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화산천검 7권(10화)
4장 소강상태(3)
“말해 보거라.”
“마지막에 살수로 보이는 자가 고루시수 망영의 시체를 들고 도주했습니다.”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지 않았더냐? 그렇다면 괜찮지 않느냐?”
“강시를 제조하던 자입니다. 본인이 죽은 후에 다시 강시로 되살아날 수 있도록 어딘가에 안배를 해 놓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숨을 끊었지만 되살아날 가능성이 있다. 그것 때문에 그렇게 표정이 좋지 않았더냐?”
장문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조그마한 불안감이었지만 갈수록 커져 갔다.
무림맹에 돌아왔을 때는 사실이라도 된 것 마냥 가슴을 짓눌러 온 불안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네가 쓰러뜨린 자이다. 다시 나타난다면 네가 쓰러뜨리면 될 일. 걱정할 필요가 없다.”
딱 잘라 말하시는 장문인.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될 불안감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붙잡고 있어야 하는 감정도 아닌 일,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다음의 일, 사천참사에 대해 이야기해 보아라.”
“예…… 윽!”
시계가 반전된다.
바닥이 위로, 천장이 아래로.
회오리치듯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으로 변했다.
턱!
“피로가 심했나 보구나.”
따뜻한 손이 나의 어깨를 받쳐 주었다.
무진 사부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조금 어지러웠을 뿐이니.”
“네 상처도 만만한 것은 아니다. 사실 지금까지 아무런 일 없이 버텨 낸 것이 기적 같은 일이지. 바깥으로 나가서 의원의 치료를 받거라.”
“그 정도는 아니니 걱정 마세요.”
하지만 거절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런 몸 상태로 더 이상 말하기는 곤란하겠군.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에 듣도록 할 터이니 무진의 말대로 의원의 치료를 받거라. 매영!”
스스슥!
천장에서 떨어지는 검은 물체.
장문인의 직속부대 매영이 나를 붙잡았다.
“의원이 있는 쪽으로 데려가거라.”
매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사부의 걱정 어린 눈빛 때문에 반항하지도 못하였다.
“괜찮습니다.”
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으니 바깥으로 나갔지만, 그렇다고 부축을 받을 정도는 아니다.
조심스럽게 나를 부축한 매영의 손을 치웠다.
‘음?’
거칠지 않고 의외로 부드러운 손.
세게 힘을 주면 부러질 것만 같은 연약한 가지와도 같은 손가락이 눈에 보였다.
“…….”
매영이 감추듯 뒤로 손을 빼며 나를 응시했다.
‘여자인가?’
물론 여자 중에도 뛰어난 실력의 고수들이 있다.
하지만 살수를 택하려 하지는 않는다.
장문인의 직속부대라고는 하지만 매영은 사문의 어두운 부분을 지우는 음의 존재.
살수들의 부대에 가까운데 그런 곳에 여자가 있었다.
조금은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반응이 이상해.’
살수는 오욕칠정에 무감각해지도록 자신을 감추고 벼려 낸다.
여자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마찬가지.
아니, 여자이기에 더욱 심하게 자신을 감추고 벼린다.
그런데 이 매영은 내가 손을 잡자 황급히 뒤로 뺐다.
솔직히 매우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내 눈에는 조금의 다급함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뭔가 있는 건가?’
사람마다 각자 사정이 있는 법.
이번에도 그런 것으로 치고 넘어가려 하려는 순간 눈동자를 보았다.
흰색과 검은색의 경계가 뚜렷한, 살짝 내리깔고 있는 눈.
휙!
매영이 얼굴을 돌리며 안내를 하려는 듯 앞장서서 걸어갔다.
‘익숙해?’
순간 느낀 감정은 익숙함.
어디선가 보았던 눈과 눈빛이었다.
‘잘못 본 건가?’
내가 매영을 직접 대면한 적은 없다.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하면 분명히 잘못 느낀 것일 것이다.
매영은 장문인께서 직접 키워 낸 사람들로 채워진다.
나는 사문에서 그런 사람들과 접촉한 적이 없으니 잘못 느낀 것이 맞을 것이다.
‘뭔가 찝찝하단 말이야.’
하지만 어차피 나는 지금 별로 좋지 않은 심경.
아마도 어두운 감정과 좋지 않은 몸 상태 때문에 이렇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를 인도하는 매영.
