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마존-121화 (121/257)

# 121

121화

“헉, 어찌?”

“돼지가 불었다. 그도 내 편이 되기로 했다.”

빠드득.

일호 교관은 이를 갈았다.

‘돼지 새끼! 혼자 살겠다는 것이냐?’

도지휘사가 청운에게 붙은 것 같았다. 하긴 그 돼지가 오죽 욕심이 많은가?

더구나 영단을 숨겼다는 것을 아는 이는 그와 자신뿐이었다.

‘제길, 끝났군.’

일호 교관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쉰 후 말문을 열었다.

“진무사님, 진정 살려주시는 겁니까?”

“물론이지. 네가 충성심만 보인다면.”

일호 교관은 무엇에 홀린 듯이 영단이 있는 곳을 불었다.

의리나 충성심보다 자신의 목숨이 더 중요했다.

* * *

쾅!

우르르릉!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밀실이 크게 흔들렸다.

우수수수.

충격에 돌가루가 떨어졌다.

안에 모인 이들은 인상을 찡그렸다.

오석으로 만든 단단한 탁자를 내려친 인물에게 시선이 모였다.

날카로운 인상의 칠야였다.

“젠장! 언제까지 놈을 두고 볼 생각이십니까?”

칠야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외쳤다.

그 모습을 보고 곁에 있던 노인이 타이르듯이 말했다.

“칠야, 진정하게.”

“노야!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흑야에도 당장 투입할 고수가 없지 않나?”

“흥! 여기 있는 몇 분만 도와주셨어도 진즉 놈을 처치했을 것입니다.”

그는 몇 차례 청운을 습격하자는 안건을 내놓았었다. 모두가 찬성했지만, 누구도 휘하 고수들을 내놓지 않았다.

칠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화경에 오른 고수다. 이들 중 한둘과 그들 휘하 고수들 몇 명만 도와준다면 틀림없이 청운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운을 제거하려면 그만한 손해를 입게 될 터. 그 때문에 눈치를 보며 나서지 않고 있었다.

칠야는 고개를 돌려서 노야를 보며 말했다.

“노야, 이 모임인 노룡회의 의장이시니 더 미루지 마시고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노야의 한쪽 눈이 실룩였다.

심기가 불편할 때 생기는 오랜 그의 버릇이었다.

그는 칠야의 요구를 흘려들을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해도 청운은 대업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특히 이번에 청운이 벌인 일은 심각했다. 이미 위에서도 예의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자칫 내 입지가 흔들릴 수도 있어.’

자신은 중원을 책임지고 있는 노룡회의 의장이다. 그런데 연이어서 사고가 생겼다.

자룡궁이 박살 난 것은 이번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노야도 소리치고 싶었다.

‘그 찢어 죽일 놈을 나라고 안 죽이고 싶겠어? 그런데 누가 나설 것인데?’

그러나 끝내 말을 삼켰다.

“왜! 말씀이 없으십니까? 당장 노룡회 의장 자격으로 명령을…….”

팡!

칠야는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박살 난 찻잔을 쥐고 있는 요희가 배시시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칠야를 보며 말했다.

“지난번에는 천산에서 나는 철목 탁자를 부수더니, 이번에는 오석 탁자를 부셨네요. 흐응.”

색기가 흐르는 목소리로 말한 요희가 끈적한 눈빛으로 칠야를 바라보았다.

칠야는 요희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으르렁거렸다.

“뭐, 뭐요? 변상이라도 하라는 말씀이시오?”

“변상은 무슨.”

요희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가슴을 내밀었다.

속이 훤히 보이는 나삼을 걸치고 있는 요희의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칠야가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지, 지금 우리 흑야에 시비를 거는 것이오?”

“시비는 무슨……. 아아, 그보다 힘자랑할 곳이 그렇게 없어?”

“뭐요?”

노골적인 요희의 말에 칠야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주변에 있는 자들이 큭큭거리며 웃음을 참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칠야는 자신이 놀림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년이 감히 나를 놀려!’

그는 탁자를 강하게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쾅!

“이 냄새나는 년이 감히!”

매서운 기세에도 요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교태스러운 모습으로 칠야의 아랫도리를 흘겨봤다.

“호호홍, 욕구불만인 것 같은데, 말로만 하지 말고 덤벼 봐. 뼈가 노곤해질 때까지 사랑해줄 테니.”

