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
225화
* * *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오랜만이구나.”
제갈신기는 인사를 올리는 월평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두어 달 전보다 얼굴에 주름이 몇 개는 더 늘어난 듯했다. 머리카락도 흰머리가 절반은 차지한 듯 보였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나 보다.
“상황은 어떠하냐?”
“혼잡합니다. 소림사를 공격하다 물러선 노룡회 놈들을 추적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화산을 공격한 놈들도 사라졌고요. 정보 체계가 예전만 못한 데다, 놈들이 워낙 신출귀몰해서 추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맹의 정보 체계가 무너졌다 해도 그 많은 자들이 모습을 숨기기는 쉽지 않을 거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실제로 찾기가 쉽지 않으니…….”
“모습을 숨기기가 쉽지 않은 데도 찾기가 어렵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이유라 하시면…….”
의아함과 기대감으로 제갈신기를 보던 월평이 눈을 크게 떴다.
“혹…… 누군가가 그들을 가려주고 있다는 말씀이신지?”
“너도 알잖느냐? 무림맹에 얼마나 많은 간자가 숨어 있었는지.”
“설마 정보망의 눈이 간자에 의해 가려졌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것도 있겠지. 하지만 그보다는 놈들이 본 맹의 눈을 속기고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 많이 있다고 봐야겠지. 그것도 정파 쪽에.”
“아!”
월평은 뭔가를 깨닫고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노룡회 무사들의 거점이 정파의 세력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사실이 그렇다면 정보원들이 그들의 움직임을 놓치는 것도 이해 못 할 것이 없었다.
“하남은 물론이고, 산서와 하북의 남쪽에 있는 정파의 중소 문파들을 조사해봐라. 어딘가는 놈들의 근거지로 활용되고 있을 거다.”
“예, 어르신.”
“그리고 놈들은 분명 또 다른 대문파를 노릴 거다. 아무래도 멀리 있는 곳보다는 가까운 곳을 노리겠지. 그래야 맹에 혼란을 줄 수 있을 테니까.”
“가까운 곳의 대문파라면…….”
이번에 소림사와 화산파가 당했다. 종남파는 그 전에 당했고.
그렇다면 남은 곳은 많지 않다.
“……무당파와 제갈세가가 남았습니다만.”
“애들을 보내서 예의 주시해라. 나는 앞으로 나서서 움직이기가 힘드니 네가 수고 좀 해줘야겠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소인, 벌을 받더라도 어르신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겠습니다.”
월평의 눈이 오랜만에 옛날의 총명한 눈빛을 되찾았다.
* * *
마존령은 오대사령을 중심으로 지난 두어 달간 구슬땀을 흘렸다.
청운과 사도맹이 내놓은 무공에 신혈교를 무너뜨리고 보상으로 받은 무공까지.
얻은 무공은 많았지만 실제 수련을 할 수 있는 기간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모두 일류 고수 이상의 실력을 지닌 자들인 만큼 자질은 누구에게도 뒤질 마음이 없었다.
거기에 구슬땀을 흘리며 몸으로 때우니 실력이 늘 수밖에.
그런데 실력이 향상된 것은 마존령만이 아니었다.
혈황도 그동안 이를 갈며 절치부심하더니 나름대로 성과를 이루었다.
“이제 움직일 때가 되지 않았냐? 애들도 이제 제법 틀이 잡혔던데. 지금 실력 정도면 자기들 목숨 정도는 지킬 수 있을 거다.”
청운은 보고서에서 눈을 떼고 혈황을 바라보았다.
팔짱을 끼고 건너편에 앉아 있는데, 몸 전체에서 사람을 짓누르는 위압감이 은근히 느껴졌다.
그동안 구석에 처박혀서 수련에 열중하더니 헛수고만 하지는 않았나 보다.
그러니 몸이 근질거리기도 하겠지.
“안 그래도 마침 놈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그래? 어디냐?”
혈황의 눈에서 혈기가 번뜩였다.
말만 떨어지면 당장 달려갈 것 같은 표정이었다.
“호북 쪽입니다. 보고서의 내용대로라면 무당이나 제갈세가 쪽이 목표로 보입니다. 어쩌면 양쪽 다 노리는 것일 수도 있고요.”
“소림과 화산을 농락하더니 자신감이 붙었나 보군. 하긴 놈들이 어디 나타났다고 해도 이제는 무림맹이 바로 달려가기 힘들 테니…….”
