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477)
운성 멸문
“커억!”
여강은 비명과 함께 주르르 밀려났다.
그의 얼굴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지금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구경하시는 분들이 지루해하는 것 같아서 이젠 끝을 내야 할 것 같습니다.”
금장생은 여강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그는 여강을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은 커다란 바위였다.
바위 뒤에는 두 사람이 숨어 있었는데 그들은 뇌마신군 벽운양과 천수신의 황보충이었다.
두 사람 역시 여강만큼이나 놀란 상태였다.
특히 황보충은 금장생과 불여하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네 각주를 저렇듯 쉽게 처리할 줄은 몰랐다.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벽운양이 황보충에게 물었다.
“선택의 여지가 있기나 합니까?”
“그렇군요.”
벽운양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관천행 일행은 물론이고 각주들마저 상대가 안 되는 초극 강자들이다. 그런 자들과 싸우는 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 할 수 있다.
금장생과 불여하의 처분에 맡기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여강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끝났군.”
황보충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나가야겠죠?”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보충은 바위 뒤에서 나왔다.
“역시 두 분이셨군요.”
황보충과 벽운양을 발견한 금장생이 말했다.
“강자라는 건 알았지만 저들을 그토록 쉽게 없앨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소. 그런데…….”
황보충은 금장생을 가만히 보았다.
“저들을 왜 없앴냐는 질문이십니까?”
“은원 관계가 없는 걸로 압니다만.”
“남궁창하는 내 부인을 겁탈하려 했고 철검우는 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철검우 성주 대행이 장주를 없애려고 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저자들은 남궁창하가 내 부인에게 죽임을 당하자, 그의 명예를 지켜 준다는 웃기지도 않은 이유를 들어 살인멸구를 시도했습니다. 그런 자들을 그냥 두라는 겁니까?”
“그럼 이 안에 들어온 자들 중에 우리 두 사람만 남은 셈이군요.”
“그렇습니까?”
“이젠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오?”
“동창 부제독과 금의위 부영반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아십니까?”
“그게 무슨…….”
황보충과 벽운양은 의아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금장생은 신분증명서를 꺼내 보여 주었다.
“맙소사! 대인.”
황보충과 벽운양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일반 양민에 비해 무인의 신분은 높은 것처럼 보이지만 동창과 금의위 이인자 앞에서는 거기서 거기다.
두 사람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댄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신분이 동창 부제독과 금의위 부영반이다.
“일어나세요.”
금장생은 내공으로 두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황보충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지요. 나는 운성을 없앨 생각인데, 두 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금장생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운성은…….”
황보충은 말끝을 흐렸다.
성주 대행 철검우를 비롯한 각주들이 죽었다고 해도 운성은 여전히 춘추오패의 한 곳이다. 게다가 성주 철전혼도 살아 있다.
“두 분은 가만히 있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동창과 금의위에서 하는 일인데 가만있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황보충이 말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제 그만 나갈까요?”
금장생은 걸음을 옮겼다.
“참!”
금장생은 고개를 돌려 벽운양을 보았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벽운양이 말했다.
“혹시 집에 남는 화탄 같은 거 없습니까?”
“화탄요?”
“네.”
“화탄이라면 황실에도…….”
“공식적으로 쓸 것 같으면 관주께 부탁할 이유가 없겠지요.”
“그러니까 비공식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이군요.”
“비용은 황실에 납품하는 가격으로밖에 못 드립니다.”
“굳이 주시 않으셔도…….”
“아닙니다. 모두 지불하겠습니다. 대신 숨겨 두었던 것까지 모두 내주셔야 합니다.”
“그걸 운성에 사용하면 저는 매장당하고 맙니다.”
“운성에는 사용하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모두 내드리겠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일행은 외부로 나가는 통로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나가는 건 쉬웠다. 계단을 올라가는 것으로 해서 일 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일단의 무리가 금장생 앞으로 왔다.
“오셨습니까?”
“오셨어요?”
그들은 금장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맨 오른편에 있는 사람은 혈가의 새로운 가주가 된 오다아이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도쿠가와 신켄과 팔촌의 촌장들이 서 있었다.
금장생은 이번 작전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다. 팔촌이 움직이는 걸 아는 사람은 아수수뿐이다.
“저쪽에 장소를 마련해 두었어요.”
오다아이가 근처에 있는 일 층 건물을 가리켰다.
일행은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집 주위에는 혈가 무인들이 은신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불을 켰다.
경비를 서던 무인들의 숙소인 듯 안에는 탁자와 의자 그리고 간이침대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오다아이는 종이를 펼쳤다. 그녀가 펼친 종이에는 건물들이 그려져 있었다.
“운성 구존가요?”
금장생이 그림을 쳐다보며 물었다.
정중앙과 동서남북 네 곳에 큰 건물이 한 채씩 서 있고 외곽으로는 작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네. 중앙에 있는 이 건물이 운각인데 지금은 거의 비어 있는 상태예요.”
오다아이가 정중앙의 커다란 건물을 가리켰다.
“그리고 여기가 묵운각이에요.”
운각 북쪽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사백 명이 상주해 있는 걸로 아는데…….”
