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120화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걸 미리 말해주었으면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었을 것 아닌가 말이다.
-그 중요한 것을 왜 이제야 말씀하십니까?
[네가 안 물어 봤잖느냐?]
혈황은 ‘그게 뭐?’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고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청운은 머리가 뜨거워졌지만 지금은 말싸움을 할 때가 아니었다.
가슴을 진정시킨 그가 혈황에게 물었다.
-어딥니까?
[왜? 가보게?]
-당연히 가서 박살을 내야 할 것 아닙니까?
혈황은 대답 대신에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의 손길을 따라서 청운의 고개가 돌아갔다.
[저기 봉우리 다섯 개 있는 거 보이지?]
보였다.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봉우리 다섯 개가 나란히 있었다.
[그중에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 뒤로 가면 화괴산이라는 곳이 있다. 그곳 지하에 화룡이 한 마리 살았지.]
청운의 눈이 다시 커졌다.
-용이오?
[그래, 용. 영약은 영물이 지킨다고 하지 않더냐?]
청운도 들어본 이야기다.
영약 주변에는 영약을 지키는 영물이 있고, 그 영물이 영약을 먹고 등선한다고 했다. 물론 전설로만 전해지는 이야기였지만.
그런데 의문이 들었다.
-용이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혈각룡을 채취하죠?
[용을 잡은 다음에 채취하면 되지.]
-그럼 그들이 용을 잡았단 말입니까?
[아니, 내가 예전에 잡았지.]
혈황이 씩, 웃으며 배를 두들겼다.
말하는 투가 용을 잡아먹은 것 같았다.
‘그러고도 남을 분이시긴 한데….’
[사실 그놈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잡으러 갔다가 발견한 게 혈각룡이다. 용의 내단은 내 뱃속으로 들어갔고.]
혈황이 그때 추억을 떠올리고 입맛을 다셨다.
‘천하에 용을 잡아먹은 분은 혈황 님뿐이겠군. 그래서 강하셨던 건가?’
청운도 궁금하긴 했다. 용은 어떤 맛일지.
-당장 가시죠.
[여기는 어쩌고?]
아직 이곳도 정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선후가 있기 마련이다.
-여기는 금의위에게 맡기고 가면 됩니다. 놈들이 채취하지 못하게 막아야 할 것 아닙니까?
[알았다. 그놈 성질머리하고는.]
청운은 곧장 석덕조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신형을 날렸다.
* * *
혈황이 앞장서서 청운을 계곡으로 안내했다.
청운은 계곡 안쪽을 보다가 눈빛을 반짝였다.
-저기 놈들이 있습니다.
다행히 늦지 않은 것 같았다. 계곡의 절벽 틈 사이로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들 손에는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저 상자 안에 혈각룡이 있는 것 같다.]
혈황의 말대로 그들은 혈각룡을 채취한 뒤에 상자에 담아서 운반 중이었다.
당분간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최대한 채취해서 가져가려는 듯했다.
아마 청운이 조금만 늦게 왔어도 그들이 필요한 양을 가지고 사라졌을 것이다.
스르릉.
청운은 곧장 검을 빼 들고 신형을 날렸다.
순식간에 삼십여 장을 좁힌 그는 공력을 검에 집중시켰다.
놈들 중 하나가 청운이 날아오는 걸 보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검을 잡았다.
그사이 청운이 그들의 코앞에 도착했다.
청운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기로 마음먹은 터라 처음부터 살초를 펼쳤다.
그가 검을 흔들자 시퍼런 검강이 산개하며 허공을 난자했다.
검강에 걸린 것은 무엇이든 잘렸다.
입구에 있던 사내들은 피할 틈도 없이 모두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일곱 명을 순식간에 제거한 청운은 절벽의 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몇 걸음 걷던 그가 우뚝 멈춰 섰다.
등줄기에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표정이 굳어진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방심했군.’
청운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한 사내가 바위처럼 우뚝 서 있었다.
중년으로 보이는 그 사내는 갈색 장포를 걸친 채 주변과 동화되어 있었다.
‘강자다.’
자신이 입구 쪽에 있던 자들을 제거한 것을 봤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뒷짐을 지고 태연히 서 있었다.
곁에 있던 혈황이 사내를 살피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제법 강한 놈이군. 방심하지 마라.]
혈황조차 인정할 정도면 정말 강하다는 뜻.
-예.
