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
210화
“비록 대결에서 밀렸다 하나, 부맹주님은 사도맹의 한쪽 다리와 같습니다! 한 번의 실수로 부맹주 자리를 내놓는 것은 과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용천관은 이마를 찌푸렸다.
“그럼 어쩌자는 것이냐?”
“저는 부맹주 자리에 욕심이 없습니다. 차라리 부맹주님은 그대로 놔두셔서 사도맹을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하시고, 저에게는 사도맹을 위하고, 신혈교를 처단할 수 있는 자리를 하나 마련해주시면 됩니다.”
용천관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생각해 보니 절묘한 계책이었다.
이청운을 부맹주로 삼는다면, 아무리 말을 먼저 했다 해도 반발하는 자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특히 맹천기를 따르던 자들은 더욱 강하게 반발할 것이다.
그런데 부맹주 자리에 놔두면 반발할 수 없다.
물론 맹천기도 이제는 함부로 자신에게 대들지 못할 것이고.
거기다 이청운에게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주면, 자신에게는 막강한 측근 조직이 하나 생기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발하지 못할 것이다.
‘기가 막히군. 혹시 그것까지 생각하고 말한 거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이청운이 누군가? 삼원진사를 한 희대의 천재 아닌가?
쓱, 둘러보니 맹천기를 따르던 자들의 일그러진 얼굴에도 희망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들도 끈 떨어진 신세가 되는 걸 원치 않는 것이다.
용천관은 그 모습을 보고 대소를 터트렸다.
“와하하하하! 참으로 가상한 말이로다! 좋다! 이청운에게는 따로 직위를 내릴 것이다! 그리고 부맹주 맹천기의 지위는 그대로 놔둘 것이다! 앞으로 사도맹을 위해 열심히 일하도록 하라!”
용천관의 입만 쳐다보고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아아아!”
“사도맹 만세! 맹주님 만세!”
사도맹 무인들이 열광했다.
용천관을 따르던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맹천기를 따르던 자들도 안도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십여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분열되어 있던 두 파벌의 사람들이 함께 환호성을 지른 것은.
“쯧쯧,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 버는 놈은 따로 있다더니.”
오직 한 사람, 혈황만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은지 곧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곧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고 이청운을 흘겨보았다.
‘저 정도로 강해졌다니. 과거의 힘을 다 찾기 전에는 이기기 힘들겠는데?’
* * *
비무가 끝난 후 용천관과 청운이 단둘이 마주앉았다.
용천관은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았던 부분을 청운이 단숨에 해결해주자 무척 만족했다.
“그래, 내가 무엇을 해주면 되겠느냐?”
“말씀드렸다시피 신혈교와 싸울 수 있는 조직을 만들고자 합니다.”
“신혈교는 본 맹과 무림맹이 함께 공격하고도 무너뜨리지 못했다. 일개 조직을 만들어서 가능하겠느냐?”
용천관의 밝았던 표정이 바로 어두워졌다.
그도 힘만 앞세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신혈교, 신비세력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자신의 몸으로 직접 느껴본 터였다.
청운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몇백 명으로 그들을 치는 건 어림도 없었다.
“저도 놈들이 강하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소수의 정예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적이 강해서 소수 정예가 필요하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큰 건물도 기둥을 하나하나 뽑아내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만드는 조직은 신혈교와 정면대결을 벌이지 않고, 철저하게 놈들의 약점을 파고들어서 거대한 힘을 약화시키는 일에 주력할 겁니다.”
“흐음…….”
“맹주님께서는 놈들의 기둥뿌리가 흔들릴 대로 흔들렸을 때, 사도맹의 전력을 이끌고 놈들을 일격에 쳐부수면 됩니다.”
용천관의 눈빛이 번뜩였다.
생각만 해도 멋진 일이었다. 그리만 된다면 무림맹 놈들의 코가 납작해질 것이다.
신혈교를 쳐부순 공도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고.
“네가 만들려는 조직, 어느 정도 인원이면 되겠느냐?”
“백 명에서 이백 명 정도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사도맹의 무사는 총 삼천여 명. 인원만 생각하면 그 정도는 크게 부담되지 않았다.