소림을 전면적으로 공격할 줄 알고 지원대를 보냈는데 화산을 친 놈들이다.
무림맹에서도 곧바로 움직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나설까 합니다. 어차피 움직일 때도 되었고요.”
“정파를 도와주면 사도맹의 떨거지들이 좋아하지 않을 텐데?”
“정파를 돕는 게 아니라, 천황교의 손발을 자르려는 거지요. 하나하나 자르다 보면 몸뚱어리와 머리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청운의 말이 말장난이라는 걸 혈황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은 자신의 몸속에서 펄펄 끓는 혈기를 폭발시킬 곳이 필요할 뿐이다.
“언제 갈 거냐?”
“백야대주 어르신께서 오시면 출발하지요. 아마 한 시진 후면 도착하실 겁니다.”
* * *
무림맹 정보망에도 노룡회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이놈들! 드디어 기어 나왔구나.”
제갈신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마침내 소림과 화산에서 당한 것에 대해 설욕할 기회가 왔다. 소림에서 물러난 뒤 사라진 노룡회 놈들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는 즉시 방을 나서서 맹주를 찾아갔다.
“맹주, 노룡회 놈들이 제안에 나타났다 합니다. 즉시 무사들을 출동시켜서 놈들을 치고자 합니다. 승인을 해주시지요.”
제갈신우가 힘을 실어 말했지만, 양조생은 머뭇거렸다.
제안이라면 북서쪽, 삼문협으로 가는 길목이다. 무림맹에서 백오십 리 정도 떨어진 곳.
무림대회 전에 노룡회 놈들이 나타났던 곳이기도 하고.
그것만 보면 제대로 짚은 것이긴 한데, 얼마 전에도 놈들의 움직임만 보고 출동했다가 피해만 보지 않았던가 말이다.
“혹시 이번에도 그놈들이 성동격서의 병법을 쓰는 것 아니오?”
제갈신우는 이마를 찌푸리고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렇게 말이나 하며 보낼 시간이 없거늘…….
“멍청이가 아닌 이상 한번 쓴 병법을 연속으로 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더구나 놈들은 대놓고 모습을 드러냈던 전과 달리 은밀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상황이 전혀 다르지요.”
“흐음, 그래요?”
“이번 같은 경우는 시간이 승패를 좌우합니다. 멸사단과 정검대를 보내면 놈들을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알았소. 총군사를 믿고 승인하리다.”
“감사합니다, 맹주! 그럼 즉시 무사들을 보내겠습니다.”
맹주전을 나선 제갈신우는 즉시 명령을 내렸다.
“즉시 멸사대와 정검대를 소집시켜라. 놈들이 도주하기 전에 잡아야 한다. 흥! 이번만큼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니라.”
“예, 총군사!”
제갈민이 힘차게 대답하고 달려갔다.
제갈신기는 맹주의 명령으로 멸사대와 정검대가 출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눈을 감았다.
그는 두 시진 전 이청운으로부터 서신을 받았다.
노룡회가 무당과 제갈세가가 있는 남서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제안과는 방향부터가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제갈신우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해봐야 듣지도 않을 테니까.
‘형님은 이전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조급해져 있다. 그래서는 이길 수 없어.’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적어 이청운에게 보냈다.
이청운이 아무리 머리가 뛰어나도 무당과 제갈세가는 자신이 더 잘 안다.
그리고 아는 만큼 작전을 펼치기도 좋다.
적시에 서신이 도착한다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이청운 쪽을 믿는 수밖에.’
제갈신기는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림맹에는 자신을 싫어하는 자들도 있지만, 따르는 자들도 많았다.
그들이라면 한쪽으로 기운 무림맹의 기둥을 바로 세울 수 있으리라.
‘형님께는 죄송하지만, 더 이상 이대로 놔둘 수는 없다.’
* * *
무당(武當).
구대문파의 하나이며 천하제일검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문파다. 호북성 균현에 자리 잡은 정파의 기둥.
현 천하제일검과 차기 천하제일검을 배출한 검의 성지.
그 무당파가 보이는 산기슭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수증기처럼 피어오르는 하얀 안개 속에 서 있는 사내는 청운이었다.
“곧 시작하겠군.”
그의 붉은 입술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흘 전, 용마장원을 출발했다.
