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28)화 (28/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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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연빈에게 경거망동한 죄를 물어 경사방에서도 그 패를 빼라고 명을 내린 참이다.”

“...... ”

“내 결정이 야속한 것 같은가?”

이한이 다시 한 번 주원을 향해 떠보는 듯한 목소리로 넌지시 묻는다. 아무리 연빈이 집안에서도 골칫덩이인 아들이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냉대를 받는다고 하면 아비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쓰일수밖에 없겠지.

허나 연주원은 본디 제 감정을 솔직하게 내색하는 법이 없어 속이 아무리 타들어가도 그것을 쉬이 황제에게 내보일 이가 아니었다. 이한은 그가 무슨 대답을 하기전에 대놓고 자신이 다시 말을 잇는다.

“하기야... 자네의 얼굴을 생각하면 내가 연빈을 이렇게까지 박대하는 건 조금 너무한 처사이긴 하지.”

“아닙니다, 폐하.”

하지만 황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어진 주원의 대답은 이번에도 이한이 기대한 것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대답이다.

이한이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곤 주원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폐하께서 뜻대로 집안을 다스리시는 데 어찌 감히 소신이 그 일에 참견을 하겠습니까. 연빈께서 경거망동하여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혔다면 마땅히 폐하께서 내리신 벌도 달게 받아야 할 것이니 소신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허, 허나 아무리 그래도....”

"폐하께서 소신을 이리 생각해 주시는 마음만은 잊지 않고 보답하겠습니다.“

그러더니 이제는 아예 이한이 더 말을 꺼내지도 못하게 큰절씩이나 올리고 있다.

연주원을 이용해 무얼 꼭 어떻게 해보려던 것은 아니었다. 이한은 자신이 정말로 그렇다고 믿었다. 하지만 저렇게 제 아들을 딱 잘라버리는 이의 모습을 보자 이유도 없이 또 불쾌감이 밀려들어, 이한은 그가 물러갈 때까지 심통난 소년처럼 입술만 삐죽 거렸다.


“아진.”

황후궁에서 정안궁으로 돌아온 화운이 처소로 들기 전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아진을 불렀다. '네, 마마.’하고 대답하며 화운의 곁에선 아진은 어쩐지 제 주인의 표정이 가라앉은 것 같아 염려스러운 얼굴을 한다. 아진은 오늘 황후궁에서 들은 말 때문에 마음이 어려우신 것일까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어진 화운의 말은 전혀 다른 종류였다.

“간식을 좀 챙겨서... 정안궁을 지키는 시위들이 교대할 때 가서 먹으라고 챙겨 주겠니.”

“예? 시위들에게요?”

“응. 생각해 보니 줄곧 정안궁을 지키느라 고생이 많은 이들인데 제대로 신경 쓴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아진은 난데없는 화운의 명에 정말로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했지만 화운에게는 이것이 더없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애초에 안국의 대신들은 황제가 민간에서 시위를 뽑아 올리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출신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이들을 뽑아 황궁에 들이게 되면, 그것도 황궁의 안위를 맡는 자리에 두게 되면 분명히 무도한 마음을 먹는 이가 생겨 소란을 일으킬 거라는 예상 이었다.

물론 그 이면에 있는 진짜 이유는 대부분 귀족 집안 자제로 이루어져 있는 황궁 시위의 명성에 흠이 가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을 진행시킨 건 오롯이 황제의 의지였다. 황제는 뜻이 있지만 길이 없어 좌절하는 이들에게 작은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랐다. 비록 타고나기를 귀하게 타고난 사람과 동일한 대우를 받을 수는 없어도, 그토록 간절히 원한다면 한 번쯤은 그 꿈을 이루는 이들이 존재하기를 바랐고 그런 이들이 자신의 백성이기를 바랐다.

황제의 물러서지 않는 고집에 결국은 대신들도 의견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대신 무위뿐만 아니라 그들의 인성 역시 꼼꼼하게 가리고, 그렇게 뽑힌 시위들은 황궁에서 주요한 곳은 담당할 수 없게하며, 귀족 자제들과는 현저히 다른 대우를 받게 차등을 두는 등의 조건이 붙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하운과 같이 뽑힌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정안궁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정안궁은 황제가 가장 기피하여 염두에 두지 않은 곳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냥... 그냥 그렇게 부탁해, 아진.”

여전히 뜻 모를 얼굴을 하고 있는 아진을 돌아보며 화운이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연화운이 된 후, 화운은 정안궁을 드나들며 이따금 그 시위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 중 몇몇은 하운과 함께 궁으로 들어와 같은 관사를 쓰고 함께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하운을 알아볼 수 없고 하운 역시 그들에게 알은척을 할 수 없어, 갑작스러운 상황에 적응하느라 아등바등하는 와중에도 화운은 매번 그들 보기가 마음 편치 않았다.

심지어 화운은 그 안에서 자신과 가장 가깝게 지내던 이의 안부조차 물을 수가 없는 상태이니. 아마도 그들은 전부 하운을 금세 잊었겠으나 하운에게는 생에 몇 가지고 있지 않은 친우였다.

“마마.”

