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
206화
‘결국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아무리 적대관계라 해도 같은 목적을 위해 움직였으면 동료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동료가 당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다니.
청운은 정파의 위선적인 태도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래서 총군사가 책임을 지고 물러난 거군요.”
냉랭한 그의 말에 아미파의 장로 해인사태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능력이 안 되면 물러나야지.”
“천하에서 천뇌 제갈신기의 이름 앞에 놓일 책사가 몇 명이나 된답니까?”
“…….”
그 말에 대해서는 아무도 답을 못 했다.
“맹주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만나 뵙고 누가 잘못했는지 따져봐야겠습니다. 누구든 제국의 안녕에 해가 되는 일을 했다면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그때 누군가가 전각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미안한 이야기네만, 이제부터는 자네에게 그럴 권한이 없을 것 같네.”
고개를 돌리자, 제갈신우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무슨 말씀입니까?”
“조금 전, 황궁에서 연락이 왔네. 자네를 진무사 직위에서 파직했다는 황명이 떨어졌다고 하는군.”
청운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맑은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말인가.
‘황궁이 이상하다고 하더니, 결국 사단이 벌어졌구나.’
갑작스럽게 그런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은 황제의 안위에 이상이 생겼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남경에 갔을 때, 신비세력이 왕야들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정보가 있었거늘, 그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했어야 했다.
적절히 조치를 취해 놓았더라면 최소한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 아닌가 말이다.
‘대영반과 태감이 막지 못했다는 건 그분들 신상에도 이상이 생겼다는 거겠지.’
청운은 답답했지만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반면 무림맹의 장로와 간부들은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청운의 무공이 강하다는 걸 알기에 자신의 마음을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꼴좋군. 이젠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솔직히 그동안 어린 친구가 너무 설쳤지.”
“허어, 안타깝지만 어쩌겠나? 너무 의기소침해하지 말게. 또 기회가 오겠지.”
생각해주는 척하는 사람도 표정은 왠지 현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젊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청운을 걱정해주었다.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그래도 무림의 안위를 위해 뛰었는데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이 소협, 너무 실망하지 마시게. 곧 다시 중용될 수 있을 거네.”
청운이 제갈신우에게 물었다.
“장로님,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나 역시 소식만 전달받았네. 자세한 것은 자네가 알아봐야 할 것 같네.”
그동안 못마땅해도 표를 내지 않았던 제갈신우다. 진무사를 건드려 봐야 제갈세가에 좋을 일이 없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생각한 듯 싸늘한 느낌이 드는 말투였다.
청운도 그의 마음을 눈치채고 비수 같은 말을 날려주었다.
“제가 진무사 직위에서 파직되었다는 뜻은 황제의 안위에 이상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두어 사람이 그 말에서 심각성을 느끼고 표정이 변했다.
“무슨……?”
“허어,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구먼.”
하지만 여전히 꼬장꼬장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무림과 관은 예로부터 함께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았지만. 황궁이야 권력다툼을 하든 말든 우린 우리 길을 가면 된다.”
“직위에서 파직되니 별의별 생각을 다 하는구만.”
“글쎄요. 그렇게 편하게 생각할 일이 아닐 겁니다. 그 권력을 잡은 자들이 무림맹을 좋게 보고 있지 않다면.”
그래도 머리가 잘 돌아가는 제갈신우가 그 말뜻을 바로 깨닫고 눈살을 찌푸렸다.
청운이 한마디 더했다.
“그리고 왜 갑자기 그런 일이 생겼는지도 생각해 보셔야 할 겁니다. 아마 총군사님께 물어보시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 겁니다.”
청운은 차가운 눈으로 장로들을 둘러보고는 몸을 돌렸다.
전각을 빠져나가는 청운을 따라서 영호천이 몸을 돌리자 제갈신우가 급히 불렀다.
“영호 공자는 잠시 있게. 이번에 대단한 활약을 했다고 들었네. 하하하. 그래 몸은 어떤가?”