마존령 일백오십오 명, 백야 사십 명.
그리고 혈황과 백야대주, 백청청까지.
마존령은 무당으로, 백야대는 제갈세가로 갔다.
“흥! 곧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네놈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 혁련휘!
청운은 이를 지그시 악다문 채, 안개에 휩싸인 무당파의 도관을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서 무당산을 소리 없이 오르는 자들이 보였다.
그들의 움직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당파는 조용했다. 개미새끼 한 마리 움직이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한편, 적막감과 긴장감에 휩싸인 무당의 산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해검지조차 인적이 없었다.
빠르게 올라온 자들은 아무도 없는 해검지에 도착해서 잠시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혹시 놈들이 우리의 공격을 알고 있는 것 아닐까요?”
누군가가 말했다.
하지만 곧 다른 목소리에 묻혔다.
“알고 있었다면 이곳에 오르기 전에 숨어 있다가 공격했을 거다. 설령 알고 있다 해도 상관없지만. 어차피 오늘 무당산은 피로 뒤덮일 테니까. 흐흐흐흐,”
“가세. 오늘 말코들의 대가리를 백 개만 수집해야겠어.”
해검지를 꽉 채우며 모여든 자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동시에 옥허궁의 좌우측에서도 수백이 넘는 자들이 무당파의 담장을 뛰어넘었다.
하지만 잠시 후, 당황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아무도 없습니다.”
“도사 놈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당파를 습격한 노룡회 무사들은 당황해서 우왕좌왕했다. 잔뜩 모여 있을 거라 생각한 무당파 도인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순간, 청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왼손이 스르륵 올라갔다.
동시에 청운 주변에서 신호탄이 쏘아졌다.
퍼버버버벙!
하늘 위로 솟구친 신호탄은 폭음과 함께 붉고 푸른 연기를 피워냈다.
화려한 불꽃이 하늘을 물들일 때 옥허궁 뒤쪽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다.
“이놈들!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몰려왔다는 말이냐!”
“무당의 제자들을 당장 적도를 처단하라!”
우르르르릉!
천둥처럼 울려 퍼지는 호통이 사자후가 되어서 적의 고막을 후려쳤다.
도복을 입은 수백 명의 무당 제자들이 검을 빼들고 쏟아져 나왔다.
“쳐라! 놈들을 몰아내라!”
“무당파의 힘을 보여줘라!”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무당산을 쩌렁쩌렁 울렸다.
무당 제자들은 철저히 몇 명씩 짝을 이루어서 노룡회 무사들을 공격했다.
노룡회 무사들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함정이다! 모두 물러서라!”
“막아! 물러서지 말고 도사 놈들을 모두 베어라!”
“물러서! 빨리 물러서!”
“물러서는 놈은 내가 먼저 베겠다! 공격해!”
“함정이었더냐? 가소로운 놈들 한 놈도 살려두지 말고 죽여라!”
함정을 예상치 못했던 그들은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서 우왕좌왕했다.
각 부대를 이끌던 지휘관의 명령도 각기 달랐다.
하지만 곧 커다란 사자후가 무당산을 쩌렁쩌렁 울렸다.
“정신 차려라! 물러서지 마라! 오늘 무당을 지운다!”
그러자 노룡회 무사들도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시작했다.
노룡회의 무력은 무림맹을 궁지로 몰아넣을 정도로 강했다. 그들이 반격을 하자 금세 팽팽한 접전이 벌어졌다.
그나마 무당파 제자들이 사상진과 칠성진으로 진세를 이루며 싸웠기에 밀리지는 않았다.
“일대 제자들이 앞으로 나서라! 이대 제자들은 삼대 제자들과 함께 뒤로 받쳐라!”
“장로들은 적의 수괴들을 맡으시오!”
무당파에 남아 있던 장로들이 뒤에 있다가 앞으로 나섰다.
명령을 내린 인물은 한 팔이 없는 옥선진인(玉仙眞人)이었다.
차기 천하제일검. 무당칠자의 한 명인 옥선진인이 헐렁한 왼팔을 펄럭이며 오른손에 송문고검을 들고 우뚝 서서 전방을 노려보았다.
조금 전 사자후를 터트려서 노룡회 무사들을 일사분란하게 만든 자가 피식 조소를 지었다.
청운에 의해 가운데 다리가 잘린 광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