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76)
정신 속박 마법에 당한 척사랑을 보면서 춘추오패의 다른 주인들 또한 척사랑과 같은 처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게다가 그들의 주인이 황제 자리까지 차지한 상태면 최강의 힘을 지녔다고 봐야 한다. 즉, 명나라 전체와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명나라와 전쟁을 한다는 건 설사 팔왕이 된다고 해도 쉬운 일 결코 아니다.
“잠마는 그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우리에겐 환수각이란 변수가 있습니다.”
“우리 측이 꼭 불리한 것만은 아니라는 거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잠마를 제거하고 팔왕가를 장악한 후 춘추오패와 전쟁을 벌이면 더 낫지 않아?”
“그렇게 하려면 비무를 통해 잠마를 없애야 하는데, 무 형이 그를 이길 수 있느냐 하는 게 문젭니다.”
“내가 질 거라는 거야?”
“잠마는 혁 영감님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았습니다. 물론 오래 살았다고 해서 강하다는 건 아니지만 그는 완성된 상태에서 중원의 무공을 익혀 잠마가 된 겁니다. 혁 영감님보다 더 강할지 그건 알 수가 없지만 우리가 쉽게 상대할 자가 아니라는 건 분명합니다.”
금장생이 말한 혁 영감은 천마 혁지광이었다.
“아냐. 내 생각은 너와 달라. 너는 몰라도 나는 그자를 이길 수 있어.”
무혼이 이렇게 자신하는 건 철갑거인 아스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몸으로는 패할지 모르지만 아스에 탑승하면 천마에게도 패하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잠마를 제거할 자신이 있단 말입니까?”
“자신 있다.”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마를 제거해도 이번에는 화가를 장악하는 일이 남습니다.”
“환수각도 장악한 나다. 화가도 내 부하로 만들 수 있을 거다.”
“흠!”
금장생은 무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실 그는 어떻게 하는 게 더 좋은 건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무혼과 힘을 합치면 잠마에 비해 약하다고 할 수 없다. 잠마에게 맡겨 두는 것보다 자신들이 팔왕가를 장악하여 전쟁을 치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는 중이다.
전쟁을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심무극을 암살하면 효과는 더욱 커질지도 모른다. 문제는 동창과 금의위가 춘추오패와 팔왕가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느냐 하는 거다. 만일 그들이 범인을 찾겠다고 무림 전쟁에 개입하게 되면 상황은 꼬이고 만다.
‘일단은 맡겨 두는 수밖에 없겠네.’
금장생은 방관자가 되기로 했다.
“알아서 하세요. 단, 잠마를 반드시 없애야 합니다. 살려 두면 그자에게 배신을 당하게 될 겁니다.”
“알았다.”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를 비롯한 다른 가문들의 선발대가 들어온 건 그날 저녁 무렵이었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숙소를 점검했다.
각 가문의 본대는 다음 날 저녁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들어온 자는 암가의 가주 야제 유가람이었다. 유가람은 키가 크고 비쩍 말랐으며 차가운 인상을 한 자였다. 그가 대동한 인원은 서른 명 정도였다. 금장생은 천리지청술로 은신해 있는 자들을 살폈다. 하지만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유가람 옆에 있어야 할 음사영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어서 오십시오, 여러분.”
이내 생각을 접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팔왕. 다쳤다고 하던데…….”
“여기를 약간 다쳤습니다.”
금장생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머리를 다쳤다는 건…….”
“기억력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겁니까?”
“네. 하지만 무공은 전부 기억합니다. 단지 사람만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 부인도?”
“재혼한 기분도 들고, 나쁘지 않습니다. 집사람도 새로운 남자 같다며 좋은 점도 있다고 하더군요.”
“허허허! 그거 참!”
유가람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따가 저녁이나 함께 하지요.”
“그렇게 합시다. 그럼.”
유가람은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가람 뒤로 전가, 사가, 철가, 혈가가 들어왔다. 각 가문의 수행원들은 삼백여 명가량이었다.
