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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마존-173화 (173/257)

# 173

173화

하루의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갈 수는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제갈신우의 마음을 풀어주지 않으면 앞으로가 피곤해질 수 있었다.

청운은 제갈신우의 손을 보았다. 마침 그의 손에는 순백의 부채가 살랑거리고 있었다. 마치 제갈공명이라도 된 듯한 모습이었다.

청운은 미소를 지으며 제갈신우에게 말했다.

“장로님, 그런데 그 백우선은 무엇입니까? 못 보던 건데 예사롭지 않군요.”

“응? 아! 이것 말인가? 허허, 자네 보는 눈이 있군. 이 백우선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제갈신우는 한 손에 쥐고 있는 백우선을 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어린아이와 같은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청운의 얼굴에도 제갈신우와 조금은 다른 의미의 미소가 걸렸다.

‘생각보다 순진하시군.’

* * *

청운은 자소궁을 나와서 곧장 백가장이 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백영상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장로님, 어찌 되었습니까?”

“어서 오게. 방금 화산의 의약당 당주가 다녀갔네.”

안겸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부상자가 있다며 화산파에 도움을 청했었다.

청운은 경과가 궁금했다. 백영상이 그의 마음을 아는지 말을 했다.

“내상이 심하다고 하더군. 다행히 청청이가 먹인 영약이 도움이 되었다고 하네.”

“다행입니다. 이번에도 백가장과 백 소저에게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래, 그렇긴 한데 이자가 깨어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하네.”

그리되면 곤란하다. 당장 내일 증거를 보여준다고 했거늘.

“무언가 다른 방법은 없다고 합니까?”

“요상결을 이용해서 직접 치료하는 방법도 있긴 한데…….”

“아! 그래요? 그럼 요상결에 대해 정통한 분을 찾아봐야겠군요.”

스스로 몸을 치료하는 운기요상과 타인을 치료하는 요상결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운기요상법을 안다 해서 함부로 환자의 몸에 손을 댔다가는 오히려 위험을 자초할 수 있었다.

다행히 화산에는 각 문파의 고수들이 몰려와 있으니 그중 요상결을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백영상도 청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네. 그리고 아무래도 사람이 더 필요할 것 같아서 백가장에 천산비응을 날렸네.”

호위무사 중 절반 가까이가 부상을 당했다.

게다가 여차하면 정사 간에 전쟁이 벌어질 판이었다.

백청청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호위가 더 필요했다.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천산비응은 뭡니까? 혹시 호위무사 하나가 들고 다니던 매?”

“백야에서만 사용하는 귀한 녀석인데, 이번에 무슨 일이 생기면 띄우라고 백야대주께서 주신 특별한 녀석이지.”

천사비응은 백가장에 속한 백야의 비전 전서응이었다.

천산비응은 전서구와 달리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난다. 그 속도 역시 전서구에 비해서 몇 배나 빠른 영물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몰랐다.

백영상 장로가 띄운 천산비응이 가져올 여파를.

* * *

위남은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청룡단이 위남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사령회 고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청룡단은 영마장으로 이동하며 가는 길에 마주치는 자들을 하나둘 처리했다.

영마장에 가까워졌을 때 사령회의 고수들이 앞을 막아섰다.

다행이라면 그들에 비해서 청룡단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문제라면 상대보다 인원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었고.

챙!

서걱!

잿빛 무복에 붉은 망토를 두른 사내의 목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전진하시오!”

남궁룡은 이를 악물며 외쳤다.

적의 숫자가 많았지만 상관없었다. 자신들은 무림맹 최정예인 청룡단이었다.

남궁룡은 질풍신룡이라는 별호답게 선두에 서서 단원들을 지휘했다.

소림의 광표가 비호처럼 봉을 휘두르며 붉은 물결을 갈랐다. 무당의 비천신룡 장추룡이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태청검법(太淸劍法)을 사방에 뿌렸다. 그의 검기가 닿는 곳마다 피를 뿌리며 혈랑대가 쓰러졌다.

남궁룡의 뒤에서 누군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백색의 도복을 입은 그는 청성파의 창천백룡 강호풍이었다.

“길을 열어라!”

촤자자자장!

파바바바방!

수십 줄기의 검기가 쏟아졌다.

