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
224화
무림맹 무사들은 공터에서 빠져나가 남쪽으로 달렸다.
그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퇴각해야만 하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나 이미 수십 명이 죽고 그보다 많은 이들이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일단 쏟아지는 암기는 피하고 봐야 했다.
절벽 위에 서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무림맹 무사들을 내려다보던 사내가 비릿하게 웃었다.
“후후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오십 명은 붙잡은 것 같군.”
“꽁지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도망가는 꼴을 보니 속이 다 시원하군요.”
“일진은 이미 시작했겠지?”
“그럴 겁니다. 이각 전에 올라갔으니까요.”
“그럼 우리도 올라가 볼까? 갈 때 가더라도 땡중들 대가리를 몇 개는 더 따가야지.”
몸을 돌리는 사내의 두 눈에서 붉은 혈광이 폭사되었다.
* * *
찌르르르.
풀벌레 소리가 가을밤을 적셨다.
도도하게 흐르는 달빛이 대지를 어루만질 때 한 사람이 산으로 오르는 길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처럼 짙은 흑의를 입은 그는 산책을 나온 사람처럼 천천히 산 위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에는 커다란 산문이 있었다.
산문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사람이 흑의를 입은 사내가 다가오자 묵직한 소리로 말했다.
“무량수불! 멈추시오. 이 밤에 화산에는 무슨 일로 오신 거요?”
중년 도인의 중저음이 어둠을 깨웠다.
흑의 장한은 고개를 살짝 들어서 산문 위에 매달린 현판을 보았다. 세 글자가 용사비등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화산파(華山派)]
그랬다. 이곳이 바로 오악검파의 수장이며 정도 구대문파의 하나인 대 화산파로 가는 입구였다.
피식.
흑의 장한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그 비릿한 미소에 중년 도인은 섬뜩함을 느끼고 공력을 끌어올렸다.
“시주, 묻지 않소이까? 밤이 늦었는데 화산에 용무가 있으신 거요?”
“용무? 물론 있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한 흑의 장한에게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피어났다.
중년 도인은 온몸에 전해지는 찌릿한 살기를 느끼고 등에 맨 검을 잡았다.
‘아무래도 좋은 뜻으로 온 자는 아닌 것 같군.’
오늘 따라 위에서 경비를 철저히 하라는 장문인의 명령이 내려왔다. 일대 제자인 자신이 직접 경비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앞에 있는 자가 바로 그 명령과 관련이 있는 자일지 몰랐다.
“무슨 용무요?”
그 말에 흑의 장한이 툭 던지듯 말했다.
“말코도사가 선자불래 내자불선이라는 말도 모르나?”
“뭐요?”
“쯧쯧쯧, 오늘 화산을 지우러 왔다는 말이다.”
“가, 감히!”
챙!
중년 도인이 노호성과 함께 검을 뽑았다.
“감히 대 화산파에 와서 뭐라? 미친놈이 확실하구나!”
“크크크, 세상이 미쳤는데 나라고 온전할까?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노부가 네놈들을 극락으로 보내줄 것이니.”
아무리 어둠에 가려졌다 하나 삼십대 정도로 보이는 자였다.
그런데 노부라고?
자신을 놀리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 들을 것도 없구나.”
중년 도인은 바닥을 차고 곧장 흑의 장한에게 나아가며 검을 뻗었다.
매화이십사수.
화산파가 자랑하는 검법이 어둠 속에서 검화를 수놓았다.
흑의 장한은 눈을 빛내더니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슈슈슉!
그의 손짓에 세 줄기 기운이 쏘아졌다.
중년 도인은 몸을 빙그르 돌리면서 검을 휘저었다.
터더더덩!
그가 펼친 검기와 장력이 부딪치며 맑은 소음이 울렸다.
찌이잉.
장력을 쳐낸 검신이 부르르 떨렸다.
중년 도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흑의 장한이 펼친 장력에는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힘이 담겨 있었다.
그 순간, 중년 도인 뒤쪽에 있던 화산파 제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저희가 상대하겠습니다, 사숙!”
“안 돼!”
중년 도인은 화들짝 놀라며 제자들을 말렸다. 그러나 한발 늦고 말았다.