명백한 조롱이었다.

사방에서 배를 잡고 웃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칠야는 이만 갈아댈 뿐 요희에게 덤빌 수 없었다. 그녀에게 덤비는 순간 죽을지 몰랐다.

‘깜박했군. 저 더러운 년의 무공실력을.’

이 자리에 모인 사람 중 그녀를 상대할 인물이 몇이나 될까?

자신이 흑야의 대표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했어도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이유였다.

‘X 같은 년! 오늘 일, 결코 잊지 않겠다.’

칠야는 원독에 찬 눈빛으로 요희를 노려보았다.

꼴이 우스워진 칠야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둘 다 그만하지.”

칠야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건 광존이었다.

덩치가 다른 이들보다 두 배인 광존은 요희를 보며 혀를 찼다.

“쯧쯧, 장난은 이쯤 하는 게 어때? 처리할 안건도 많은데.”

“흐음, 아쉽네.”

요희는 숙였던 상체를 뒤로 젖히며 가슴을 한 차례 흔들었다.

탱글탱글한 그녀의 가슴이 허공에서 흔들릴 때 칠야의 눈동자도 함께 흔들렸다.

광존이 나서자 활활 타오르던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가만히 있던 노야가 흑야에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

“광존, 고맙네.”

모두의 시선이 노야에게 모였다.

노야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더니 학사의를 입은 한 사내에게 말했다.

“묘수 선생, 어찌 된 것인지 소상히 설명해주실 수 있으시겠소?”

이들이 급하게 모인 이유가 있었다.

묘수 선생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노야, 송구합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놈이 황궁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행적을 놓쳤습니다. 모처에서 수련이나 할 줄 알았는데, 태원부에 갑자기 나타나서 대업을 방해할 줄이야….”

묘수 선생은 혈룡단을 만들어서 고수를 양성하던 인물이다.

가시적인 성과가 있어서 모두가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청운이 망쳐놓고 말았다.

계획이 틀어졌어도 다른 곳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그런데 계획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노야가 묘수 선생을 보며 물었다.

“선생, 혈각룡이 있던 동굴이 무너졌다는 게 사실이오?”

“예, 그곳을 지키던 자들이 실종되었습니다. 계곡 안에서 크게 싸운 흔적과 함께 동굴이 뚫려 있던 절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싸움? 그럼 그곳을 지키던 자들은 어찌 되었소?”

“모두 실종된 상태입니다. 아무래도 모두 죽임을 당한 것 같습니다.”

“하면, 그곳 역시 이청운 소행이란 말씀이시오?”

수련장을 습격해서 박살 냈고, 잘 커가고 있는 병사들을 잡아들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산서성 도지휘사와 휘하 장수들마저 잡혀서 당장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혈룡단의 주재료인 혈각룡의 생산지가 박살 났으니 청운을 의심하는 것이다.

묘수 선생이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그들의 시체라도 있다면 누구 소행인지 알 수 있겠는데, 어떤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허, 누군가 손을 썼다는 말이구려. 하면 무너진 동굴은 어찌 되었소? 다시 뚫을 수는 있소?”

“예, 지시는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용암지대다 보니 속이 어떻게 변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동굴 내부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른다. 충격에 용암이 넘쳤을 수도 있고 혈각룡이 자라는 곳이 용암에 잠겼을 수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 결과가 나오겠지만, 복원하는 걸 놈들이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는 무언가 이상했다.

청운과 천태중이 싸우며 동굴이 무너져 내렸다. 천태중이 신비세력 쪽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건만, 이들은 그 둘의 싸움을 모르는 눈치였다.

노야는 심각한 얼굴이 되어서 묘수 선생에게 물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재료는 어느 정도요?”

“다행히 미리 채취해 놓은 혈각룡이 제법 됩니다.”

“휴……. 다행이군.”

굳었던 노야의 얼굴이 살짝 펴졌다. 그러나 이어지는 묘수 선생의 말에 다시 얼굴을 굳혔다.

“그런데 넉넉하지는 않습니다. 지금처럼 사용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혈룡단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좀 더 실험을 진행해서 안정성을 높여야 했다. 그러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고.

“선생 생각은 어떻소?”

“무엇을 말입니까?”

“동굴을 무너트린 자가 혹 혈각룡을 가져가지는 않았을까요?”