청성파의 비전인 청운적하검(靑雲赤霞劍)이 번개처럼 혈랑대를 강타했다.

청룡단에는 오룡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오봉 중 삼봉이 그 뒤를 이었고 구대문파와 거대세가의 제자들이 비전을 쏟아부었다.

청룡단을 막아섰던 혈랑대 수십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혈랑대가 밀리는 그 순간 붉은 물결을 뚫고 푸른색 옷을 입은 무리가 파고들었다.

수라대.

사령회가 자랑하는 수라대 무인들이 두 자루 곡도를 꺼내 들고 청룡단에게 부딪쳤다.

차자자장!

실력은 혈랑대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강했지만 수라대는 혈랑대와 조금 달랐다. 그들은 상처를 입으면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 바람에 청룡단이 주춤거렸다.

쓰러지는 쪽은 여전히 사령회 고수들이 많았지만 청룡단에도 부상자와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단원들의 비명을 들은 남궁룡은 선두에서 안쪽으로 물러나며 전체를 살폈다.

지금 상태로는 전진을 할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전진은커녕 포위당한 상태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장 형! 일단 물러서지요! 뒤쪽을 뚫어주십시오! 호풍 형님도 장 형을 도와서 퇴로를 열어주세요!”

남궁룡의 외침에 장추룡과 강호풍이 조원들과 뒤쪽으로 이동했다.

비어버린 자리를 메우기 위해서 남궁룡이 명령을 내렸다.

“칠조와 팔조가 이조와 삼조의 자리를 메워라!”

좌우에서 날개 역할을 하던 이조와 삼조가 뒤로 물러섰다. 사조와 오조가 남았지만, 그들만으로 좌우를 막을 수 없었다. 빈자리는 중앙에 있던 칠조와 팔조가 메웠다.

이십 명씩 십조로 구성된 청룡단은 훈련된 대로 빠르게 움직였다.

남궁룡은 연달아 명령을 내렸다.

“부상자를 안으로 물려라! 구조와 십조는 각조를 지원하라!”

결원이 생긴 부분은 구조와 십조의 조원들이 나뉘어서 메꿨다.

강호풍과 장추룡이 힘을 합쳐서 포위망을 뚫자 금세 막혔던 퇴로가 열렸다.

남궁룡은 때를 놓치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천천히 물러선다! 일조와 오조는 정신 차려라! 후미는 그대들이 막아야 한다. 육조는 부상자를 챙겨라!”

청룡단이 손발을 맞춘 시간은 짧았지만 위기에 처하자 그 효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빠져나가는 청룡단을 그냥 보내줄 혈랑대와 수라대가 아니었다.

“놈들이 물러선다! 이대로 보낼 수 없다!”

“혈랑대는 모두 돌격하라!”

그들은 처음보다 더욱 강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목숨을 도외시한 수라대의 공격에 벌써 셋이 목숨을 잃고 일곱이 크게 상처를 입었다. 이대로 놔두면 피해가 누적될 것이다.

그나마 광표가 후방에 남아서 선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대로 물러선다! 일조도 물러서라!”

소리를 내지른 남궁룡은 적이 있는 뒤쪽으로 달리며 검을 수평으로 늘어트렸다.

이를 악문 그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보여주마! 남궁의 검을!”

파밧!

남궁룡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한 마리 청룡이 비상하는 것 같았다. 늘어트렸던 검이 스르르 움직였다.

몸의 회전에 맞춰서 검이 잔상을 만들어냈다.

허공 높이 솟구친 남궁룡의 몸이 굉음과 함께 우뚝 멈춰 섰다.

팡!

공기가 터졌다.

갑작스런 굉음에, 뒤로 물러서던 청룡단원들도 추격하던 혈랑대와 수라대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강한 빛이 남궁룡의 검에서 폭사되었다.

화악!

남궁룡의 검에서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 같은 검기가 흘러나왔다. 남궁룡의 검이 사방을 점하고 위로 솟구친 뒤 그대로 일직선으로 그어졌다.

쫘악!

순간 도도하게 흐르던 검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거친 풍랑을 만난 물줄기가 사방을 휘저었다.

남궁룡의 검을 알아본 수라대주가 이를 악물며 외쳤다.

“피해!”

