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61화
“그리고 상단의 운영비로 만 냥을 더 내놓겠습니다. 대신 이익의 삼 할을 주시고, 뒤쪽에 있는 별채를 제가 마음대로 사용하게 해주십시오.”
공선의 눈매가 떨렸다.
그 돈이면 고리로 얻은 돈도 모두 갚을 수 있어서 공가상단의 모든 어려움이 풀린다.
뒤쪽의 별채도 지금은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내준다 해도 불편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 그 돈을 내놓겠다는 걸까?
“정말이오?”
“오늘 밤 전액을 드리겠습니다. 담보에 대한 권리는 대금을 다 치름과 동시에 발생하는 것으로 하지요.”
공선도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더 기다린다 한들 어느 누구도 그렇게 좋은 조건을 내밀지 않을 것이다.
“좋소이다, 공자. 공자의 요구를 받아들이지요. 별채는 항상 깨끗하게 치워져 있으니 당장 사용하셔도 됩니다.”
“그래요? 그거 잘됐군요. 그럼 밤에 봅시다.”
청운은 그날 밤 은자 삼만 냥을 내놓고 정식으로 계약을 맺었다.
자룡궁 비밀통로에서 빼돌린 돈 중 일부를 비상자금으로 남겨 놓았던 터라 대금을 지불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날 밤 늦은 시각.
금의위와 함께 공가장 별채에 자리를 잡은 청운은 다음 날 일에 대해서 상의했다.
혁련휘도 잡아야 하고, 배후의 신비세력 정체도 밝혀야 했다.
* * *
“이번에 자룡궁 서고에서 한 가지 비급을 얻었습니다.”
[비급?]
“예, 재밌는 것이 적혀 있더군요.”
[어떤 비급인데? 어디 좀 보자.]
청운은 품속에서 얇은 비급을 척 꺼내놓았다.
천면(千面).
비급의 표지에는 그 두 글자만 적혀 있었다.
혈황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손짓했다.
어서 책장을 넘기라는 말이었다.
청운은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겼다.
다섯 장쯤 넘기자 혈황이 말했다.
[얼굴을 변환시키는 역용술이구나.]
“예, 신기하지 않으세요? 내공으로 얼굴을 변환시키다니요. 이거라면 인피면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얼굴 형태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청운은 비급의 첫 장을 다시 펼쳤다.
첫 장에는 천면만화신공(千面萬化神功)이라 적혀 있었다.
그 글귀를 보며 혈황은 탐탁지 않게 말했다.
[이름은 거창하구나. 천 가지, 만 가지로 얼굴을 바꿀 수 있다니. 쯧쯧]
혈황은 못마땅했지만 비급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폈다. 이내 곰곰이 생각하더니 청운에게 말했다.
[이렇게 봐서는 모르겠다. 일단, 섣불리 익히지 말고 연구해보자꾸나.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니.]
“예.”
[그리고, 놈들을 그냥 덮치는 게 어떻겠느냐?]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무작정 들어갔다가는 상당한 피해를 볼 수 있습니다.”
청운이라 해서 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을까.
당장 혁련휘를 잡아서 자신이 당했던 것보다 열 배 이상의 괴로움을 주고 싶었다.
청운은 못마땅해 하는 혈황에게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렇다고 해서 꼭 피해 때문만은 아닙니다. 천교를 공격한 무리와 저들이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혁련휘를 제거하기 위해서 무작정 저들을 공격하면 연결고리가 끊어질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자룡궁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된 곳이 분명했다.
게다가 두 노괴는 물론이고, 다른 무인들도 생각보다 강자들이었다.
“개방에 그들의 정체를 알아봐 달라고 했으니 곧 연락이 올 것입니다.”
청운은 이미 개방과도 연락을 취한 상태였다.
염악 방주가 직접 오지는 않았다. 모종의 일로 다른 곳에 갔다며 삼장로인 철산반 안달이 찾아왔었다.
그는 여전히 철로 만든 주판을 들고 있었고, 개방의 살림을 맡은 인물답게 이번 일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받아갔다.
* * *
꼬박 하루가 지나자, 기다리던 소식을 개방의 삼장로가 가져왔다.
별채의 내실에서 마주한 삼장로는 안색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는 품속에서 얇은 책자를 꺼냈다.
“영풍장에 관한 내용과 말씀하신 두 노괴의 정체요.”
