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134화
분명히 어제와 오늘 아침 회의에서 삼문협 문제가 거론됐었다. 하지만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회의가 끝났었다.
‘그렇게 알았는데… 무림맹 단독으로 처리한다고?’
아무래도 자신을 배제하겠다는 뜻인 듯했다.
‘이 사람들이 또 악수를 두는군.’
무림맹 인사들은 지난번 금검문 사태를 겪었으면서도 아직 청운과 금의위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
‘금검문은 이권 때문에 욕심을 냈다지만, 삼문협은 욕심낼 문제가 아닌데?’
청운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굳이 힘든 일을 단독으로 처리하겠다는 저의가 궁금했다.
‘설마?’
청운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정 소감의 의견을 물었다.
“혹, 어떻게 된 일인지 아는 것 있는가?”
“니에, 어젯밤 몇몇 무림맹 인사들이 단독으로 처리하자며 강하게 주장했다고 합니다. 정확한 내용은 알아보는 중입니다.”
청운은 어떤 멍청한 인사가 이리 결정했는지 궁금했다.
“그들이 누군지 아나?”
“니에, 파악은 했습니다. 따로 그들을 감시하기 위해서 물밑 작업 중이옵니다.”
청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황궁이라면 동창과 금의위가 나서서 움직이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곳은 무림맹이기에 함부로 정보를 모으겠다고 움직일 수 없었다.
더구나 수많은 사람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무림맹에도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과 하급 무사는 넘쳤다. 환관 특유의 친화력과 눈이 돌아갈 만한 은자라면 그들을 통해서 기본적인 정보를 알아내는 일이 어려운 건 아니었다.
중요한 정보가 아닌 일상적인 일거수일투족이라면 입을 열 자는 많았다.
“정보를 얻으려면 적지 않은 자금이 필요할 거네. 웅천 백호에게 말해둘 테니 은자를 받아가게.”
“니에, 그렇지 않아도 가져온 자금이 부족했사옵니다.”
“금의위나 동창이나 쥐꼬리만큼 나오는 건 비슷하지. 앞으로 자금 걱정은 하지 말게. 내가 책임질 것이니.”
“대인, 감사하옵니다.”
정 소감은 활짝 웃음을 지었다.
청운의 말대로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이 얼마 되지 않았다. 황도를 벗어나면 뇌물을 받든 스스로 벌어서 부족한 자금을 충당해야 한다.
그런데 청운 덕분에 자금 걱정을 덜게 되었다.
다음 날,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이른 아침부터 수백에 달하는 무림맹 무사들이 무림맹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서문을 통해서 빠져나가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던 청운은 눈을 빛냈다.
-혈황 님, 어찌 될까요?
[네 녀석 생각대로 되겠지.]
-한 번으로는 부족했나 봅니다.
[원래 정파 놈들은 여러 번 당해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멍청한 놈들이지. 누가 ‘정의를 위해서’라는 말만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거든. 그래도 이번에는 신중을 기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서두르는군.]
청운이 느끼는 이상함을 혈황도 느끼고 있었다. 귀찮을 정도로 이것저것 따지는 위인들이 제대로 된 회의도 거치지 않고 저렇게 몰려가다니.
[따라갈 거냐?]
-뭐 하러요? 나를 배제시키려고 작정한 사람들인데, 따라갔다가 무슨 소리 들으라고요?
[하긴… 네 녀석이 따라온 걸 알면 가만있지 않을 거다.]
청운은 그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그래도 별일은 없어야 할 텐데…….’
동원된 무사들이 모두 자신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다. 개중에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의협을 위해 일하겠다며 무림맹에 몸담은 사람도 많았다.
아무 죄도 없는 그들이 희생되는 것은 그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이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것밖에 없었다.
* * *
다음 날 오후, 삼문협으로 길게 이어진 협곡을 따라서 일단의 무사들이 빠르게 달려갔다.
전날 무림맹에서 출발한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삼문협 인근을 샅샅이 수색해서 산채를 하나 발견했다.
그곳이 진짜 산적들의 거처인지, 아니면 포로들의 말대로 신비세력의 비밀 거점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 있었다. 그들이 산적이건 신비세력이건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것이다.
어차피 둘 다 때려잡아야 할 자들이니까.
협곡을 달리던 무림맹 무인들이 협곡을 거의 빠져나왔을 때였다.
우르르르릉!
슈슈슈슉.
협곡의 양쪽에서 느닷없이 바위가 굴러떨어지고, 화살이 날아들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무림맹 무사들이 대경해서 소리쳤다.
