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143)
잠시 후 그는 둘둘 말린 종이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그중 몇 장을 금장생에게 건넸다.
금장생이 받아 든 건 채무 증서였다.
즉, 얼마를 빌렸으니까 얼마의 이자를 주며 언제까지 갚겠다는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이걸 보십시오.”
금장생은 황금전가 증서와 대륙황가 증서에서 같은 글자를 가리켰다.
그가 손가락으로 짚은 글자는 몇 년 몇 월 며칠 할 때 년年 자였다.
보통 년年 자를 쓸 때 직선으로 내리긋는데, 두 글자는 동일하게 왼편으로 약간 삐쳐 있었다.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아니 한 장만 놓고 볼 때에는 발견하기 힘든 차이지만 두 장을 함께 놓고 보니 한 사람이 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금장생은 몇 장을 더 살폈다.
다른 문서 역시 다르지 않았다. 모든 문서가 년年의 아래로 긋는 획이 왼편으로 삐쳐 있었다.
“이제 대륙황가에서 사용하는 진짜 문서를 줘 보십시오.”
“여기 있습니다.”
석보산은 아직 수결과 직인이 찍히지 않은 증서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년 자를 비교해 보십시오.”
“이건 같지…….”
“삐친 정도와 농담을 보십시오.”
“아!”
석보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문서가 약간 더 많이 삐쳐 있었다. 아울러 농도도 더 진했다.
“두 개를 동시에 놓고 보지 않으면, 아니 년年 자가 위조됐다는 걸 아는 상태가 아니면 구분할 수 없겠군요.”
“그렇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석보산은 물었다.
“받은 대로 돌려줘야지요.”
금장생의 눈에 서늘한 기운이 어렸다.
“어떻게…….”
“먼저 중원에 있는 모든 위조 전문가를 찾아내세요. 북경을 위주로 뒤져야 할 겁니다.”
“찾아내서는 어떻게 합니까?”
“일단은 동향만 파악하고 있으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난 가 보겠습니다.”
금장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석보산은 증서를 챙겨 정리한 다음 금장생을 따라나섰다.
어느새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바로 식사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석보산이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주 긴 하룻밤이었습니다.”
“단주에게는 긴 낮이 기다리고 있잖습니까.”
아직 일이 다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제 일인데요, 뭐.”
석보산은 멋쩍게 웃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나는 들어가서 잠이나 좀 자렵니다.”
숙소에 도착한 금장생은 작별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간밤에 감사했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석보산은 감사의 인사를 했다.
“내 재산인데 내가 지켜야지요.”
금장생은 손을 흔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밤을 꼬박 새운 사람은 금장생과 석보산뿐만이 아니었다.
“딸꾹! 남자란 말이야, 무엇보다 신腎이 강해야 해. 그래야 건강한 아들을 낳을 수 있어. 이왕 이렇게 만났으니까 내가 약을 지어 줄게. 둘의 관상을 보면 너는 적극적인데 서방은 영…….”
“너무 소극적이란 말씀이세요?”
“소극적일 뿐 아니라 신이 약해, 신이. 신을 강하게 해 주지 않으면…….”
“하루에 다섯 번씩 보약을 퍼먹여 버릴까요?”
“클클클! 그것도 좋은 방법이다.”
“약이 너무 과하면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고 하던데요.”
“아이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냥 퍼먹여. 그리고 밤마다 잠자리를 해. 그러다 보면…….”
“흐흐흐! 아이가 뿅 하고 생길 거란 말이네요.”
“맞다, 맞아.”
아수수와 유인태도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밤을 꼬박 새웠다.
간밤에 친해진 듯, 유인태는 아수수에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술이 되게 맛있는 모양입니다.”
금장생은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남편께서는 외박하고 이제 돌아오시네요?”
아수수가 금장생을 돌아보며 말했다.
“외박?”
“보통 외박을 하면 좋은 데 다녀오는 경우가 많은데. 어디 다녀왔는지 말해 봐요.”
“음! 좋은 곳에 사서 단주와 한잔했습니다.”
