마를 대하긴커녕 주제도 모르고 감히 황후마마를 투기하려 들지를 않나, 황후께서 보이시는 관용과 자비를 보란 듯이 배반하질 않나, 그 방자함이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근래에 연빈이 보여 주었던 짧은 변화로 황후마마께서는 그를 달리 보시는 것 같았으나 선은 여전히 그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허면 차라리 잘된 일이 아니더냐.”

아무리 생각해도 황후께서 직접 정안궁으로 가는건 영 내키지가 않아 한번더 만류하려던 선의 말은 그보다 조금 먼저 흘러나온 황후의 말에 막히고 말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선이 '예?' 하고 당황 하여 되묻자 언제나처럼 흔들림 하나 없이 우아한 태도로 몸을 일으키며 황후가 말을 이었다.

“연빈이 불청객인 나를 어찌 대하는지 확인해 볼 수가 있을 터이니.”

깊이를 도무지 알 수 없는 물길처럼 아득한 황후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선이 이내 허리를 굽혔다.

모르는 이들은 자란을 두고 너무 무른 황후라고 말하곤 했다. 가진 성정이 조용하고 우직하여 이토록 태평한 때에 내명부를 맡았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총애를 받는 후궁들의 등쌀에 밀려 기를펴지 못하였을 거라고,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모르는 이들이나 할 수 있는 소리였을 뿐, 황후를 가까이서 마주하는 내명부의 모든 이들은 자란이 실로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한이 지고한 태양 같은 존재라면, 자란은 망망한 대해 같은 존재였다. 바다란 본디 폭풍우가 치지않을 때에도 더없이 광활하고 깊어 무릇 뱃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두렵고 어려운 대상이듯, 자란역시 지금 당장에 고요하여 파도가 일지 않는다고 하여도 경외하여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이였다.

“기력을 회복하는 데에 좋은 약재를 챙기거라. 정 안궁으로 직접 가지고 갈 것이니.”

“예, 마마.”

허니 그런 황후마마께서 연빈에게 지금 보이는 태도는 과연 무엇을 염두에 두고 계심인지. 가진 것이 미천하여 그 깊음을 전부 다 가늠하여 볼 수 없는 선은 그저 고개를 숙여 대답을 할 뿐이었다.


시간이 영영 멈춰버린 것만 같다는게 어떤 기분 인지 너무나도 뼈저리게 실감한 시간이었다. 그는 황제였으니 나라와 관련된 일보다 앞세울 수 있는 건 무엇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대신들과 중요한 정국을 논의하는 와중에도 아주 작은 틈을 타고 헛된 생각이 흘러들어왔다.

잠시 숨을 쉴 때. 피곤함에 눈을 한번 깊이 감았다 뜰 때. 바람이 불어와 불현듯 창밖을 한 번 바라 볼 때. 그럴 때.

그럴 때 이한은 화운을 생각했다. 죽었다 살아난 후로 줄곧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던 연화운을. 온화한 표정으로 아랫것들을 대하고, 모두의 무시를 담담하게 감내하고, 황제의 모멸을 다정한 염려로 되돌려 주던 연화운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아파하고 있을 연화운을 이한은 자꾸만 떠올렸다.

천하의 성이한이 조회를 보는 중 찰나라도 다른 생각을 했다니. 이한을 아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믿지 못할 일이다.

“정안궁에서는 다른 기별이 있었느냐.”

“더 전해온 소식은 없었습니다. 폐하.”

“...가자.”

청건전을 나오는 황제의 걸음이 다급해졌다. 사실 이한은 정안궁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다. 차라리 말을 달리고 싶었다. 미리 대령해놓은 가마에 올라타는 시간도 답답하기가 그지없어 애가 탔다.

“빠르게 가자!”

그런 황제의 마음을 알아챈 오 태감이 그리 목소리를 높였지만 여럿이 어깨에 가마를 이고 가는 이상 달리는 것처럼 빠른 속도를 낼 수는 없는 법. 이한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고 팔걸이를 몇 번이나 잡았다 놓으며 당장에 뛰어내리고 싶은 제 마음을 달랜다.

