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천검-64화 (64/175)

# 64

화산천검 3권(14화)

6장 우가장의 심처(2)

“…….”

우승빈의 짧은 말에 혈호의 눈썹이 꿈틀했다.

“난 고용주야. 아직 계약은 끝나지 않았어.”

“……알았다. 하지만 내 자존심도 있으니 너에게 경어는 쓰지 않으마.”

“마음대로 해.”

혈호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조심해라, 무언가 있다.”

“살수(殺手)들이겠지. 혈호, 막을 수 있나?”

“못 막는다면 내 명성이 아깝지.”

호조의 갈고리를 혈호가 혀로 핥으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싸움을 즐기는 자, 싸움을 원하는 자.’

낭인은 혈호의 적성에 정말 잘 맞는 것 같았다.

싸움에 임할 때마다 무척이나 즐거워한다.

목숨이 단 한 치의 차이로 사라지는 그 경계 속에서 혈호는 두려움과 무서움을 던져 버리고 싸움이라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뭐해? 어서 와.”

혈호가 막아 준다고는 하지만 우승빈은 너무나 당당했다.

‘아니, 당당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것이지.’

내가 보기엔 아슬아슬하다.

저런 상태라면 제대로 실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분노에 몸을 맡길 것 같았다.

“우승빈, 조금만 냉정하게…….”

“나도 잘 알고 있어. 화산파의 고귀한 선검수 나으리, 이건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옆에서 도와주기나 해.”

이를 갈며 말하는 우승빈에게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스윽∼

무언가 음습한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혈호의 호조가 빛살과도 같이 움직였다.

챙!

“호오∼ 재밌는 암기술이군.”

소리가 들린 것은 분명히 앞인데, 혈호의 호조가 암기를 막은 것은 분명 뒤쪽이었다.

“감이 아니었으면 당할 뻔했어.”

호조 사이에 낀 세침을 털어 버리며 혈호가 우리에게 말했다.

“너희는 신경 끄고 그냥 달려라. 내가 다 막아 줄 테니.”

“내공의 소모가 심각합니다.”

급속도로 혈호의 내공이 사라져 가는 것을 옆에서 느꼈다.

“이 정도는 별것 아니지. 옛날에 전쟁을 하던 것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니 신경 꺼라.”

혈호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모두들 내가 신경을 쓰지 않아도 잘하고 있다.

누군가의 조언이 필요한 경지는 한참 전에 지난 무인들인 것이다.

‘미숙한 것은 나였던가?’

지금은 앞의 일만 신경 쓸 때이다.

쓸데없는 상념은 저버려야 할 때.

앞의 적만을, 앞의 내막만을 바라봐야 할 때다.

“왔다.”

뒤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병장기 소리.

혈호의 외침과 함께 핏방울이 비산하는 것이 눈앞에 훤히 보였다.

정원을 지나 장주의 거처 앞.

상단전을 울리는 불길한 예감과 음습하게 문의 틈 사이로 빠져나오는 불길한 기운.

어두운 기운이 건물을 뒤덮고 있었다.

“후우∼ 자, 끝을 낼 시간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마주쳐 보자고.”

우승빈이 중얼거리곤 심호흡을 했다.

콰앙!

허리춤에서 검을 빼 들어 내리치자 문이 박살 나며 안의 정경이 보였다.

촛불조차 켜져 있지 않은 어두운 건물 안.

두 눈이 마치 불과 같이 반짝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역시 둘이구나. 그 남자가 하는 말이 맞았어. 쓸데없는 짓을 하는 두 녀석이 있다고.”

“……형?”

“잘 왔다, 승빈아.”

예상하지 못한 변수.

예상하지 못한 적.

‘우문혁…….’

어두운 휘장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우가장의 총관, 우문혁이었다.

“화산파의 선검수, 그리고 우가장의 골칫거리 우승빈. 다행히도 딱 두 명이서 알아챘구나. 찾으러 갈 수고를 덜었어.”

“형, 형이었어?”

“뭐가 나였다는 건지 모르겠구나, 승빈아.”

우문혁이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우승빈이 주먹을 꽉 쥐며 팔을 부르르 떨었다.

“난 형은 아닐 거라 믿었어. 난 다른 남자인 줄 알고…….”

“세상에 믿을 사람은 없어. 모두가 각자의 뜻을 품고 옆의 사람을 이용할 뿐이지. 그런 면에서 넌 너무 어리석어, 날 믿고 그렇게 따라 주었다는 것이 말이야.”

