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75)
파앗!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가장 위쪽에 있던 백사의 손등에서 광채가 솟아 나왔다. 이어 오른편에 있는 강시와 왼편 강시의 손에서도 차례로 밝은 광채가 흘러나왔다.
“오!”
백리장광의 얼굴에 감격의 빛이 어렸다.
그사이 광채는 문 전체로 퍼져 나갔다.
빛은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문이 파란색으로 변하면서 수면처럼 일렁였다.
‘저런 걸 또 보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강시를 물려도 되네.”
백리장광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금장생은 백사를 물러나게 했다.
“먼저 들어가게.”
백리장광은 금장생을 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금장생은 백사의 손을 잡고 오른발을 내디뎠다.
그의 다리는 아무런 저항 없이 안으로 쑥 들어갔다.
금장생과 백사는 곧바로 푸른색 막을 빠져나왔다. 문 안쪽은 사물의 구분이 가능할 정도의 희미한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태 소저가 들었다는 붉은 강은 어디에 있을까?”
금장생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딱히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니었다. 혼잣말에 더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이 통로는 멀리서 보면 붉은색의 물이 흐르는 강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 거다.
“여기가 통로야?”
금장생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통로의 입구다.
그 순간 백리장광을 비롯한 두 강시와 백리장광의 부하들이 나왔다. 부하들의 수는 이백 명이나 되었다.
‘많이도 숨어 있었네.’
금장생은 피식 웃었다.
상당수가 숨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수가 많을 줄은 몰랐다.
“모두 갑옷을 착용하라!”
백리장광은 나직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백리장광의 부하들은 일제히 장포와 상의를 벗었다.
그런데 그들의 상의 안에는 특이한 물체가 하나씩 붙어 있었다. 가슴 형태를 이루고 있었는데, 마치 가슴을 보호할 용도로 부착하고 다니는 방패 같았다.
‘저건 갑옷이…….’
바로 그때 옷을 벗은 자들이 손바닥을 가슴에 대고 나직하게 소리쳤다.
중원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금장생은 해석이 가능했다.
그들이 외친 소리는 ‘해제’라는 의미였다.
스스스! 스스스! 스스스! 스스스!
“헉!”
금장생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놀랍게도 방패 형태의 물체에서 촉수 같은 게 튀어나오더니 무인들의 전신을 뒤덮은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무인들은 갑옷을 걸친 전사로 변했다.
그들의 모습은 백사를 데리러 갈 때 싸웠던 죽지 않는 자들과 흡사했다.
‘혹시 저들은…….’
문득 누란의 유적지에서 보았던 글이 떠올랐다.
방문자들은 전부가 떠난 게 아니라고 하였다. 많은 이들이 떠났지만 일부는 중원에 남아 정착했다고 했다.
어쩌면 저들은 그 남은 자들의 후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리장광 역시 갑옷을 걸친 상태였다.
그가 입은 갑옷은 부하들의 갑옷보다 무늬가 더 정교하고 화려했다.
“출발한다!”
백리장광은 나직하게 소리쳤다.
“진형을 구축하라! 마물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주의하라!”
폭풍단 단주 광풍사객 궁철이 부하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존!”
폭풍단 대원들은 오른손을 가슴에 대며 대답했다.
척! 척척!
대원들은 좌우로 이동하더니 금장생과 백사 그리고 두 강시를 에워싸듯 늘어섰다.
‘영락없는 포로 신세네.’
금장생은 쓴웃음을 지었다.
―악마수가 있는 이상 두려워할 필요 없다.
백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게 악마수가 있다는 걸 들키면 큰일 나.’
―큰일 난다는 건 무슨 뜻이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건 적안으로 저 갑옷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걸 뜻하는 것 같은데, 맞아?’
―적안으로는 안 되고, 흑안 이상이라야 한다.
‘아무튼 혈반으로 저들을 없앨 수 있다는 거잖아.’
―그렇다.
‘그럼 내가 저들의 천적이라는 소린데, 너 같으면 천적을 가만두겠어?’
―…….
백사는 대답을 못 했다.
‘아무튼 난 악마수는 절대 사용하지 않을 거니까 그리 알아.’
