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68)
커다란 마차 한 대가 관도를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마차 주위에는 무기를 소지한 무인들이 방어 대형을 유지한 채로 따랐다.
마차 안에는 다섯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무혼, 바타르, 천마, 척사랑, 태월령이었다. 이들은 천왕지회에 참석하기 위해 안휘성으로 가는 중이었다.
마차 안은 기다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좌우측 벽에 탁자 길이와 같은 의자가 붙어 있는 구조였다.
마차가 나아가는 방향을 중심으로 오른편에는 척사랑과 태월령이 앉았고 왼편에는 바타르, 무혼, 천마가 앉았다.
척사랑은 건너편에 앉은 무혼을 보았다.
도전을 하겠다고 말하자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무가 끝나고 나서야 흔쾌히 수락한 이유를 알았다. 백 초 만에 패하고 말았다.
자신에 이어 태월령까지 도전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적신천사마공을 익힌 태월령이 패하는 데 걸린 시간은 십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무혼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세 사람 중 무혼이 가장 약자라는 사실이었다. 특히 자신을 혁 노야라고 소개한 중년인의 무공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그가 무공을 펼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쳐다보는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혔다. 환수각의 각주가 되고 난 이후 누구 앞에서 그렇게 위축된 건 처음이었다.
아니 위축된 정도가 아니라 앞으로 백 년이 더 지나도 중년인을 이길 수 없다는 패배 의식에 사로잡혔다.
무혼에게 패배를 인정하고 중년인의 정체에 대해 캐물었다. 하지만 무혼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저거 안 읽어 봐?”
무혼은 척사랑 뒤에 있는 종이 뭉치를 가리켰다. 척사랑이 서찰을 받은 장소는 환수각이었다.
환수각에서 받았는데 척사랑은 아직 읽어 보지 않은 상태였다.
“남의 서찰에 너무 관심이 많은 거 아닌가요?”
듣고 있던 태월령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중요한 서찰 같아서 그런 거다.”
“저게 중요한 서찰인지 아닌지를 무 공자가 어떻게 아는데요?”
“무 공자가 아니고 총각주님이라고 불러야지.”
“헹! 내가 인정한 총각주는 척 언니밖에 없네요.”
태월령은 혀를 쑥 내밀었다.
“하긴 네게 인정을 받아 봐야 소용없으니까.”
무혼은 다시 척사랑을 보았다.
“알았어요.”
척사랑은 서찰을 집어 들었다.
무혼이 이렇듯 서찰에 집착하는 건, 서찰에 내포돼 있는 특이한 기운 때문이었다. 결코 중원인들의 무공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그건 바로 마법사들의 마법 기운이었다.
중원 무인이 마법을 펼칠 리는 없고, 그렇다면 가능성은 한 가지뿐이다. 그건 바로 이방인의 흔적이다.
척사랑은 서찰을 펼쳤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서찰을 읽어 내려갔다.
“헉!”
어느 순간 척사랑의 눈이 커졌다.
―바타르!
무혼은 바타르를 전음으로 불렀다.
―마법을 펼치라는 거냐?
―조금 있다가. 지금은 준비만 해.
―알았다.
바타르와 무혼은 척사랑을 지켜보았다. 척사랑은 최면에 빠진 것처럼 멍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지금이다.
무혼이 바타르에게 전음을 보냈다.
“안티 매직 쉘!”
바타르가 마법을 펼쳤다.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 광채가 척사랑의 머리를 감쌌다.
“어?”
척사랑은 놀란 얼굴로 무혼과 바타르를 보았다.
“조금 전 상황을 기억해?”
무혼이 물었다.
“무슨 상황을 말씀하시는 거죠?”
척사랑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혼은 바타르를 보았다.
“기억을 못 하는 모양이다.”
“그럼 서찰에 마법을 건 자를 알아내지 못한다는 거네?”
“언젠가는 알게 될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바타르가 대답했다.
“혹시 환청을 말하는 거라면 말해 드릴 수 있습니다.”
무혼과 바타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척사랑이 말했다.
“환청?”
무혼은 척사랑을 보았다.
“꿈속에서 들은 것 같은 목소리가 머릿속에 남아 있어요.”
