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47화
빠르게 낚아채며 눈앞으로 끌어당긴 청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손이 반쯤 썩은 얼굴을 하고 있는 시체의 가슴을 잡고 있었다.
퍽!
청운은 본능적으로 밀어서 던졌다.
잡힌 시체가 뒤로 날아갔다.
“뭐지?”
청운은 성큼 걸음을 옮겨서 날아간 시체를 보았다. 얼굴이 박살 난 시체였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뭉개져 있었다.
그런데 보고 있는 사이에 연기처럼 흩어져서 사라졌다.
쉬익.
다시 무언가가 가까운 거리에서 기습공격을 가해왔다.
청운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몸이 먼저 반응했다.
퍽!
수박 깨지는 소리가 들리며 무언가가 털썩 쓰러졌다.
청운은 보법을 펼치며 앞으로 나갔다. 불과 두 걸음 옮겼을 뿐인데 눈앞에 커다란 바위가 갑자기 나타났다.
쿵.
“크윽.”
미처 피하지 못하고 바위에 부딪혔다.
자신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 근체에 바위가 없었다. 그러니 진법이 만들어낸 허상일 텐데 이상했다. 부딪치면서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주춤 뒤로 물러선 청운은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추며 기수식을 취했다.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는데, 저 바위는 뭐지?”
눈앞에 떡하니 버티고 충격을 준 바위의 존재를 믿기 어려웠다.
하긴 시체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판이니 바위인들 대수일까.
더구나 생각하며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다.
다시 안개 속에서 무언가가 공격을 해왔다.
후웅. 펑!
이번에도 장풍에 맞은 무언가가 박살났다.
“강시도 아니고. 도대체 이 시체 같은 것은 뭐야?”
청운은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였다.
채 세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건만 이번에는 낭떠러지기가 나왔다. 한 발자국만 더 내디뎠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등골이 서늘해졌다.
처음 접하는 형태의 진법이었다. 몇 차례 검진을 상대해봤지만 이처럼 지형마저 실체화시키는 진법은 처음이었다.
‘혈황님께서 조심하라 이른 것이 이것이었나? 그런데 어디 계시지?’
언제나 자신 곁에 있던 혈황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혈황님!”
혈황을 불러봤지만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다시 서늘한 기운이 사방에서 몰려왔다.
으득.
내공을 쌍장에 더 불어넣었다.
“후우.”
심호흡한 청운이 강하게 앞으로 쌍장을 뻗었다.
후웅!
검붉은 안개가 좌우로 쫙 갈라지며 자룡궁 모습이 보였다.
안개는 물처럼 투명한 덩어리 형태였다.
스르륵.
그런데 언제 갈라졌냐는 듯이 다시 안개가 밀려와서 갈라진 틈을 메꿨다.
‘이것 봐라?’
처음 접하는 기이한 현상이었지만 청운은 무언가 느껴지는 게 있었다.
퍼버벙.
그러나 아쉽게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다시 안개 속에서 몰려드는 무언가를 쳐내야 했다.
“놈은 어찌하고 있느냐?”
구호량이 한 중년인에게 질문했다.
중년인이 부복한 채 대답했다.
“곤궁(坤宮)에 있습니다.”
“잡았군.”
구호량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누구라도 한번 빠지면 살아남지 못하는 진법이 현현미리말살진이다.
이 진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아서 한번 펼치면 후유증이 많았기에 좀처럼 발동시키지 않는 진법이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적이 워낙 강한 듯해서 무리를 하며 펼쳤는데 마침내 적이 진법 안에 제대로 갇힌 듯했다.
구호량은 미소를 지었다.
“몇 놈이나 되더냐?”
“그것이… 한 명이라고 하옵니다.”
“……뭐라? 한 명? 그럼 한 놈 때문에 현현미리말살진을 펼쳤다는 말 아니냐?”
“송구하옵니다.”
중년인은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구호량은 중년인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화를 냈다.
“진법을 한번 발동하는 데 얼마나 많은 돈을 허비하는지 모르느냐?”
