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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마존-48화 (48/257)

# 48

48화

촤라라라락!

너풀거리는 붉은 아지랑이가 혈황의 몸을 감쌌다.

삼백여 년 전, 일황, 삼제, 오왕, 칠군으로 불리던 강호고수 서열에서 제 일좌인 일황이 혈황이었다.

그가 독문무공을 꺼내 들었다. 삼백 년 만에 펼쳐지는 무공에 혈황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청운은 혈황과 달리 처음 접하는 살진 때문에 낭패한 모습이었다. 검은 야행복은 여기저기 찢겨져 있었다.

그렇다고 적의 공격이 감당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끝없이 연결되는 공격보다 환경 변화가 문제였다.

그것만 아니라면 여유로웠을 것이다.

상황이 지속되자 청운도 점점 지쳐갔다.

처음에는 곧 적응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실전 감각을 습득하며 좋아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이 점점 피폐해져 갔다.

혈사만마살진을 왜 악마의 진법이라 부르는지 청운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점점 진법에 녹아내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습격하는 자들을 처치하기 바빴다.

찌이이잉!

마침내 자룡궁의 타격대가 투입되자 청운은 더욱 힘에 부쳤다.

지형의 변화 역시 기존과 달리 거세지고 강력해졌다.

청운은 처음과 달리 적을 일격에 박살 내지 못하고 여러 번 휘둘러야 했다. 그들의 연계 공격이 이어질수록 청운은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쉐에엑.

챙챙, 챙.

쉴 새 없이 청운의 사혈을 노리고 공격해 들어오는 적의 공격은 아찔함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이미 진법에 정신이 반쯤 나갔기 때문에 제대로 상대하지 못했다.

놈들의 연계는 물 흐르듯이 이어졌고, 청운은 점점 수세에 몰렸다.

결국 청운은 본능적으로 천명신공을 끌어올렸다.

우우웅.

밝은 빛이 청운의 몸에서 뿜어졌다.

짙은 푸른빛이 감도는 내공이 사방으로 폭사되자 검붉은 안개가 급격히 뒤로 물러섰다.

천명신공 속에도 혈황신공과 마찬가지로 뇌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청운을 보호하듯이 둥근 원을 그리며 안개를 몰아냈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던 공격과 환경 변화가 뚝 끊기자 그제야 청운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이런, 내가 진법에 빠져 정신이 혼몽해져 있었구나.”

그는 몸속에 남아 있는 내공을 가늠해봤다.

‘삼 할 정도 남았나?’

무지막지한 내공으로 가득 차서 흘러넘치던 단전이 텅텅 비었다. 남은 내공은 고작해야 삼 할가량. 삼 할도 적은 양이 아니었지만 진법에 갇혀 있으니 많다고 볼 수도 없었다.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위험했다. 이미 말도 안 되는 경험을 했다. 다시 제정비하고 온다면 지금처럼 낭패를 당하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다.

‘혈황님이 걱정이군.’

문제는 혈황이었다. 그가 없이 혼자서 이곳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청운이 생각을 정리할 때 진법이 다시 꿈틀거렸다.

천명신공에 밀려났던 안개가 다시 청운을 덮치기 시작했다.

천명신공과 혈사만마살진이 만든 힘이 격돌했다. 검붉은 기운은 푸른빛이 감도는 맑은 기운과 대치했다.

뜻하지 않은 내공 대결이 시작되었다.

밀고 밀리는 힘겨루기는 오래지 않아 한쪽으로 치우쳐졌다.

“크으윽.”

청운의 입술을 비집고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삼 할 남은 내공으로는 혈사만마살진의 기운을 온전히 막아내기 불가능했다.

드득 드드득.

사방에서 옥죄는 압박에 청운의 몸에서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한번 흔들리기 시작한 몸이 점점 격하게 흔들렸다.

금세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때 청운의 몸속 깊은 곳에서 작은 울림이 들려왔다.

우우웅.

어딘지 끈적거리는 짙은 울림이었다.

청운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혈황진기?’

뇌기와 합쳐지면서 혈황진기는 변해버렸다. 혈황의 말에 의하면 반쪽짜리가 되었다고 했었다.

