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478)
“정체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네 각이 동시에 공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동시에?”
공손보기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각 각에는 사백 명의 무인이 있다. 그들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는 무인의 수가 더 많아야 한다. 적은 수로 공격을 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알기론 하남에 그런 세력을 거느린 단체는 없다. 아울러 그런 대규모 무인이 이동했다면 운성 이목에 걸려들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런데?”
네 각이 공격당하고 있다면 운각도 침입자들의 계획에 포함돼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을 공격하는 자들은 없다. 성주가 운림 무인 사백 명을 데리고 갔다고는 하지만 아직 백여 명이 남아 있다.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건가? 하지만…….’
공손보기는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총관은 올라가서 계속 종을 치게.”
“알겠습니다.”
오양군은 서둘러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아악!”
“으아악!”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묵운각의 부각주 차황은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그가 깊은 잠에서 깬 것은 두 번째 비명을 듣고 나서였다. 사실은 첫 번째 비명도 들었다. 하지만 그 비명은 꿈속에서 일어난 일인 줄 알았다. 그러다가 두 번째 비명이 들려오자 꿈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벌떡 일어나 옷을 입고 전마도를 챙겨 들고 뛰어나왔다. 밖은 이미 화마에 휩싸여 있었다. 그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묵운각 대원들을 무자비하게 격살하고 있었다.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곧바로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적과 교전을 하면서 알아낸 사실 중 하나는 공격해 온 자들이 상당히 늙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강했다. 묵운각 대원들도 약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적은 더 강했다. 게다가 무인의 수도 두 배 이상으로 보였다. 대원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그때 종소리를 들었다. 운각 꼭대기에 매달려 있는 운종 소리였다. 종을 친 사람이 공손보기 군사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때부터 포위망을 뚫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적의 포위망은 완벽했다.
“방법이…… 있다.”
차황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는 급하게 묵운각 무기고로 달려갔다. 외부로 나갈 수는 없지만 내부는 아직 점령되지 않은 상태였다. 무기고 안에서 거무튀튀한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반 주먹 크기의 물체 이십여 개가 보였다. 벽력탄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주머니 안에 챙겨 밖으로 나왔다.
“묵운각 대원들은 이쪽으로 와라!”
그는 내공을 모아 소리쳤다.
“크악!”
“아악!”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사방에서 들렸다. 비명을 뒤로하고 수십 명이 차황 곁으로 모여들었다.
“모두 나를 따라라!”
차황은 벽력탄 두 개를 꺼내 전방으로 내던졌다. 앞에 있는 자들이 적인지 아군인지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포위망을 뚫는 게 우선이었다. 벽력탄은 곧바로 어둠을 뚫었다.
콰앙! 콰앙!
“아악!”
“으악!”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가자!”
차황은 다시 벽력탄을 던지며 몸을 날렸다. 벽력탄 덕분인지 포위망을 뚫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금세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몇 명이냐?”
차황은 옆에서 달리는 부하에게 물었다.
“백 명 정돕니다.”
“빌어먹을!”
차황은 욕설을 내뱉었다. 사백 명 중 포위망을 뚫은 사람이 백 명뿐이란다. 기가 막혔다.
“하지만…….”
차황은 이를 악물었다.
지금은 기습에 당했지만 철검우와 각주들이 나오면 달라질 거라 확신했다.
그는 내공을 더욱 끌어 올려 속도를 냈다.
잠시 후 그를 비롯한 묵운각 대원 백 명은 운각에 도착했다.
“어서 오게.”
운각에서 그를 맞은 사람은 군사 공손보기였다.
“우리만 당한 겁니까?”
차황은 물었다.
“아니네. 전 각이 동시에 공격을 받았네.”
“어떤 자들인지 알아냈습니까?”
“아직 모르네.”
공손보기는 고개를 저었다. 계속해서 적의 정체에 대해 파악을 시도했지만 나오는 게 없었다.
휙! 휙휙! 휙!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다른 각 대원들이 도착했다. 두 번째로 들어온 자들은 백운각 대원들이었다. 백운각 대원의 수는 백오십 명이었다.
“부각주는?”
공손보기는 백운각 대원들을 보며 물었다.
“탈출 도중에 당했습니다.”
대원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으음!”
공손보기는 신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오른편 사내에게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탄탄한 체구를 가진 중 키의 사내는 적운각 부각주 유헌이었다.
유헌의 손에 들린 검에서는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자네들은 어떤가?”
“칠십 명만 살아 나왔습니다.”
“피해가 막심하군. 자네들은?”
이번엔 맨 왼편에 서 있는 사내를 보며 물었다. 키가 훤칠하게 큰 그자는 연운각 부각주 장석이었다.
“우린 이백 명이 빠져나왔습니다.”
“비밀 통로로 나온 겐가?”
원래 연운각은 운성 초창기 때 성주 거처로 사용하던 건물이라 외부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었다. 다른 각에 비해 생존자가 많은 이유가 그 비밀 통로 덕분인 듯했다.
“네.”
장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집에서 쉬고 있던 무인들이 속속 도착했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공손보기에게 와서 보고를 했다.
한 식경 정도가 흐르자 운성 대원들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공손보기는 인원을 파악했다.
“총 육백 명입니다.”
인원 파악을 마친 차황이 공손보기에게 보고했다.
“삼 할도 안 되는군.”
공손보기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성주 대행은 아직 연락이 안 되는 겁니까?”
장석이 물었다.
“고전으로 들어간 뒤로는 소식이 없네.”