노야의 질문에 묘수 선생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가져갔겠지요. 그자가 이청운인지, 아니면 다른 놈인지는 모르지만 상당한 양을 챙겼을 겁니다.”

“다른 자라……. 설마 정보가 샜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노야, 배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은밀하게 진행했지만, 분명히 눈치챈 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긴 너무 대놓고 일을 벌였지요.”

너무 안일하게 일을 진행했다.

그 바람에 여러 가지 허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군부를 이용해서 눈을 가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수련생들을 풀어놓은 게 가장 걸렸다.

‘그렇다고 그들을 꼭꼭 숨길 수도 없었지 않은가.’

자연스럽게 군부에 밀어 넣으려다 보니 그들의 과거 행적이 필요했다. 한둘이라면 거짓으로 만들어 낼 수 있지만, 그 숫자가 많았기에 일일이 거짓 신분을 만들 수 없었다.

“회수한 실험체는 전체의 몇 할이나 되오?”

“삼 할이 채 안 됩니다.”

“허허, 전멸이군.”

일 년 가까이 벌였던 일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노야가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 기회에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청운을 제거합시다. 흑야대를 지원할 분이 필요합니다. 뒤로 빼지 마시고 나서실 분이 계십니까?”

노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 눈에서 기광을 뿜어내며 자신을 선택해주기를 바라는 광존이 들어왔다.

“광존이 한번 나서주겠소?”

“노야, 맡겨만 주십시오. 놈의 머리를 뭉개버리겠습니다.”

광존은 가슴을 탕탕 치며 기뻐했다.

그 모습에 요희가 희미하게 웃었다.

* * *

장안과 더불어 중원의 심장과 같은 곳, 천년 고도 낙양.

강호 정파의 핵심인 무림맹은 바로 그 낙양에 있었다.

봄바람이 여인네의 앞섬을 살짝살짝 들추어대던 어느 날, 낙양성에서 남쪽으로 삼십 리 떨어진 곳 관도 위에 학사의를 입은 사내가 나타났다.

태원부를 떠나 온 청운이었다.

그는 지나다니는 무사에게 무림맹 위치를 물어봤다.

무사는 학사가 왜 무림맹을 찾는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무림맹 위치를 알려주었다.

“저쪽으로 쭈우욱 가면…….”

무림맹으로 가는 길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길을 따라 쭉 가기만 하면 되었다.

청운은 무사가 말한 대로 길을 따라 쭈우욱 걸었다.

무림맹이 가까워질수록 많은 무인이 보였다. 거리를 걷는 이들 중 상당수가 칼 찬 무림인이었다.

‘과연 천하 무림의 중심이라 할 만하구나.’

형형색색의 의복과 기형병기를 지닌 자들이 즐비했다. 청운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기형병기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그 모습만 보면 영락없이 시골에서 상경한 촌놈이었다.

혈황은 그런 청운이 마뜩치 않았다.

[촌놈처럼 창피하게 왜 그러느냐?]

-같은 하남에 있다고 하지만 무림맹은 처음입니다. 그보다 무사들의 병기가 생각보다 다양하네요.

청운도 여러 곳을 다니며 무인들과 싸움을 했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기형병기를 지닌 자들이 많았다.

[무인들은 자신의 무공을 보완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한다. 강력한 무공이나 영약이 가장 대표적인데 쉽지 않은 일이지. 그래서 무기를 변형시키는 자들이 의외로 많다.]

혈황의 말대로 같은 종류의 병장기도 조금씩 달랐다. 검등에 검코를 하나 더 달거나, 두 갈래로 갈라서 상대의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자도 있었다.

혈황은 신기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는 청운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조심하고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는 곳이 저곳 무림맹이다.]

-사람 사는 곳 다 같은 것 아닌가요?

[웃기려고 하는 농이냐?]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무림맹이면 정파인들이 모인 곳일 텐데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쯧쯧, 내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무림맹에 있는 자들은 각 세력의 이익을 위해서 파견된 자들이라고.]

전부는 아니지만 일정 부분 혈황의 말에 부합되는 자들을 파견했다. 이권이 걸렸기에 권모술수를 안 쓸 수가 없었다.

-물론 기억나죠.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아무리 권모술수에 능해도 자신 있습니다.

머리 쓰는 일에 특화된 사람이 청운이다. 머리로 덤빈다면 얼마든지 환영할 일이었다.

-일단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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