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78)
안으로 들어온 자들은 헌원중천과 칠왕가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내부를 살폈다.
“아무도 없습니다.”
제갈영우가 헌원중천에게 보고했다.
“다른 곳으로 나가는 문은?”
헌원중천은 물었다.
“문도 없습니다.”
“정말 없단 말이냐?”
“벽을 전부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외부로 나가는 문은 없습니다.”
“열한 구의 시체만 남기고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말이구나.”
“이 안에서 가장 수상한 건 저 기둥 세 갭니다.”
제갈영우는 기둥을 가리켰다.
“나도 봤다. 발자국과 손바닥 자국이 남아 있더구나.”
“해왕이 데리고 왔던 강시도 세 구였습니다.”
“그러니까 천좌 네 말은, 저 기둥 세 개와 강시 세 구가 열쇠였다는 거냐?”
“그게 아니라면 해왕을 비롯한 강시는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흐흠!”
헌원중천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 역시도 제갈영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시체는 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하느냐?”
헌원중천은 한편에 너부러진 시체를 가리켰다.
“누군가를 막기 위해 남은 자들로 보입니다.”
“하지만 실패했고, 저들을 없앤 자는 해왕을 따라갔을 거라는 거냐?”
“다른 통로가 있다면 모를까 이곳은 완전히 밀폐된 공간입니다. 유일한 통로는 우리가 왔던 그곳뿐입니다.”
“한 번 더 살펴라!”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제갈영우는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대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지하 공간을 꼼꼼하게 조사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휴식을 취하고 몸을 회복한 다음 돌아간다!”
헌원중천은 철수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헌원중천의 말이 떨어지자 대원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가부좌를 하고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운기행공을 끝낸 자들은 그 자리에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돌아가는 길도 쉽지 않을 겁니다.”
제갈영우는 헌원중천을 보며 말했다.
“쉽지 않다고 여기서 살 수는 없지 않느냐.”
“그렇긴 합니다만.”
“그가 돌아올 거라고 보느냐?”
“해왕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다.”
“저는 해왕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릅니다. 대천좌께서는 아십니까?”
“나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는 죽지 않고 어디론가 갔을 거라는 거다.”
“화왕께서는 아시겠죠?”
“그렇겠지.”
“만일 대천좌께서 질문을 하면…….”
“이건 내 생각인데, 해왕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다.”
“그렇겠지요.”
제갈영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쉬어라.”
헌원중천은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대천좌도 쉬십시오.”
제갈영우는 인사를 하고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찰미하가 전음으로 물었다.
―나도 아는 게 없소.
제갈영우는 고개를 젓고는 드러누웠다.
‘제길!’
너무 찬 바닥에 절로 욕설이 비어져 나왔다. 그렇다고 다시 일어날 수도 없었다.
그는 꾹 참고 잠을 청했다.
쌓인 피로 때문인 듯 금방 곯아떨어졌다. 그의 코에서는 곧 고른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이 잠에서 깬 건 세 시진 후였다.
먼저 일어난 자들은 동료들을 깨워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출발했다.
그들이 떠나고 반 시진 후 두 사람이 지하로 들어왔다. 태월령과 척사랑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내부를 샅샅이 살폈다.
하지만 헌원중천 일행이 한 번 훑고 지난 곳인데 두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한 걸 발견할 리가 없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채 시체 앞으로 갔다.
“어디로 갔을까요?”
시체를 살피던 태월령이 물었다.
“글쎄요. 그냥 간 걸 보면 그자들 역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기는 한데…….”
척사랑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하는 계단을 제외한 사방이 꽉 막힌 폐쇄된 공간이다.
혹시 벽 어딘가에 진식이 설치돼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기가 왜곡된 부분이 있는지도 철저하게 조사했다.
하지만 그런 장소는 없었다. 지하 공간은 깨끗했다.
“그 사람은 있을 줄 알았는데.”
척사랑은 중얼거렸다.
“장 소협 말인가요?”
태월령은 물었다.
“네.”
