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화산천검 5권(2화)
1장 남궁수련(2)
창궁검 남궁대한.
흑철방에 단신으로 덤벼 백여 명이 넘는 방도들을 죽였을 정도로 급한 성격이다.
그런 사람이 화를 참고 있다가 나를 만난다면, 화를 참지 못해 검을 뽑고 생사결을 벌이자고 할 수도 있다.
“알겠습니다.”
또 하나 조심할 것이 생겼다.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오자 시비가 나를 보고 있었다.
“시중을 드는 시비 주제에 이렇게 주제넘게 계속해서 말을 해도 될까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가씨에 관련된 일인지라 못 본 척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말을 하겠습니다. 수련 아가씨를 찾으시는 것이라면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으슥한 곳에 작은 호수가 보일 것입니다. 수련 아가씨는 보통 그곳에서 외로움을 달래시곤 하니 아마 그곳으로 가면 아가씨를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도움을 주는 것이 주제를 모르는 일이라면 그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사고방식이지요. 감사합니다.”
대답하며 웃어 주자 시비가 포근하게 웃었다.
건물을 벗어나 으슥한 길을 따라 어제 밤늦게 남궁수련과 만났던 그 작은 호수에 도착했다.
시비의 말이 사실이었던 듯 남궁수련은 어제 마지막에 본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
다른 것이라면 어제의 애잔함과 슬픔은 없고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이라는 것이다.
대체 그 무표정한 얼굴 아래에 얼마나 커다란 슬픔을 감추고 있는지,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시금 떠오르는 미안함과 동정심을 가라앉히며 가까이 다가갔다.
어제와는 달리 내가 온 것을 느꼈는지 남궁수련이 고개를 돌렸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내가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어제 사과도 받았고, 용서도 한 것으로 아는데 어째서 이렇게 다시 온 것인지 모르겠네요.”
차가운 목소리.
다가가던 발걸음에 제동이 걸릴 뻔하였다.
하지만 다시 힘을 주어 발걸음을 옮겨 남궁수련의 앞에 섰다.
폭이 좁지만 멋스럽게 꾸며진 다리 위에 서서 호수에 담겨 있는 맑은 하늘을 쳐다보자 무척이나 운치가 있었다.
“물은 하나의 동경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죠. 보이는 것을 비추는 투명한 물은 제 마음까지 그곳에 담아 흘려버리는 듯해서 기분이 좋답니다.”
한동안 말이 없던 남궁수련이 꺼낸 말이다.
무심한 말투이지만 그 말의 내용만큼 무척이나 가슴에 사무쳤다.
한마디로 슬프고 괴로운 감정을 흘려보내려 이곳에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게나 힘드오?”
바보 같은 물음이지만 이것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바보 같은 질문이군요.”
남궁수련도 그렇게 느낀 것인지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이곳에서 힘들다고 하면 위로라도 해 주실 예정인가요?”
“평생 가슴에 묻어 두는 것보다는 남에게 한 마디 말이라도 해 보는 것이 후련하지 않소?”
“하루 동안, 얼마 겪어 보지도 못한 사람에게 이십 년 가까이 친하게 지낸 사람에게도 해 주지 않은 얘기를 하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다면 당신은 무척이나 어리다고 할 수 있겠군요.”
남궁수련의 핀잔에 얼굴을 붉혔다.
너무 주제넘게 나선 것인가 고민하는 사이 남궁수련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아버지가 절 받아들여 직계에게만 전해진다는 무공을 전해 주신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감사하고 있답니다. 힘들긴 하지만 그 은혜에 비하면 무척이나 작은 괴로움이지요. 지금까지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참아 내면 될 일이니 당신이 저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은 그저 이 일에 관해서 무관심하게 냉대하는 것뿐이랍니다.”
남궁수련의 말에 목 언저리까지 반박의 말이 올라왔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그녀를 양녀로 받아들인 이상, 남궁세가의 무공을 배우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을 커다란 은혜로 받아들여 자신의 감정조차 숨기고 무표정하게 살아가야 한다니.
그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당신이 이해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이런 것은 겪어 본 사람 외에는 모르는 일이거든요. 당신들이 저를 대신해 분노해 주는 것을 보면 저는 한숨밖에는 나오지 않는답니다. 그저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것 같아 부럽기는 하지만 말이지요. 그렇지만 남의 속사정을 모른 채로 그렇게 얘기하는 것은 장본인에게 상처가 될 수밖에 없어요. 그것은 잘 견디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뿐만 아니라 약해지고 무뎌지게 만들 뿐이거든요. 그렇기에 천 오라버니와 대한 장로님이 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아닙니까.”
남궁수련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 난 장본인이 아니다.
일의 장본인에게는 타인일 뿐이다.
나는 그 사람이 될 수 없고, 그 사람의 감정을 매우 조금밖에는 느낄 수 없으며, 그 사람의 속사정도 알 수 없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것조차도 그들에게는 사치일 수 있다.
그것이 고통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그것이 익숙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흔들어 놓는다.
그저 원망 외에는 드는 감정이 있을 리가 없다.
주제넘게 나선 것이 맞았다.
또다시 상처를 준 것인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남궁수련을 바라보자 남궁수련이 뭐가 우스운지 살짝 웃었다.