우승빈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니까, 형이 날 배신했다 이거지?”

“뭘 배신했다는 거지?”

“우가장을 저 뒤에서 혈호와 싸우고 있는 빌어먹을 놈들에게 팔아먹었다는 거냔 얘기야.”

“난 팔아먹지 않았어. 비상을 위한 잠시의 추락을 허락했을 뿐이지.”

“비상? 추락? 우가장에서 십 년을 넘게 총관을 해 온 사람으로서 그게 우가장을 위한 일이라는 얘기야?”

“그래, 총관으로서 그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오늘의 일을 봐, 철검파와의 싸움을 생각해 봐. 관인들은 우리보다 철검파를 위로 쳐. 민초들도 겉으로는 우가장을 위로 치지만 속으로는 철검파를 위로 치지. 분명히 철검파보다는 우리 우가장이 더 명성이 있었어. 단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우가장이 위였어. 그런데 지금을 봐.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렇게 성장했는데, 이렇게 올라왔는데 아직도 이 꼴이야. 너희 화산파, 구파!”

갑작스레 나한테 손가락질하는 우문혁.

그 눈은 무언가에 무척이나 분노하고 있었다.

“네놈들은 그 명성과 믿음이 어디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거냐?”

“갑자기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통(傳統)과 협(俠)이라고 생각한다.”

“전통과 협? 우습기 짝이 없군. 네놈들의 현실을 잘 생각해 봐라.”

우문혁의 말에 일 년 전의, 현재까지도 진행되고 있는 알력 싸움이 생각났다.

“전통은 이미 옛날 구닥다리로 전락한 지 오래요, 협은 이미 너희들끼리의 자존심 싸움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우문혁이 고함을 터뜨렸다.

“어째서 너희들은 그렇게 모두에게 고고하다고 칭송받고, 믿음을 받는 것이냐! 우리들은 이렇게 너희에게 떨어져 나온 뒤에도 열심히 노력했다. 너희의 어두운 치부를 보고, 그러지 말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어째서! 왜 너희들은 아직도 그렇게 칭송받는 것이냐, 우리들은 왜 이렇게 너희들에게 비교가 되는 것이냐!”

“문혁이 형, 그렇게 장황하게 말할 필요 없어. 그냥 한마디로 말해. 나 너희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어, 라고.”

우승빈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우문혁이 눈을 부릅떴다.

“그딴 감정으론 설명이 되지 않아!”

“똑같은 감정이야. 그렇게 자신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 모두가 누군가에겐 비교가 돼. 나는 최고가 아니야, 우리도 최고가 아니야. 내가 올라섰다고 생각하면 누군가는 더 높이 올라가 있고, 누군가가 추락했다고 생각해도 아직도 나보다 위인 경우가 수두룩해. 그런 어린애 같은 감정에 휩쓸려서 이런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면, 난 무척이나 화가 나. 지금이라도 아니라고 말해 봐. 우리 우가장의 사람들을, 내 가족들을 그딴 감정에 휩쓸려서 죽이려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라고, 우문혁!”

“이 녀석이…….”

우문혁이 분노에 몸을 부르르 떨더니 품속에서 섭선을 꺼냈다.

철컹!

우문혁이 섭선으로 옆의 벽을 치자 지붕을 뚫고 커다란 무언가가 난입했다.

“뭐지?”

“크르르…….”

갑작스레 난입한 커다란 덩치, 봉두난발의 두 괴인(怪人).

붉게 빛나는 두 눈, 커다란 입과 흘러내리는 침.

나보다 두 배는 될 법한 키, 또한 나보다 두 배는 커다란 덩치.

카라락!

두꺼운 손목과 발목에 채워져 있는 커다란 철환. 그리고 철환에 연결된 쇠사슬과 그 뒤에 매어져 있는 철추(鐵椎).

‘위험해.’

“가라.”

“크아아∼”

부우웅∼ 콰앙!

철추, 그 무게에 걸맞게 엄청난 파괴력이 있었다.

피하는 중에도 그 풍압(風壓)에 밀려 발이 어긋날 뻔했다.

“캬아아∼”

쿵! 쿵!

피한 것에 화가 난 듯 발을 동동 구르더니, 나에게 철추를 던졌던 괴인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한 명씩 맡자는 건가?”

우문혁은 냉정을 되찾은 듯 비웃는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 괴인은 나에게, 한 괴인은 우승빈에게 달려들었다.