천명신공을 얻고 혈황진기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저 몸속 깊은 곳에 처박혀 있었는데, 청운이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몸을 움직였다.

우웅.

단전 깊숙한 곳에서 다시 울림이 생기며 붉은 기운이 솟구쳤다.

이내 단전을 나온 혈황진기는 독맥으로 치달리기 시작했다.

장강혈로 내려간 혈기가 허리를 거침없이 지나쳤다.

등줄기의 독맥들을 따라서 이동하더니 목 뒤의 아문혈을 돌아서 머리 꼭대기의 백회혈에 잠시 안착했다. 이내 윗입술의 끝인 태단에이르렀다.

독맥의 마지막에 다다른 혈기는 곧장 임맥을 따라서 죽 내려오더니 단전으로 흘러 들어갔다.

우우우우웅

한번 돌기 시작한 혈기가 연달아서 단전을 빠져나와서 거침없이 소주천을 시작했다.

‘혈황신공을 운기하면 안 되는데.’

덜컥 겁이 났다. 혈황신공의 특징 때문이었다. 붉은 아지랑이 같은 기운을 알아보는 자가 있을 수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며 천명신공을 운기했다.

우웅, 우우웅.

두 가지 신공을 동시에 운용되었다. 성질이 다른 두 가지 심법을 운용했다가는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었다.

그런데 청운은 이 일이 가능했다. 모두가 무당파의 양의심공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청운은 황실무고에 잠들어 있던 양의심공의 복사본을 얻을 수 있었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혈황은 양의심공을 알고 있었다.

청운의 뜻을 알았는지 혈황신공의 혈기가 양처럼 온순해졌다.

‘됐다.’

청운은 천명신공을 이용해서 단순하게 내공을 임맥과 독맥으로 보내며 일주천시켰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한 가닥 혈기가 흘러나오더니 천명신공에 도움을 주었다.

덕분에 삼 할도 남지 않은 단전의 내공이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다행이군.’

한 줄기 혈기만으로 바닥난 내공이 차오르다니. 혈황신공의 효능이 엄청나다는 것을 다시 느끼는 청운이었다.

덕분에 몰려드는 기운에 맞상대할 수 있었다.

그렇다 해서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놈들이 다시 습격하면 이 대치도 끝나겠구나.’

한고비 넘겼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청운에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습격하던 자들의 모습이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지금은 진법과 힘겨루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무슨 일이지? 왜 놈들이 습격을 안 하는 것이지?’

의아함도 잠시였다.

굉음과 함께 진법이 크게 출렁였다.

우르르르릉.

콰과과쾅!

무언가 강력한 폭발이 발생했다.

덕분에 청운의 몸 역시 앞뒤로 흔들렸다.

동시에 청운을 압박하던 기운이 거짓말처럼 뒤로 물러났다.

한곳을 향해서 검붉은 안개가 맹렬하게 몰려갔다.

덕분에 청운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응? 무슨 일이지?”

새로운 변화였다.

무언가 진법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자신을 압박하던 진법이 왜 물러났는지.

“혈황님?”

청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멀지 않은 곳에 혈황이 서 있었다.

붉은 혈기가 형황을 감싼 채 사방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아지랑이 같은 붉은 기운은 천지를 뒤덮으며 거치적거리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그 사이에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자룡궁 무인들이었다. 수십 명이나 허공에 대롱대롱 떠 있었다.

“헉! 어찌 저럴 수가.”

청운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정녕 인간의 무학이 아니구나.”

새삼 혈황신공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문득,

“어?”

청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찌 혈황님께서……?”

의문도 잠시 혈황을 두르고 있던 혈기가 하나둘 허공에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예전에 이런 경우를 한 번 겪은 적이 있었다. 처음 혈황과 만났을 때였다.

청운은 경공을 펼쳐서 혈황 곁으로 다가가며 전음을 보냈다.

-혈황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혈황은 청운을 힐끔 보더니 자신의 흩어지는 혈기를 둘러보았다.

알알이 흩어지며 허공을 수놓는 붉은 기운에 살며시 미소 지었다.

“아름답지 않으냐?”

혈황의 질문에도 청운은 대답 대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의 목소리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청운이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 채 입만 쩍 벌리고 있자, 혈황이 한마디 했다.