“거긴 우리 철전과 옹전에서 맡기로 했습니다.”
철촌의 촌장 육전수가 말했다.
“동쪽의 적운각은 우리 의전과 금전에서 맡기로 했어요.”
의전 촌장 어설아가 육전수의 말을 받았다.
“남쪽의 연운각은 우리 도전과 공전에서 맡기로 했습니다.”
“서쪽의 백운각은 우리 목전과 북전에서 맡기로 했습니다.”
도전의 촌장 천득과 목전의 촌장 막부산이 차례로 말했다.
“혈가는…….”
“우린 운전을 비롯해서 나머지를 정리하기로 했어요.”
마지막으로 오다아이가 말했다.
“공격 시간은 언제 하기로 했죠?”
“그건 팔왕께서 전해 주셔야죠.”
“축시 초로 하죠.”
“알았어요.”
“알겠습니다.”
오다아이를 비롯한 팔전 촌장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끝나고 다음 행선지는 정했나요?”
금장생은 일행을 보며 물었다.
“저희가 철선문을 맡기로 했습니다.”
가장 먼저 육전수가 말했다.
“저희는 백호당입니다.”
“저희는 철궁전입니다.”
“저희는 천기룹니다.”
“저희는 백운팝니다.”
“저희는 춘추서원입니다.”
각 촌장들이 차례로 말했다.
“그럼 남궁세가는…….”
금장생은 오다아이를 보았다.
“우리와 북전이 함께 가기로 했어요.”
“일이 끝나고 난 후 귀신처럼 빠져나가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알고 있습니다.”
촌장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합시다.”
“그럼.”
촌장들은 일제히 포권을 취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런 그들을 황보충과 벽운양은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금장생을 동창 부제독과 금의위 부영반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운성을 하룻밤 만에 없애 버릴 정도로 엄청난 전력을 지닌 무림 세력의 수장이 된 것이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두 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금장생은 황보충과 벽운양을 보며 물었다.
“가겠다면 보내 주실 겁니까?”
황보충이 물었다.
“가겠다는데 내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보내 드려야지요.”
“상황을 좀 더 지켜보고 싶습니다.”
황보충은 두 세력의 싸움의 결과를 확인하고 싶었다. 비록 금장생이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것처럼 말을 했고 노인들 또한 자리를 떴지만 이곳은 춘추오패의 한 곳인 운성이다.
금장생의 말처럼 그리 쉽게 당하지 않을 거라는 게 황보충의 생각이었다.
“좋을 대로 하세요. 갑시다.”
금장생은 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한 식경 후 그와 오다아이, 도쿠가와 신켄은 운성의 중심 건물인 운각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팔왕.”
그곳에 있던 신풍사 사주 사이토가 인사를 했다.
금장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운각을 보았다.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공룡처럼 적막감이 감돌았다.
그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됐다.
그곳은 운각 이 층이었다. 창문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 나오고 있었다.
벌컥!
곧 창문이 열렸다.
“공손보기.”
금장생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휴우!”
공손보기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틀 전 철검우가 각 문파 문주들을 데리고 고전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다. 아무리 철검우가 성주 대행이라고 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 분명히 있다. 금역 출입 또한 하지 말아야 할 일 중 하나다.
그런데 철검우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일 처리를 해 버린 것이다.
“오래 앉아 있긴 했지.”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들어올 때는 환영을 받지 못했지만 은퇴는 화려하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불가능한 것 같다.
공손보기는 문을 닫고 한편에 두었던 술을 꺼냈다. 그리고 잔에 따라 마셨다. 술이 들어가자 답답했던 속이 약간 뚫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술 한 병을 다 비우고 잠자리에 들었다.
“크아악!”
비명을 들은 건 그때였다.
공손보기는 벌떡 일어났다.
“아악!”
“으악!”
“적이다!”
“크아악!”
비명이 연이어 들려왔다.
“이게 무슨…….”
공손보기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러고는 뛰듯이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없느냐!”
그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벌컥!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뛰어나왔다.
“어떻게 된 건지 당장 알아봐라!”
공손보기는 버럭 소리쳤다. 밖으로 나온 자는 급하게 뛰어나갔다.
“아악!”
“크악!”
“으악!”
이번에는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맞다, 종!”
공손보기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잠시 후 옥상에 있는 종 앞에 도착했다. 바로 종을 쳤다.
뎅뎅뎅! 뎅뎅뎅! 뎅뎅뎅!
종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포위망을 뚫은 대원들은 운각으로 가라!”
“운각으로 가라!”
다행히 비상종은 제대로 전달이 된 모양이었다. 공손보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었다.
“도대체 어떤 자들이…….”
공손보기는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아니, 운성이 너무 강해 누군가 혹은 어떤 세력에 의해 멸문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고 지금의 고난도 헤치고 나갈 거라 확신했다.
“군사님!”
오십 대 중반 사내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총관 오양군이었다. 조금 전 공손보기의 외침을 듣고 뛰쳐나온 자가 바로 오양군이었다.
“어떤 자들인가? 규모는 얼마나 되고?”
공손보기는 인사를 받을 겨를도 없이 급하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