금장생은 일일이 마중을 나갔다.
맨 마지막에 도착한 자는 화가의 화왕, 즉 헌원소야였다. 헌원소야가 왔다는 말을 들은 금장생은 다시 마중을 나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헌원소야만큼은 꼭 보고 싶었다.
계단 아래쪽에 서 있는데 헌원소야 일행이 들어왔다. 십여 명이 한꺼번에 들어왔지만 헌원소야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한가운데서 다른 이들의 호위를 받는 모양새라서 바로 알아본 건 절대 아니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키도 작고 체격도 왜소했다.
그런데 주위에 있는, 키와 덩치가 더 큰 자들을 압도했다.
‘그런데…….’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다시 헌원소야를 보았다. 문득 날카로운 섬광이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넌 자격이 없다! 자격이 없는 자는 우리 종족을 멸망으로 이끌 뿐이다! 내가 널 쳐 내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우리 신족의 미래를 위해서다!
“맙소사.”
금장생은 격렬하게 몸을 떨어졌다.
그는 멍한 눈으로 헌원소야를 보았다.
“왜 그러시오?”
시선이 마주치자 헌원소야가 물었다.
하지만 금장생은 헌원소야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헌원소야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팔왕!”
헌원소야가 다시 불렀다.
“마왕!”
옆에 있던 유공이 금장생을 툭 쳤다.
그제야 금장생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몸이 많이 안 좋은 게요?”
헌원소야는 금장생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간혹 잃었던 기억이 떠오르면 이런 증상이 나타나곤 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가주.”
금장생은 헌원소야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잃었던 기억이 나를 보는 순간 되살아났다는 거요?”
헌원소야는 물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다른 분은 가물가물한데 유독 가주는 명확하게 기억이 납니다.”
헌원소야는 금장생을 보았다.
‘으음!’
그는 내심 신음을 내뱉었다.
머리를 다쳐 기억을 잃었다는 말은 들었다.
그렇다면 무공도 과거보다 더 약해져야 한다. 그런데 아니었다. 전에 비무를 할 때보다 더 강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상대는 아니지.’
이내 마음을 놓았다.
“하하하! 그것참 특이하구려. 나만 기억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헌원소야는 크게 웃으며 물었다.
“아무래도 비무를 할 때 화왕이 가장 기억에 남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름만 기억나고 다른 건 전혀 기억에 없습니다.”
“그렇구려. 아무튼 건강해 보이니 다행입니다.”
“다른 분들을 오늘 저녁 식사에 초대했는데 함께 하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시간은 반 시진 훕니다.”
“알았소이다. 그럼.”
헌원소야는 인사를 하고 그의 숙소로 향했다.
금장생은 멀어지는 헌원소야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셀라스 리 라헬! 신족 제일장로 태양의 제사장!”
금장생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함께 나왔던 유공이 물었다.
“저자의 원래 신분입니다.”
금장생은 헌원소야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신족이란 무림 단체도 있습니까?”
유공은 다시 물었다.
“네. 아주 오래전에 그런 단체가 있었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유공은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 오래돼서 군사는 모를 겁니다. 그만 가시죠.”
금장생은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는 처소로 돌아왔다. 처소는 식사 준비로 한창이었다. 식사할 장소는 이 층의 접객실이었다. 접객실에서는 열려 있는 커다란 창 너머로 호수가 한눈에 보였다.
손님들은 한 식경 전부터 들어왔다.
무혼을 제외한 여섯 명은 모두 한 명씩만 데리고 왔다. 그런데 그들 중 금장생이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가람은 음사영을 데려오고 막거성은 아들 중 한 명을 데려올 줄 알았다. 그런데 막거성이 데려온 자는 군사 악투루였다.
무혼은 바타르와 천마, 백리장광 세 명을 데리고 왔다.
“어서 오십시오.”