“적의 기습이다! 대응하라!”
“바위를 엄폐물로 삼아라!”
기습에 당황할 만도 하건만 무림맹 무사들은 평소 훈련대로 대처했다.
그렇다고 피해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바위를 피하고 화살을 쳐 내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콰광! 터덩!
제멋대로 튕긴 바위에 맞아서 부상당하는 자가 속출했다.
슈슉! 퍽!
“크윽! 빌어먹을!”
화살에 맞은 자도 간간이 나왔다. 개중에는 심장과 머리에 화살을 맞아서 즉사하는 자도 있었다.
그때 누군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기름이다! 모두 화공에 대비하라!”
놈들이 굴린 것은 바위만이 아니었다. 기름이 담긴 항아리를 바위와 함께 던졌다.
슈슈슈슝.
협곡의 절벽 위쪽에서 일단의 무리가 나타나더니 불화살을 쏘았다.
“이 비겁한 놈들이……!”
“불화살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옆으로 튕겨내라!”
누군가 악에 바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무사들은 장풍을 쏘며 불화살을 공중에서 꺼트리거나 멀리 튕겨냈다.
“제마대는 우측을! 항마대는 좌측 협곡 위를 정리하라!”
커다란 외침에 무사들이 몸을 날렸다.
절벽은 높이가 이십여 장에 달했지만, 무림맹 무사들에게 그 정도 높이는 별문제가 안 되었다.
무사들이 빠르게 절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절벽을 오르면서도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과 암기를 쳐 냈다.
그 과정에서 무사 십여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결국 수십 명이 절벽 위에 올라섰다.
“모두 제거하라!”
제마대와 항마대는 절벽 위에 있는 자들을 공격했다.
절벽 위에서 벌어진 싸움이 점점 격해질 때쯤 협곡의 안쪽에서 다시 불화살이 쏟아졌다.
슈슈슈슉!
수백 발의 화살이었다. 이대로 둔다면 기름에 젖은 협곡이 불바다가 될 것이다.
그런데 사내가 하나 앞으로 나서더니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
그의 검에서부터 시작된 일진광풍이 허공을 가득 메운 불화살을 휘감았다.
후두두둑.
불화살은 힘을 잃고 멀리 날아갔다.
화공이 막히자 불화살이 날아온 방향에서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놈들을 쳐라!”
그 직후 정체불명의 무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절벽 위에서 떨어진 바위로 인해 전열이 흐트러진 무림맹 무사들을 덮쳤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무림맹 무사들이 약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특히 토벌대를 이끌고 있는 사람은 무당칠자 중 한 명인 옥선진인(玉仙眞人)이었다.
옥선진인은 화경에 든 인물로 무당파에서 파견한 절대고수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몰려드는 괴인들을 향해서 검을 휘둘렀다. 그의 사숙인 검왕에 비하면 조금 부족한 실력이었다. 그러나 차기 검왕으로 거론되는 인물답게 주변을 압도했다.
선두에서 옥선진인이 뛰어난 실력을 보이자 습격했던 무리들이 기세를 잃었다.
결국 누군가의 명령이 협곡을 가득 메웠다.
“안 되겠다. 퇴각하라!”
주춤거리던 정체불명의 무사들이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옥선진인은 그들을 그냥 보내줄 마음이 없었다.
“이놈들! 올 때는 네놈들 맘대로지만 갈 때는 마음대로 갈 수 없다! 영웅대는 나를 따라 놈들을 추격하라!”
옥선진인이 추격 명령을 내렸다.
영웅대 칠십여 명이 도망치는 자들의 뒤를 바짝 추격했다.
남은 이들은 서둘러 부상자를 살피며 주변을 경계했다.
옥선진인과 영웅대가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협곡의 하늘 위에 불덩어리가 떠올랐다. 그 불덩어리는 타오르는 항아리였다. 높이 날아오른 불타는 항아리 수십 개가 맹렬한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경계하던 무사들이 소리치며 불덩어리를 막아섰다.
“막아! 부상자들을 기름이 없는 곳으로 이동시켜!”
퍼버벙!
화살과 달리 항아리가 허공에서 깨지며 사방으로 불붙은 기름이 쏟아졌다.
만일 옥선진인이 있었다면 허공으로 퍼져서 떨어지는 불붙은 기름을 무공으로 제압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옥선진인은 이미 자리를 뜬 후였다. 덕분에 남겨진 자들이 불길에 휩싸였다.
붉은 화마가 협곡을 집어삼켰다.
검은 연기가 협곡을 가득 메우고 하늘로 솟구쳤다.
