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79화 (79/524)

황금가 (79)

역천영면마진

가장 먼저 금장생의 눈을 사로잡은 건 주위를 감싼 어둠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그렇게 심하게 어둡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일 장 너머를 볼 수가 없었다.

금장생은 바닥을 살폈다.

흙이 깔려 있는 바닥에는 풀 한 포기 나 있지 않았다. 흙먼지도 날리지 않는다.

“저건 나무 같은데…….”

저 앞에 거무튀튀한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금장생은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예상대로 나무였다.

전에 천역에서 보았던 나무처럼 이파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위를 향해 가지를 뻗어 올리고 있다.

금장생은 나무를 가만히 살폈다. 혹시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하지만 나무는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도 없고, 풀벌레 소리도 없고, 숲이 살아 있다는 징후는 어디에도 없었다.

금장생은 좌우를 살피며 천천히 걸었다.

반 시진 정도를 걸었을 때였다.

“응?”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바로 앞에 커다란 석옥이 나타났다.

그는 석옥을 살폈다.

시계가 일 장밖에 나오지 않는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한 변의 길이가 십 장에 달하는 석옥은 전부 보였다.

감옥처럼 창문도 없었다.

금장생은 벽을 따라 걸었다.

잠시 후 문이 나타났다. 문 역시 벽처럼 돌로 돼 있었다.

금장생은 문을 오른편으로 밀었다.

그르릉!

그가 이곳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듣는 소리였다.

쿵!

파앗!

문이 완전히 열리는 순간 천장에서 강렬한 광채가 쏟아졌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이 갑작스럽게 빛을 보자 곧바로 적응이 되지 않았다. 금장생은 얼른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눈을 떴다.

그제야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왼편 벽에는 서가가 있고, 한가운데에는 돌로 만든 탁자가 놓여 있다. 오른편 벽에는 찻잔과 주전자 등이 놓인 선반이 있다. 찻잔 수는 백여 개 정도다.

한두 사람이 백여 개의 찻잔을 돌려 가면서 쓰진 않았을 테니까 최소 백 명이 기거했다는 뜻이 된다.

금장생은 중앙 탁자 앞으로 갔다.

탁자 가운데에는 첩지가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첩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이름: 무혼

나이: 이십 대 초반으로 추정.

직업: 선착장으로 들어온 고래를 잘라 주고 일당을 받아 살아감.

무공 정도: 정식으로 익힌 무공은 없으며 고래를 일도에 잘라 내는 괴력을 지닌 것으로 보아 도법에 자질이 있음.

신체적 특징: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심한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약도 없이 사흘이면 털고 일어나는 것으로 볼 때 전대 맹주와 같은 마신체를 타고난 것으로 추정됨.

“이건?”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아는 한 현재 맹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무림 단체는 없었다.

“이것도 왕가들처럼 비밀단첸가?”

그는 다른 첩지를 집어 들었다.

대부분의 첩지는 인물에 대한 특징들이 적혀 있었다.

“여기도 있네.”

무혼이란 자에 대한 첩지는 또 있었다.

구 년 전 데려온 무혼은 전대 맹주의 피를 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양성소네.”

첩지를 분석해 내린 결론이었다.

정확하게 어떤 단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공에 자질이 있는 자들을 데려와 무인으로 길러 낸 장소가 분명했다.

이번에는 서가로 가서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겉장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금장생은 첫 장을 넘겼다.

어쩌면 공연한 짓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록을 남기는 건, 이 모든 일이 우리 영달을 위해 한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어서다.

우리 구마는 맹주를 배신했다. 아니, 그를 살해했다.

우리는 영원한 마도를 꿈꾸는 마인이다. 마맹이 창설된 이유도 영원한 마도 천하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는 아니었다.

아니, 젊은 시절엔 우리와 같은 꿈을 꾸었던 마도 전사였다. 그를 맹주로 추대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랬던 그가 변했다. 무맹의 존재를 인정하고, 무림 발전을 위해서는 마맹과 무맹이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린 분노했다.

맹주를 찾아가 제발 그러지 말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결국 우린 최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맹주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철무황 그에게 있다.

