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화산천검 2권(8화)
3장 죽림현사 모청수(3)
왕정치와의 싸움 중 깨달은 상단전의 응용.
염력.
지금 느껴지는 것은 그 염력의 연장선상에 있는 벽이었다.
지금 상태로서는 건드리지도 못할 정도로 높은 벽이다.
하지만 나빠진 상태도 아니고, 발전 가능성이 있는 만큼 기쁘게 받아들였다.
“후우∼”
운기를 마치고 눈을 떴다.
어느새 밤이 되었는지 창문 사이로 월광(月光)이 스며 들어왔다.
밝은 빛이 마치 요정이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모습.
그 빛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처음과 달리 괜찮은 편이었다.
내부가 많이 상해 있기는 하지만, 삼단전이 건재하다면 상관없다.
노력을 하기만 하면 내력은 복구할 수 있다.
복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문제이긴 하지만, 뭐, 상관없다.
문제라고 하면 그 복면인들, 비겸독지주 왕정치.
그런 자를 부리는 정체불명의 집단.
“어찌해야 되는지…….”
밝은 월광과 휘영청 빛나고 있는 보름달.
보름달이 마치 적월(赤月)과 같고, 월광이 살수의 비수와 같이 느껴진다.
마음속에 근심이 가득 찼기 때문일까?
모든 것이 불안하고, 심란했다.
“왕정치가 말한 정체불명의 집단. 마진천이 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그 살수. 어떻게, 어째서 이곳에서 나를 감시한 거지?”
첫 번째 의문.
“어째서 녹청산에 있던 것일까? 그리고 그들의 목적은?”
두 번째 의문.
“그리고 이 회담을 그들이 조작했다고 했고, 본산이 아니면 이쪽이 위험하다고 했었는데…… 어느 쪽이지?”
여러 의문이 끝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운데, 아무것도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시간만이 흘러갔다.
고민에 빠진 지 얼마나 지났을까?
짹짹짹!
“읏!”
어느새 밤이 지나가고 동이 텄는지 밝은 양광이 창문 사이로 들어왔다.
“거기, 움직여!”
“농땡이 피우지 마. 빨리빨리 일어나!”
시종과 하인들을 움직이라 재촉하는 총검문의 무인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검을 챙기고 문을 열자, 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연화가 보였다.
“아!”
눈을 위아래로 훑어 내 상태를 확인하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연화가 말을 걸어왔다.
“이제 괜찮은 거야?”
“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그래도 어제보다는 괜찮은 편이야.”
연화가 내 말에 빙긋 웃으니, 심란했던 마음이 상쾌해졌다.
“다행이다, 가자.”
연화가 내 손을 잡아끌며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가자 나에게 집중되는 시선.
놀랍다는 시선도 있고, 경계하는 시선도 있었다.
복잡한 시선들.
그 시선을 뚫고 지나가 자리에 앉았다.
연화가 옆자리에 앉고, 조식(早食)이 나왔다.
첫날만 조식을 먹은지라 잘 모르겠지만, 지금도 처음과 같은 포자 몇 개가 나온 것이, 아마도 아침은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다들 불만 없이 먹는 것이 적응해 있는 것 같았다.
나도 아무런 말없이 꾸역꾸역 포자를 입에 넣었다.
‘배고파…….’
그동안 밥을 먹지 않아서인지 포자를 입에 넣자 꼬르륵 소리가 나며 배가 심히 고파 왔다.
입에 쑤셔 넣듯이 포자를 넣자, 연화가 포자 두 개를 나의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눈으로 고맙다고 인사하곤 목이 메여 와 차를 마셨다.
꿀꺽! 꿀꺽!
식사를 마치자 사람들이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너무나 오랜만에 먹는 음식인지라 너무 게걸스럽게 먹었는지, 사람들의 시선이 마치 걸개(乞짵)를 보는 듯하였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자, 사람들의 시선이 거두어졌다.
