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77화
“미친 놈. 한번 받은 돈은 내줄 수 없다.”
청운은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시 은자 한 냥을 꺼내서 손으로 떡 반죽 만들 듯 은자를 편 다음 귀퉁이를 조금 떼어냈다.
“이 정도면 닷 푼보다는 많을 거다. 그러니 한 냥짜리는 내놔.”
사내는 청운이 은자를 손으로 떼어내는 걸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씨바, 강호 고순가?’
강호 고수를 잘못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사내는 잘 알고 있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청운이 내민 것을 받고 은자 한 냥을 내주었다.
청운은 한 냥을 돌려받고 배를 향해 걸어갔다.
사내는 청운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침을 삼켰다.
‘저 새끼, 품속에 은자가 굉장히 많은 것 같아. 어쩌면 봇짐 속에도 돈이 있을지 몰라.’
그사이 청운은 배에 올라갔다.
그런데 뱃삯을 다시 받는 것 아닌가.
“세 푼입니다.”
“조금 전에 뱃삯을 냈소만?”
“나리, 그건 통행료고 뱃삯은 따로 주셔야 합니다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청운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늙은 뱃사공에게 질문했다.
“이보시오, 통행료는 뭐고 뱃삯은 무엇이오?”
“아! 나리께서는 초행이신가 보군요.”
“그렇소. 남경은 처음이오.”
늙은 뱃사공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했다.
“나리, 왕부에서 지난번 홍수로 피해를 본 사람들을 구휼한다며 통행료를 걷고 있습니다. 소인도 벌이의 절반을 저들에게 내고 있습니다요.”
“그렇소?”
마음에는 들지 않았지만 홍수로 끊어진 다리를 다시 놓는 일이라면 보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은자를 다시 조금 떼어서 콩처럼 만든 다음 건넸다.
그것만 해도 철전으로는 족히 열 푼은 되었다.
“거스름돈은 주지 않아도 되오.”
굳이 힘들게 일하는 사람에게는 거스름돈을 받고 싶지 않았다.
사공은 고맙다며 허리를 숙이고 선미로 갔다.
배는 잠시 후에 출발했다.
청운은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중얼거렸다.
“추도단수수갱류 (抽刀斷水水更流)
거배쇄수수경수 (擧杯銷愁愁更愁)
인생재세불칭의 (人生在世不稱意)
명조산발농편주 (明朝散髮弄扁舟).”
칼로 물을 베어도 물은 다시 흐른다.
술로 시름을 달래도 더욱 서글퍼지네.
인생은 가도 가도 어렵다.
내일이라도 머리칼 휘날리며 조각배 타고 놀리라.
절로 이백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이럴 때 한잔 술이라도 있다면 답답한 마음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으련만.’
당장 쓸어버리고 싶은 자들을 황궁의 권력 암투 때문에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놔두어야 한다는 게 답답했다.
차라리 진무사의 직위를 포기할까?
‘그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장강을 건너가고 있을 때 혈황이 말했다.
[저놈들 봐라?]
청운은 혈황이 보고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척의 날랜 배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배에 타고 있는 자들은 조금 전 통행세를 걷던 자의 일행이었다. 그들이 탄 배는 속도가 빨라서 곧바로 도선을 지나쳐 갔다.
청운은 앞서가는 그들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배에 탄 자들 중 하나가 자신을 쳐다보며 씩 웃고 있었다.
‘설마 나에게 볼일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남경포구에서 내린 청운이 선착장에서 멀어졌을 때 일단의 무리가 앞을 막아섰다.
“이봐.”
건너편 포구에서 통행세를 받던 자들과 비슷한 복장을 한 자들이었다. 개중 한 사람은 배를 타고 올 때 빠르게 지나가던 배에 타고 있던 자였다.
무기를 들고 있는 걸 보니 그냥 넘어가기는 틀린 듯했다.
“나에게 볼일이 있나?”
한 놈이 키득거리며 청운에게 다가와 거들먹거렸다.
“잠깐 따라와라.”
“무슨 일이지?”
“아무래도 수상한 놈인 것 같아서. 그 봇짐 좀 보자.”
“싫은데?”