자신이 분노해서 앞뒤 가리지 않고 발동시키라 명해놓고는 다른 소리를 한다. 그렇다고 따질 수도 없었다.
자칫 이대로 궁주가 화를 더 낸다면 자신은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기에 중년인은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놈의 무공이 엄청납니다.”
“엄청나다니?”
구호량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고개마저 앞으로 살짝 빼며 흥미를 보였다.
“벌써 한 시진을 버티고 있습니다. 이미 백 명이 넘는 인원을 투입했지만 놈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허허 믿기 힘든 일이군. 그 살진 속에서 한 시진을 버텨? 그것도 백 명이나 투입했는데?”
“예, 그렇습니다.”
구호량의 미간이 확 일그러졌다.
“그럼 적어도 최상급의 절정고수라는 말인데….”
“파악하기로는 그렇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대어가 걸렸다.
구호량은 태사의에 몸을 뉘며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사내는 궁주의 시선에 움찔하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궁주님. 이 상태로 시간이 흐르면 피해가 너무 커질 수 있습니다. 그만 타격대를 투입하심이 어떨는지요?”
자룡궁 무사 중에서도 진법에 휩쓸린 자들이 많았다.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른다면 피해가 더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구호량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 놈이 강하다면 타격대를 투입하는 건 시기상조다. 좀 더 힘을 뺀 다음에 투입해.”
“예, 알겠습니다.”
진법은 진법에 빠진 자의 힘과 정신을 갉아먹는다. 단 한 번도 깨지지 않은 현현미리말살진이다. 피해가 조금 더해져도 아직은 타격대의 힘을 소모할 필요가 없었다.
중년인이 밖으로 나가자 구호량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대전 안이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청운은 한 시진 넘게 진법 안에서 활로를 찾아다녔다.
한 발 한 발이 살얼음판이었다. 절벽이 나타났다가 눈보라가 휘몰아쳤고 커다란 파도가 밀려왔다.
때로는 호랑이와 용이 나타나서 공격했고, 사이사이에서 괴이하게 생긴 자들이 달려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공격하는 자들의 실력이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비록 아슬아슬하게 피한 경우도 있었지만 상처 입지는 않았다.
덕분에 청운의 실전경험이 늘어났다. 마치 무공수련을 하듯이 여러 가지 상황에서 임기응변을 익히는 계기가 되었다.
“후우, 끝도 없군.”
잠깐씩 쉴 틈이 없었다면 더 빨리 지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히 공격하는 사이사이에 잠깐의 틈이 있었다.
청운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눈에 보이는 건 검붉은 안개뿐이었다.
‘진법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어.’
자신의 움직임에 맞춰서 진법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앞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돌아오면 나타나는 현상이 달랐다.
‘변화가 없는 진법이라면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같은 현상이 나타나야 하는데, 이 진법은 생소한 지형이 나타나고 있다.’
좋지 않았다. 진법의 원리가 파악되지 않았다.
혈황이라도 곁에 있다면 진법의 요체를 알 수 있을 텐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불러보아도 돌아오는 건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조금 버거운데?’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지쳐서 먼저 쓰러질 것 같았다. 지금도 조금씩 숨이 차오르고 있었다.
“타핫!”
청운은 다시 한번 기합을 넣었다. 안개 속에서 치켜들어오는 자들을 피떡으로 만들었다.
빠각 소리와 함께 두개골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지만 청운은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았다.
그렇게 청운의 혈투가 이어졌다.
한편, 어느 순간 혈황은 홀로 남게 되었다.
청운과 언제나 함께하다가 갑자기 헤어지게 되자 의아했다.
[진법의 영향인가?]
청운의 모습이나 기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무심코 자신의 곁을 지나가는 흰 덩어리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턱.
와작.
제 모습도 갖추지 못한 덩어리가 혈황의 손에 잡혔다. 힘을 주자 일그러지며 허공에서 사라졌다.
[이것 봐라?]
혈황은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며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촉이었다.
다시 손을 앞으로 들었다.
흡자결의 묘를 운용했다.
턱. 와작.