―알아서 해라.
카아아아아!
크아아아아!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괴성이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금장생은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그 소리에는 본능을 자극하는 뭔가가 내포돼 있었다. 문득 조금 전 백리장광이 말한 마물의 울음소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동물인지 알아?’
그는 백사에게 물었다.
―동물이 아니라 마물이다.
‘마물은 어떤 걸 말하지?’
―마물에 대해 알려면 먼저 통로에 대해 알아야 한다.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는 말이겠지?’
―그렇다. 이 통로는 고도로 압축된 기氣로 이루어져 있다. 그 압축된 기가 엄청난 속도로 흐르고 있는 장소가 바로 통로다. 고도로 압축된 힘이 가공할 속도로 흐르면 어떤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느냐?
‘흘러넘치겠지.’
―맞다. 고도로 응축된 기는 통로 밖으로 흘러넘쳐 주위의 동식물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일이백 년 동안 노출되면 극히 미미한 변화밖에 일어나지 않겠지만 천 년이 넘어가면 달라진다.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종이 등장하게 된다.
‘혹시 너를 데리러 갈 때 보았던 그 걸어 다니는 나무도?’
―맞다. 그 식인보목食人步木이 그래서 생겨난 거다. 그리고 근처에 살던 동물들 역시 식인보목처럼 완전히 다른 종이 돼 버린다. 빠르고 강하고 잔인하고, 수명은 영원에 가깝게 늘어나지.
‘죽지 않는 자도 그렇게 생겨난 거야?’
―죽지 않는 자는 응축된 기에 한 가지가 더해야져야 한다.
‘어떤 건데?’
―원한.
‘원한?’
―원한이 골수에 쌓이면 영혼은 그 육체를 떠나지 못한다. 그 영혼과 응축된 기가 합쳐지면 암흑기暗黑氣라는 새로운 기가 만들어지고, 그 암흑기는 뼈나 시체, 혹은 갑옷으로 들어가 죽지 않는 자가 된다. 죽지 않는 자는 어둠 속에서 생전보다 몇 배 강한 전사가 되지만 태양 빛이나 혹은 성스러운 광채에 노출되면 소멸하고 만다.
‘그래서 이 녀석으로 없앨 수 있었던 거였네.’
금장생은 묵야로 시선을 주었다.
전에 죽지 않는 자의 공격을 받았을 때 얼결에 묵야를 휘둘러 없앴다.
수어린이나 북궁창 그리고 카밀의 공격을 받고도 죽지 않았던 자들이 묵야에 의해 소멸되자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비로소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백사가 말한 죽지 않는 자들도 강시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탄생했기 때문이다.
―묵야로 죽지 않는 자들을 없앴다고?
‘응.’
―태양 빛이나 성스러운 광채 말고도 새로운 무기의 탄생이네.
‘지들이 죽지 않는 자 어쩌고 해 봐야 강시잖아.’
―강시?
‘움직이는 시체 말이야.’
―풋! 그러네.
‘너 지금 웃었어?’
―아, 아니다.
스윽! 스윽! 스윽!
‘온다.’
금장생은 긴장한 얼굴로 전면을 보았다.
수천 년 동안 응축된 기를 먹고 자란 마물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전투준비하라!”
백리장광은 고함을 내질렀다.
스르릉! 스르릉!
폭풍단 대원들은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었다.
휙! 휙휙! 휙휙!
잠시 후 일행 앞에 붉은 눈동자 수백 개가 나타났다.
털이 하나도 나 있지 않은 피부는 기름을 발라 놓은 것처럼 번들거렸다.
키는 머리에서 꼬리까지 거의 삼 장에 달하고, 머리에는 황소처럼 뿔이 나 있다. 고양이의 그것처럼 구부러진 발톱은 은색이며 길이가 한 자 정도 되었다.
대지를 딛고 선 앞다리와 뒷다리는 강철 기둥을 연상시킬 정도로 강인해 보였다.
크아아아아아!
맨 앞에 있던 마물 한 마리가 앞발을 번쩍 들고 일어나더니 괴성을 내질렀다. 대장 마물이 분명했다.
캬우우우우!
이어 뒤편에 있던 마물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허!”