문제는 청운이 최소한 일류 이상의 고수들을 원한다는 점이다.
“네가 만족할 수 있는 무사들을 뽑는 일도 쉽지는 않을 거 같은데.”
청운이 그에 대해서도 해결책을 내놓았다.
“제가 황궁무고에서 얻은 상승 무공 중 몇 가지를 내놓을 겁니다.”
황궁무고에서 외운 무공구결 중 써먹지 못한 무공만 해도 수십 가지나 되었다.
“마도사파에 속한 기재, 고수는 누구나 응하게 해서 기준을 통과한 사람에게는 모든 무공을 열람하게 할 겁니다.”
정말 그리한다면 사문에, 가문에 웅크리고 있던 자들이 기어 나올 것이다.
다른 곳에 밀리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그거 좋은 방법이군. 좋다! 그럼 나도 본 맹의 무고에 있는 무공 몇 가지와, 중간 간부들이 신물로 삼을 보검보도를 내놓겠다.”
용천관을 만나고 나온 청운은 혈황과 함께 자신에게 주어진 방으로 갔다.
혈황은 청운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선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군. 하지만 놈들의 수뇌부를 제대로 치려면 네가 강해야 한다.”
“저도 압니다. 그래서… 구룡마경을 제 것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구룡마경이란 단어가 나오자 혈황이 흠칫했다.
“구룡마경이라……. 그거 괜찮은 생각이군. 지금의 너라면 마경의 마기를 이겨낼 수 있을 거다.”
혈마룡과 흑마룡, 청마룡의 구결과 기초를 익힌 청운이다. 그동안에는 공력이 부족해서 본격적으로 익힐 수 없었을 뿐.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공력도 충분하고, 무공에 대한 깨달음도 일 년 전과 비교하면 천지차이였다.
“그런데 혈황 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할 거냐니?”
“영호천의 몸으로 혈황 님의 능력을 끌어내려면 열심히 수련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수련…하고 있는데?”
“하신다고요? 에이, 제가 수련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야말로 무슨 말이냐? 나는 지금도 요상결을 운용하고 있느니라.”
혈황은 새로운 몸을 얻었지만 불안정한 상태였다. 서둘러 영혼과 몸을 일치시키고 내공을 회복해야 했다.
“이 녀석아,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이라 했다. 걷거나 머물 때, 앉아 있거나 누워 있을 때, 말하거나 침묵할 때,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을 때, 즉 일상생활의 모든 순간에도 수련을 한다는 뜻이다. 알지?”
“옳은 말씀입니다만, 그런데 왜 아직 힘을 반도 찾지 못한 겁니까?”
청운의 살짝 긁자, 혈황이 발끈했다.
안 그래도 답답한데, 누구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흥! 이놈아, 지금은 몸이 회복되지 않아서 네 녀석보다 못하지만, 조금만 기다려 봐라, 하늘 밖에 하늘이 있음을 보여줄 테니.”
청운은 속으로 웃었다.
혈황은 가끔 자극을 줘야 한다. 그래야 이 일 저 일 나서지 않고 한 가지 일에 집중한다.
‘혈황 님이 힘을 절반만 되찾아도 놈들을 상대하기 수월해질 텐데…….’
그게 청운이 혈황을 닦달하는 진짜 이유였다.
* * *
마존령 신설 소식이 사도맹 모든 무사들에게 전해졌다.
사람들은 마존령의 기준 조건을 듣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류고수 이상만 뽑는다고?
절정 고수와 초절정 고수 환영? 화경 고수 우대?
장난하나!
하지만 혜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눈을 번뜩였다.
심드렁하니 누워서 이야기를 듣던 자들도 벌떡벌떡 일어났다.
-마존령의 대원이 되면, 열두 가지 상승 무공을 마음대로 익힐 수 있음. 가문이나 사문에 전수 가능.
-황궁무고와 사도맹 무고의 비전무공 대량 방출!
-중간간부에게는 보검보도 지급.