“말해 봐라.”
무혼이 말했다.
“한 달 후 개봉으로 오라는 명령이에요.”
“갈 거야?”
무혼이 물었다.
서찰을 받은 지 이십일이 넘었으니까 십일도 채 남지 않았다.
“안 가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왜 그런지 혹시 아세요?”
척사랑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마치 그곳으로 반드시 가야 할 이유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원래 정신 속박 마법은 벗어난다고 해도 상당 기간 영향을 받게 된다.”
그녀의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바타르였다.
“내 생각엔 저 마법은 바타르, 네가 아니면 풀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것 같은데, 맞아?”
무혼이 바타르에게 물었다.
“맞다. 인간 마법사라면 최소한 팔 클래스는 돼야 한다. 그 이하는 불가능하다.”
바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엄청난 마법이란 소린데, 중원무림 십대 고수 중 한 명에게 정신 속박 마법을 펼칠 수 있는 자가 누굴까?”
무혼의 시선이 척사랑과 태월령에게로 향했다.
자신과 바타르, 천마 세 명은 강호 사정에 어두워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그래서 두 여자는 알까 하는 생각에 쳐다본 거였다.
“전혀 짐작도 못 하겠어요.”
“나는 중원 사람이 아니에요.”
척사랑과 태월령은 고개를 저었다.
척사랑은 누가 자신에게 마법을 펼쳤는지 알지 못했고 태월령은 가늠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보기엔 태양마존과 귀마존 일행을 보냈던 자와 동일인 같다.”
바타르가 말했다.
“그렇겠지? 문제는…….”
무혼은 고개를 끄떡였다.
“마법에 걸린 자가 척사랑 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거냐?”
바타르가 물었다.
“척 소저는 무림십패 중 서열 이위에 올라 있잖아. 그렇다면 나머진 볼 것도 없는 거 아냐?”
“무림십패는 서열을 가리는 게 무의미해요.”
척사랑이 말했다.
“그건 나도 알아. 그렇다고 해도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지. 안 그래?”
“그렇긴 해요.”
척사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춘추오패의 수장이 모두 척 언니와 같은 상태라는 거예요?”
태월령이 물었다.
“그건 나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 마맹을 세웠던 자들이니까 가능성이 아주 없진 않아.”
“그걸 알아봐야겠군요.”
척사랑이 말했다.
“그렇게 하려면 그자가 부르는 곳으로 가야 해.”
“당신이 바라는 게 그거 아닌가요?”
“그렇긴 하다만…….”
“정신 속박 마법에 걸리면 어떤 상태가 되죠?”
척사랑은 바타르를 보며 물었다.
“정신 속박 마법은…….”
바타르는 정신 속박 마법에 걸린 자가 취하는 행동과 말투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때부터 척사랑은 정신 속박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행동했다.
천천히 가던 마차가 멈췄다.
“이곳에서 하룻밤 묵어가야겠습니다.”
이어 백겸 주육승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남았지?”
“앞으로 사흘은 더 가야 합니다.”
“근처에 객잔은 없어?”
무혼은 밖으로 나가며 물었다. 근처에 물이 있는 듯 대기는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세 시진은 더 가야 합니다.”
“그럼 새벽에 도착한다는 거네?”
“그렇습니다.”
“길을 잘못 든 거야?”
“네.”
“아는 길이라고 하지 않았어?”
무혼은 주육승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십 년 전과 너무 많이 달라져서…….”
“이십 년 전에 와 봤다고?”
“네.”
“이십 년이면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정도로 긴 시간이라는 거 알아?”
“여기 와서 알았습니다.”
“아무튼…… 알았으니까 여기서 야영 준비 해.”
“알겠습니다.”
주육승은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저기요.”
태월령이 무혼의 팔을 툭 쳤다.
“왜?”
“우리 화장실 갈 거예요.”
“다녀와.”
“다녀오라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와요?”
“이런 경우엔 보통 뭐라고 하는데?”
“내가 망을 봐 줄게, 라고 말하는 거라고요.”
“망?”
“네.”
“얘는 내 앞에서 백 초를 견뎠고 너는 오십 초를 견뎠다는 거 알아?”