슈슈슈슈슉!
흑의 장한 손에서 십여 줄기의 하얀빛을 띤 장력이 뻗어가더니 화산파 제자들을 덮쳤다.
퍼버버벅!
중년 도인의 두 눈에는 세상이 정지한 듯 모든 사물이 일순간 멈췄다. 잠시 후 세상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제자들이 비처럼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이놈! 용서하지 않겠다!”
비명 같은 기합과 함께 중년 도인이 흑의 장한을 덮쳤다.
흑의 장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바닥을 차며 쏘아졌다.
챙!
퍼버벅!
“크윽! 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풀썩.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며 중년 도인은 무릎을 꿇었다. 그 옆을 예의 흑의 장한이 스치듯이 지나가며 말했다.
“아! 미안하군. 자꾸 소림하고 헷갈려서 말이야.”
“…….”
“도가는 극락이 아니라 도솔천이지? 크크크.”
“우, 원시…….”
중년 도인은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그대로 고개를 떨궜다.
우지직!
콰콰쾅!
화산파 산문이 무너졌다. 아니 폭발하며 사방으로 건물의 잔해가 비산했다.
“쳐라!”
흑의 장한의 입에서 차가운 명령이 떨어졌다.
순간 뒤쪽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솟구치더니 산 위로 날아갔다.
곧, 화산파 경내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분노에 찬 외침,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화산파가 피로 물들었다.
* * *
청운은 급하게 전해진 보고서를 받아듣고 이마를 좁혔다.
“진짜 답이 없군.”
화산파에 적의 공격이 있을지 모른다는 걸 알렸다.
그랬는데도 화산파는 적을 물리치지 못하고 많은 피해를 본 채 산속 깊숙이 물러서야만 했다.
그나마도 다행인 것은, 평소보다 경계를 강화해서 상당수 제자들이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었다.
아마 그조차도 하지 않았다면 화산의 대지에 화산파 제자들의 시신이 수백 구는 더해졌을 것이다.
하루 뒤에는 소림사의 소식이 전해졌다. 소림으로 향하던 무림맹 지원대가 기습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이 잠깐 지체한 사이 소림사도 공격을 받았다.
그로 인해 소림사의 제자 이백여 명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그런데 적은 이각 정도 공격을 하다가 지원대가 산을 올라오는 걸 알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다고 했다.
설마 노룡회 놈들이 그렇게 물러설 줄 몰랐던 지원대는 그들의 꼬리만 멍하니 바라보아야만 했다고 한다.
“역시 소림 공격은 화산을 치기 위한 미끼였어.”
씁쓸했다.
적의 성동격서에 제대로 당한 셈이었다.
소림의 피해도 적지는 않았다. 지원대까지 삼백여 명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으니까.
하지만 화산파에 비하면 큰 피해라고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로 인해서 무림맹의 서쪽 방벽이나 다름없던 화산파의 힘이 현저히 악화되었지 않은가. 무림맹으로선 좌우 양팔 중 하나가 부러진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잘려나가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한편으로는 무림맹 지휘부의 좁은 시야에 짜증이 났다.
적이 나타났다 해서 그쪽만 바라보다니.
성동격서는 병법의 기본 중 기본이 아닌가 말이다.
‘천뇌 님이 총군사를 맡고 계셨다면 뭔가 대책을 마련해 놓고 움직이셨을 텐데…….’
그때 백야삼호가 말했다.
“대주께서 조금 전에 화산으로 달려가셨습니다.”
“예? 대주께서 화산에 가셨다고요?”
“예, 령주. 아무래도 흑야대 본대가 화산에 나타난 것 같습니다. 해서 직접 조사해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신혈교에 나타난 흑야대원들은 정예가 아니었다고 했다.
화산에 나타난 자들이 정말 흑야대 정예일 경우, 그 흔적을 역추적하면 놈들이 숨어 있는 거점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청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화산의 절경을 구경하러 가신 건 아니겠지?’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았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더 컸다.
흔적을 역추적 하는 일은 백야대 대원들만 보내도 되었다. 백야대주가 직접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화산에 가서 엉뚱한 일을 벌이시지만 않으면 괜찮은데…….’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후의 대책이다.