“우승빈, 냉정히 대처해라.”

“너나 잘해, 선검수 나으리.”

말을 끝냄과 동시에 괴인의 주먹이 나의 청강검과 맞부딪쳤다.

카가각!

‘칼을…… 막아?’

분명 주먹과 검이 부딪쳤다.

하지만 들리는 것은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 느껴지는 것은 금강석을 검으로 내리친 듯한 엄청난 반탄력이다.

“이 녀석들은 금강불괴(金剛不壞)라도 되는 거냐, 우문혁?”

“그래, 승빈아. 회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물건이라 들었는데, 정말 대단하구나.”

‘회?’

또 회라는 얘기를 한다.

합동훈련 때에 금강쇄망도 그렇고, 지금의 이 괴인들도 그렇고.

회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기에, 대체 회는 어떤 단체이기에 이런 짓을 하는가.

‘일단은 이 괴인부터!’

눈앞의 적에 집중하자. 의문을 푸는 것은 나중에 우문혁을 잡고 난 후에.

“하앗!”

따앙!

기합을 내지르며 괴인의 주먹을 튕겨 냈다.

“우어어!”

괴인의 손을 튕겨 냄과 동시에 매화작보로 괴인의 앞으로 파고들었다.

‘화(化)는 무리다. 인(引)도 무리야. 이런!’

덩치에 맞지 않게 너무나 빠르다.

어느새 손을 회수했는지 강력한 풍압과 함께 주먹이 나의 앞에 다다라 있었다.

퍼어억!

“컥!”

바위가 몸을 짓누른 것 같다.

기를 앞으로 모아 충격을 줄였는데도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크윽.”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욱신대는 가슴을 왼손으로 부여잡고 괴인에게 검을 겨누었다.

“탐색은 끝이다. 덤벼라, 무뢰배.”

“크아아∼”

부웅∼ 카가가각!

날아오는 철추를 비스듬히 흘려 냈다.

‘큭!’

하지만 풍압을 버티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콰앙!

다행히 버텨 냈다.

철추를 흘려 내고 괴인에게 달려들었다.

스걱!

“크악∼!”

매화초개를 전개하자 괴인의 흑색 피부에 붉은색의 검상이 생겨났다.

일(一)자로 새겨진 검상.

터엉!

진각을 밟으며 위로 솟구쳤다.

매화검로 십일 초 매화표천.

스거거걱!

“크아아∼”

회오리가 휘몰아치듯 가슴팍에 생겨나는 검상들.

검상 하나하나에 피어나는 자색의 매화꽃이 붉은 피에 물들어 붉은색으로 변해 갔다.

매화검로 십사 초 매화난영.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어지러운 매화의 그림자.

“크어∼”

점점 커져 가는 괴인의 비명 소리.

‘마지막!’

매화검로 육 초 매화천락.

콰콰콰쾅!

턱!

땅으로 착지하며 검을 환집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크르르∼”

침을 흘리며 나에게 손을 뻗는 괴인.

느릿느릿한 손동작.

오른쪽으로 이 보 움직이며 피하자, 괴인의 손이 내가 있던 자리에서 멈췄다.

쿵!

괴인의 무릎이 꺾이고, 괴인의 눈이 감겼다.

온몸에 새겨져 있는 검상과 매화 무늬.

이것이 새로운 경지에 오른 매화검로의 진정한 위력이다.

오른쪽을 돌아보니 우승빈과 괴인이 아직도 싸우고 있었다.

우승빈과 싸우고 있는 괴인은 철추를 다루는 실력이 무척이나 뛰어났다. 아니면 나와 싸웠던 괴인이 실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내가 죽였거나.

아무튼 괴인이 무거운 철추를 자유자재로 휘두르자 우승빈이 맥을 못 추고 있었다.

‘음? 아니야.’

우승빈의 눈을 보면 절대 당황한 눈빛은 아니었다.

기회를 노리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저 기세라면 내가 도울 필요도 없지.’

남은 것은 우문혁.

우가장의 내막을 앞에서 지휘한 자. 그리고 회라는 곳을 알고 있는 우가장 안의 유일한 사람.

“칫, 너무 쉽게 끝났군. 강해 보였는데, 역시 선검수라 할지라도 화산파에게는 무린가?”

“우문혁.”

“덤벼라, 화산파의 졸개. 그 어리석은 위선과 독선을 부숴 주마.”

우문혁이 섭선을 꽉 쥐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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