식사를 끝내고 바깥으로 나가자, 먼저 식사를 마친 종남의 무인들과 두 장로님이 보였다.
영풍 장로와 문후 장로님.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몸은 괜찮은가?”
“네, 염려해 주신 덕분에 괜찮아졌습니다.”
“언제 깨어났지?”
“어제 아침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몸을 움직이는 데 이상은 없느냐?”
“괜찮지만, 무리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그래도 오늘은 어차피 지력의 훈련을 할 것이니 훈련에 참여하도록 하거라.”
“네.”
어깨를 툭툭 치고는 장로님들이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장로님들이 친 어깨를 쓰다듬자 온기가 느껴졌다.
‘그래, 고민할 필요 없다. 장로님들은 강해. 본산은 걱정할 필요 없다. 이쪽도 마찬가지고.’
걱정을 털어 냈을 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몸은 괜찮아?”
걱정스런 목소리.
연화의 목소리와는 달랐다.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작은 키의 소공자와 같은 인상, 탑희윤이 보였다.
“아…….”
하루의 친분.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이렇게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일까?
“아직은 괜찮지 않은 거야? 그럼 들어가서 쉬는 게 나을 텐데…….”
걱정스런 표정과 진심이 느껴지는 목소리.
기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냥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런 거야…….”
“응?”
탑희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람을 표했다.
“음? 왜 그래?”
“아니, 네가 쓰러지기 전만 해도 경어를 썼던 걸로 기억하는데…….”
탑희윤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짓곤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아니, 괜찮아, 괜찮아. 나도 이게 편하고, 그저 놀라서 그랬을 뿐이야…….”
‘그것보다도…….’
탑희윤이 당당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말이다.
“그러는 너야말로 성격이 변한 것 같은데?”
“아, 그건…….”
“왜 그런지 내가 설명해 줄까?”
탑희윤의 어깨에 턱하니 손을 얹으며 누군가가 말했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나와 동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신장과 덩치의 남자가 보였다.
현파였다.
“이 녀석 말이야, 연화 소저에게 남자가 그렇게 소심해서 어쩌냐고 좀 잔소리를 들었거든? 그 이후로 이렇게 변했어.”
탑희윤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이런 걸 보니 변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좋아하는 여자한테 그런 소리를 들었으니, 충격을 먹어도 엄청 먹었지. 한동안 말도 안 하고 침울해져 있더니, 어느 순간 당당하게 말을 하고 있더라고.”
씨익!
현파가 능글맞게 웃었다.
“아, 아…… 아…… 아니야!”
빼액 하고 소리를 지르는 탑희윤.
“얼굴을 그렇게 붉히면서 소리를 지르면 누가 믿어 주겠어?”
능글맞게 답변하자, 탑희윤이 더욱 고개를 붉혔다.
‘별로 변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데 자세히 보니 현파에게만 그런 것 같았다.
‘천적인가?’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자, 그만 떠들고, 집중해라!”
짝 하고 박수를 치며 영풍 장로가 말하자,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이는 탑희윤.
능글맞게 웃던 현파가 장난을 멈추었고, 다른 자들도 입을 다물고 영풍 장로를 쳐다보았다.
“오늘은 지력(智力)을 훈련한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있겠지?”
“예.”
“그럼 가거라. 훈련이 끝나면 돌아오는 것 잊지 말고 말이다.”
모두에게 당부하듯이 말하지만, 나를 보며 말하는 것이 나를 지적하는 것 같았다.
‘하이고야…….’
살짝 고개를 숙이자, 영풍 장로가 시선을 거두었다.
다른 자들을 따라 어딘가로 향하였다.
총검문의 동쪽 끝.
커다란 전각이 보였다.
현판에는 고풍스런 필체로 ‘修賢閣’이라 쓰여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풍겨 오는 냄새.
은은한 묵향(墨香)이었다.
많은 의자가 계단식으로 놓여 있고, 벽 위에는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고 쓰여 있는 족자가 있었다.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만큼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뜻.