금장생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아직 술이 부족한 거 같은데 한 잔 드려요?”
“좋죠.”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수수가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금장생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술은 상당히 독했다. 화끈한 기운이 목에서 식도까지 이어졌다.
‘캬아!’ 소리가 절로 나왔다.
“자요.”
금장생 입 앞으로 감 한 조각이 다가왔다. 아수수가 집어 준 술안주였다.
“고맙습니다.”
금장생은 입을 쩍 벌렸다.
서리를 맞은 감인 듯, 상당히 달달했다.
금장생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이제 나는 가 볼란다.”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유인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게요?”
“얼마 안 된 줄 알았는데 벌써 밖이 훤하구나.”
“그래요?”
아수수는 창밖을 보았다. 유인태의 말처럼 창밖이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그러네요.”
아수수는 어색하게 웃었다.
“좋은 시간 보내도록 해라.”
유인태는 싱긋 웃으며 방에서 나갔다.
“저걸 다 마신 겁니까?”
금장생은 한편에 수북하게 쌓인 술병을 가리켰다.
“천 잔을 받아 마신 사람도 있는데 이 정도는 뭐.”
“나야 뭐 어쩔 수 없이…….”
“사실 나 술 못해요.”
“그 말 믿어 줄게요. 당신은 술을 한 잔도 못 합니다. 이제 그만 들어갈까요?”
“당신은 술 안 마실 거예요?”
“아침부터 술을 마시면 미쳤다고 욕합니다.”
“아침부터가 아니라 나는 어젯밤부터죠.”
아수수는 의자를 잡고 일어났다.
하지만 바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만취 상태라 몸을 버티고 설 수가 없었다.
“내 몸이 왜 이러죠?”
“원래 술이란 그런 겁니다. 업히세요.”
금장생은 아수수 앞에 등을 대고 쪼그려 앉았다.
아수수는 금장생의 등에 업혔다. 아수수와 금장생의 처소는 삼 층이었다.
금장생은 아수수를 업고 방을 나와 계단을 올라갔다.
“당신 몸에서 피 냄새가 나요.”
“간밤에 일이 좀 있었거든요.”
“남편은 가문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있는데 아내라는 년은 밤새 술을 퍼마셨네요.”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요, 뭐.”
“실은 당신의 기분을 느껴 보고 싶어서 마셨어요.”
“어떤 기분?”
“못 마시는 술을 억지로 마시는 기분 말이에요.”
“정말 술 못 마셔요?”
“한 잔만 마셔도 얼굴과 몸이 벌게지고, 바로 잠드는 체질이에요.”
“곤욕이었겠군요.”
“약왕께서 워낙 재미있는 분이라서 지루하진 않았어요. 다만 술을 마시는 게 힘들었을 뿐이죠.”
“한번 이렇게 마시고 나면 술이 많이 는대요.”
“풋! 술이 늘어서 뭐하게요.”
“우리 사내들은 술에 목숨을 걸거든요.”
“목숨을 걸어요?”
“멋진 사내를 평가하는 척도에 술을 잘 마시는 것도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훗! 아무튼 사내들은 희한한 족속이에요.”
“오줌 멀리 쏘기로 형 아우를 정한다는 말을 들으면 기절하겠네요?”
“그런 걸로도 내기를 해요?”
“네.”
“피이! 시시해.”
“원래 사내들은 관으로 들어가 눕기 전까지는 철이 안 든다고 하잖아요.”
“호호호! 그거 정답이네.”
아수수는 크게 웃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삼 층 처소에 도착했다.
“먼저 욕실로 갈 거예요.”
“서 있는 것도 힘든데 그냥 자는 게 낫지 않아요?”
“제가 목욕을 못 할까 봐서요?”
“네.”
“당신이 있는데 뭔 걱정이에요?”
“밤새도록 일하고 온 사람에게 목욕을 시켜 달라는 건가요?”
“네.”
아수수는 배시시 웃었다.
“그건 너무 뻔뻔한 거 아닌가요?”
“부부는 말이에요, 때로는 손해 보는 일도, 하기 싫은 일도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 거예요. 늘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만은 없다고요.”