척사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은 워낙 환경 적응력이 뛰어나서 살아남았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살아오면서 많은 이들을 겪었는데, 그 녀석보다 생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못 봤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내가 걱정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아니니까요. 우리도 그만 돌아갈까요?”
“그렇게 해요.”
태월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들이 또 공격해 오겠죠?”
“수가 많이 줄었으니까 돌아갈 때는 좀 더 수월할 거예요.”
“그렇겠죠.”
두 사람은 바로 계단을 올라갔다.
그들이 떠나고 한 식경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지하 한편 벽에서 금장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로 시체들 옆으로 갔다.
“이상하지도 않나?”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벌거벗은 상체에 방패처럼 생긴 물체로 가슴을 가린 상태인데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죽은 시체는 깊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건가?”
금장생은 시체 한 구 옆으로 가 쪼그려 앉았다.
“적운신갑이라고 했지, 아마?”
그는 적운신갑의 표면을 살폈다. 여러 가지 기호가 어지럽게 새겨져 있었다.
“맙소사!”
기호를 쳐다보던 그의 눈이 커졌다.
표면에 새겨진 글에 엄청난 힘이 숨겨져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린 것이다.
“어떻게…….”
그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가만.”
문득 강시를 제강할 때 피부에 주문을 써 넣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몸속으로 스며든 글은 시체를 움직이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완전히 같진 않지만 제강할 때 사용하는 주문과 적운신갑 표면에 새겨진 글은 비슷한 기능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같은 기능을 하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어쩌면 강시도 저 방패에 적힌 주문과 죽지 않는 자들로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장생은 시체들 중 한 구의 가슴에서 적운신갑을 떼어 냈다.
적운신갑은 네 귀퉁이에 구멍을 뚫어 줄로 묶은 다음 양쪽 어깨와 허리에 묶어 고정돼 있었다. 안쪽은 몸의 굴곡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두께는 한 치 정도였다. 갑옷의 가장자리에는 작은 구멍이 무수히 뚫려 있었다.
금장생은 방패 형태의 갑옷을 쥐고 힘을 끌어 올렸다.
스르르!
그러자 가장자리의 작은 구멍에서 촉수가 튀어나왔다.
금장생은 얼른 힘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촉수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 이번에는…….”
그는 그동안 금제해 두었던 내공을 풀었다.
닫아 두었던 단전이 열리자 엄청난 양의 내공이 쏟아져 나와 온몸을 휘감았다.
그는 그 내기를 적운신갑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데 적운신갑은 촉수를 내밀지 않았다.
이번에는 본연의 내기를 배제하고 천병총 지하에서 얻은 힘만 밀어 넣었다.
천병총 지하에서 시체로부터 얻은 힘은 특이하게도 원래 지닌 내기와 섞이지 않고 따로 놀았다. 아울러 지금까지 그가 싸울 때도 그 힘만을 사용했다.
이질적인 기운임에도 불구하고 발출과 회수가 내기와 똑같이 이루어졌다.
스르르!
그러자 촉수가 다시 튀어나왔다.
“이놈은 본래 내 내기엔 반응을 하지 않고 천병총 지하에서 얻은 특이한 힘에만 반응한다는 거네?”
금장생은 적운신갑을 톡톡 두들겨 보았다.
하지만 그걸로 적운신갑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하나 정도 있어서 나쁠 건 없겠네.”
그는 장포와 상의를 벗고 적운신갑을 안쪽에 걸쳤다. 굳이 갑옷 상태로 만들지 않더라도 상체를 보호하는 용도로 괜찮을 것 같았다.
벗어 두었던 상의를 입고 장포를 걸친 후 계단을 올라갔다.
“그들이 다 처리해 주면 나는 편하게 갈 수 있을 텐데.”
그는 걸음을 옮겼다.
오는 도중 나타났던 박쥐와 수인 그리고 황소를 닮은 늑대와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싸우기 싫다는 건 그의 생각일 뿐이었다.
한 시진 정도를 걷자 족히 백여 마리는 될 것 같은 박쥐가 앞을 막아섰다.