콰콰콰쾅!

검기 하나가 곧장 땅으로 떨어졌다. 검은 점점 몸집을 키우더니 뭉쳐 있던 수라대 머리 위를 덮쳤다.

콰앙!

“크아악!”

“으윽!”

단 일격에 다섯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남궁룡은 여전히 허공에 떠 있었고 그의 검세는 아직 멈추지 않은 상태였다.

차라라랑!

검이 춤을 추듯 남궁룡의 몸 주위를 흐르더니 그대로 쏟아졌다.

슈슈슈슈슉!

콰과과과쾅!

수십 줄기의 검기가 적을 강타했다. 아니 검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검강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남궁세가의 제왕검형이다!”

그 소리에 모두가 두 눈을 부릅떴다.

제왕검형.

남궁세가의 가주만이 익힐 수 있다는 남궁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청룡단 단원들이 환호했다.

언제까지나 허공에 떠 있을 것 같은 남궁룡이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섰다. 오연하게 서서 수라대와 혈랑대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와라! 끝장을 보자면 얼마든지 상대해주마!”

주춤주춤, 기세에서 눌린 사령회 무사들이 물러섰다.

남궁룡과 청룡단 역시 더 싸우지 않고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첫 싸움은 그렇게 끝이 났지만, 전쟁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위남을 빠져나온 남궁룡은 생각보다 많은 단원들이 부상당한 걸 알고 후퇴를 결정했다.

“일단 후퇴해서 전열을 정비해야겠습니다.”

“위남을 이대로 내주잔 말인가?”

강호풍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적이 숫자가 많았지만, 실력은 자신들이 뛰어나기에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궁룡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예, 형님. 부상자가 많아서, 정면으로 싸우는 것은 무리입니다. 전술을 바꿔야겠습니다. 더 피해가 발생하면 본대가 오기 전에 적의 증원군이 먼저 올 경우 낭패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알겠네. 단주님 명령인데 따라야지. 그보다 언제 배운 거야?”

강호풍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다른 이들도 궁금한지 귀를 쫑긋 세웠다.

“제왕검형요?”

“그래, 형님 때문에 배울 수 없다고 매번 투덜거렸잖은가.”

제왕검형은 가주와 후계자만이 배울 수 있는 비전검법이다.

남궁룡이 두각을 보이기 전에 이미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정해져 있었다. 남궁룡이 아무리 오룡의 일원이라 할지라도 배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전 남궁룡이 제왕검형을 펼쳤지 않은가.

“몰래 배웠습니다.”

“뭐?”

“미쳤어!”

“아, 아미타불. 아니 어쩌자고 그런 짓을.”

옆에 있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다. 모두들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기사멸조(欺師滅祖)? 기군망상(欺君罔上)?

아무튼 그 사실이 알려지면 큰일 난다.

남궁룡은 걱정 가득한 그들의 눈빛이 재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농입니다. 농! 가주나 소가주가 아니어도 특별한 조건이 되면 제왕검형을 배울 수 있습니다.”

“후우, 간 떨어질 뻔했잖느냐!”

“허, 남궁 형. 아주 고약한 취미가 있구려.”

“아미타불. 시주, 그러다가 지옥에 떨어집니다.”

다소 무거워질 분위기가 남궁룡에 의해서 조금은 밝아졌다.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함께한 동료 이십여 명이 죽거나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남궁룡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자, 어서 움직이지요.”

강호풍이 물었다.

“어디까지 후퇴할 생각인가?”

“저 뒤쪽에 있는 언덕까지 후퇴하지요.”

남궁룡이 말한 곳까지의 거리는 오 리 정도 되었다. 지대가 높아서 위남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시야를 확보할 생각인가?”

“예, 여차하면 위남을 버리고 도주해야 하니까요.”

남궁룡이 농담처럼 말했지만, 결코 농담만이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래선지 모두들 표정들이 무거웠다.

그때 강호풍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런데 주작단은 어디로 간 거야? 이곳에서 우리를 기다렸으면 놈들에게 밀리지 않았을 텐데.”

남궁룡도 이마를 찌푸렸다.

“글쎄요.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아쉬움이 많았다.

‘반나절만 빨리 왔거나 주작단만 있었어도 희생이 적었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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