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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마존-110화 (110/257)

# 110

110화

발걸음 소리의 주인공은 엄청난 신위를 선보인 백철군이었다.

누구도 감히 그의 발길을 막지 못했다.

화경의 고수를 간단히 제압하는 그의 무력은 경이, 그 자체였다.

그가 황제를 향해서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그의 앞에는 이제 두 명의 호신위뿐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었다. 백철군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끄응.”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던 실내에 앓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백철군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의 고개가 스르르 돌아갔다.

모든 이들의 이목이 그를 따라서 이동했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던 청운이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허어, 그냥 누워 있을 것이지.”

백철군의 입에서 씁쓸함이 묻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굳이 청운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기절만 시키려 했는데 용케 정신을 잃지 않은 듯했다.

한편, 혈황은 쓰러진 청운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쯧, 이리 허약해서야.]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서, 황제에게 걸어가는 백철군을 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아직은 무리지.]

무공을 익힌 지 겨우 이 년이 흘렀을 뿐. 상대가 상대인 만큼 패배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다.

[내가 해볼까?]

혈황이 넌지시 말하자, 청운이 펄쩍 뛰었다.

-미쳤습니까? 안 됩니다! 절대로! 설령 제가 정신을 잃더라도 지금은 안 됩니다.

[아, 그 자식… 그놈의 똥고집은…….]

혈황은 못마땅했지만 청운이 싫어하는 이상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전에는 청운이 정신을 잃어서 어떻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정신이 깨어 있으면, 더구나 청운이 반대하면 뇌기도 더 강해져서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저도 할 만큼 했습니다. 저분도 황제 폐하를 어떻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조금 지켜보죠.

[당연히 황제를 죽이지는 못하지. 그럼 백가장도 박살 날 테니까.]

그때 백철군이 손가락을 튕겼다.

핑!

지풍은 정확히 청운의 마혈에 적중했다.

상체를 반쯤 일으킨 청운이 다시 쓰러졌다.

백철군은 청운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고개를 돌려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두려웠지만, 황제로서 위엄을 잃지는 않았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청운은 굉장한 고수였다. 이 년이 채 안 되는 시간에 저리 강해졌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청운조차 패했다.

이제 이곳에는 자신을 지켜줄 사람이 없었다.

천하제일검도 어찌하지 못하는데 누가 나서서 자신을 구해줄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황제의 자존심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고개를 든 그는 백철군의 눈을 마주 보았다. 입이 바짝 마르고 고개가 자꾸 밑으로 떨어지려 했지만 악착같이 참아냈다.

그런 황제를 보며 백철군이 입을 열었다.

“황상, 정말 훌륭한 수하를 두셨습니다.”

“고맙네.”

‘만일 저자가 악한 마음을 먹는다면?’

황제는 두려웠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등이 축축하게 젖은 지 오래였다.

그는 백철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했다.

저자에게는 황제의 위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황제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철군이 입을 열었다.

“황상, 천하의 주인이 바뀌었으니 황실과 백가장에 전해지던 오랜 전통은 잊겠습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리하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백가장은 황실과 척을 지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오래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강서성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백가장에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으셨으면 하옵니다.”

백철군의 말에 황제의 미간이 살짝 모였다.

‘저들의 힘이 필요하거늘.’

생각해보니 백가장이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그들의 힘을 사용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자신이 모르는 이유로 물러가겠다고 하고 있었다.

잡아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윤허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절로 쓰러져 있는 청운에게 눈길이 갔다.

‘삼원에게 물을 수도 없고.’

청운이 괜히 원망스러웠다.

황제가 머뭇거릴 때 백철군이 입을 열었다.

“황상, 소란을 피워서 송구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자, 잠깐!”

황제가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

몸을 돌리던 백철군이 다시 황제를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신지요?”

“그, 그게 말이네. 허허, 이거 뭐, 뭐라고…….”

황제는 머뭇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려서 신하들을 살펴보았다. 보통은 이럴 때 대신들이 나서서 쫑알쫑알해야 하는데,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바짝 공포에 질려서 자신의 눈길을 피하며 딴청만 피웠다.

“에잉.”

그의 입에서 절로 못마땅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마침 보화전의 입구 쪽에서 한 사내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황상! 제갈세가의 신기이옵니다. 소인이 황상을 대신해서 이야기해도 될는지요?”

모두의 시선이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제갈신기에게 모였다.

그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었다. 누구도 그의 앞을 막아서는 이는 없었다.

황제는 안도했다. 그가 누군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대신 중에서도 제갈신기를 알아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자들이 많았다.

황제는 두말하지 않고 허락했다.

“그리하게.”

제갈신기는 미소마저 띤 표정을 지으며 백철군 앞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포권을 취했다.

“가주,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갈 형을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구려. 잘 지내셨소?”

둘은 서로 알고 있는 사이인 듯했다.

제갈신기가 다시 말했다.

“먼 길 오셨는데 조금 더 있다 가시지요. 이대로 가시면 저기 진무사가 서운해할 것입니다.”

백철군은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린 환관의 품에 안긴 청운이 보였다. 그런데 어린 환관의 눈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원수를 앞에 두고 노려보는 듯했다.

백철군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호오, 어린 녀석이 제법이군. 그런데 저 녀석이 왜 나를 저런 눈으로 노려보는 거지? 황제를 무례하게 대했다고 그러나?’

환관이라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품을 만했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참…….’