“혈사만마살진이 나에게 새로운 육신을 잠시나마 주었다. 진법이 곧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새로 얻은 육신도 사라지겠지.”

혈황의 말대로 진법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청운에게는 진법이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이상은 없으십니까?”

“글쎄다. 곧 원래대로 돌아가겠지. 지금도 혈기를 이용해서 붙잡는 중이다. 네가 한번 연구를 해보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진법의 원리를 아십니까?”

“대략적인 원리만 알고 있다. 워낙 복잡하고 기분 나쁜 진법이라서 깊이 파고들어 본 적은 없다.”

진법을 경험해본 청운은 충분히 혈황의 말을 이해했다. 자신도 진법이 불쾌했다.

“그럼 자세하게 알고 있는 곳은 자룡궁이겠군요.”

“그렇겠지. 놈들이 펼쳤으니.”

둘이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허공에 매달렸던 자들이 비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후두둑. 후두두둑.

“시간이 다 된 것 같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혈황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진법이 남아서 검붉은 안개가 시야를 막고 있었다.

이내 혈기를 갈무리했다. 허공에 흩어졌던 혈기가 일순간 혈황의 몸으로 빨려들었다.

혈황이 오른발을 살짝 들며 말했다.

“부탁하마.”

쿵!

오른발로 땅을 살짝 밟았는데 천둥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혈황이 밟은 땅에서부터 붉은 기운이 터져 나갔다. 동시에 희미해진 검붉은 안개를 덮쳤다.

일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

팟.

동시에 혈황의 뚜렷한 형체도 함께 사라졌다.

다행히 혈황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변한 거라고는 약간 희미해졌다는 것 말고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정신 차려라. 놈들이 몰려오지 않느냐.]

멍하니 있던 청운이 혈황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자들이 병장기를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청운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쌓인 게 많았다. 진법 안에서 겪은 일을 생각하면 당장 자룡궁을 박살 내고 싶었다.

그러나 이내 손에서 힘을 뺐다.

“오늘은 이쯤하지요.”

[그럼 더 싸우려고 했냐?]

청운이 말없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런 청운의 모습에 혈황이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애초에 놈들을 흔드는 게 목적이었으니 그만 돌아가자.]

“그게 좋겠습니다. 생각해 보니 몸 상태도 좋지 않네요.”

청운은 양발에 내공을 모아서 바닥을 찼다.

팟.

허공을 날아오르며 곧장 신법을 펼쳤다.

무영신투의 비천무영신법이었다.

그는 몰려드는 자룡궁 무사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유유히 모습을 감췄다.

청운이 한차례 휩쓸고 간 자룡궁은 침묵에 빠졌다.

현현미리말살진까지 꺼내 들었는데도 흉수를 잡지 못한 것이다.

쾅!

거대한 대전을 뒤흔드는 굉음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곤룡포를 입은 구호량이 붉어진 얼굴로 호통을 쳤다.

“네놈들은 무얼 했느냐? 침입자가 많은 것도 아니고, 고작 한 놈을 놓쳐? 현현미리말살진까지 펼치고도?”

극도로 화가 난 그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전신에서 광폭한 기운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무릎을 꿇고 있는 간부 수십 명이 침도 제대로 삼키지 못했다.

“입이 있으면 어서 말을 해보란 말이다!”

콰콰쾅!

구호량의 손에서 청광이 번쩍이더니 열두 기둥 중 하나를 강타했다.

청강석(靑剛石)으로 된 단단한 기둥에 선명한 손자국이 깊숙하게 새겨졌다.

그는 화가 덜 풀렸는지 씩씩거리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는 부하들이 보였다.

이를 갈며 가까스로 분노를 누른 구호량이 태사의에 털썩 주저앉으며 차갑게 말했다.

“보고해 봐!”

“예, 먼저 물적 손실입니다. 전각 다섯 채가 완파되었고 다섯 채가 부서졌습니다. 담장과 조형물, 그리고 그 안에 있던 물품들은 집계가 안 되고 있습니다.”

“끄응.”

구호량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재물이 아니었다.

‘설마 놈이 그곳까지 들어간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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