“사람은 보내 보셨습니까?”
장석이 다시 물었다.
“세 명을 보냈는데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네.”
공손보기는 거짓말을 했다. 처음부터 철검우에게 지금 상황을 보고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우리 전력으로는 적과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다른 문파에 연락해서 지원군을 보내 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문주들과 연락을 해야 하고요.”
장석은 눈치가 빠른 자였다. 그는 대번에 공손보기가 철검우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지금은 자존심 싸움을 할 때가 아니었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건대 지원을 받지 못하면 운성에 남은 건 멸문뿐이다.
“다시 보내도록 하세.”
공손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전과 각 문파로 모두 보내야 합니다.”
“물론 그럴 생각이네.”
“지원 요청은 유 부각주가 맡아 주게.”
공손보기는 유헌을 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유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바로 인원을 편성했다. 그가 뽑은 무인의 수는 총 오십 명이었다. 그들 중 열 명은 고전으로 향하고 사십 명은 각 문파로 갈 자들이었다. 각 문파로 갈 자들은 유헌이 인솔하기로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유헌은 포권을 취하고 자리를 떴다.
유헌 일행이 자리를 뜨고 나자 공손보기는 곧바로 방어 진형을 구축했다. 원래는 운성 전역을 방어하는 진식이 있는데, 그 진식을 펼치는 데 들어가는 최소 인원이 일천 명이다. 지금 남은 인원으로는 구축이 불가능하다. 싸우면서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다.
“으악!”
“아악!”
“크아악!”
비명이 들려온 것은 일각 후였다.
공손보기는 굳은 얼굴로 상황을 주시했다. 아직 누구의 비명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반 각 정도가 흘렀을 때 일단의 무리가 운전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밖으로 나갔던 대원들이었다.
“어떻게 된 건가?”
공손보기가 대원 중 한 명을 보며 물었다.
“우, 운전은 완벽하게 포위됐습니다.”
“부각주는?”
“죽었습니다.”
“들어올 땐 아무도 없었습니다, 군사.”
차황이 소리쳤다.
“일부러 막지 않은 거였어.”
공손보기는 넋을 잃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차황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다수의 적을 격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분산시켜 놓는 것이다. 이번 적의 기습 또한 그렇게 이루어졌고 자신들은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다. 그래서 결사항전을 위해 운전으로 모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적의 계략이었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놈들은 운성을 완전하게 지워 버릴 생각이네. 그래서 운전으로 향하는 길만 열어 주고 다른 곳은 틀어막아 버린 거라네.”
“운성의 모든 무인들이 이곳으로 모이길 기다렸다는 겁니까?”
이번엔 장석이 물었다.
“이곳에 있는 우리는 운성의 전 전력 아닌가.”
“…….”
장석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아닐 겁니다. 놈들이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기습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차황은 부정하듯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
슉! 슉슉슉! 슉슉슉!
바로 그때 붉은 덩어리 수백 개가 담을 넘어왔다.
턱! 턱턱턱! 턱턱턱! 턱턱턱!
운전 곳곳으로 박힌 붉은 덩어리들은 바로 불화살이었다. 화살은 쉬지 않고 날아왔고 운전은 곧 불길에 휩싸였다.
“불을 꺼라!”
“물을 떠 와라!”
몇몇 대원들이 우물로 달려가 물을 떠 와 불이 붙은 곳을 향해 끼얹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슉!
퍼억!
“아악!”
그나마도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양동이를 든 자의 몸을 뚫었다.
“대원들은 멈춰라! 불을 끄지 마라.”
공손보기는 고함을 내질렀다.
슉! 슉슉슉! 슉슉슉!
이번에는 일반 화살이 날아왔다. 화살은 정확하게 운성 무인들이 은신해 있는 곳으로 떨어졌다.
푹! 푹푹! 푹푹!
“아악!”
“으악!”
“크악!”
운성 무인들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휙! 휙휙!
콰앙! 콰앙! 콰앙! 콰앙!
“크아아악!”
“으아아악!”
“아아아악!”
폭발음에 이어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저, 저건 벽력탄!”
공손보기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폭발 소리는 동서남북 네 곳에서 다 들렸다.
“저, 저기…….”
대원 한 명이 담을 가리켰다. 대원이 가리킨 담 위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무인들이 올라서 있었다. 무인들은 검은 옷을 입고 복면을 쓰고 있었다. 복면인들은 아래로 뛰어내렸다.
스윽! 스윽! 스윽! 스윽! 스윽!
중간쯤 내려오던 자들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극고의 은신술이었다.
“놈들은 은신술을 펼친다, 주의하라!”
공손보기는 고함을 내질렀다.
“컥!”
“큭!”
“윽!”
하지만 그의 경고는 소용없었다. 짤막한 비명이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이래 가지고는…….”
공손보기는 이를 악물었다.
“전 대원들은 은신을 풀어라!”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와아!”
“우와아아아!”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운성 무인들은 벌떡 일어나 앞으로 달렸다. 육안으로 적이 보이면 부딪쳐 볼 텐데 은신술을 펼치고 있는 상태라 마땅히 공격할 방법이 없었다. 허공을 향해 무기를 휘둘러 보지만 걸려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커억!”
“크윽!”
“아악!”
상대를 확인하지 못하고 무기를 휘두른 결과는 참혹했다. 무기가 지나간 빈틈을 향해 적의 무기가 파고들었다. 적의 무기는 운성 무인들의 목을, 가슴을 혹은 단전을 갈랐다. 운성 무인들의 수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