하지만 눈동자를 조심스레 굴리며 주변을 보는 것이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는 것 같았다.
‘무림맹 내이니 그럴 필요 없을 텐데…….’
하지만 그것이 매영의 임무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장문인을 수호하는 수호대.
아마 내가 뭐라고 말해도, 처음엔 멈추더라도 조금 있으면 곧바로 다시 주변을 경계하리라.
‘그것보다도 이렇게 대놓고 돌아다녀도 괜찮은 건가?’
매영은 어둠의 존재다.
바깥으론 드러나서는 안 되는 존재.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바깥에서 돌아다녀도 괜찮은 것일까?
‘알아서 하겠지.’
임무에 그대로 따르는 것일 수도 있다.
나를 의원에게로 안내하는 것이 임무이니 말이다.
“이곳.”
낮게 깔린 저음.
완벽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정도는 흑도의 삼류무사에게서도 배울 수 있는 잡기인지라 신경 쓸 만한 것도 아니었다.
끼익∼!
기름칠을 하지 않은 듯 문을 열자 소리가 났다.
매영은 어느새인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곳은 내가 지금까지 다니던 의원(醫院)과는 조금 달랐다.
주가의원도 그렇고 성의, 그리고 약선까지도 그 방에서는 특유의 약 냄새가 났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보통의 방과 같이 쾌적한 공기 때문에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심지어 피 냄새까지도 나질 않았다.
안쪽에서 환자의 진맥을 보고 있는 중년인.
그 중년인의 옆에서 타오르며 회색 연기를 뿜고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뭐지?’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 것과 관계가 있는 듯싶었다.
먼저 진맥을 보던 무인이 의원으로 보이는 노인과 얘기를 주고받고는 바깥으로 나갔다.
이제 내 차례.
바로 앞의 의자에 주저앉자 의원이 나의 손을 잡고는 맥을 짚었다.
“흐음…….”
의원이 그렇게 밝지도 않고 그렇게 어둡지도 않은, 그저 그런 표정을 지었다.
“기가 많이 쇠했구려. 그리고 혈도도 조금 찢긴 것 같으니 그것도 보해야겠고, 무엇보다도 정기(精氣)가 많이 상했어. 별로 좋은 상태는 못 되는구려. 완치되려면 족히 보름은 요양해야 되니 무리는 하지 마시구려.”
사부가 무림맹으로 오면서 나를 많이 치료해 주셨다고는 하나 전문적인 의원보다는 못하다.
게다가 무림맹에 속해 있는 의원이니 실력이 얼마나 뛰어날까?
단 한 번에 나의 상태를 파악하였다.
“일단 매일매일 이곳으로 와서 내가 주는 탕약을 마시고 침을 맞아야겠소. 이쪽으로 오시구려.”
의원이 옆쪽에 서 있던 제자로 보이는 여인에게 잠시 자리를 맡기고 나를 방으로 안내했다.
침상과 함께 많은 의료 기구들이 놓여 있는 방 안.
한산하기만 한 바깥과는 비교되도록 많은 물건이 있었다.
의원의 지시대로 침상에 눕자 곧이어 깨끗하게 닦여 있는 예리한 침이 옆에 놓여졌다.
“그건 그렇고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시구려.”
“어째서 이곳에선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 것입니까?”
의원이 나의 몸 이곳저곳을 눌러보며 대답했다.
“일전에 운남에 갔다가 우연히 만독문(萬毒門)에 들어가게 되었소. 그 때 선물로 받았던 독초 때문에 그런 것이오.”
‘만독문!’
독의 종주라고 하는 사천당가와 비견되는 사파의 문파.
사천당가보다도 더 폐쇄적이기에 운남에 존재한다는 것을 빼고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만독문이다.
그런데 그런 곳에 들어갔다가 선물로 무언가를 받았다니.
‘괜히 무림맹에서 의원을 하고 계신 것은 아니군.’
푹! 푹! 푹!
조심스럽게 혈에 꽂히는 침.
여러 번 겪었던 치료이다 보니까 별 감상은 없었다.
게다가 피곤한 것은 물론이요, 이렇게 누워 있다 보니까 졸음이 쏟아졌다.
약선에게서 치료를 받았던 때와 똑같은 상황이다.
‘조금만 자자.’
어차피 침술은 빠르게 끝나는 치료법이 아니다.