금장생은 멍한 얼굴로 마물을 바라보았다.
엎드려 있을 때도 엄청난 크기였지만 두 발로 서자 더 커 보였다. 키가 거의 이 장(6미터)에 달했다.
“설마 걷는 건 아니겠지?”
크아우!
대장 마물은 폭풍단 대원들을 가리켰다.
크아앙!
카아앙!
파앗! 파앗! 파앗! 파앗!
마물들은 일제히 바닥을 찼다. 그러자 거대한 동체가 허공을 날았다.
“쳐라!”
동시에 백리장광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차앗!”
“타하!”
“이얍!”
폭풍단 대원들도 기합과 함께 몸을 날렸다.
마물과 폭풍단 대원들은 곧 맞닥뜨렸다.
먼저 공격한 쪽은 마물이었다. 마물은 한 자에 달하는 은색 발톱이 튀어나온 앞발을 힘껏 휘둘렀다.
차앙!
폭풍단 대원은 검을 들어 마물의 앞발을 막았다.
“크윽!”
마물의 힘은 엄청났다.
폭풍단 대원은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검을 놓지는 않았다. 그는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채 바닥으로 내려섰다.
크아앙!
마물의 입이 쩍 벌어지고 검은 액체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타액은 곧바로 폭풍단 대원이 팔로 떨어졌다.
치이익!
폭풍단 대원의 팔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마도 살을 녹이는 독 종류 같았다.
다행히 갑옷을 입은 상태라 대원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차앗!”
카캉!
푸욱!
기합과 함께 검 한 자루가 마물의 목을 뚫고 들어갔다. 동료 대원 한 명이 마물을 공격한 것이었다.
쿠에에엑!
마물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으아아악!”
비명을 내지른 건 마물뿐만이 아니었다. 폭풍단 대원들 또한 마물의 발톱에 죽임을 당했다.
마물 발톱의 힘은 엄청났다.
갑옷으로 중무장한 폭풍단 대원들의 몸을 갑옷과 함께 찢어발겼다.
“엄청나네.”
금장생은 혀를 내둘렀다.
마물들의 힘은 그의 상상을 초월했다.
시험을 해 본 건 아니지만 폭풍단 대원들이 걸친 갑옷은 검강이 실린 검이 아니면 잘라 내지 못할 게 분명하다. 그렇게 단단한 갑옷을 마물의 발톱은 마치 종이처럼 찢어 내고 있다.
―저것들이 중원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어?
백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흥 재벌이 탄생하겠지 뭐.’
―신흥 재벌?
‘내가 떼돈을 번다는 거지 뭐겠냐?’
―이 와중에…….
‘진짜 장사꾼이란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지. 나도 그런 부류 중 한 명이고.’
―그래, 잘났다.
백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대원들은 멈추지 마라! 계속 밀고 나간다!”
백리장광은 고함을 내질렀다.
“차아!”
“타하!”
폭풍단 대원들은 더욱 거칠게 공격을 했다.
그들은 어느새 마물과 싸우는 방법을 터득했다.
강기를 생성하지 못한 자는 방어에 치중하고, 강기를 생성하는 자는 마물의 숨통을 끊는 일을 맡았다. 수년 동안 함께했던 자들이라 그런지 손발이 척척 맞았다.
마물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 와중에 폭풍단 대원들도 당했지만 마물이 줄어드는 수보다는 적었다.
마물의 수가 줄어들자 폭풍단 대원들이 나아가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강하네.’
금장생은 내심 중얼거렸다.
어느 순간 마물들이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더욱 밀어붙여라! 놈들이 물러난다.”
“차앗!”
“타하!”
“하아!”
폭풍단 대원들은 기합을 내지르며 더욱 거칠게 밀어붙였다.
캬우우우!
스윽! 스윽! 스윽!
철수하라는 명령인 듯 마물들이 전장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완전히 도망치진 않았다. 십여 장 떨어진 곳 좌우측에서 일행을 노려보며 따랐다.
우두둑!
‘돌겠군.’
금장생은 얼굴을 찌푸렸다.
방금 그건 마물이 죽은 자를 씹어 먹을 때 나는 뼈 부서지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