청운에게 대하던 것과 달리 미소를 지으며 살갑게 말을 붙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싸늘하기만 했다.
“의와 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분들과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머, 뭐라?”
제갈신우가 영호천의 반응에 놀라 눈을 치켜떴다. 함께 있던 장로들과 무림인사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보게 백호단주! 말이 지나치지 않은가?”
“어허, 진무사와 함께하더니 사람이 변했군. 쯧쯧쯧.”
그들은 당장 호통을 치며 영호천을 나무랐지만, 그들이 아는 영호천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혈황이 존대를 한 것도 일이 커져서 청운에게 피해가 갈까 봐 참은 것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 혈황의 성격대로 쌍욕이 날아갔을 것이다.
“후회하게 될 거요, 오늘 일을. 그때는 이미 피가 강이 되어 흐른 후가 되겠지만,”
냉랭히 말한 영호천은 청운을 따라붙었다.
“저, 저……!”
“어디서 감히!”
몇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지만, 그 이상의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청운만 해도 자신들이 상대하기 어려울 만큼 강한데, 영호천은 저번 싸움으로 무림맹 청년 무사들의 새로운 영웅이 되어 있었다.
자칫하면 젊은 무사들의 반발을 살 수 있으니 지나치게 몰아붙이기도 애매했다.
잠깐 망설인 사이 휑하니 사라지는 청운과 영호천을 보며 제갈신우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왠지 모르게 찜찜했다.
그도 머리라면 어느 가문에게도 뒤지지 않는 제갈세가의 장로다. 청운의 말뜻을 어느 정도는 알아들은 터였다.
차분히 생각해보니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자존심 때문에 더 붙잡고 물어보지 않은 것일 뿐.
‘황궁으로 사람을 보내서 정확한 상황을 알아봐야겠군.’
* * *
한편, 구중심처인 황궁은 폭풍전야와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오랑캐를 정벌하기 위해 원정을 나갔던 대장군과 오호대장군들이 돌아올 때만 해도 별일이야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황궁제일고수라는 대장군과 오호대장군들이 황실에 돌아오자마자 일부 관리들과 밀담을 했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정원 태감과 대영반은 동창과 금의위를 이용해서 그들을 주시했다.
뒤늦게 태감과 대영반이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대장군이 각계에 손을 쓴 후였다.
대장군은 눈 깜짝할 사이에 황제의 신변을 확보하고 황제로 하여금 명령을 내리게 했다.
황제는 참담한 마음임에도 왕자와 공주를 지키기 위해서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진무사 이청운을 모든 관직에서 파직하노라! 이청운을 잡아들이고! 휘하 금의위들을 모두 황궁으로 불러들여라! 반발할 시에는 역적으로 간주하겠노라!”
정원 태감과 대영반은 대장군의 전횡을 막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고관대작과 대장군이 먼저 기습적으로 밀어닥쳐서 압박하는 바람에, 정원 태감과 풍천호 대영반은 물론, 그들을 따르는 동창과 금의위의 고위 간부 역시 모두 잡혀서 뇌옥에 감금되었다.
대신들은 역모와 다름없는 사건에 대노했지만, 힘이 동반되지 않은 외침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더욱이 대장군 독단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많은 대신들이 대장군과 뜻을 함께했고, 남경의 이왕야가 뒤에 있었다.
반항하던 대신들도 대장군 파벌의 힘을 알고는 한발 물러섰다.
덕분에 황궁은 대장군 손에 넘어가고 말았고, 충신이랄 수 있는 많은 이들이 붙잡혀서 뇌옥에 감금되었다.
권력을 잡은 대장군은 이왕야를 등에 업고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황궁에 파견된 무림맹 사람 중 청운에게 호의적인 이들이 급히 전서구를 날려 무림맹에 청운의 진무사 파직 소식을 전했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하루가 지났을 때, 황궁에서 또 다른 명령이 떨어졌다.