그 족자의 앞에서 한 중년인이 먹을 갈고 있었다.
스윽∼ 스윽∼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검을 만들듯 중년인 또한 그러했다.
너무나 고고하고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아무리 살펴봐도 평범한 사람의 기인데 이런 위엄이라니…….
마진천과는 또 다른 압도(壓倒)였다.
나와 마찬가지인 듯 모두가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모두가 정해진 의자 위에 서자, 중년인이 먹을 가는 것을 그만두고 고개를 들었다.
소싯적에 매우 미남이었을 것 같은 청수한 얼굴이었다.
가슴까지 늘어뜨린 수염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앉거라.”
중년인의 말에 모두가 질서정연하게 자리에 앉았다.
절정에 이른 무인에게서 나오는 무형의 기세와 같은 느낌.
거부할 수 없는 압력이 깃들어 있었다.
“편하게 앉으라 했거늘, 어째서 그렇게 긴장하고 있느냐?”
부드럽게 웃자 기세가 씻은 듯 사라졌다.
가슴을 막고 있던 무언가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중년인을 쳐다보는 나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연화가 옆에서 말해 주었다.
“저분이 죽림현사 모청수 선생님이셔. 일주일 전에 이곳에 도착하셔서 우리를 가르쳐 주시는 학식 높은 유명한 분이시지.”
“아.”
나를 살려 준 구명지은의 은인인 의원으로 보이는 중년인을 불러 준 그분.
그렇다면 나에게는 또 다른 구명지은의 은인이다.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허허허’ 하고 웃고는 붓을 들었다.
붓에 적당히 먹물을 묻히고,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글을 써내려 간다.
종이를 들어 올리자 고아한 필체가 보였다.
마치 절세의 무공 비급을 보는 듯 사람을 빨아들이는 마력을 가진 필체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보겠느냐?”
모 선생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누군가가 손을 들어 올렸다.
“거기, 말해 보거라.”
첫 번째, 진법의 훈련 때에 서생과 같은 인상의 남자였다.
이름이 소우군(蘇旴君)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남송(南宋)의 철학가(哲學家)이자 교육가(敎育家), 주희(朱熹)의 독서삼도(讀書三到)입니다.”
“호오, 잘 알고 있구나. 역시 그동안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제대로야. 그렇다면 독서삼도의 삼도(三到)가 무엇인지 아느냐?”
“네. ‘구도(口到), 안도(眼到), 심도(心到)’입니다.”
“설명할 수 있겠느냐?”
소우군이 자부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예, 독서삼도. 독서의 법은 ‘구도, 안도, 심도’에 있다 함이니, 즉 입으로 다른 말을 아니하고, 눈으로는 딴 것을 보지 말고, 마음을 하나로 가다듬고 깊이 새기면 그 참뜻을 이해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잘 알고 있구나.”
모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잘 설명해 주었다만, 세부적으로 얘기해 주마. 구도란 글을 읽을 때에는 입으로 말을 하지 않고 글만 읽어야 함을 이르는 말이다. 안도란 글을 읽을 때에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 일을 뜻한다. 심도란 글 읽는 데만 열중하고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음을 이른다. 독서를 할 때의 세 가지 마음가짐이 바로 이것이다. 책을 읽을 때에 이 세 가지 도(到)를 잊지 말거라.”
세 가지 독서의 마음가짐, 독서삼도.
무공과 공통점이 있다.
특히 심도.
글 읽는 데만 열중하고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무공에만 집중하고, 그 하나만을 생각해야 한다.
집중력.
무공을 배울 때엔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그것도 고도의 집중력을.
만류귀원(萬流歸元)이라.
모든 것은 하나로 통하니, 무공이든 독서든 하나로 통하는 데가 있었다.
괜히 지력을 훈련시킨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무공을 배울 때의 초심, 마음가짐을 다시 깨우치게 하는 수업이었다.
“자, 그럼 이번엔 독서를 할 때에 좋은 세 여가가 무엇인지 아느냐?”
누군가가 손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