“우리가 패했다는 거 아니까 그렇게 강조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너희들이 패했다는 게 아니라 망을 봐 줄 사람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거야.”
“그건 나도 알아요. 문제는 우리가 무방비 상태라는 거예요.”
“무방비?”
“볼일을 보려면 옷을 발목까지 내려야 하고 그 상태에서 공격을 받으면 사내들은 방어부터 하겠지만 우리처럼 정숙한 여자들은 옷부터 올리게 돼요. 맥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고요. 그러니까 당신이 반드시 망을 봐 줘야 해요. 망을 봐 주지 않으면 나와 언니는 옷에 쌀 테고 당신과 저분들은 여자가 싼 오물 냄새를 맡으며 여행을 해야 할 거예요.”
“알았다, 가자.”
무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두 여자를 따라나섰다. 잠시 후 두 여자는 으슥한 곳으로 갔다.
두 사람이 풀숲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무혼은 바위에 걸터앉았다.
숲에서 먼저 나온 사람은 태월령이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태월령은 몸을 날렸다.
그녀가 자리를 이동하고 잠시 후 척사랑이 나왔다.
“이쪽으로 와요.”
그때 태월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혼과 척사랑은 태월령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갔다. 태월령이 서 있는 곳에는 작은 호수가 있었다. 근처에 있는 장강의 지류가 모여 형성된 호수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여긴 왜 온 거지?”
“지금이 어떤 계절이죠?”
“여름이지.”
“당신네들 괴물 삼형제는 아니겠지만 우리처럼 보통 사람들은 여름이 되면 땀을 흘려요. 땀을 흘리게 되면 몸이 꿉꿉해지고, 꿉꿉하면 신경질이 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고요.”
“그러니까 그게 어쨌다는 거지?”
“언니와 나는 목욕을 하겠다는 거지 뭐겠어요.”
“그러니까 니들 목욕하는 데 망을 보라고?”
“네.”
“야! 나는…….”
무혼은 얼른 입을 다물고 몸을 돌렸다. 그가 소리를 치려고 하자 태월령이 상의를 벗어 버린 것이었다. 무혼은 자리를 옮겼다.
“멀리 가지 마세요.”
태월령은 싱긋 웃으며 척사랑을 보았다.
“언니 얼른요.”
“알았어.”
척사랑은 옷을 벗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물로 들어갔다. 먼저 목욕을 마친 사람은 태월령이었다. 그녀는 밖으로 나와서 몸을 닦고 옷을 입은 후 자리를 떴다.
“왜 너만 나오지?”
무혼은 태월령을 보며 물었다.
“언니는 나보다 크잖아요.”
“커?”
“여기도 더 크고 여기도 더 커요.”
태월령은 가슴과 엉덩이를 가리켰다.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예요. 더 크니까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거죠.”
“그건…….”
“먼저 갈게요.”
태월령은 손을 흔들고는 자리를 떴다.
“참! 언니는 몸을 닦을 수건이 없어요.”
멀리서 태월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끙!”
무혼은 얼굴을 찌푸렸다.
“저기요.”
그때 척사랑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혼은 어기적거리며 척사랑이 있는 곳으로 갔다. 척사랑은 옷으로 앞쪽만 가리고 있었다.
“수건?”
“마차로 가면 제 짐 안에 있는데 좀 가져다주실래요?”
“알았다. 또 필요한 거 있느냐?”
무혼은 물었다.
“속옷도 좀 부탁드릴게요.”
“속옷?”
“빨아 버렸거든요.”
“알았다.”
무혼은 마차가 있는 곳으로 갔다. 호수에서 마차까지 거리는 이십 장이었다. 마차 안에서는 태월령이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필요한 거 있어요?”
“수건과 속옷을 가져다 달라고 하더구나.”
“언니 짐은 저기 있어요.”
태월령은 뒤편을 가리켰다.
“좀 꺼내 주면 안 되냐?”
“언니는 다른 사람이 자기 짐 뒤지는 걸 제일 싫어해요.”
“그럼 난 뭔데?”
“남으로 생각하지 않나 보죠, 뭐.”
“난 인마…….”
슉!
느닷없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푹!
“커억!”
그리고 호위대가 있는 곳에서 비명이 비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