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92)
격돌한 혼천오대천력
이상한 느낌에 이호는 잠에서 깼다. 마치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내기를 끌어 올려 주위를 살폈다. 눈은 자는 것처럼 감은 채였다.
‘헉!’
비어져 나오려는 신음을 꿀꺽 삼켰다.
바로 옆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옥구도, 부활전사단 대원도 아니었다. 그들이 흘린 기운이라고 보기엔 너무 엄청났다.
―그만 눈을 뜨는 게 어떠냐?
이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라, 라헬 장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날 아는구나.”
헌원소야가 물었다.
“당신에 대한 건 더 이상 비밀이 아닙니다.”
이호는 벽에 기대앉으며 말했다.
‘이놈?’
헌원소야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호가 벌벌 떨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너무 태연했던 것이다.
“놀라지 않느냐?”
그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놀라야 하는 상황입니까?”
“그런 건 아니다. 다만 그들이 날 처단해야 할 적으로 간주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적으로 간주한 건 맞습니다.”
“그런데 왜 가만있느냐?”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았는데 굳이 덤벼서 개죽음당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머리 회전이 빠르구나.”
“칭찬입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다. 혹시 그들과 내가 어떻게 해서 적이 됐는지 아느냐?”
“모릅니다.”
“원래 그들과 나는 생각이 같았다. 신족의 왕인 루하를 없애고 중원의 주인이 되려고 했지.”
“그런데 왜 갈라서게 된 겁니까?”
“그들은 망설였다. 신민들이 반발할까 봐 겁을 집어먹고 차일피일 거사를 미뤘다. 결국 내가 먼저 움직였다.”
“왕을 축출한 겁니까?”
“맞다. 그런데 크로헬 그들은 나를 반역자로 몰아공격을 했다. 혼자 힘으로 세 명을 상대하는 건 역부족이었다.”
“도망을 쳤군요.”
“일대일로 싸우면 놈들은 내 상대가 안 된다.”
“그렇다고 해도 패한 건 패한 거지요. 여긴 왜 온 겁니까?”
“제안을 하러 왔다.”
“…….”
이호는 헌원소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들을 떠나 내게로 와라.”
“그분들을 배신하란 말입니까?”
“그게 네가 살길이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면 주시겠습니까?”
“안 된다. 지금 결정해야 한다.”
“거절하면 바로 죽겠군요.”
“맞다.”
“제 머리에 금제가 돼 있다는 걸 아십니까?”
“그건 내가 이미 풀었다.”
“그렇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군요.”
이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계획을 말해 봐라.”
“우리는…….”
이호는 좌무백의 지시 사항을 자세하게 말했다.
“흠!”
이야기를 듣고 난 헌원소야는 생각에 잠겼다.
“내가 팔왕이 되면 가장 먼저 살인자들을 찾기 위해 절벽을 수색하게 될 것이다. 그때 들키면 아무리 내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해도 너희들을 없앨 수밖에 없다.”
“피하란 말씀이십니까?”
“계곡 밖으로 나가 있어라.”
“알겠습니다.”
이호는 고개를 숙였다.
“오늘 밤 바로 이동해라.”
헌원소야는 일어났다. 그리고 동굴 밖으로 몸을 날렸다. 곧 그의 등에서 날개가 생겨났다. 날개를 펼친 헌원소야의 몸이 서서히 사라졌다.
“옥구!”
이호는 나직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옥구가 들어왔다.
“어떻게 된 겁니까?”
옥구는 이호 앞으로 가며 물었다. 그는 헌원소야가 이호를 찾아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말을 안 들으면 죽이겠다는구나.”
“그래서…….”
“일단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그자가 원하는 건 뭡니까?”
“부하가 되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팔왕이 되면 가장 먼저 절벽을 수색할 거니까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라는 지시도 내렸고.”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자의 말이 맞아. 이곳에 계속 머무는 건 위험해.”