“뭐, 나이는 저보다 많지만 아직 어리신 것 같군요.”
울컥해 버렸다.
하지만 꾹 눌러 참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뭐, 그만큼 순수하다는 얘기도 될 수 있겠지요. 이런 깊은 감정까지 헤아리지 않을 정도로 순수하다는 말이지요.”
“이게 순수하다면 많은 어린아이들이 상처를 입을지도 모르오.”
“농담도 할 줄 아시네요? 그래도 이렇게 누군가에게 무언가 얘기라도 해 보니 답답함이 조금 풀리긴 하군요. 한마디 말이라도 하는 것이 후련하다는 말, 조금은 맞는 것 같네요.”
잠시 웃더니 남궁수련이 다시 말했다.
“잠시 같이 걸으시겠어요?”
거절할 이유가 없기에 승낙했다.
호수가 있는 작은 정원을 벗어나 길을 걸었다.
남녀가 같이 걸으면 무슨 말이라도 하는 것이 당연할 텐데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색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편안했다.
아무런 말이 없어도 천 마디 말을 주고받은 사람과 있는 양 마냥 편안했다.
하지만 그것도 으슥한 길을 걸을 때의 얘기다.
내성 안에 있는 밝은 길.
처음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 따위.
하지만 가면 갈수록 점점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그것도 호의적인 시선이 아닌 바에야.
잠시 걸음을 멈추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은 거의 다 남궁수련에게 향해 있었다.
몇몇 남자들의 질투에 찬 시선을 빼고는.
그들의 시선은 무척이나 거북했다.
보고 있는 나조차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받고 있는 사람은 어떠할까?
아무리 직계가 아니라고 한들, 분명히 가주의 양녀일 텐데도.
‘무언가 잘못되었다.’
잘못되었다.
정상적인 형태가 아니다.
정상적인 행동이 아니다.
정상적인 마음이 아니다.
정상적인 질투가 아니다.
하나같이 정상에서 벗어난, 비정상이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오대세가의 수좌라는 남궁세가의 직계가 가지는 위력이 컸던 것인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직계라는 그 핏줄이 아무리 힘이 있다 한들, 사람들의 시선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오만방자함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남궁세가가 구파일방이 아니라 협을 그렇게 중시하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예의와 도덕은 명문으로서 보통의 가문이나 협사들보다 뛰어나다.
그런데도 이런 행동.
무언가 잘못되지 않고서는, 남궁세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이상에는 이럴 리가 없었다.
‘남궁세가, 무슨 일이 있는 것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남궁세가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기에는 남궁세가가 가진 힘이 무척이나 컸다.
구파에 버금가는 거대한 세력.
그리고 남궁세가에는 우리 화산파의 장문인이신 검선과 비슷한 경지라고 전해지는 전대의 고수인 제왕검(帝王劍) 남궁무백(南宮武伯)이 있다.
그리고 현 남궁세가의 가주는, 남궁무백의 아들로서 어릴 적부터 제왕검 남궁무백에 절대 뒤처지지 않는 무재이자 신동이라고 불리며 기대를 받아 왔던 검왕(劍王) 남궁명헌(南宮明獻)이다.
계략과 지략 같은 것으로 함정에 빠뜨리기에는 남궁세가의 무력과 금력이 모두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것이 잘못된 것일까?’
혈천회의 공작이라고 보기에는 그렇다.
남궁세가의 본가와 가까운 창렴표국에서 혈천회의 놈들을 보기는 했지만 이곳 남궁세가에 어떤 공작을 펼쳤다는 어떠한 징조도 없었고 느낌도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몇 가지 안 된다.
‘가주의 행실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아니면 남궁수련의 평소 행실이 나쁜 것일까?’
직계의 사람들이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
그들도 모두 도리를 알고 도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므로 그런 쪽으로 보자면 행실로 따질 수가 있었다.
일단 남궁수련의 행실.
절대 잘못될 리가 없었다.
이렇게 쭉 감내하고 감내하며 고통을 겪으며 아무 데도 풀지 못하고 가두어 두고만 있는 여인이 대체 어떤 잘못을 했단 말인가?
남궁수련의 행실엔 절대 잘못된 것이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나머지 하나.
남궁세가의 가주, 검왕 남궁명헌.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검왕은 너무도 뛰어나다.’
예전부터 신동으로 불려 왔던 무의 천재.
게다가 그 정도 실력이면 오만방자할 수도 있건만 절대 그러지 않고 검박하고 절도 있게 생활해 온 남궁명헌이다.
어릴 적 생활이 그랬으니 나이가 들어 더욱 연륜이 쌓인 지금 절대 탈선을 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째서일까?’
고민하고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이곳에서의 나는 외부인.
아무리 남궁수련을 도와주려고 해도, 그녀를 이해하려고 해도 그저 외부인일 뿐이다.
그 안에 감추어진 속사정, 속마음은 절대로 알 수가 없다.
어느새 남궁수련은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조금 빠르게 걸어가자 남궁수련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남궁수련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 무표정한 것이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라면 그 누가 무표정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랴?
“괜찮소?”
나의 말에 남궁수련이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익숙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