청운은 심상치 않은 중년 사내의 기세에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때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혹, 자네가 위명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진무사 이청운인가?”
중년 사내는 친구 대하듯이 청운에게 물었다. 청운은 곧장 싸우려던 생각을 버리고 대답했다.
“그러는 그대는 누군가?”
“나? 나는 천태중이라 하네.”
처음 듣는 이름에 청운은 별호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혈황의 호통이 들렸기 때문이다.
[무얼 하느냐? 놈이 시간을 끌고 있지 않느냐!]
-예?
[조심해!]
콰아아아아.
청운은 갑자기 자신에게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거력에 깜짝 놀라며 검을 들어 방어했다.
콰과광!
천태중이 발을 들어서 바닥을 내려찍는 시늉을 하자, 그의 앞 바닥이 터져나가며 부서진 돌조각들이 청운에게 날아갔다.
청운은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호신강기를 빠르게 두르지 않았다면 암기처럼 날아드는 돌조각에 낭패를 당할 뻔했다.
표정이 굳은 청운은 고개를 들어서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혈황이 천태중을 보더니 이마를 찌푸렸다.
‘아무래도 그 검둥이들과 연관이 있는 놈 같은데….’
그때,
쾅!
중년 사내가 여전히 뒷짐을 진 채 다시 한번 발을 들어서 바닥을 내리찍었다.
쩌저저저저정!
굉음과 함께 땅거죽이 터져나가며 곧장 청운에게 밀려갔다.
청운은 검을 어깨 높이로 들어 올리며 환우구검을 펼쳤다.
‘폭멸!’
검을 내려치며 좌우로 흔들자, 검강이 바닥을 가르며 나아가서 사내의 공격과 충돌했다.
콰과과광!
뿌연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나는가 싶더니, 먼지구름을 뚫고 천태중이 불쑥 튀어나왔다.
뒷짐 진 손을 푼 그는 청운을 향해서 쌍장을 뻗었다.
가공할 위력의 장력이 청운의 요혈을 노리며 밀려들었다.
청운은 빙글 몸을 돌리며 검막을 일으켜서 맞받아쳤다.
챙! 콰과광!
‘읍!’
청운의 몸이 다시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그 와중에도 시선만큼은 천태중을 놓치지 않았다.
‘젠장!’
찰나의 순간 마음을 놓지 않았다면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문보다 실력이 부족한 것 같군.”
천태중이 다시 뒷짐을 지며 말했다.
명백한 도발.
청운은 피식 웃음 지으며 검병을 움켜잡았다.
“벌써 나를 판단하면 섭섭하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청운은 천명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패할지도 모른다.’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닌 고수였다. 도대체 신비세력에는 저런 고수가 몇 명이나 있단 말인가.
우우우웅!
청운의 검이 요동치며 울기 시작했다.
그 검명을 들은 천태중은 양손을 좌우로 펼치더니, 서서히 주먹을 오므리기 시작했다.
그의 주먹이 다 오므려졌을 때였다.
팟! 파밧!
동시에 앞으로 튀어나간 두 사람이 중간에서 격돌했다.
콰광!
채재재재쟁!
청운과 천태중은 눈 깜짝할 순간에 십여 합을 주고받았다.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기라도 하는지 전력을 다해서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팽팽한 접전. 좀처럼 승부가 갈리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쾅!
강력한 폭음과 함께 둘이 튕겨나가듯 떨어졌다.
중심을 잡고 선 둘은 서로를 응시했다.
천태중은 처음과 같은 모습이었지만, 청운은 입고 있는 의복의 여기저기가 찢기고 구멍 나 있었다.
그것만 보면 청운이 밀린 것처럼 보이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청운이 천태중을 보며 말했다.
“천잠사인가? 그쪽은 천잠사를 배급 주나 보군. 너도나도 천잠사로 만든 옷을 입은 걸 보니.”
그러면서 미간을 좁히고 눈빛을 반짝였다.
천잠사는 결코 흔한 물건이 아니다. 그런데 하오문의 천위단주도 천잠사로 된 옷을 입었었다. 잘하면 그쪽에서 실마리가 잡힐지도 몰랐다.
“비슷하긴 한데, 조금 달라.”
천태중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옷도 자세히 보면 베어진 자국이 있었다. 잘 표시가 나지 않을 뿐.
후우!
“결판을 내도록 하지.”
스르릉.