“철수는 언제 합니까?”
“당장 대원을 보내서 밖에 우리가 머물 곳이 있는지 알아봐.”
“알겠습니다.”
옥구는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한 시진 후 부활전사단은 철수를 시작했다. 애초에 짐이 없었던 터라 철수도 금세였다. 한 식경도 지나지 않아 동굴에서는 온기가 사라졌다.
떠나는 그들은 자신들 뒤에서 황금색 날개를 펼친 자가 허공에 숨은 채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각 가문의 가솔들은 팔왕대 옆 건물로 모여들었다.
오늘 비무를 보기 위해서였다.
비무장에 먼저 도착한 사람은 무혼이었다.
무혼은 심호흡을 했다.
간밤에 천마로부터 잠마에 대해 많은 걸 들었다.
천마가 잠마 헌원소야에 대해 내린 결론은 ‘속을 알 수 없는 자’라는 거였다.
“하지만 오늘 죽는다.”
둥! 둥! 둥!
비무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렸다. 무혼은 팔왕대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중앙에 도착한 순간 화가 진영에서 불그스름한 장포를 걸친 자가 몸을 날렸다. 무혼 앞으로 내려선 그는 화왕 헌원소야였다.
“검에는 눈이 없다는 말 아시오?”
헌원소야는 무혼을 가만히 보며 물었다.
“알고 있소.”
“특히 실력이 비슷한 무인끼리 싸우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데, 그것도 아시오?”
“물론이오. 그리고 수뇌가 적으면 적을수록 지닌 권력이 커진다는 것도 아오.”
“지금이라도 그만두면 다치지 않고 끝냈을 수 있소, 해왕.”
“내가 하고 싶은 말이오, 화왕. 이제 그 화왕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게 어떻소? 나 같으면 이천 년 세월이 지겨워서라도 앉아 있지 못할 것 같은데, 아무튼 당신은 대단하오. 경의를 표하는 바이오.”
무혼은 헌원소야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나를 아느냐?”
무혼을 가만히 바라보던 헌원소야가 물었다.
“말이 너무 짧은 것 같다, 잠마. 네가 나이를 먹은 건 알지만 나도 먹을 만큼 먹었다.”
“…….”
헌원소야는 무혼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는 게 많구나.”
“세상에는 비밀이 없어.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결국엔 밝혀지고 말아.”
“또 누가 알고 있느냐?”
헌원소야는 물었다.
“오늘 내게 죽을 텐데 굳이 알 필요 있을까?”
“쿡!”
헌원소야는 피식 웃고는 뒤로 물러났다.
무혼 역시 뒤편으로 물러났다.
그는 오른손을 편하게 내리고 내기를 주입했다.
차르르!
수라가 길게 늘어났다.
“그거 아느냐?”
헌원소야는 내기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츄악!
그러자 물줄기가 몸 주위에서 튀어 올랐다.
“뭘 말이냐?”
무혼이 물었다.
“남천기는 내 백 초 상대도 안 됐다는 사실 말이다.”
“나는 남천기의 무공만 익혔을 뿐, 남천기 본인이 아니다, 잠마.”
“내가 보기엔 같아. 아니, 더 못해.”
헌원소야는 딱밤을 먹이는 것처럼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푸아악!
새끼손톱보다 더 작은 물방울이 가공할 속도로 무혼을 향해 쏘아져 갔다. 잠마는 계속해서 손가락을 튕겼다.
푸아악! 푸악! 푸악! 푸악! 푸악!
물방울들이 암기처럼 날아갔다.
“타하!”
무혼은 기합과 함께 수라를 휘둘렀다.
캉! 캉캉캉!
수라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물방울이 잘렸다. 물방울 잘리는 속도가 빨라지자 헌원소야의 동작도 커졌다. 이젠 손가락을 튕기는 게 아니라 뺨을 쓰다듬는 것처럼 손바닥을 천천히 휘둘렀다.