“허, 이놈이 무얼 믿고 이리 고개가 뻣뻣해? 우린 왕부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하라는 대로 해. 맞아죽기 싫으면.”
“왕부? 정말 왕부에서 나온 자들이냐?”
“크크, 그렇다. 이 몸들이 바로 왕야의 측근들이시다.”
“그래? 그럼 신분패를 보여줘 봐.”
청운은 한 손을 앞으로 내밀며 신분을 밝히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놈들은 신분패를 내놓지 않고 비릿하게 웃음을 날렸다.
“신분패? 그걸 네놈이 봐서 어쩌겠다고.”
선두에 서서 말하던 자가 다른 자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죽이지는 말고 무릎 꿇려.”
신호를 받은 자들이 칼을 빼들더니 청운에게 달려들었다.
퍼버벅.
후두둑.
자신만만하게 청운을 공격하던 자들이 한순간에 바닥에 쓰러졌다.
굳이 초식을 펼칠 필요도 없었다. 그저 걸리는 대로 놈들을 쓰러트리면 되었다.
청운은 손을 탈탈 털고는 홀로 남은 자에게 말했다.
“신분패 내놔 봐.”
주춤.
사내가 뒤로 물러섰다.
‘젠장, 강호 무사라고 하더니, 생각보다 더 고수잖아?’
연락을 받고 한밑천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강호무사라고 하기에 실력이 괜찮은 수하들을 골라서 다섯 놈이나 데려왔다.
그런데 잘못하면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판이었다.
“네, 네 이놈. 우리는 왕부 사람들이다.”
“신분패를 보여 달라니까. 진짜 왕부 사람인지 확인을 해야 하니 말이야.”
청운은 재차 신분패를 요구했다. 그러나 신분을 증명할 패가 이들에게는 없었다.
“집에 있다. 그, 그래! 우리 신분은 다른 자들에게 물어보면 될 것 아니냐?”
“아무래도 네놈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군. 순순히 불지 않는다면 모조리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청운은 기세를 살짝 흘렸다.
“허억.”
홀로 서 있던 사내는 청운의 기세에 주저앉고 말았다.
숨이 턱 막히는 엄청난 기세에 오줌이 찔끔거렸다.
“사, 살려주십시오. 저희는 정말 왕부 사람입니다.”
울먹이며 말하는 사내를 내려다보며 청운은 옆에 쓰러진 한 사내의 발을 밟았다.
빠각.
“크아아악.”
쓰러져서 끙끙 알던 자가 두 눈을 뒤집으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청운은 재차 사내에게 물으며 다른 사내의 발을 밟았다.
“왕부 사람이라고?”
빠각.
“으아악.”
차가운 청운의 눈빛은 흡사 악귀와 같았다.
그러나 사내는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다리가 아니라 목이 잘릴 수도 있었다.
사내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팔다리가 다 부러지더라도 사실을 말해서는 안 되었다.
“우, 우리는 진짜 왕부 사람입니다.”
“호오. 그래?”
청운은 다른 사내의 발마저 부러트렸다. 이제 남은 건 한 명뿐이다.
줄기줄기 살기를 흘리는 청운의 모습에 사내는 기겁을 하며 엉금엉금 기어서 골목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턱 하니 청운이 앞을 막자 청운의 발에 매달렸다.
“살려주십시오. 나리!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관복도 입지 않고 신분증도 없이 왕부 사람이라면 누가 믿겠느냐? 아무래도 네놈들이 왕야의 이름을 팔아서 선량한 사람들을 강탈하는 강도들이 분명하구나.”
“아, 아닙니다요. 저희는 왕부에서 나온 게 맞습니다요.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흐음.”
청운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놈들을 다리까지 부러트렸다. 그런데도 한결같은 대답만 들을 수 있었다.
만약 왕부 사람이 아니라면 그만큼 독한 놈들이라는 말이었다.
청운은 사내들의 짓거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목을 칠 정도는 아닌 듯해서 손을 멈췄다.
“한 번만 더 이런 짓을 하는 게 눈에 띈다면 그때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리.”
사내는 연신 절을 하며 흐느꼈다.