무혼 일행이 들어오자 금장생은 포권을 취했다.
“초대해 주어서 고맙소.”
무혼도 마주 포권을 취했다.
“제가 가주를 소개시켜도 되겠습니까?”
금장생은 물었다.
“그렇게 해 주시면 더없이 영광입니다.”
무혼은 고개를 숙였다.
“여러분들께 해가의 새로운 가주를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철무혼 대협입니다.”
금장생은 무혼을 가리켰다.
“처음 뵙습니다. 이번에 해가의 새로운 가주가 된 철무혼입니다. 여러 영웅호걸들을 만나고 보니까 해가를 선택한 게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무혼은 일행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중원인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 출신이오?”
무혼에게 질문을 한 사람은 헌원소야였다.
“성함이…….”
무혼은 헌원소야를 보았다.
“참! 내 소개를 한다는 걸 깜빡했구려. 난 화가의 가주 헌원소야요.”
“화왕이었군요. 나는 샤이칸드리아 대륙에서 왔습니다.”
“음!”
“으음!”
각 가주와 수행원들은 나직하게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이미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대신 의아한 얼굴로 무혼 뒤에 서 있는 백리장광을 보았다. 그들은 차원 통로를 여는 자가 중원의 주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 누군가의 부하가 돼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해왕은 샤이칸드리아 대륙인이 아니라 중원인이오. 수라 남천기의 후예이기도 하고.”
“지, 지금 수라修羅 남천기라고 했소?”
수라 남천기란 말에 가장 놀란 사람은 헌원소야였다.
“그렇소.”
백리장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수라 남천기의 후예가 샤이칸드리아 대륙으로 건너가 있던 거요?”
헌원소야는 다시 물었다.
“그렇소.”
백리장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장광이 사실이 아님에도 고개를 끄덕인 건 설명하는 게 귀찮아서였다.
“수라 남천기의 제자고 수라도법을 완벽하게 익혔다면 백리 가주가 상대가 안 될 수도 있지.”
헌원소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나와 함께 온 사람을 소개하겠소. 이 사람은 내 친구로 바타르요.”
“반갑소.”
바타르는 짤막하게 인사를 하고 일행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드래곤이군.’
헌원소야는 내심 중얼거렸다. 그는 대번에 바타르가 드래곤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얼마나 강한지 알아보기 위해 계속해서 바타르를 살폈다.
‘그런데…….’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드래곤을 살피는데 자꾸만 신경에 거슬리는 뭔가가 있었다. 그 거슬림은 드래곤에게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바타르 옆으로 향했다. 아주 평범해 보이는 사내가 서 있었다.
그런데 사내 얼굴이 눈에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워낙 오랜 세월을 살았고, 수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나를 이렇게 거슬리게 하는 자라면 기억에 남아 있을 게 분명한데…….’
이내 마음을 다잡고 다시 혁지광을 보았다.
“그리고 이분은 내 친한 친구인 혁광 대협입니다.”
무혼이 천마를 소개했다.
“혁지광!”
무혼이 혁광이라고 말하자마자 헌원소야는 버럭 소리쳤다. 그제야 머릿속에서 맴돌던 중년인의 얼굴이 구체화됐다. 그는 바로 자신을 영원히 이인자로 만들었던 천마 혁지광이었다.
“이분은 혁지광이 아니고 혁광입니다, 화왕.”
무혼이 말했다.
“어떻게…….”
헌원소야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눈빛, 얼굴, 체형 모든 게 천마 혁지광이다. 하지만 혁지광은 신족이나 마족이 아닌 인간이다. 지금까지 산다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날 아십니까?”
혁지광은 헌원소야를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사실 그도 헌원소야를 처음 봤을 때 기절할 듯 놀랐다. 설마 잠마가 아직 살아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내 잠마가 신족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아, 아니오.”
헌원소야는 고개를 저었다.
“자! 이제 식사를 하도록 하지요.”
금장생은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크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안에서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