다시 왼손에 빨려 들어온 하얀 무언가가 터져 나갔다.
다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혈황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촉이군. 혈사만마살진이 유부의 귀신을 불러낸다고 하더니, 영혼인 나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
혈사만마살진은 금지된 진법이다.
영혼마저 소멸시킨다는 몹쓸 진법이기에 사용이 금지되었다.
더군다나 이 진법을 펼치면 자칫 주변에 있는 자들이 진법에 빨려 들어간다. 살아 있는 마물과 같은 진법이기에 그 변화가 무쌍하고 위험했다.
그런데 죽음의 살진이라고 불리는 진법이 자신에게 힘을 주는 것 같았다.
[어디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볼까?]
혈황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파도가 밀려들었지만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허상은 아니었다. 단지 혈황의 몸 주위로 뻗어 나간 아지랑이 같은 혈기를 뚫지 못할 뿐이었다.
펑!
파도에 구멍이 크게 뚫리며 힘을 잃고 사그라졌다.
다시 한 발 내디뎠다.
이번에는 집채만 한 호랑이가 커다란 앞발을 좌우로 휘둘렀다. 두 줄기 혈기가 뻗어 나가서 호랑이의 양발을 꿰뚫었다.
푸, 푹.
어흥!
호랑이가 울부짖었다.
혈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갔다.
이번에는 집채만 한 커다란 흑룡이 나타나서 입을 쩍 버리며 한입에 혈황을 삼키겠다는 듯이 인정사정없이 달려들었다.
크아아아앙!
혈황의 앞에서 커다란 괴성이 들리며 한 마리 혈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두룡 중 일룡이 현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육중한 몸을 지닌 혈룡은 두 눈을 번들거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이내 달려드는 흑룡의 머리를 살짝 피하며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카아아악!
처절한 용음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혈룡은 흑룡이 죽겠다고 울부짖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목덜미를 사정없이 흔들며 뜯어냈다.
바닥에 내동댕이처진 흑룡은 한 차례 꿈틀거렸다. 이내 축 늘어지더니 안개 속으로 스르르 사라졌다.
혈룡은 혈황을 한 차례 내려다보더니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자취를 감췄다.
[허허, 혈황진기를 이용한 구두룡을 현신시키다니.]
새로운 사실에 혈황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상대한 존재들이 허상일지, 아니면 유부를 떠도는 영혼일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저 부하들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알고만 있었다.
예전에도 한 번 상대해봤었던 진법이기에 그 변화가 이상하거나 생소하지는 않았다. 무언가 예전보다 진법이 약해진 것 같기는 했지만 중요하지는 않았다.
[이 녀석을 빨리 찾아서 상의해야겠는데.]
어쩌면 복수를 하는 데 자신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이렇다 할 확신은 없지만 약간의 기대감 정도는 가져도 될 듯했다.
혈황은 시커먼 무언가가 자신 곁을 지나치는 것을 보았다. 이번에는 영혼이 아닌 진법 속에 숨어든 무사였다.
혈황은 곧장 그자에게 혈기 한 가닥을 쏘아 보냈다.
슈욱 퍽!
머리통에 작은 구멍이 생기며 혈기가 상대의 숨통을 끊었다.
[되는군!]
살아 있는 존재에게도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혈황의 눈빛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뒤로도 혈황은 사람과 진법이 만들어낸 환상과 괴물들을 여러 차례 상대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잘하면 녀석에게 큰 도움이 되겠군. 하하하.]
원 없이 무공을 사용했다. 상대가 너무 하찮은 존재라는 것과 약하다는 게 아쉬웠지만 상관없었다. 지금은 무공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퍼버벅.
혈황신공에 의해서 새롭게 나타난 인물들의 미간이 꿰뚫렸다.
혈황은 쓰러지는 자들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며 느낄 수 있었다.
[흠……. 슬슬 시작하려나 보군.]
그는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공격한 자들은 맛보기였다. 진짜 혈사만마살진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어디 한번 놀아볼까?]
웅! 우우웅!
혈황의 몸에서 웅장한 소리가 울리며 붉은빛이 폭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