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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숙비, 현비영이 답지 않게 초조함을 드러내며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 톡 치며 중얼거렸다. 폐하께서 오늘 안정전에 머무실 모양이라는 말은 이미 전해들은 차였으나 그와는 별개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이다. 사실 비영은 연빈이 물에 빠졌다 살아난 후 첫 문후를 들었던 그 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런 상태였다.
“명주야.”
“예, 마마.”
“네가 보기엔 연빈이 어떤 것 같으냐.”
한참을 혼자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비영은 이내 곁에 서 있던 궁녀에게 물었다. 눈동자를 한 번 굴린 명주가 이내 대답을 올렸다.
“연빈의 고약한 성질머리는 누구보다 마마께서 가장 잘 아시지요. 소인이 보기엔 폐하께서 다시 찾을 생각을 아니 하시니 연기를 하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 그럴 거야…. 이렇게 한순간에 변했을 리가 없지….”
저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명주의 말을 들으며 비영은 다시 한 번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상하게도 이 문제는 그리 간단히 인정하고 넘어가게 되질 않았다.
겪지 않았다면 비영도 그게 무슨 헛소리냐며 넘겼을 것이다. 연빈의 모습을 직접 마주치지 않았다면 고분고분하게 예의를 갖추어 말하는 연화운 같은 걸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황제의 앞에서 그가 머리를 조아리며 폐하의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비영은 울고 불며 꼴사납게 애원하는 연빈의 모습을 떠올렸을지언정 황후의 앞에서 보였던 것처럼 공손하고 단아한 모습은 결코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비영은 이제 바로 눈앞에서 연빈을 보았다. 악을 쓰며 행패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가증스럽게 눈물방울이나 뚝뚝 흘려대며 저는 억울하다 하소연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담담한 모습으로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말을 하고, 들어야 할 말을 듣는 그런 연빈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단 말이다.
아무리 곱씹어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어딘가 분명 내가 놓쳤던 무언가가 있을 거라 여겨 오늘 아침에도 그는 연빈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조차 집요하게 관찰하며 사사건건 그의 신경을 건드리는 말을 내뱉어 보았으나 연빈은 비영을 한번 노려보지도 않았다.
그간 비영이 봐온 연빈의 모습은 모욕적인 말을 내뱉으며 제가 달려들던 악독한 모습뿐이었으니, 어제 오늘 황후궁에서 보았던 연빈의 단정한 얼굴은 난생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래서일까. 그토록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연빈의 얼굴이 유독 낯설어 이상하게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하도 꼴 보기가 싫어 이제는 그 미색이 뛰어나다는 것도 잊고 살 지경이었는데 어제 오늘 본 그 깨끗하고 정갈한 얼굴이며 내리깐 시선 따위가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그저 그 모습이 지나치게 낯설기 때문이었을까.
“되었다. 폐하께선 오늘 아니 오실 테니 우리도 이만 쉬자꾸나.”
허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지금으로서는 어찌 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비영은 이내 머릿속에 가득한 연빈의 얼굴을 흩어버리곤 몸을 움직인다. 어차피 폐하께서는 여전히 연빈을 멀리하고 계시고, 연빈의 인내심으론 얼마 지나지 않아 폐하의 냉대에 폭발하고 말 것이니 더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으리라.
자꾸만 마음을 거슬리게 만드는 것들을 애써 치워버리며 비영은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멈추어라!”
어가의 곁에서 걷고 있던 오 태감이 황제가 손을 들어 올린 것을 빠르게 보고는 목소리를 높여 가마를 멈추었다. 안정전에서 정무를 보던 황제가 정빈에게 가 차나 한 잔 마시고 오겠다 한 탓에 황제의 가마는 지금 정빈의 처소로 가는 중이었는데, 지금 멈추어 선 곳은 정안궁으로 향하는 길목이다.
그리 가마를 세운 채로 이한은 한동안 말이 없이 고개를 돌려 그 길을 노려보기만 했다. 겉으로는 더없이 고요하게만 보이는 이한은 사실 속으로 엄청난 번뇌를 겪고 있는 중이다.
무엇 때문에 화를 내고 싶은지는 몰라도 이대로 정안궁으로 가 그 뻔뻔한 얼굴을 보고 화를 내고 싶은 마음과 아무 관심 없는 척 무시한 채로 지나치고 싶은 마음이 격렬하게 다투었다. 이한은 사실 제가 이러한 고뇌를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짜증이 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안궁으로 가는 것이든 보란 듯이 지나치는 것이든 그 기저에는 여전히 연화운을 향한 비정상적인 관심이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한은 얼마든지 제 뜻대로 화운을 무시할 수 있었다.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보고 있으면 화가 나도 돌아서 다른 일을 할 때는 단 한 순간도 연화운의 존재를 떠올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헌데 지금 이한은 어떤가. 일에 집중할 때를 제외하곤 온종일 연화운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지를 않나, 이제는 하다하다 다른 후궁의 처소에 가는 길에도 그 생각을 떨치지 못해 이렇게 길에 서 있다. 아주 솔직히 말해서 이한은 자신이 정말로 정빈의 처소에 가고 싶기는 했던 건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이한 스스로도 자신이 무얼 하고 싶은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답이 없는 문제를 계속 풀고 있는 격이니 짜증이 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팔걸이를 쥐고 있는 황제의 손이 자꾸만 움찔거렸다.
이윽고, 황제가 말한다.