청운은 검을 늘어트린 후에 둥글게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검의 궤적에 따라서 하나씩 검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둥근 원의 테두리에 잔상처럼 검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천태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놈! 강서백가와 관련이 있었던 것이냐?”
“그대가 봤을 때 어떤 사이일 것 같으냐? 차핫!”
말과 동시에 청운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검의 잔상이 청운의 뒤를 따랐다.
청운은 천태중의 가슴을 향해서 검을 휘둘렀다. 천태중은 한 손을 들어서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쩡!
청운이 재차 공격하려는데, 천태중이 기겁하며 몸을 뒤로 빼냈다.
청운의 뒤를 따르던 검의 잔상이 좌우로 돌아서 튀어나가며 천태중의 요혈을 두드렸다.
“윽!”
주르륵, 뒤로 물러선 천태중은 일그러진 얼굴로 양손을 휘저었다.
그를 중심으로 천수관음처럼 수십 개의 손 그림자가 만들어지더니 곧장 청운이 만든 검의 잔상과 부딪쳤다.
퍼버버벙!
몇 개의 수영이 검막을 뚫고 들어와서 청운의 몸을 강타했다.
청운 역시 주춤거리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한 번씩 충격을 주고받은 상황.
누가 우위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를 악다문 청운은 다시 자세를 잡고 천태중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천태중이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갑자기 뒤로 날아갔다.
“하하하! 다음에 보자, 이청운!”
“저…….”
생각지 못한 상황에 청운은 바로 쫓지도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그사이 천태중의 신형이 빠르게 멀어졌다.
청운은 천태중을 쫓을까 했지만 결국 쫓지 않았다.
비천무영신법을 펼치면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따라잡는다 해서 승부까지 결정 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자의 동료라도 있다면 자신이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계곡 아래를 확인해 봐야 했다.
계곡 아래로 내려간 청운은 절벽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무너졌네요.”
절벽의 한쪽이 폭삭 주저앉아 있었다.
그 무너진 곳이 바로 혈각룡을 채취할 수 있는 곳이었다.
청운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혈황이 말했다.
[네 녀석이 그놈과 싸울 때 안에 있던 놈들이 모두 도망쳤다.]
“그자의 잔꾀에 당했군요.”
혈황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미련을 두지 않고 몸을 돌렸다.
[돌아가자꾸나.]
“이곳은 어쩌고요? 바위를 치우고 안에 확인해야지요.”
[그럴 것 없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동굴 전체가 무너질 거다.]
아무리 청운의 몸이 단단하다 할지라도 동굴이 통째로 무너지면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청운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천태중이라 했나? 다음에 만나면 절대 오늘처럼 그냥 보내주지 않을 거다.’
이각 후, 오씨 집성촌에 도착한 청운은 석덕조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홍상경은 그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가 돌아오지 않는 게 왠지 불안했지만, 청운은 그곳에서 하염없이 홍상경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나 먼저 태원부로 돌아갈 거네. 일처리가 끝나는 즉시 태원부로 오게.”
“예, 대인.”
청운은 석덕조의 대답을 뒤로하고 태원으로 향했다.
* * *
태원부에 돌아온 청운은 곧장 치국하지 않고 일호 교관과 오호 교관을 따로 불렀다.
그러고는 그들에게 살길을 열어주겠다며 협조를 구했다. 어떻게 보면 협박이나 다름없었지만.
“협조하면 살 것이고, 반항하면 죽일 것이다. 어떻게 하겠느냐?”
오호 교관은 배신할 수 없다며 버텼다. 그러나 일호 교관은 달랐다.
“정말 약속을 지켜주실 겁니까?”
“이미 전향한 자들이 많다. 너 하나 더 죽인다 해서 놈들의 힘이 약해질 거라 생각하느냐?”
일호 교관은 이를 악물었다. 허탈감마저 느껴졌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였나?’
청운의 말대로, 자신이 죽는다 해서 세력의 힘이 약해질 일은 없다.
게다가 말단은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높은 지위도 아니었다.
굳이 따진다면 중간 정도?
말 몇 마디로 일호 교관의 기를 꺾어 놓은 청운이 이번에는 은근한 어조로 일호 교관의 마음을 흔들었다.
“네가 입을 열면 그들에게 큰 타격을 주겠지. 나에게도 큰 도움이 되는 일이니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으음, 생각할 시간을 조금 주십시오.”
“그러도록 해라. 잘 생각해보고. 아, 참!”
“…….”
“단약은 어디에 숨겨 놓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