중요한 것은 그 열두 가지 무공이 모두 이름 있는 고수들이 남긴 유명한 무공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보검보도도 맹주 용천관이 아끼는 보물이라는 소문이 났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마존령에 들어가기 위한 물밑 작업이 시작되었다.
사도맹 간부들은 어떡하든 자신들의 제자를 집어넣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개중 약삭빠른 자는 청운의 거처로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며칠이 지나자, 사도맹에 속한 문파의 주인들도 소식을 듣고 급히 형제나 제자들을 파견했다.
도대체 마도사파 어디에 기재, 고수들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마존령 인원 확보를 걱정했던 용천관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씩씩거리며 핏대를 세웠다.
사도맹에 파견하지 않고 숨겨놓았던 고수가 이리도 많았을 줄이야!
오죽하면 청운이 분노한 그를 말려야 했다.
결국 사도맹을 위해 좋은 일 아니냐며.
지원자에 대한 시험은 청운과 혈황이 맡았다.
지원자의 능력을 검증하고, 지원자에게 맞는 무공을 추천하기에는 두 사람이 직접 시험하는 게 가장 나았다.
지원자 중에는 이미 초절정 경지에 오른 자도 있었다. 개중에는 청운을 이겨서 마존령주가 되고자 하는 욕심을 품은 자도 있었다.
덕분에 청운은 자신의 무공을 더욱 가다듬을 수 있었고, 혈황도 훨씬 효과적으로 수련할 수 있었다.
의외의 소득이라면, 모든 지원자들이 청운과 혈황을 경외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 * *
청운이 마존령 무사들을 뽑고 있던 그때, 임시 무림맹이 된 화산파에 일단의 무리가 방문했다.
백청청이 백야대주와 함께 십여 명의 무인을 데리고 온 것이다.
화산파 산문을 지키고 있던 화산 제자들은 백청청을 알기에 앞을 막지 않았다.
무림맹 인사들이 모인 곳으로 안내된 백청청은 뜻밖의 소리에 눈을 치켜떴다.
“이 공자님을 쫓아냈다는 말씀이신가요?”
“소저, 쫒아내다니요? 제 발로 나갔소.”
일청자가 나서서 대답했다.
그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백청청을 보았다.
‘어린것이 사내 놈에게 빠져서는, 쯧쯧.’
다른 이들의 시선 역시 비슷했다.
청운이 사도맹에 들어갔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전부터 곱지 않게 봤지만, 이제는 적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청운과 가깝게 지내는 백청청을 반갑게 대할 리 없었다.
백야대주는 무림맹 장로들의 마음을 눈치채고 백청청에게 전음을 보냈다.
‘물러서는 게 좋겠다.’
얼굴을 붉히며 따지려던 백청청이 입을 닫았다.
백청청이 한발 물러서는 기미를 보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미파의 혜연 사태가 나섰다. 그녀는 불진을 한차례 휘저으며 못마땅하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소저는 이곳에 어쩐 일인가요? 백가장이 다시 무림에 나오는 것인가요?”
“흥.”
이미 마음이 상한 백청청은 대답 대신 콧방귀를 뀌었다.
그 모습에 모여 있던 무림 인사들이 발끈하며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허허, 버릇이 없군.”
“아무리 백가장 여식이라지만 무림 대선배에게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강서백가는 예의도 가르치지 않나 봅니다.”
수군거리며 말했지만 모두가 들으라는 듯 목소리가 컸다. 덕분에 백청청의 얼굴이 붉어졌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평소라면 보이지 않을 행동이었지만 청운 때문에 화를 참지 못한 것이다.
“할아버지, 그만 가요. 여기는 더 있을 곳이 못 되네요.”
“그러자꾸나.”
그제야 무림맹 인사들의 시선이 백야대주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부터 있었지?’
‘누구지? 백가장 사람인가?’
백청청이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강서백가의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노복인가? 무공을 익힌 흔적은 없는데.’
분명 백청청과 함께 전각으로 들어왔지만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자연체.
주변과 동화되어 기척을 느낄 수 없는 지고무쌍한 경지를 어느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백야대주는 몸을 돌리려다가 중앙에 앉아 있는 양조생에게 시선을 던졌다.
“오랜만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