이상한 감정이라는 생각조차도 들지도 않았다.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으니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행위이며 감정인 걸 알고 있으면서도 온통 앓고 있을 연화운을 생각하기에 바빠 그런 것들은 따질 여유가 없었다.

당장에 그의 엄살을 눈으로 확인해야 할 것만 같았다. 전처럼 별것도 아닌 일을 두고 정신을 잃었네, 어쨌네 하며 그가 황제를 끌어들이려 수작을 벌였다. 는 걸 두 눈으로 보아야만 안심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이한은 자신이 지금 연화운의 이 소동이 차라리 이전처럼 엄살을 부리는 일이기를 바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이한을 정안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약을 먹는 일까지 불사하여 아픈 것을 꾸며내는 연화운의 행동은 이한이 가장 경멸해 마지않았던 행동 중 하나였다. 그것으로 인해 화운에게 화를 내고 돌아선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그가 정말로 아플 바에야 차라리 이전처럼 제게 거짓말을 한 것이기를 바라고 있다니

어떠한 전조도, 소리도 없이 이한의 세상이 뒤집어지고 있었다. 아주 고요한 재해였다.


황후, 자란은 화운의 침대에 걸터앉아 아직 정신이 들지 않은 화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절해 있는 와중에도 아픈 것인지, 아니면 안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건지 화운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다.

“무엇이 그리 서러운고....”

자란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으며, 어린 감정을 쉬이 알아챌 수 없었다. 그는 무감한 것 같으면서도 화운을 연민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궁금해하는가 싶으면서도 동시에 경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창백한 얼굴을 하고 누워 있는 화운은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사람처럼 보여 누구에게라도 절로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자란은 그곳에서 화운의 연약함이 가진 힘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들의 황제는 마음이 여린 분이다. 그분은 강한 이에게는 더없이 강하지만 약한 이에게는 한없이 약한 분이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상에서 가장 존귀 하였으면서도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살펴볼 줄 아는 이였다.

그러니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지난날의 연빈이 황제의 앞에서 조금만 영악하게 굴어 제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던 약함을 자연스럽게 보여 주었다면 총애는 아니어도 폐하께서 그토록 냉정하게 연빈을 멀리하여 완전히 정을 끊어버리는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란은 지금 연화운을 보고 있다. 혹시나 자신은 오래 전에 알았던 그것을 연빈이 이제 와 알아챈 것은 아닌가 해서. 지금 이렇게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 누워 눈물을 흘리는 이 모습이 사실은 전부 계획된 무언가는 아닌가 싶어서.

“......”

화운의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처연하게 그지없는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자란이 이내 자신의 손을 천천히 화운의 뺨으로 가져간다.

그가 변한 것이 진심이든 아니든, 거짓으로 꾸민 것이든 아니든, 어찌 되었든 연화운은 이제 변했고 황제 폐하는 그리 변한 연화운을 눈에 담고 있다. 사랑의 감정에 대해서는 어린 소년과 다름이 없을 황제는 과연 이토록 연약하고, 일방적이며, 맹목적인 연정을 어찌 받아들이실까. 어찌 이해하실까. 어찌 감당하실 수 있을까.

또한 나는 너로 인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자란의 손가락이 천천히 흘러내린 연빈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손끝에 닿은 연빈의 피부는 차갑고, 또한 부드럽다. 눈물이 닦인 자리를 다시 한 번 자란이 천천히 매만졌을 때.

“...황후”

등 뒤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렸다. 그들의 황제, 이한이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일어나시오.”

황제가 안으로 들어서자 황후는 곧장 화운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인사를 하는 황후의 목소리는 화운이 깨어나기를 염려하는 것처럼 작고 조심스러웠다. 황제의 시선이 이내 황후의 뒤쪽으로 넘어가 여전히 눈을 감고 누워 있는 화운에게 향한다.

이불을 덮은 채 파리한 안색으로 누운 화운은 꼭 숨조차도 쉬지 않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침부터 황후가 고생하였군.”

"당치 않으십니다, 폐하. 황후로서 후궁을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을요.”

대답을 하며 황후는 황제의 시선이 화운에게서 서서히 자신의 손끝으로 움직이는 것을 본다. 조금 전 화운의 뺨을 쓸어 보고 있던 손이었다. 황제가 천천히 침대 가까이 다가오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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