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화산천검 5권(3화)
1장 남궁수련(3)
‘익숙하다라…….’
익숙하다고 아픈 것이 안 아파지는 것은 아니건만 남궁수련은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억지를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다.
말했듯이 나는 외부인이고 남궁수련의 속사정이 있는 법이니까.
‘대체 그 속사정이 무엇일까?’
아무리 가주에 대한 은혜가 깊다곤 해도 이렇게 이십 년 동안 감내해야 할 만큼 커다란 은혜는 아니다.
게다가 어릴 적의 아이들은 모두 반항기를 거친다.
그렇다면 그때에 한 번쯤 자신의 감정을 털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또 다른 속사정이 있다는 말과도 연관된다.
‘대체 무슨 속사정이 있는 것일까…….’
이렇게 하면 남궁수련의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할 수 있을까 싶어 남궁수련의 깊고도 현양한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하지만 역시나 아무런 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남궁수련은 나의 눈길을 똑바로 받고도 미동도 하지 않은 것이다.
철혈이라고 불릴 만한 여인이었다.
고개를 흔들자 남궁수련이 말했다.
“끝까지 포기하시질 않네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생각이니.”
“분명 무시해 준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그런 말, 한 적은 없소.”
“구제불능이군요.”
남궁수련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또 말없이 걸었다.
걷고 걷다 보니 어느새인가 내가 남궁수련에게 억지로 내상약을 먹이고 들어갔던 그 전각에 도달해 있었다.
“언제 여기까지 온 걸까요?”
“그저 길 따라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이곳까지 온 것일 뿐이오.”
“뭐, 이 정도면 괜찮지요. 많이 편해졌어요, 고마워요.”
말하며 남궁수련이 살짝 웃었다.
이렇게 웃으면 화사한 여인이 이렇게 침묵하고 무표정하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런 나의 눈을 보며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남궁수련이 얼굴을 굳히며 단호하게 말했다.
“또 뭔가를 하려고 하는군요, 그런 생각 말아요. 말했다시피 남일 뿐이고, 제 마음을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럴 바에는 그냥 내버려 두세요. 그것이 도움이니.”
“마음대로 되면 그것이 어찌 사람 마음이라 할 수 있겠소? 사람의 마음은 의지를 벗어나 자기 혼자서 자라나고 증폭되는 마물인지라 어찌할 수가 없소.”
나도 이성적으로는 그녀를 이해하고 그녀의 말대로 해서 그녀가 조금이라도 편해지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슴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하라고 외치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하아∼ 정말로 어쩔 수가 없는 구제불능이군요. 몇 번을 말해도 듣질 않으니, 화산파가 아무리 극기와 절도를 중시하는 생활을 해서 고집이 세다고 들었지만 이 정도로 고집불통일 줄은 몰랐어요.”
“화산의 문규 때문이 아니라 그저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일 뿐이니 화산을 들먹일 필요는 없소.”
그렇게 말하자 남궁수련이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 해석해서 듣는군요. 보통 어느 문파의 제자든지 문파를 들먹이면 울컥해서라도 떠날 줄 알았는데…….”
내가 남궁수련의 말을 이상하게 해석했나 보다.
하지만 내가 듣기로는 이런 뜻이었으니 뭐 어찌하겠는가?
“그런대로 마음을 편하게 해 준 즐거운 산책이었으니 이 정도는 용서해 줄게요. 그러니 그만 가시는 것이 좋을 거예요.”
“이 정도로 정말 괜찮소?”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오?”
이 정도로 괜찮은지.
이십여 년 동안의 억눌림과 분노와 절망과 슬픔 등의 만감을 겨우 이 정도 털어 내고 괜찮으냐는 말이다.
이런 시간도 얼마 오지 않는다.
이 일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나 같은 사람이 더 나타날 것이란 기약도 없고, 또 나도 이곳을 떠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아마 다시 남궁세가로 돌아올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될 수 있는 한 그 시간 동안 많이 풀어 줘야 한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죄이며 동정이며, 최선이다.
“하아…… 정말…….”
남궁수련의 눈빛에 만감이 교차했다.
한탄, 고마움, 증오, 갈등, 분노 등의 감정들이 하나하나 남궁수련의 얼굴에 스치고 지나가며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 냈다.
남궁수련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오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괜찮으니 가 주세요. 더 이상은 저도 곤란할 것 같아요.”
“알겠소.”
미련 없이 돌아섰다.
이 정도로 말했는데도, 이 정도로 갈등을 겪었는데도 거절한다는 것은 하나의 확고한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상 더 몰아붙였다가는 다음번의 기회도 없을 것이다.
내가 미련 없다는 듯이 말하자 남궁수련이 고개를 숙였다.
힘들어하고 있는 것인가.
눈물을 흘리는 것인가.
들썩거리는 어깨와 하염없이 마음을 짓누르는 안타까움.
그 모든 것을 한 번의 고갯짓으로 털어 버리려는지.
남궁수련이 힘차게 고개를 저으며 주먹을 쥐었다.
“그만…… 돌아가세요.”
고개를 끄덕이고 정말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헤어지기엔 아직 이른 것인가.
해가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점점 가라앉고 있는 시각.
하나의 커다란 고함 소리가 나의 몸을 붙잡음과 동시에 긴장하게 만들었다.
“적습이다!”
적습, 적이 쳐들어온 것이다.
안휘성의 패자, 남궁세가.
그 남궁세가에 적습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쳐들어온 자들이 미쳤거나 아니면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고함 소리에 담겨 있는 다급함으로 보아 후자인 것 같았다.