어린 환관은 강한 적개심과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무엇이 분한지 몸마저 부들부들 떨었다.

그렇다고 물어보기에도 뭐해서 그냥 고개를 돌려 제갈신기를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오랜만에 제갈 형을 만났는데 이대로 갈 수는 없지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렇게 보화전의 불었던 광풍이 잦아들었다.

* * *

화려하지는 않지만 잘 꾸며진 실내는 정갈했다.

학사의 방이라도 되는지 한쪽 벽면에 놓인 서가에는 서책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벽면에 걸린 산수화의 폭포에서부터 묵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것 같았다.

한쪽에 놓인 침상에는 한 사내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사내는 백철군과 싸우다가 기절한 청운이었다.

그 옆에서 환관복을 입은 사람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청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인, 어쩌자고 나서셨사옵니까. 소인 너무 속상하옵니다.”

꾀꼬리처럼 맑고 청아한 음성에 속상한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십오륙 세쯤 되어 보였는데,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의 두 눈은 우수에 차 있어서 금방이라도 굵은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흐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는군.]

혈황은 청운을 간호하고 있는 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아는 얼굴인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신을 잃은 청운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은 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거야?]

벌써 반나절이 흘렀는데 어쩐 일인지 청운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 녀석이 몸속의 기운만 잘 조화시켜도 그렇게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청운의 몸속에는 여러 가지 진기가 흐르고 있었다.

혈황진기가 근원인 혈기, 벼락이 근원인 뇌기, 그리고 천명신공을 기반으로 쌓인 청기.

모두가 개별적으로는 강한데, 한데 뭉치지 못하고 따로따로 움직였다.

[깨어나면 그 문제부터 해결해야겠군.]

이번에 패한 것도 내공이 온전치 못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적당한 상대라며 모를까, 이번같이 현경에 이른 자를 상대했다가는 또 패배할 것이 뻔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섰다.

청운을 수발들던 어린 환관이 물이 담긴 통을 들고 있었다.

어린 환관이 들어서자 청운을 간호하던 환관이 수건을 물에 적셔서 꾹 짠 후에 청운의 이마에 올려놓았다.

“수고했다. 그만 나가보아라.”

“네, 소감님.”

대답을 한 어린 환관은 곧장 몸을 돌려서 나가지 않고 우물쭈물하며 자꾸 머뭇거렸다. 그 모습이 어색했던지 소감이라 불린 환관이 어린 환관을 보며 말했다.

“할 말이 있느냐?”

“아, 아니옵니당.”

“괜찮으니 말해 보거라.”

“그, 그것이…… 예전에 대인을 모셨다고 들었사옵니다. 그때 괜찮으셨는지요?”

“응? 그게 무슨 말이냐?”

정 소감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어린 환관이 무엇을 묻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 그것이 대인께옵서 소인의 몸을…….”

“네 이노오옴!”

자리에 앉아 있던 정 소감이 더 듣지 않고 벌떡 일어섰다.

그의 몸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폭풍처럼 뿜어졌다.

그 기세에 어린 환관이 바닥에 오체투지 하며 용서를 구했다.

“허억! 소인이 잘못했사옵니다. 사, 살려주십시오.”

“네놈이었구나! 소문을 낸 놈이. 내 그렇지 않아도 그 소문을 들었다. 감히 이분이 누구신지 알고 그따위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낸다는 말이냥!”

금방이라도 어린 환관을 일장에 죽일 듯한 기세였다.

그때 곁에서 재미난 구경이라도 하는지 흥미롭게 지켜보던 혈황은 그제야 소감이라는 환관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아! 정 소감이었군. 구화보전을 익히더니 모습이 몰라보게 달라졌어. 허허허.]

소감은 혈황의 생각대로 정 소감이었다.

동창에 차출되어서 수련하던 정 소감이 어느덧 수련을 마치고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모습도 몰라보게 바뀌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오죽하면 혈황이 몰라봤을까.

혈황이 놀라서 바라볼 때, 정 소감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올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 이 녀석 그대로 내려치면 저 녀석 죽을 텐데.]

정 소감의 손에는 엄청난 내공이 실려 있었다. 다행이라면 극도로 분노하고 있어도 한 가닥 이성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스르륵.

정 소감은 심호흡을 하며 올렸던 손을 내렸다. 이내, 날카로운 눈빛으로 어린 환관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한 번만 더 거짓 소문을 낸다면… 내 네놈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 것이당. 알겠느냥?”

“아, 알겠사옵니다.”

어린 환관은 정 소감의 추상같은 호통에 몸을 떨었다. 현재 환관 중에서 정 소감의 위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알려져 있었다. 윗선의 신뢰와 그의 일취월장한 무공실력 때문이었다.

어린 환관은 정신이 혼미한지 눈동자가 살짝 풀렸다. 만일 정 소감이 조금만 더 내공을 쏘아 보냈다면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정 소감은 어린 환관을 내쳤다.

“썩 꺼져라!”

“니, 니에.”

어린 환관이 종종걸음으로 물러났다. 그가 사라지자 정 소감은 청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두 눈에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대인,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옵소성. 소인이 대인을 보필할 시간이 멀지 않았사옵니당. 그러니 이제 아무 걱정 하지 마시옵서성.”

무언가 기대에 찬 표정을 짓는 정 소감이었다.

그런 정 소감의 표정에 혈황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허허, 그놈 참… 여복은 없고 남자 복만 터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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