“이건!”

금장생은 멍한 얼굴로 책을 보았다.

무맹武盟, 마맹魔盟.

그들은 삼백 년 전에 존재했던 무림 세력이다. 두 문파는 백 년 동안 중원무림을 양분하여 다스렸다.

두 세력의 통치가 끝난 건 삼백 년 전 쟁천비무 때였다.

두 세력이 중원무림을 놓고 벌인 그 비무에서 마맹은 참패를 했다. 승자가 된 무맹은 마맹 측에 해산을 요구했다.

당연히 마맹은 무맹의 요구를 거절했다. 다른 건 몰라도 해산은 할 수 없다는 게 마맹의 주장이었다.

결국 무맹은 마맹을 공격했다.

그런데 마맹은 생각보다 허무하게 무너졌다.

마맹 역사상 가장 뛰어난 맹주라고 알려졌던 전신 철무황도 없었고, 구마 중 태양마존, 귀마존, 빙마존, 풍마존도 없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마맹은 무너지고 말았다.

무림 일통.

무맹은 그 어떤 세력도 이루지 못했던, 무림의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무맹 천하는 오래가지 못했다. 마맹이 멸망하고 불과 십 년도 지나지 않아 그들 역시 몰락하고 말았다.

무맹의 몰락 원인은 내분이었다.

무맹은 수십 년 동안 마맹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전력을 증강시켰다. 그랬는데 마맹이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몰락하자, 증강했던 전력은 고스란히 남고 말았다.

더 많은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십 년이 지나자 무맹 또한 와해되고 말았다.

그랬던 단체의 이름을 이곳에서 보게 된 것이다. 금장생은 다시 책자로 시선을 주었다.

그를 없애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에겐 그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다.

그건 중원무림을 놓고 무맹과 벌이는 비무인 쟁천비무다.

그 비무를 위해 일백 명의 기재를 모아 이곳으로 왔다.

이곳을 발견한 사람은 귀마존이다.

귀마존은 이곳에 역천영면마진이라는 특별한 진식이 펼쳐져 있다고 하였지만, 내 생각엔 진식의 이름은 그가 지어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이름은 없을 것 같아, 역천영면마진이라 부르기로 했다.

역천영면마진은 누가 만들었는지 모른다.

안에는 수십 개의 석옥이 있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불이 켜진다.

그리고 강시도 있다. 강시들은 특이하게 사람이 다가가면 깨어나 공격을 해 왔다.

우리는 편의상 그것들을 빙강시와 화강시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이곳에는 빙한담과 열양천도 있었다.

빙강시와 화강시가 탄생하게 된 이면에 빙한담과 열양천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곳은 무인을 양성하는 데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데려온 백 명에게 양극신공兩極神功 전반부와 야수마존의 혈랑도법 일부를 가르쳐 주고 마령단을 복용시켰다. 그리고 역천영면마진 안으로 들여보냈다.

역천영면마진 내에는 총 열 개의 관문이 있고, 석옥에는 우리 무공을 적어 두었다.

이제 십 년 후 역천영면마진에서 살아남은 전사는 열 번째 마령단을 복용하고 쟁천비무에 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주고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마령단 속에 독을 집어넣은 모양이네.”

금장생은 책을 서가에 꽂았다. 더 이상 볼 게 없었다.

안을 둘러보던 그는 계단을 발견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 역시 문을 완전히 열자 불이 켜졌다. 그곳은 마치 고문을 자행했던 방처럼 쇠사슬 등이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저거네.”

금장생은 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양극신공이란 이름의 무공이 적혀 있었다.

“양극신공은 내공심법 중 최고봉이고 창시자는 천마와 쌍벽을 이뤘던 수라修羅인데…….”

수라는 천마와 동시대를 살았던 무인이다.

모든 면에서 천마에게 뒤졌지만 딱 한 가지 더 뛰어난 게 있었는데, 그게 바로 양극신공이라 불리는 내공심법이었다.

양극신공은 상극인 극양기와 극음기를 몸 안으로 끌어들여 서로 충돌시키고 그때 나오는 힘을 내기로 만드는 무공을 말한다.