사방에서 고성이 오갔다.
“물러서라! 흙을 뿌려서 불길을 열어라!”
“어서 부상자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
동료를 버릴 수는 없었다. 살길은 불길을 잡는 방법밖에 없었다.
사방이 붉은 화염으로 뒤덮였지만 무림맹 무사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불길을 잡아가던 무림맹 무사들은 협곡 위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소리에 이를 악물었다.
채재재쟁!
“놈들의 증원군이다! 물러서지 마라!”
절벽 위에서 다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적의 지원무사들이 몰려온 듯했다.
하지만 무림맹 무사들은 물러설 수가 없었다.
“이곳을 포기하면 아래 있는 동료들이 위험하다! 목숨으로 자리를 사수하라!”
위를 내주면 좁은 곳에 갇힌 동료들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지금도 불길에 갇혀서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만일 이곳을 내주면 놈들은 다시 불붙은 기름 항아리를 던질 게 뻔했다.
“막아!”
“물러서지 마라!”
고성이 오가며 동료를 독려했다. 그러나 공격하는 자들의 실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위기의 순간. 무림맹 무사들이 절망에 몸부림칠 때 희망의 소리가 들렸다.
“갈!”
우르르르릉!
거대한 사자후가 협곡을 뒤덮었다.
도망치는 자들을 추격하러 떠났던 옥선진인이 돌아온 것이다.
옥선진인의 눈에 불길 속의 부하들이 보였다. 그는 적의 유인책에 빠져서 부하들을 돌보지 못한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타아아앗!”
기합성을 내지른 그는 불길을 향해서 검을 휘둘렀다.
검에서 뻗어나간 기운이 휘돌면서 불길을 빨아들였다.
그 순간, 검기의 회오리에 빨려든 불길이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그로부터 일각 후.
삐이익!
협곡 어딘가에서 피리 소리가 들렸다. 신호인 듯, 무림맹 무사들과 싸우던 자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놈들이 도망친다!”
옥선진인은 당장 놈들을 추격해서 죽이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추격하지 않았다.
옥선진인은 불이 꺼지면서 드러난 참상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명령을 내렸다.
“부상자를 추스르고 뒤로 물러선다!”
기름에 젖고 불길에 휩싸인 곳에 더 있을 수는 없었다. 놈들이 다시 공격하기 전에 부상자를 수습하고 물러나서 전열을 가다듬어야 했다.
무림맹 무사들은 일사불란하게 후퇴했다.
무림맹 무사들이 뒤로 물러서며 왔던 길을 되돌아갈 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커다란 덩치의 광존과 나풀거리는 나삼을 입은 요희였다.
둘은 협곡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의 나무 그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요희가 아래를 내려다보기 위해 상체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어때? 내 말대로 옥선진인만 유인하면 나머지 것들은 쉽다니까.”
“네년의 말대로 되었군.”
광존은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 요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흐응, 좋으면 좋다고 말하라니까.”
“끄응, 이번만큼은 인정하마. 한동안 당하기만 했는데 덕분에 체면을 세웠다.”
광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항상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광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를 아는 이들이 보았다면 기겁할 일이었다. 그만큼 광존은 기분이 좋았다.
요즘 무림맹이 자신들의 거점을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어디서 꼬리를 잡았는지 모르지만, 하나둘 습격을 받아서 곤란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요희가 계략을 펼쳐서 삼문협으로 무림맹을 끌어들였다.
미리 함정을 파고 기다렸는데 뜻하지 않은 대어가 걸려든 셈이었다.
광존은 물러나는 무림맹을 보며 말했다.
“그놈이 없는 게 아쉽군.”
“진무사? 큰일 날 소리 하네. 놈이 이곳에 있었으면 우리의 계획이 실패했을지도 몰라.”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감도 오지 않는 청운이다. 만약 옥선진인 외에 다른 고수가 한 명만 더 있었다면, 이처럼 쉽게 무림맹에 타격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요희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흐응, 맛있는 먹잇감은 천천히 먹는 거야.”
“미친년, 그러다가 네년이 잡아먹히는 수가 있다.”
“호호호, 그것도 나쁘지 않네. 제발 죽여줬으면 좋겠어.”
요희가 커다란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에 광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미친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눈앞에 있는 먹잇감부터 처리하자.”
“아흥, 지금쯤이면 칠야가 잘 처리하고 있을 거야. 우리는 그물에 걸린 고기가 펄떡이는 것만 구경하면 돼. 그럼 가볼까?”
순간, 요희가 먼저 사라지고, 광존이 그녀를 따라서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