그 새삼스러운 사실을 되새기니 저도 모르게 마음에 스산한 바람이 드는 것만 같아서 화운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때, 이번에는 아진이 조금 무거워진 음성으로 화운을 불렀다. 화운이 고개를 돌려 아진을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마마께오선 저의 주인이시고 저는 마마의 종이에요.”

“.....갑자기 그건 왜....”

“주인은 종에게 부탁을 하지 않아요, 마마. 제가 무언가를 하길 원하시면 그저 제게 명을 내리시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제야 화운은 아... 하고 작은 탄성을 흘린다. 조금 전 시위들에게 간식을 챙겨 주라고 하며 부탁한다고 말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화운이 멍한 얼굴로 바라보자 아진은 이내 속이라도 상한 사람처럼 눈꼬리를 조금 늘어트리며 말을 이었다.

“어찌하여 귀하신 마마께서 저 같은 것에게 부탁 한다는 말을 그리 쉽게 하십니까....”

그랬다. 아진은 정말로 속이 상한 것처럼 보였다. 이전에는 화운이 이름만 불러도 벌벌 떨며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를 해대느라 바쁘던 이가 이제는 화운이 저에게 부탁한다는 말을 썼다고 이리 세상 서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 아진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화운은 방금까지 자신을 외롭게 만들던 생각들이 서서히 걷히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화운이 입을 열었다.

“아진.”

“예, 마마.”

“너는 아마도 영영 모르겠지만... 너는 내게 너무 나도 큰 것을 주었어.”

남의 삶을 빼앗아 살아가고 있다는 죄책감과 싸우는 나날들에 있어 화운에게 아진은 마치 제가 구해낸 세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제는 제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웃고 말하는 아진을 볼 때면 화운은 제가 이 삶을 대신 살게 된 이유를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사실을 알게 되어 누군가 화운에게 이기적이라고 욕을 하더라도, 뻔뻔하게 남의 자리를 차지하여 삶을 연명하였다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화운은 적어도 제가 연화운이 되어 세상에 단 한 사람만큼은 행복해질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내가 장담할게. 아진, 너는 나에게 지금보다 더 귀한 대우를 받아야 해.”

그것은 아진이 결국 정안궁의 뜰 한복판에서 와락 울음을 터트리고 만 이유였다.


"눈치도 없는 노인네 같으니....”

경사방에서 올린 패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이한이 이내 불만스러운 얼굴로 투덜거렸다. 몇 번이나 눈앞에 놓인 패들을 아무리 훑어보아도 그저 어딘가가 불편하고 마음에 들지 않아 괜한 성질만 치밀어 올랐다.

“소, 송구하옵니다. 폐하...!”

위 총관은 연유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황제가 볼멘소리를 내니 일단 고개부터 조아리고 본다.

황제는 그런 위 총관의 정수리를 이유도 없이 노려보다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고 하더니 딱 그 짝이지. 아무리 아들이 못났다고 해도 저가 눈 딱 감고 제 얼굴을 봐서 한 번만 용서해 달라 하면 내가 설마 그것을 무시하겠어?”

난데없는 말에 위 총관이 고개를 들어 무어라 대답을 하려다가 크흠, 하고 작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살살 흔드는 오 태감의 모습을 보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또 제가 모르는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여간에 부자지간이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고정하시옵소서, 폐하. 연 대인도 폐하의 앞에 염치가 있으니 차마 부탁하시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내가 친히, 관대하게 운을 띄워 줬잖아. 헌데 그것도 못 받아먹어?”

“나라고 뭐 연빈을 용서하고 싶어 그런 줄 아나.”

여전히 늘어선 패를 노려보며 이한이 조금 전보다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사실 이한은 오늘 아침 연주원을 독대하고 난 후로 내도록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오로지 위 총관뿐, 곁에선 오 태감은 담담한 표정이다.

“전부 제 얼굴을 봐서 내가 큰마음 먹고 길을 내어 준 것도 모르고....”

어쩐지 말을 하면 할수록 이한의 표정은 화가 났다기보다는 시무룩해지는 모양새였는데, 정작 서러운 표정으로 애꿎은 패들만 노려보고 있는 이한은 자신이 그러고 있는 줄도 모르는 모양이다. 그렇게 다시 한참 동안 패를 바라보기만 하던 이한이 이내 무얼 고르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 위 총관을 향해 손을 휘휘 저어버린다.

혹여나 다른 불똥이 튈까 서둘러 뒷걸음질 치는 총관을 오 태감이 문 앞까지 따라나서자 길게 한숨을 푸욱 내쉰 위 총관이 태감을 향해 물었다.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소. 무슨 일이 있었소?”

"폐하의 뜻을 우리 같은 이들이 어찌 알겠다. 다만 내가 충고할 말은....”

폐하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태감이 충고할 말이라니. 위 총관은 두 귀를 쫑긋 세워 태감의 말을 경청한다. 이윽고, 오 태감이 말했다.

“연빈마마의 패를 잘 닦아두게.”

"연빈마마의... 패를...?“

“곧 쓸 일이 있을 터이니.”

위 총관은 마치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뜰 거라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오 태감은 그저 여유로운 얼굴로 고개를 한번 끄덕이곤 다시 안으로 들어선다. 남겨진 위 총관만이 믿을 수 없는 말을 한참이나 곱씹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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