청운은 힐끔 삼장로를 보고는 그대로 책자를 펼쳤다.
청운이 책자를 빠르게 읽어 내려갈 동안 삼장로는 입을 닫고 가만히 청운을 살폈다.
탁.
청운이 마지막 책장을 넘겨서 책자를 덮으며 삼장로를 보고 말했다.
“두 노괴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군요. 설명해 주실 수 있소?”
“내가 활동할 당시의 일이 아니라서 나도 자세히는 모르오. 하지만 그들이 워낙 유명해서 들은 이야기가 있소이다. 설마 그들이 아직 살아 있을 줄은 몰랐소만.”
삼장로는 책자의 내용을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려는지 빠르게 두 노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두 노괴는 음양쌍괴라 부르오. 그들이 활동할 때에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는데,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항시 피바람을 몰고 다녔다고 하오. 그들이 다시 무림에 나왔으니 어쩌면 큰 혈풍이 불지도 모르겠소.”
“흠, 이야기를 계속해 보시오.”
청운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며 삼장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예전에 소소검 한매가 문제를 일으켰다 하오. 그녀의 사문은 화산파였소. 모종의 일로 파문을 당한 후 이름을 한매라 바꿨소. 그리고 그녀와 함께 다니는 남자는 운형검 한죽이라는 자요. 곤륜파 무인이었는데 역시 파문당하고 소소검을 따라다녔소. 물론 이자 역시 한죽이라는 이름으로 바꿨소.”
“이름을 바꿨다니,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군요.”
“강호에 떠도는 소문인데, 소소검이 강호행 중에 사문의 어른에게 검을 겨눈 일이 있었다 하오. 그때 운형검이 도왔다고 합디다.”
구대문파의 후예들이 사문의 어른에게 검을 겨눴다는 것은 기사멸조에 해당한다.
보통은 사지근맥을 자르고 무공을 패하거나 면박을 시키는데, 멀쩡하게 파문이라니, 무언가 이상했다.
“내용은 알고 있소?”
“알려지지 않았소. 당사자들이 입을 닫아서….”
“그래요?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당사자가 되었든 상대가 되었든, 무언가 말을 했을 텐데, 이상한 일이군요.”
“그 때문에 말이 많았소. 그렇지만 금세 시들해졌다고 들었소. 한 가지 아셔야 할 부분은, 소소검이 검을 겨눈 인물이 당금 화산파 장문인이라는 거요.”
“호오!”
청운은 서책을 다시 펼쳐서 둘의 이름을 보았다.
둘은 찰 한(寒)자를 성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소소검(小素劍) 한매(寒梅)
운형검(雲形劍) 한죽(寒竹)
‘이상하군. 원한이 있다면 한 할 한(恨)자를 사용할 텐데, 차가운 한(寒)자라니. 원한까지는 아니고 무언가 다른 사연이 있나 보군.’
청운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이름이 매와 죽이면, 난과 국도 있소?”
“둘과 함께 활동한 자들이 둘 더 있소. 그들은 빙백마녀라고 불리는 백살마녀와 빙혼마녀요.”
백살마녀(白殺魔女) 한난(寒蘭).
빙혼마녀(氷魂魔女) 한국(寒菊).
“사람들 중에는 그 넷을 사군자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소.”
청운은 미간을 모으며 빙백마녀라 불리는 둘에 관해서 물었다.
“한난과 한국은 어디 있소?”
“이번에 둘이 모습을 드러낸 걸 보면 그들도 어딘가에 있을 확률이 높다고 볼 수 있소.”
삼장로의 대답에 청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함께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군.’
그런 청운의 모습에 삼장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들이 살아 있는 걸 알면 많은 무림인이 가만있지 않을 거요.”
“어째서……?”
“활동할 당시에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피를 많이 봐서 원한을 많이 샀소.”
“흠. 그런데도 모습을 드러냈단 말이지요? 그것도 이름 없는 상단에서?”
수상한 냄새가 강하게 났다.
그들의 실력이 원수들의 시선을 무시할 만큼 강하다면야 문제없겠지만, 그것도 아니면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안 되었다.
청운과 삼장로는 그밖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 후, 삼장로가 돌아가고 홀로 남은 청운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배후의 세력이 더 비밀스럽고 큰 것 같군. 어쩐다…….’
* * *
정보를 모으는 일을 개방에 맡겨 놓은 청운은 웅천을 불러들였다.