“나는 싸우지 않고 그냥 가고 싶은데 안 되겠니?”
금장생은 박쥐들을 보며 말했다.
휙! 휙!
소용없었다.
박쥐들은 금장생을 먹잇감으로만 생각하는 듯, 곧바로 날아왔다.
“어디 한번 해볼까?”
금장생은 장포와 상의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힘을 끌어 올렸다.
스스스! 스스스!
그러자 적운신갑의 각 구멍에서 촉수가 튀어나왔다.
촉수는 상의와 장포의 틈새를 뚫고 나와 금장생의 전신을 뒤덮었다. 적운신갑의 촉수가 미치지 못한 유일한 곳은 악마수였다.
―뭐냐, 이건?
금장생의 몸이 달라졌음을 감지한 악마수가 물었다.
‘적운신갑이라고 하더군요.’
―죽은 녀석에게서 벗겨 낸 거구나.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죽음의 기운으로 뒤덮여 있으니 알지 어떻게 알았겠느냐?
‘주인이 죽으면 약해지나요?’
금장생은 전방으로 왼팔을 내밀었다.
슉! 슉슉슉! 슉슉슉! 슉슉슉!
이십여 개의 혈반이 빠르게 튀어 나갔다.
쏘아져 가면서 적안으로 변한 혈반은 날아오는 박쥐들의 몸통을 갈랐다. 두 조각으로 잘려 나간 박쥐들이 추락했다.
하지만 적안은 멈추지 않았다. 속도로 느려지지 않았고, 처음과 같은 속도로 날아다니며 박쥐들을 없앴다.
백여 마리에 달했던 박쥐를 모두 없애는 데 한 식경도 걸리지 않았다.
―일반적으론 그렇지만 너는 해당되지 않는다.
‘왜 그런 거죠?’
―네가 가진 모든 것들이 산 자보다는 죽은 자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더 익숙하다는 건가요?’
―그렇다. 그리고 그 갑옷을 ‘죽은 자의 갑옷’이라 부른다.
‘죽은 자의 갑옷?’
―그렇다.
‘어느 게 더 강하죠?’
―일반적인 기사와 죽지 않는 자 중 누가 더 강한지 비교해 보면 답이 나온다.
‘죽은 자의 갑옷이 훨씬 강하다는 거군요.’
―힘이 넘치는 것 같지 않으냐?
‘그 정도는 아닙니다.’
금장생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적운신갑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입은 채로 걸어 보았다.
한 시진 이상 걸었는데도 적운신갑은 크게 무겁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약간 두꺼운 옷을 입은 정도였다.
그러던 도중 수인족의 시체들이 가득한 곳에 도착했다.
쫓아오던 자들과 태월령 일행에게 전부 죽임을 당한 듯, 살아 있는 괴물은 없었다.
처음 만났던 괴물도 마찬가지였다.
금장생의 발길을 막아서는 건 없었다.
괴물들 시체를 지나치자 갑옷을 해제했다.
해제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갑옷 한가운데 손바닥을 대고 갑옷을 벗겠다는 의지만 주입하면 되었다.
‘앞으로 입을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불편하진 않을 텐데?
‘갑옷을 걸치면 법기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그랬다. 갑옷은 전신을 감싸 버리기 때문에 태극선의 이곳저곳에 꽂아 둔 암왕칠구를 꺼낼 수가 없었다.
―갑옷은 입지 않으면 더 좋은 거지.
‘그러게 말입니다.’
“응?”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왼편에서 이상환 광경을 발견한 탓이었다.
괴물 한 마리가 너부러져 있었는데 몸통의 절반이 보이지 않았다. 잘려서 안 보이는 게 절대 아니었다. 놀랍게도 죽은 마물의 상체 절반이 벽을 뚫고 들어가 있었다.
즉, 저 벽은 어딘가로 통해 있다는 뜻이다.
“가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금장생은 갈등했다.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지 않으면 후회할 것만 같았다.
“가 보자!”
이내 결심을 굳혔다.
금장생은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