만약 백야가 적의 꼬리를 확실히 잡기만 한다면 역습을 가할 기회가 올 것이다.
“놈들은 계획이 성공했으니 분명 또 움직일 거요. 어떤 소식이든 전해지면 바로 알려주시오.”
“예, 령주.”
청운은 백야삼호가 나간 방문을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도 움직일 때가 되었어.’
* * *
제갈신기는 소림과 화산의 소식을 듣고 깊이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우우.”
답답했다.
이번 일로 인해 정파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심지어 무림맹으로 달려오던 정파의 무사들마저 현저히 줄어들었다.
모여들던 무사들 숫자가 한계에 이르기도 했고, 소림사와 화산파마저 당하자 무림맹에 의탁하기가 불안해진 것이다.
더구나 형님인 제갈신우는 기존의 군사들과 정보망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래서 새롭게 사람을 들여 측근으로 삼고 자신만의 정보망을 구축했다.
하지만 정보망이라는 게 어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던가.
그 바람에 무림맹의 정보망은 한쪽 눈과 귀가 막혀 있는 상태였다.
이번의 일도 그로 인한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제갈신기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동안은 형제간에 다툼으로 비칠 것 같아서 행동을 자제했다.
그러나 잘못되어 가고 있는 상황을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인월아, 들어와 봐라.”
그가 부르자 삼십대 장한이 안으로 들어왔다.
제갈신기의 친조카인 제갈인월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숙부님.”
“월평을 만나서 오늘 저녁 자시에 은밀히 나를 찾아오라고 해라.”
제갈인월의 눈이 흠칫 커졌다.
월평이라면 군사각의 이인자라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제갈신우의 조카이자 측근인 제갈민에게 밀려 삼인자가 되었지만.
그를 은밀하게 부른다는 건 단순히 얼굴이나 보자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예, 숙부.”
“그리고 내가 서신을 하나 써줄 테니 이청운에게 전해라.”
제갈인월의 표정이 굳어졌다.
“만에 하나 중간에 문제가 생기면 종남파에 전하는 서신이라고 둘러대라고 해라. 겉봉에는 수신인을 일청자로 해놓을 거니까.”
눈을 든 제갈인월이 머뭇거리다가 속마음을 내비쳤다.
“숙부님께서는 그자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당금 강호에서 모든 상황을 냉철한 판단력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이청운뿐이다.”
제갈신기가 단언하듯 말했다.
제갈인월도 이청운을 몇 번 봤다.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자신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제갈신기의 명령이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서신만 전하면 되는지요? 답은……?”
“답은 굳이 받아올 것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가 알아서 답을 줄 테니까.”
제갈인월은 모순된 제갈신기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순순히 답했다.
“알겠습니다, 숙부.”
* * *
“이런 빌어먹을! 놈들의 속임수에 넘어가다니…….”
제갈신우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숙였다.
자괴감과 함께 후회가 밀려왔다.
‘신기의 말에 조금만 귀를 기울였다면 역으로 놈들을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언제나 사촌동생인 제갈신기의 그늘에 가려져서 빛을 보지 못했었다. 나이가 많아 장로를 하고는 있지만, 오랜 세월 가슴에 맺힌 그 아픔을 누가 알아줄 건가.
그래서 이번에 제갈신기가 실각하고 자신이 무림맹 총군사가 되자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이 천뇌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걸.
그런데 자신의 성급한 결정 한 번으로 수백 명이 죽거나 다쳤다.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던 지인들의 눈빛이 얼마 전부터 차가워진 게 느껴졌다.
마치 ‘당신 때문이야! 당신 때문에 내 제자들이 죽었어!’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아니야! 아직은 아니야!”
제갈신우는 두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어떻게 올라온 자리인데, 이대로 포기를 해.”
이번 일로 큰 타격을 받았지만 무림맹은 여전히 건재했다. 화산파가 심하게 당하고 중소 방파 몇 곳이 쓸려나갔지만 아직 남은 게 많았다.
“다시 하는 거야. 이번에는 우리 무림맹이 놈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주면 돼!”
제갈신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두 눈을 빛내며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