마치 무당파의 태극권을 펼치는 것 같았다.
그가 손바닥으로 물방울을 쓰다듬을 때마다 대여섯 개의 물방울이 무혼을 향해 쏘아져 갔다.
무혼은 계속해서 수라를 휘둘렀다. 그가 휘두르는 수라 또한 완벽하게 헌원소야의 물방울을 쳐 냈다.
그 상태는 한 식경 동안 유지됐다. 상당한 내공 소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움직임은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먼저 공격을 변화시킨 사람은 헌원소야였다.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튀어 올랐던 물방울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대신 물색이 검붉은 색으로 변해 갔다.
‘응?’
무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점차 범위를 넓혀 가는 검붉은 색에서 특이한 기운이 감지됐다. 그건 바로 사기가 극대화된 극사의 기운이었다.
무혼은 곧바로 양극천강을 끌어 올렸다.
양극천강은 무공으로 펼칠 수도 있지만 역장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양극천강이 만들어 낸 색은 저녁노을처럼 불그스름한 색이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팔왕대 수면의 절반은 검붉은 색으로 변하고 나머지 절반은 노을 색으로 변했다.
두 사람은 각자가 만든 역장 중앙에 우뚝 섰다.
“와아!”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저게 뭔가?”
누군가가 물었다.
“본연의 내기로 만들어 낸 역장이네.”
“그게 뭔가?”
“무인은 일정 경지를 넘어서면 자신이 가진 본연의 경지를 이용해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는데 그 안에서만큼은 전지전능의 능력을 발휘하게 되네.”
“저 역장 안에서는 신의 능력을 갖는단 말인가?”
“그렇네.”
“하면, 일정 경지라는 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건가?”
“혹시 허무지도, 자연지도, 무심지도 같은 말을 들어 봤는가?”
“각 분야의 최고 경지를 말하는 거 아닌가?”
“맞네.”
“심검도 자유자재로 펼치겠지?”
“당연하지.”
“신들이네.”
“정확한 표현이네.”
“시작했다.”
가솔들의 시선이 헌원소야에게로 향했다.
헌원소야가 내리고 있던 손을 들어 올린 거였다.
슥!
무혼의 수라가 중간에서 구부러졌다.
차앙!
순간 구부러진 부분에서 불똥이 튀었다.
스윽!
이번엔 무혼의 왼팔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헌원소야가 왼 주먹을 내질렀다.
퍼억!
쩌엉!
둔탁한 소성에 이어 허공에 줄을 그은 것처럼 새하얀 광채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무혼이 양극천강의 음陰의 기운으로 펼친 심검이었다.
스윽!
헌원소야가 오른팔을 앞으로 내밀면서 왼팔을 내밀었다. 순간 무혼 앞에 거대한 검이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이동!”
거대한 검이 심장으로 파고들려는 순간 무혼의 신형이 사라졌다.
“억!”
“어?”
여기저기서 놀람에 찬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심검을 피해 내는 무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마법이구나?”
헌원소야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는 무혼이 마법을 익히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잘 아는구나.”
무혼은 빙긋 웃었다.
무공과 마법을 동시에 익힌 부작용으로 인해 갈릭은 사십 대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다시 태어나서는 무공과 마법을 결합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한 가지만 가지고는 최정상으로 오르는 건 물론이고 크로노마스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찾아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전지전능 구역인 역장이었다. 그 안에서만큼은 무공과 마법을 동시에 펼치는 게 가능했다. 물론 현재의 몸으로 그렇다는 건 아니다. 지금 몸으로 이 안에서 펼칠 수 있는 건 적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이동 마법뿐이다.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다.”
헌원소야는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무혼 머리 위 오 장 높이에 헌원소야가 만든 역장과 같은 색의 기검 수백 자루가 나타났다.
“십만무적검十萬無敵劍?”
두 사람의 비무를 지켜보던 천마 혁지광이 나직하게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