“정빈에게 가기 전에 정안궁에 잠시 들를 것이다.”
“정안궁으로 가자!”
오 태감의 목소리는 애초에 그 말을 하려고 했다는 듯이 자연스럽기만 하였다.
“마마! 마마!”
화운이 쓴 약을 마시는 걸 바라보며 얼른 단 사탕을 내밀려 준비하고 있던 아진은 갑자기 침전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서서를 보고 인상을 확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이 밤에 어찌 그리 소란을 피우니! 마마께서 놀라시게!”
“헉…! 마마, 죄, 죄송해요…! 놀라셨어요?”
다급하게 뛰쳐 들어올 땐 언제고 아진의 말에 또 금세 눈꼬리를 추욱 늘어트리며 말하는 서서의 모습에 쓴 탕약에 잠시 찌푸렸던 미간을 풀곤 가볍게 웃어버린 화운이 ‘아니야. 괜찮아.’ 하고 대답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착실하게 화운의 입에 사탕을 넣어드린 아진이 다시 서서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기에 난리인 거야?”
“아! 그게, 마마…! 폐, 폐하께서 정안궁으로 오고 계시다고 합니다!”
서서의 말에 화운이 답지 않게 ‘뭐?!’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디 화운뿐인가. 아진은 하마터면 화운에게서 받은 빈 약그릇을 떨어트릴 뻔했다.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세 사람은 완전히 얼어버려 잠시 동안 멍하니 서로의 눈만 쳐다보고 있다.
그나마 이미 밖에서 먼저 놀라고 먼저 호들갑을 떨며 뛰어온 서서가 아진의 팔을 붙들고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진 언니! 폐하께서 오신다니까요!”
“아… 아! 폐, 폐하께서 그… 그래… 이, 일단 서서 너는 얼른 주방에 가서 다과를 준비하라 일러. 서두르라고!”
“네! 그럴게요!”
서서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던 것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다시 밖으로 뛰어나가자 아진이 서둘러 경대 앞으로 가 장신구들을 살폈다. 다행히 아직 옷까지 갈아입지는 않았으나 편히 쉬시라고 머리는 장식을 전부 거두고 편하게 내린 상태라 당장에 어찌 꾸밀 수가 없었다.
아주 잠시 고민하던 아진이 이내 서랍에서 머리끈 하나를 꺼내어 여전히 얼은 채로 앉아 있는 화운의 뒤에 섰다. 재빠른 손길로 화운은 머리카락을 앞에서 절반만 걷어내 뒤로 묶으며 저도 긴장되는 목소리를 애써 숨기고 입을 연다.
“마마. 괜찮으세요?”
“으응?”
하지만 화운은 아진의 물음에도 여전히 얼빠진 표정으로 눈을 깜빡일 뿐이다. 그간 몇 번이나 황제를 마주치기는 하였으나 화운의 입장에서는 매번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갑자기 마주친 것이 전부일 뿐, 지금처럼 미리 알고 기다려야 했던 경우는 화운이 깨어난 후 황제가 정안궁을 찾아왔을 때 이후론 처음이었다.
게다가 화운은 폐하께서 이 시간에 어째서 정안궁으로 오고 계시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재빠르게 오늘 하루 제가 한 행동들을 떠올려 보았으나 아침에 황후께 문후를 드린 일 말고는 정안궁에서 한 발자국 나간 일도 없는데 어찌 갑자기 자신을 찾아오시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마마…! 크게 숨을 쉬세요!”
화운의 정신을 일깨운 건 다급하게 그의 등을 쓸어 주며 말하는 아진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제야 화운은 자신이 숨을 헐떡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진이 연신 화운의 등과 팔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괜찮아요, 마마. 그저 폐하께서 오시는 것뿐이에요.”
화운은 아진이 저를 다독여 주는 손길에 맞춰 천천히 숨을 쉬었다. 한 번 숨을 고르고 나자 그제야 정신이 좀 돌아오는 기분이 든다. 연화운의 몸은 지나치게 예민하고 약해서 가끔 그는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몸이 주는 감각들이 너무 낯설 때가 있었다.
“고마워, 아진.”
화운은 애써 표정을 풀어 아진에게 웃어 주며 다시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한다. 아진의 말이 맞았다. 그저 폐하께서 오시는 것뿐이고 폐하의 용안을 뵐 수 있으니 나쁜 일도 아니다. 화운은 그리 생각하며 황제를 마중하기 위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밖으로 나서는 걸음걸음마다 지금껏 황제와 마주쳤던 날들이 기억이 되어 떠올랐다. 처음. 하운으로 황제를 처음 보았던 그날부터 지난밤에 보았던 모습까지. 좋았던 기억보단 어려웠던 기억이 훨씬 더 많으나 제게 차가웠던 황제의 모습은 사실 하운이 아닌 연화운을 향한 것들이었으니 사실상 하운이, 하운으로서 받은 황제의 마음은 모조리 좋은 것들뿐이었다.
하운에게 황제는 저의 삶을 이끌어 주고, 하운의 죽음에 의미를 주신 분이었다.
그러니 인간이란 본래 이토록 뻔뻔하게 제게 좋은 것만을 간직하려 드는 모양이라고. 화운이 그런 생각을 하며 막 뜰로 나와 저만치 폐하께서 걸어오실 길을 보고 섰을 때.
“황제 폐하 납시오!”
밤을 가르는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저만치 황제, 이한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