게다가 나는 전신에 침을 꽂을 것으로 보이니 더욱 오래 걸릴 것이다.
잠을 청하더라도 문제는 없다.
‘치료가 끝나면 깨우겠지.’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5장 불타는 무림맹(1)
“이제 더 이상 올 필요 없다. 그만 가거라.”
질린다는 듯한 표정에 말투.
살짝 웃으며 말했다.
“치료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진찰을 하는데 걸리적거릴 뿐이다. 우연히 만난다면 모를까 찾아오지는 말아라.”
“하하하, 알겠습니다.”
치료는 의원, 조원창(曹元彰)의 말대로 딱 보름이 걸려서 끝났다.
아니, 사실은 더 일찍 끝날 수도 있었는데 내가 문제였다.
분명히 처음에 조원창 의원께서는 나에게 정기가 상했으니 무리를 하지 말라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무리를 하였다.
나 이외의 신룡들은 모두 심한 상처 때문에 침상에 누워 있다.
특히나 두 사형은 나의 부족함으로 인해 크게 다친 것.
움직여도 별문제가 없는 나는 실력을 쌓아야 된다는 생각에 의원을 가고 사부와 얘기하는 것을 빼고는 수련만으로 시간을 보낸 것이다.
여독도 풀리지 않은 상태에 수련까지 해 대니 몸이 남아나질 않는 것은 당연했다.
분명히 몸을 좋게 만들고 갔는데도 다음 날이면 다시 악화되니 조원창 의원께서도 결국엔 화를 내셨다.
그렇게 수련을 안 한 지 삼 일.
자하심법의 공능과 더불어 무리하지 않고 치료까지 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은 완쾌되었다.
바깥으로 나오자 음과 양이 전환되는 시간이었다.
음의 어둠이 양의 빛과 전환되며 색과 색이 섞여 자색 노을을 이루었다.
자하(紫霞).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는 시기다.
그 어떤 것에도 치우치지 않도록 조화를 이루도록 기운을 모으는, 수련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이기도 했다.
‘몸도 완치되었으니 다시 수련을 해 볼까?’
삼 일 동안 움직이지 않은 것치고는 몸이 나쁘지 않았다.
탕약과 더불어 침술 때문에 근육이 많이 풀렸기 때문일 것이다.
“치료가 끝난 것이냐?”
“아, 사부.”
내가 매영에게 이끌려 의원으로 간 이후로 사부는 나를 대신하여 그 이후의 일을 장문인들께 말하셨다.
그리고 내 치료가 끝난 이후까지 말씀을 나누셨다.
분명히 그 이후의 일에 대한 이야기는 내 치료가 끝나기 전에 마쳤을 텐데 더 무슨 얘기를 나누셨냐고 물어보자 사부는 나중에 알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셨다.
궁금했지만 무척이나 단호하게 나오신 데다가 나중에 알 것이라고 말하셨으니, 말 그대로 기다리면 알 게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더 물어보지 못하고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
사부는 화산의 취운암에서 지낼 때와 마찬가지로 조금은 무뚝뚝하게, 조금은 장난스럽게 행동하셨다.
하지만 그동안의 나의 행적 때문인지 이따금씩 두 시진 정도 나에게 심도 깊은 이야기를 하셨다.
그래도 이제 조금씩 화산에서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아닌 매화 향기 풍기는 화산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더냐?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디 간 것이냐?”
사부의 말에 상념을 접고 대답했다.
“예, 오늘로서 보름. 치료는 끝났어요. 완쾌됐어요.”
“그거 다행이구나.”
사부가 한시름 놨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순간 죽었다는 소문이 났던 제자.
오랜만에 만난 제자가 상처 입어 치료를 받고 있었으니 마음속으로 심히 걱정되셨을 것이다.
가슴이 뭉클했다.
친우들과 있을 때와는 다른, 진정한 가족과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턴 어찌할 참이더냐? 사천참사 때문에 혈천회와의 전쟁은 소강상태. 전장에 나갈 일은 없을 터인데 말이다.”
전장은 소강상태.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는 상태였다.
전면전이 있었던 곳을 경계로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태.
그렇다고 아예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니다.
양동작전으로 치고 들어갔던 것 때문에 둘 모두 큰 피해를 입어, 피해를 추스르는 시간을 갖는 폭풍전야의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