“무림맹은 이청운을 잡아서 사지근맥을 자른 후 황궁의 사자에게 인도하라! 협조하지 않을 시 반역죄로 다스리겠노라!”
아마 그 명령이 먼저 전해졌다면 상황은 또 달라졌을 것이다.
* * *
청운은 회의장을 빠져 나오자마자 혈황에게 말했다.
“당장 여기를 떠나야 합니다.”
“그렇겠지. 관직을 몰수당했다면 역적이 되었을 거다. 어쩌면 이미 잡아들이라는 황명이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정파인들이 어떻게 나올지 눈에 선했다. 이대로 이곳에 있다가는 정파 무사들의 손에 붙잡혀서 황궁으로 압송될 수도 있었다.
혈황이 청운을 힐끔 보며 물었다.
“어디로 갈 생각이냐?”
“일단 정 소감에게 사람을 보내 왕부에서 나오라 하고, 차분히 생각해 봐야지요.”
“흠, 그러고 보니 정 소감도 문제군. 아참! 네 휘하 금의위들은 어찌할 생각이냐?”
몇 년간 청운을 보필하며 한솥밥을 먹은 이들이 각지에 있다. 청운을 주군으로 모신다고 맹세한 이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진 상태 아닌가. 일부는 자신과 함께하겠지만 모두는 아닐 것이다.
“제가 역적이 되었을 테니 떠나겠다는 자들도 있겠지요. 곧 그들도 알게 될 테니 어떤 쪽으로든 결정을 내리겠지요.”
착잡한 심정이었다. 너무 갑자기 뒤통수를 맞는 바람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너무 답답했다.
청운은 일단 오룡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청운이 들어서자, 청운과 인연이 있는 세 사람이 반갑게 청운을 맞이했다. 그러나 얼굴 한쪽에 그늘이 져 있는 걸 보니 자신에 관한 소식을 들은 것 같았다.
“여기들 계셨군요. 제 소식을 들으셨는지요?”
“어서 오게. 방금 소식을 접했네.”
강호풍이 나서서 대답했다.
뒤이어 팽도천이 얼굴 가득 억지웃음을 지으며 호방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무언가 잘못되었겠지. 내가 작은 아버님께 전서를 날려서 알아보겠네.”
“이 형.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남궁룡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청운이 남궁룡을 보며 말했다.
“일단 이곳을 떠날 생각이오.”
“차라리 남궁세가로 가는 건 어떻습니까?”
“패를 끼치고 싶지 않네. 마음만 받지.”
“남궁세가가 싫으면 우리 팽가로 오게. 황실에서도 팽가를 홀대하지 못하니 말이야.”
“마음만 받겠네. 그보다 호풍 형님, 부탁이 있습니다.”
“말하게.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네.”
강호풍은 다른 둘과 달리 청운을 직접적으로 보호하기 어려웠다. 문파에서의 입지가 남궁룡이나 팽도천에 비해서 약했다.
그동안 청운이 자신들에게 베푼 은혜를 생각한다면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잘된 일이었다.
청운은 그런 강호풍의 마음을 아는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은밀하게 전해야 할 말이 있는데, 제가 끈이 떨어져서 부탁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 일이라면 걱정 말게.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전하겠네.”
“파견 나온 금의위나 동창이 알아서는 안 됩니다.”
“걱정 말게. 여의치 않으면 내 직접 움직이겠네.”
“감사합니다. 그럼 형님만 믿겠습니다.”
청운은 전음으로 무언가 말을 전했다.
남궁룡이나 팽도천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법이다. 문제가 되었을 경우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강호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리 전하지.”
청운은 세 사람과 작별을 고한 후 혈황과 함께 곧장 화산파를 나섰다.
산문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두 사람의 뒤를 몇몇 흑의 인영이 은밀하게 따라붙었다.
청운은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서쪽으로 길을 잡았다.
‘흥! 어디 열심히 따라와 봐라, 그 길이 지옥으로 가는 길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