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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마존-205화 (205/257)

# 205

205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들어선 이유는 무언가 찜찜한 마음 때문이었다.

무림맹이 시간을 맞춰 협곡에 진입만 했어도 신혈교의 힘이 분산되어서 사도맹이 그렇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무림맹도 큰 피해를 입었지만, 사도맹에 비하면 큰 피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양 맹이 유기적으로 상호 협조를 했다면 최소한 이렇게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무림맹이 그리 행동한 이유를 알아야 했다.

청운은 제갈신기를 만나기 전에 먼저 은밀히 움직이며 무림맹 인사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런데 몇몇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노룡회 놈들이 뒤만 치지 않았어도 지금쯤 무림맹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을 텐데.”

“천일영이 문제야. 그놈이 설마 배신자였을 줄 누가 알았겠나.”

“그보다는 사도맹을 구원하기 위해 떠난 오백 무인만 있었어도 우리가 이겼을지 모른다고 하던데.”

“하긴, 그 빌어먹을 마도사파 놈들을 뭐 하러 구하겠다고 정예를 보냈단 말인가?”

“나도 불만이야. 진무사라는 애송이 놈이 권력으로 맹주님과 천뇌 님을 압박했다고 하던데.”

“쯧쯧. 뭐 어쨌든 이번에 천뇌 님도 책임을 지고 물러났으니…….”

“꼴 보기 싫은 진무사 놈도 실종되었다고 하는 것을 봐서는 죽었을 것이네.”

“다행이군. 그동안 어린놈 명령을 듣느라 아니꼬웠는데 잘됐어.”

청운은 무림맹 무사들의 이야기를 엿들으며 안색을 굳혔다.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무림을 구할 영웅처럼 이야기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고마움보다는 원망 섞인 목소리로 자신을 성토하고 있었다.

‘사람이 곤궁해지면 진심이 나온다고 하더니….’

제갈신기도 곤란한 상황에 처한 듯했다.

총군사에서 물러났다고 하지 않던가.

‘아무래도 총군사를 뵙는 게 좋겠군.’

청운은 냉소를 지으며 제갈신기를 찾아가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때였다.

‘응?’

누군가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럴 수가. 내 은신술이 들켰다고? 아니지, 이 거리까지 접근하는 동안 몰랐다고?’

과거의 그가 아니다.

이미 공력이 융화되어서 전보다 배는 강해졌다. 그럼에도 십 장 안으로 접근할 때까지 몰랐다는 건 그만큼 상대가 강하다는 말이었다.

청운은 공력을 운용하며 천천히 돌아섰다.

그러고는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호천이 어둠 속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

그에게 막 전음을 보내려고 하는 순간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청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응? 영호천이 그렇게 강했던가?’

청운은 영호천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엄청난 잠력이 영호천의 몸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그때 들리는 전음.

-따라오너라.

목소리는 영호천인데 혈황의 말투였다.

혈황이 영호천의 몸속에 들어가 있는 듯했다.

-예.

혈황은 청운에게 한마디 말만 남기고 훌쩍 날아올랐다. 청운은 뒤처질세라 혈황의 뒤를 따라서 몸을 날렸다.

* * *

청운과 혈황은 연화봉 뒤쪽에 있는 능선에 올랐다.

기암절벽이 즐비한 화산의 모습은 웅장했다. 한밤이라 그런지 더 장엄하게 느껴졌다.

영호천의 모습을 하고 있는 혈황은 한동안 주변 풍경을 살폈다.

회한이 가득한 그의 두 눈동자는 만감이 교차했다.

청운은 혈황 곁에서 그가 입을 열기를 말없이 기다렸다. 그러기를 한참. 열릴 것 같지 않던 혈황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청운아.”

“예. 말씀하세요.”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지 모르지만 오늘따라 혈황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달랐다.

혈황은 떨리는 음성으로 청운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새로운 몸을 찾은 것 같구나.”

“네? 무슨 말씀이세요?”

“영호천의 몸을 내가 차지한 것 같다.”