위력은 최강이지만 부작용도 아주 심해, 자칫 잘못하면 극양기와 극음기의 충돌을 견디지 못하고 몸이 폭발하고 만다.

그 무공이 이곳에 적혀 있었다.

“그런데 완벽한 게 아니네.”

다 읽고 난 금장생은 중얼거렸다.

양극신공으로 만들어 내는 강기를 양극천강兩極天罡이라고 하는데, 벽에 새겨진 구결만 가지고는 양극천강을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물론 극양공과 극음공을 쉬지 않고 펼치면 양극천강이 만들어지긴 한다. 하지만 그건 본래 위력의 오 할에도 미치지 못한다.

“설사 다 안다고 해도 일회성 소모품에게 전부를 알려 줄 필요가 없겠지.”

그의 시선이 양극신공 옆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야수마존의 무공인 야수감각도와 혈랑도법 일 초 혈랑파, 그리고 혈랑보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도 대박이네.”

금장생은 야수감각도와 혈랑도법 일 초와 혈랑보를 암기했다.

그런 다음 왼편에 나 있는 석문을 열었다. 그곳은 물이 펄펄 끓고 있는 열천이었다.

“열양천이네.”

그는 열양천 문을 열어 둔 채로 반대편 석문을 열었다. 그곳은 빙한담이었다.

“제대로 효과를 보려면…….”

그는 생각에 잠겼다.

“합쳐야겠지.”

그는 장포를 벗어 놓고 묵야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잠능폐혈대법을 풀었다.

그러자 막아 두었던 단전이 활짝 열리며 내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각 혈도에 내공이 완벽하게 자리 잡자 묵야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열양천 문 앞에서 빙한담 입구까지 일자로 그었다.

묵야 끝에서 솟구친 검강은 바위 바닥에 깊은 홈을 만들었다.

묵야를 들어 올린 그는 이번에는 처음 만들었던 홈에서 두 자 정도 떨어진 곳에 찔러 넣고 다시 열양천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열양천과 빙한담을 잇는 깊은 홈 두개가 생겨났다.

두 천에서 흘러나온 극음과 극양의 물은 금장생이 판 홈을 따라 흘러갔다. 두 물이 만난 중앙에서 희뿌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금장생은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위쪽과 아래쪽 홈을 잇는 홈을 팠다.

그가 판 홈은 금세 물로 채워졌다.

세로로 난 홈은 하나만 만든 게 아니었다. 사다리처럼 한 자 간격으로 계속 만들어 나갔다.

세로로 홈을 다 파고 난 후 열양천 바로 앞으로 갔다. 그리고 홈이 파인 부분을 발로 강하게 굴렀다.

쩍!

홈 아래쪽에서 뭔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홈을 벗어난 그는 방금 굴렀던 돌에 손바닥을 대고 허공섭물을 펼치면서 들어 올렸다.

츄악!

열양천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차례로 돌을 떼어 내면서 수로를 만들었다. 한가운데 돌 하나는 그대로 두고 양쪽의 돌을 모두 떼어 냈다.

한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오른편에는 극양의 기운을 내포한 물이, 왼편에는 극음의 기운을 내포한 물이 채워졌다.

“이제…….”

금장생은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돌을 발로 힘껏 밟았다.

작은 소리와 함께 돌 아래쪽이 갈라졌다. 그 상태에서 천천히 들어 올렸다.

치익!

극양과 극음의 물이 섞이면서 엄청난 양의 수증기가 생겨났다.

수증기는 금세 지하 석실 내부를 채웠다. 열양천과 빙한담의 물은 중앙에 줄을 그어 놓은 것처럼 서로 섞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금장생은 옷을 벗었다.

곧 그는 완전히 알몸이 되었다.

“드디어 지극음양천地極陰陽泉을 찾았습니다, 사부님.”

금장생은 나직하게 중얼거리고는 물이 나뉜 부분으로 들어갔다.

치익!

쩌엉!

오른편은 꽁꽁 얼고 왼편은 벌겋게 익었다.

“크윽!”

금장생의 입에서 고통에 겨운 비명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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