“그럴 거면 뭐하러 혼인을 하는 거죠?”
“이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건 혼자뿐이라는 지독한 외로움이거든요.”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혼인을 한다는 건가요?”
“그건 아주 일부분에 불과해요. 혼인을 하게 되면 가장 좋은 건 사랑으로 채워진 충만함을 얻을 수 있다는 거예요. 사랑으로 채운 충만함은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살 수가 없어요. 오직 혼인을 통해 이루어진 가정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어요. 아무튼 난 지금 목욕을 해야겠어요.”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아수수를 욕조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옷을 벗겼다.
욕조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이화태양강을 펼쳐 미지근하게 데웠다. 그런 다음 아수수를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 좋다.”
아수수는 활짝 웃었다.
“당신도 들어오세요.”
“난…….”
“당신은 당신 몸에서 피 냄새가 얼마나 심하게 나는지 모르죠?”
“그렇게 많이 나요?”
금장생은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빨리 들어오지 않고 뭐 해요.”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의가 아니라고 해도 벌써 두 번이나 관계를 가졌는데 새삼스럽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금장생은 챙겨 왔던 증서들이 물에 젖지 않도록 한편에 빼 놓고 옷을 벗었다.
그리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아수수는 금장생의 알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금장생이 안으로 들어오자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약간은 어색한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
“나 씻겨 주세요.”
침묵을 깬 사람은 아수수였다.
“씻겨 달라고요?”
“제가 그날 밤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당신을 침대에 눕히고 물수건으로 밤새 닦았다고요.”
“그러니까…….”
“날 저기로 눕히고 조두를 잔뜩 발라서…….”
아수수는 몸을 일으켰다.
첨벙!
하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로 욕조로 처박혔다.
금장생은 얼른 아수수를 부축했다.
“저를 저기로…….”
아수수는 단을 가리켰다.
“아무튼 그놈의 술은!”
금장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아수수가 원하는 대로 단으로 데려가서 눕혔다.
“저기 조두 있어요.”
아수수는 곡물 가루가 놓여 있는 선반을 가리켰다.
금장생은 선반 앞으로 갔다.
“맨 오른편에 있는 게 장미와 조두가 섞인 거예요.”
금장생은 아수수가 가리킨 자기병을 들고 단 앞으로 갔다. 그런 다음 세숫대야에 물을 떠 와 손바닥에 조두를 붓고 물을 섞어 비볐다.
향긋한 장미 향을 풍기는 거품이 잔뜩 생겨났다.
“엎드릴게요.”
아수수는 엎드렸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했던 것과는 달리 뒤집는 건 쉽게 했다.
금장생은 거품을 낸 손으로 아수수의 몸을 안마하듯 문질렀다.
먼저 목을 꼭꼭 누르면서 문지른 손은 등을 타고 내려갔다. 그리고 허리를 지나 엉덩이에 이르렀다.
아수수의 몸이 약간 경직되었다.
금장생도 아수수의 몸이 굳어진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손을 멈추면 더 어색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는 손으로 꽉꽉 쥐어 가면서 엉덩이에 비누질을 했다. 가끔은 허벅지 안쪽으로 손이 침입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다리까지 조두 칠을 다 하고 나서 물을 끼얹었다.
“역시 남편이 있어야 해요.”
아수수는 빙그레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래도 전 여자보다 돈이 더 좋습니다. 제 혼인 상대는 여자가 아니라 돈입니다. 금빛과 은빛의 황홀한 광채를 뿌려 대는 돈 말입니다.”
금장생은 다시 조두로 거품을 냈다.
그런 소리라도 하지 않으면 무너지고 말 정도로 아수수의 몸매는 치명적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목부터 조두 칠을 했다.
목을 비빈 손이 아래로 내려가다가 가슴 앞에서 멈췄다.
그는 아수수의 얼굴을 보았다. 아수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는 고개를 젓고는 손을 아래로 내렸다.
풍마한 가슴이 그의 손에서 이지러졌다.
“학!”
아수수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금장생의 손이 우뚝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