청운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워하다가 와락 인상을 구기더니 혈황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예에? 아니 혈황 님이 영호천의 몸을 차지하면 영호천은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그렇게 몸을 빼앗으려고 영호천에게 공을 들이신 거예요? 당장 돌려주세요.”

“후우, 그게 아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당장 영호 공자 몸에서 나오세요.”

아무리 새로운 몸을 가지고 싶다고 해도 제자나 마찬가지인 아이의 몸을 빼앗는 것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방방 뛰며 화를 내는 청운에게 혈황은 한숨을 내쉬며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래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그제야 청운도 사정을 알고 눈이 커졌다.

“그럼 영호 공자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란 말인가요?”

“육신만 살았지, 정신은 이미 모든 활동이 정지된 상태였다. 아마 놔두면 육신마저도 서서히 죽어갔겠지. 그래서 내가 들어간 거다.”

청운은 의심의 눈초리를 버리지 않고 혈황을 살펴보았다.

혈황이 정대한 성격이 아니라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본인이 살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빼앗으려 한 적도 있었지 않은가.

하지만 영호천의 몸을 차지할 경우 자칫하면 어떤 위험이 있는지 혈황도 잘 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도 몸에 들어갔다면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봐야 했다.

그런데 영호천의 몸을 차지한 혈황이 조금 불안정해 보였다. 지금도 살짝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제대로 들어앉긴 한 거예요?”

“그게 좀 문제가 있다. 영호천과 나의 혼을 겨우 일치시키긴 했는데, 내가 지닌 혈기의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시간이 흐르면 되찾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자신이 지닌 능력을 절반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그것도 하늘의 뜻일지 모르니까요. 지금은 영혼을 들어앉힐 육신이 생긴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하십시오.”

“그건 그렇지.”

청운은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이리 될 줄 알고 있었지 않은가. 혈황 님이 영호천에게 집착할 때부터.’

청운은 한동안 말없이 주변 산세로 시선을 돌렸다가 혈황에게 말했다.

“그보다 현 상황은 아시죠?”

“그래. 놈들이 작정을 했더구나.”

“싸움에서 이긴 자들이 열흘이 흘렀는데도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냥 있을 자들이 아닌데요.”

“어차피 그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다시 움직이기 위해 전열을 정비하려면 시간이 걸릴 거다.”

혈황의 말이 옳았다.

더구나 그들은 이제 혈룡단을 더 만들 수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남은 것이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무한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주머니 속 송곳은 언제든 튀어나오게 되어 있다. 그동안 힘을 모으면서 기다려라.”

“저도 그럴 생각입니다. 그런데 무림맹 상황을 보니 쉽지 않을 것 같군요.”

“언제는 네가 무림맹 믿고 싸웠냐?”

“하하, 그건 그렇죠.”

청운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혈황의 말대로 신비세력과 싸울 때 혼자인 경우가 많았다. 무림맹이 나서서 자신을 도와준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소규모 싸움일 때의 이야기였다. 수백, 수천 명을 상대로 싸우려면 무림맹의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아쉽고 씁쓸했다.

그런데 청운을 보던 혈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네 녀석 조금 달라진 것 같구나.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

“아. 하하하”

청운은 자신이 세 가지 기운을 융화시켰다는 말을 웃음으로 대신했다. 대충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청운은 의심의 눈초리로 보던 혈황은 청운의 몸을 요리조리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느낌이 다른데? 이것 봐라? 흠……. 호오… 이 녀석 보게!”

혈황의 두 눈이 커지며 화들짝 놀랐다. 그 반응에 청운이 살며시 입을 열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하하.”

“어쩌다 보니? 아! 어쩌다 보니 나를 만났고, 어쩌다 보니 권력을 손에 쥐었고, 이제는 어쩌다 보니 무공마저 대성했다고?”

“예. 그게 어떻게 된 것이냐면…….”

청운은 협곡으로 떨어져서 혈룡단을 복용한 부분부터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갔다. 설명이 이어질수록 혈황의 안색이 시시각각 변했다. 감탄사를 연발하던 혈황이 대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아주 천운을 타고 났구나. 네 녀석은 필시 전생에서 열 여자를 구했을 것이다. 크하하하.”