“웅 백호, 이번 파견을 준비하면서 무공을 하사받았다고 하던데. 맞나?”
“네, 대인. 대인께서 황궁무고에서 가지고 나오신 무공이라 들었습니다.”
청운이 황궁무고에서 전해준 열 가지 무공 중 하나를 배운 듯했다.
“어떤 것을 배웠는가?”
“천류신공입니다.”
금의위에서 큰마음 먹고 하사한 무공이었다.
천류신공(天流神功).
하늘의 움직임을 특정한 형식에 담아서 만든 무공이다. 제대로 익힌다면 절정에 이를 수 있는 무공이었다.
배운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서 제대로 익힌 자들은 없지만 이대로 세월이 흐른다면 많은 이들이 절정의 경지에 오를 것이다.
“그래? 오늘 밤에 금의위를 집합시키게. 천류신공이라면 나도 대충이나마 살펴보았었네. 무공 증진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아는 바를 최대한 알려주겠네.”
상대해야 할 적은 개개인이 대부분 금의위보다 강했다.
영풍장만 처리할 거라면 자신과 몇 명만 나서도 되었다. 그러나 그들 뒤에는 또 다른 자들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들과 엮일 경우 금의위의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시간이 있을 때 금의위의 무공 수준은 최대한 높여야 했다.
“대인, 감사하옵니다!”
웅천은 그대로 부복하며 청운에게 대례를 올렸다.
무인에게 있어서 가장 원하는 것은 은전이 아닌 무공이다. 그런데 청운의 무위는 어느 정도인지 파악도 못할 만큼 강했다.
잘만하면 청운에게 한 자락 무공을 전수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드디어 그 기대감이 현실이 되었다.
“그건 그렇고, 자룡궁 일은 어찌 되었는가?”
“생각보다 자룡궁의 규모가 커서 시일이 더 걸릴 거라 합니다.”
“이백 년 역사를 지닌 자룡궁을 파헤치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 그래, 다른 일은 없나?”
“왜 없겠습니까? 황도에서 압력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감찰관들이 이를 악물고 버틴다고 합니다. 그들 일의 특성상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신기한 일입니다.”
모두가 청운이 그들의 약점을 잡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파견 나온 동창과 오군도독부 소속의 대표자들이 모두 고위직이기에 그나마 버티고 있는 듯했다.
“흠. 우리에게도 시간이 많지 않겠군.”
“예, 소장도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빨리 무언가 증거를 잡지 못한다면 자룡궁의 혐의가 벗겨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증거라는 것이 코에 붙이면 코걸이가 되고, 귀에 붙이면 귀걸이가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그들의 도망쳤다는 증인과 비밀통로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었다. 더욱이 그들과의 관계를 부정하고 가문의 역도였다고 없는 죄를 씌우면 또다시 살길이 생길 수도 있었다.
자룡궁이 가지고 있는 힘과 인맥이 너무 방대했다.
그래서 이런 일은 빨리 결론을 지어야 하는데 자룡궁과 관련된 자들이 너무 많았다.
‘할 수 없지. 어차피 그 일도 배후의 세력만 밝혀지면 해결될 일이다.’
청운은 그날 밤부터 금의위들에게 무공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가르친 적이 없는 청운이었지만 그에게는 혈황이 있었고, 무공과 다르긴 해도 학문을 가르쳤던 경험이 있었다.
덕분에 금의위 개개인의 무공을 살펴보고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혈황이 나서서 전적으로 금의위의 무공을 봐주지는 않았다.
가끔 청운이 놓치는 부분만 살짝 알려주는 정도였다.
청운에게 부족한 것은 경험이었다. 무공에 대한 이해만큼은 혈황도 인정할 만큼 대단했다.
어차피 경험은 본인들이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 무공의 이해에 대한 것만 배워도 금의위에게는 다시없는 기연이었다.
* * *
청운은 처음 영성에 와서 들렸던 객잔을 다시 찾아갔다.
같은 자리에 앉은 그는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차를 마셨다.
이층 창가에서 보이는 풍경이 그리 아름답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는 영풍장에서 빠져나오는 대로가 모두 보였다.
청운은 한참 동안 거리를 살피다가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보고 있는 혈황에게 말했다.
-혈황님, 저들을 한번 건드려봐야겠습니다.
[네가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왠지 삐진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