청운은 그런 사내를 차갑게 내려다보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청운이 사라지자 사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빌어먹을. 재수가 없으려니까 고수를 건드렸군.”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사내는 쓰러진 자들을 놔두고 어디론가 빠르게 달려갔다.
청운은 멀지 않은 곳에 몸을 숨기고 놈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냥 가려 했는데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공포에 질린 사내의 눈빛. 그것은 결코 자신 때문에 겁을 먹은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왕부에 남들이 모르는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생각한 청운은 떠나는 척하며 골목에 숨어서 사내를 지켜보았다.
절룩거리며 뛰어간 사내는 포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그런데 왕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곳인 듯했다. 어디에도 왕부와 관련지을 만한 사람도, 표시도 없었다.
청운은 사내를 따라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수십 명이 병장기를 들고 급하게 모이고 있었다.
“누구냐?”
안에 있던 한 사내가 청운을 보고 호통 치듯이 말했다.
청운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이곳은 뭐하고 곳이냐?”
“무슨 소리야?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들어왔단 말이냐?”
“네놈들의 정체가 궁금해서 왔다. 네놈들은 누구냐?”
“허, 이놈 봐라. 재밌는 소리를 하네.”
사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청운은 물끄러미 그자를 바라보았다.
사내가 쓱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하오문에 제 발로 찾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정체가 뭐냐고? 그러는 네놈의 정체는 뭐냐?”
“아! 하오문.”
청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굴렸다.
남경왕부는 왕부가 있는 강소성과 항주가 있는 절강성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왕부의 허락을 받기 위해 남경에 왔다.
그런데 막상 남경에 와서 보니 뭔가 이상했다.
‘왕부에서는 어쩌자고 이런 자들을 쓴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신분을 밝히는 것은 뒤로 미뤄야겠군.’
그사이 수십 명의 사내가 청운을 둘러쌌다.
청운은 그들 중 한 명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 자신이 풀어주었던 사내였다.
청운이 사내를 보며 물었다.
“왕부 사람이라더니, 하오문 사람이었나?”
“흥! 하오문이 왕야를 돕고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거늘, 무슨 헛소리더냐?”
“호! 거짓은 아니었단 말이군.”
그러고 보니 이놈들이 사람들에게 통행세를 걷을 때 병사들이 곁에 있었다.
어떤 사이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왕부와 하오문이 손을 잡고 있는 것은 분명한 듯했다.
“이놈! 호랑이 굴에 들어왔으니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사내는 악을 쓰며 청운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청운은 사내를 보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자들 중 사내보다 뛰어난 자들이 여럿 보였다.
청운의 눈이 그들에게로 향하자, 큰소리치던 사내는 더 이상 떠들지 못하고 조용해졌다.
청운의 눈빛을 받은 사내가 말했다.
“칼 좀 써본 자 같은데, 명호가 어떻게 되느냐?”
“알아서 뭐하게? 시간이 없으니 일단 눕혀놓고 물어보는 게 낫겠군.”
“크크. 죽고 싶다면 죽여주지.”
사내는 으름장을 놓으며 청운을 압박하고는, 수하들에게 눈빛으로 명령을 내렸다.
무기를 빼든 자들이 청운을 향해 다가갔다.
청운도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다가오는 자들을 향해 몸을 날린 그는 걸리는 대로 두들겨 팼다.
우둑! 뚜두둑!
팔다리가 섬뜩한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크아악.”
“으악.”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한번 움직인 청운은 멈추지 않고 삼십여 명을 단숨에 쓰러트렸다.
사내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공격당했는지도 모르고 쓰러져서 신음을 흘렸다.
개중에는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는 자도 있었다. 청운은 그런 자들에게 다가가 다른 쪽 팔다리마저 분질렀다.
빠각!
“크아아악!”
비명이 사방에 메아리쳤다.
그제야 청운은 주위를 둘러보며 처음 만났던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덜덜 떨며 청운을 두려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조금 전 자신이 죽이겠다고 떠들었지 않은가.
‘이놈의 입방정……!’
그런데 그때, 청운이 물었다.
“살고 싶으냐?”
털썩.
“살려주십시오. 나리!”
사내는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 대답을 잘하면 살려줄 것이고, 거짓이 섞였다면 모두 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