혈황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좋아했다. 새로운 몸을 얻은 것도 기쁜데 거기에 제자인 청운이 자신의 무공을 대성했지 않은가.

“열 여자를 구한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요?”

“그럼! 한 여자를 구하는 것도 얼마나 힘든데…….”

뭔가 조금 이상했지만, 백청청을 생각하면 그 말도 그럴듯하게 들렸다.

혹시… 혈황 님이 총각? 왜?

묻지는 않았다. 남자의 자존심은 건드리는 법이 아니다.

혈황은 청운이 뭘 의심하는지도 모르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은 그 정도면 되었다. 이제는 사람을 모을 방법을 찾아보자.”

“생각해 두신 거라도 있습니까?”

“저 아래 있는 놈들도 꾀고, 저기 멀리 웅크리고 있는 사파 놈들도 꼬시고, 더 먼 거리에 있는 백가 놈들도 불러야지. 더군다나 너에게는 황실의 힘이 있지 않으냐? 흐흐흐.”

쉬운 길 나두고 어려운 길을 갈 필요는 없었다.

혈황의 말대로만 된다면 신비세력을 쓸어버리는 것도 시간문제일 듯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무림맹은 자신을 싫어한다. 사도맹은 어떤 상황인지조차 아직 모르고.

백가장은 고집만 세서 밖으로 나올지 알 수가 없고, 황궁에서도 수상한 바람이 불고 있다 하지 않던가.

‘후우, 일단 눈앞의 일부터 처리하자.’

* * *

청운은 아침이 되자 무림맹 인사들을 만났다.

그런데 분위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안 좋았다.

소 닭 보듯 하는 정도는 그나마 나았다. 몇몇 사람은 대놓고 못마땅한 표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게다가 뭘 물어보려 해도 말을 돌리며 피하기 일쑤였다.

‘설마 이 정도까지 나를 배척할 줄이야. 왜지?’

청운은 날선 무림맹 인사들의 반응에 당황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의문도 들었다.

거부반응이 지나치다는 것은 그만큼 감추고자 하는 것도 많은 법이었다.

그 와중에 일청자가 날선 목소리로 청운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신혈교 무리를 공격하자는 그대의 말에 정예를 움직였다가 놈들에게 뒤통수를 맞고 본거지마저 빼앗겼소. 어찌하실 생각인 것이오?”

청운도 사람이다 보니 짜증이 났다.

“그걸 왜 저에게 따집니까? 그렇게 따지면 신혈교 하나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는 힘으로 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뭐라?”

“분명 신비세력의 힘 중에는 신혈교 외에도 노룡회가 있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들의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고도 했고요? 제가 일일이 나서서 막아줘야만 합니까?”

일청자의 얼굴이 벌게졌다.

하지만 청운의 말이 사실이니 대놓고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대신 다른 장로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진무사, 말뜻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너무 심한 말 아닌가?”

“솔직히 직접적인 공격보다 방어에 치중하면서 시간을 두고 상대했으면 총단이 당하는 일은 없었을 거요.”

“그러게 무림의 일은 무림이 알아서 처리했어야 했습니다. 총군사는 괜히 관을 끌어 들여서…….”

청운의 표정이 냉랭해졌다.

“그 전에 하나 묻지요. 무림맹과 사도맹은 같은 시간에 양쪽 협곡으로 진입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왜 늦게 진입하신 겁니까?”

두어 사람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일청자가 오히려 큰 소리로 청운을 나무랐다.

“어허! 그걸 몰라서 묻나? 그럼 우리가 마도사파와 똑같이 움직였어야 한단 말인가?”

청운은 그 말에서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사도맹이 피해를 볼 것을 알고도 그리했단 말입니까?”

“흥! 사도 놈들이 몇 더 죽은 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청운은 싸늘한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몇 사람은 그나마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듯 씁쓸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다수가 당연하다는 듯 눈에 힘을 주고 청운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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