남궁수련을 돌아보았다.
굳은 얼굴의 남궁수련.
고개를 끄덕이고 같이 고함 소리의 근원지로 달려갔다.
2장 천랑대(1)
째재쟁! 카앙! 푸학!
“크억!”
“막아라! 어르신들이 오실 때까지 막아!”
“크으윽!”
서걱! 사아악! 피잉!
갖가지 병장기 소리와 기합 소리, 그리고 비명소리.
하나의 아수라장이 남궁세가의 정문에 펼쳐져 있었다.
쳐들어온 병력의 수는 대충 훑어봐도 몇 백 명.
거의 천 명에 가까운 숫자였다.
‘천 명이라니, 말도 안 되는…….’
천 명 정도가 직접적으로 쳐들어온다. 그것도 남궁세가에.
남궁세가로 쳐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모험이라 할 수 있는데 이만한 수의 무인이라면 한 문파의 싸울 수 있는 인원 전체를 데리고 왔다고 할 수 있다.
아니, 보통의 문파로는 이 정도의 문도가 나올 리가 없다.
한 성의 패자를 노릴 정도로 커다란 대문파일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그런 대문파에서 쳐들어온 것이라고 해도, 이 정도라면 그 문파의 사활을 이 싸움에 걸었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정도를 걷고 있는 광명정대한 남궁세가가 어떤 문파에게 사활을 걸고 싸움을 걸 정도로 심하게 대한 적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사도의 문파라면 몰라도.
‘그렇다면 이 정도의 수가 그 문파의 전체가 아니라는 얘기인데…….’
그렇다.
그렇다면 답은 이렇게 귀결된다.
천 명 정도를 보내도 여유가 남을 정도로 엄청나게 거대한, 보통의 문파가 아니라는 소리.
‘그런데…… 대단하군.’
남궁세가의 외성, 그리고 정문.
아무리 내성의 고수들이 오지 않았다곤 하지만 천 명 정도의 무인들은 외성을 거의 압도라 할 수 있을 만큼 밀어붙이고 있었다.
저들 한 명이 죽으면 남궁세가에선 두 명에서 세 명이 죽는다고 할까?
이 상태로 가다간 전멸은 시간문제다.
게다가 앞에서 선봉을 자처하며 강력한 무를 뽐내고 있는 열 명의 무인들과 그 옆에서 그들을 보좌하며 천 명의 무인들을 지휘하는 스무 명의 무인들.
그들에 의해서 죽어 가는 사람들이 다른 무인들보다 훨씬 많았다.
“뭘 보고만 있는 거예요!”
남궁수련이 표독스럽게 말하며 앞으로 내달렸다.
그렇다, 생각이 많았던 것이다.
전황을 둘러보는 것도 좋지만 일단 앞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 바, 재빨리 생각을 마쳤어야 하는 것이다.
벽을 박차고 그들의 사이로 난입했다.
신류퇴 낙추.
빠각!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강력한 발차기에 맞은 한 무인의 어깨가 박살 났다.
반동으로 몸을 다시 띄우고 빙글 돌며 신류퇴 회추.
뻐어억!
얼굴을 맞고 옆으로 날아가 남궁세가의 무인을 공격하는 다른 무인의 몸에 부딪친다.
어안이 벙벙한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남궁세가의 무인.
“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시오!”
“아, 예!”
말을 하고서야 놀라움을 뒤로하고 옆의 다른 남궁세가의 인물을 도와주러 가는 남자다.
‘한 명 한 명 상대하다가는 끝이 없다.’
아무리 내 실력이 이들보다 강하다곤 해도 천 명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선천진기까지 끌어낸 후일 것이다.
그렇다면 최단 시간에 이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남궁세가의 사기를 드높일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적의 수뇌부를 잡는다.’
앞에서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살육하는 열 명의 무인보다는, 천 명의 무인들을 지휘하는 스무 명의 무인들을 잡는다면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이 훨씬 길어지리라.
‘간다!’
앞을 가로막는 자, 베어 버릴 뿐이다.
길을 방해하는 자, 쓰러뜨릴 뿐이다.
매화초개에 이은 매화종지, 매화정개에 이은 매화부석, 매화연혈에 이은 매화지변, 매화분향에 이은 매화난영, 매화표천에 이은 매화조수.
푸화학! 카캉! 스걱! 피피핏! 빠각!
나도 모르는 새에 강해지고 있는 초식들과 내공.
이곳, 남궁세가의 전장에서 풀어낸다.
지나가는 자리마다 비명성과 피가 터지며 하나의 혈로를 만들어 냈다.
순식간에 도착한 한 곳.
명령을 내리려 소리를 지르고 있는 한 무인의 곁으로 다가서 순식간에 검을 내쳤다.
카앙!
그것을 어떻게 본 것인지, 앞에서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살육하고 있던 열 명의 무인 중 한 무인이 나의 앞으로 다가서며 내 검을 막았다.
“감히!”
크게 소리치며 검을 내리치는 남자.
‘반 보 앞으로, 그리고 허리를 살짝 꺾는다.’
감이 알려 주는 대로 몸을 움직이자 남자의 검이 종이 한 장 차이로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기세를 올리고 힘을 보태 주는 매화작보의 보법에 전사를 담은 강력한 장천수.
퍼억!
배를 파고 들어가는 강력한 일 장에 남자의 목에 힘줄이 솟았다.
“커…….”
멈추지 않고 앞으로 다시 나서며 신류퇴 전추.
명치를 쳐 버리자 남자의 눈이 뒤집어졌다.
빙글 돌며 검을 내려쳤다.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