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74)
암역
삼백여 명이 봉우리 정상으로 올라섰다. 그들은 금장생과 강시를 쫓는 헌원중천 일행이었다.
가장 먼저 그들의 눈에 띈 것은 일직선으로 나 있는 통로였다.
“저게 뭐라고 생각하느냐?”
헌원중천은 통로를 가리키며 물었다.
“누군가 길을 만들며 저곳으로 갔습니다.”
제갈영우가 대답했다.
“그 누군가는?”
“강신술사와 강시일 겁니다.”
“둘이서 저 길을 만들었다는 거군.”
헌원중천은 잘려 나간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들었다.
강력한 힘을 동반한 무기가 아니라 종이처럼 얇고 예리한 무언가에 잘린 흔적이었다.
이런 흔적을 보는 게 처음이 아니었다. 투루판 사구에서 보았던 시체에도 이런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자가…….”
헌원중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강신술사와 강시가 함께 만든 길이라면 이 흔적을 남긴 자는 강신술사일 가능성이 높다. 강시가 남겼다 하기에는 흔적이 너무 섬세하다.
문제는 무공 수위다.
물론 날카로운 무기를 가지고 있다면 무공이 약한 자라고 해도 이런 흔적을 남기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이 나무에 난 흔적은 고수가 아니면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강신술사가 고수라는 뜻이 되는데, 이런 실력을 지닌 자가 며칠 전 싸움에서는 목숨이 위태로웠는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척사랑과 태월령 그 계집들 중 한 명이 함께 가고 있다고 봐야겠군. 아니면 둘 다 가거나.”
그는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그러쥐었다.
푸스스!
나뭇가지는 곧 가루로 흩어졌다.
휙!
바로 그때 한 명이 일행 후미로 날아내렸다. 구라다를 찾으러 간 소라였다.
“찾았느냐?”
소라가 다가오자 헌원중천이 물었다.
“네.”
소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오지 않은 걸 보면 죽었구나.”
“네.”
“어디서 죽었느냐?”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우물 옆에 죽어 있었습니다.”
“사인은?”
“옆 목을 찔렸습니다.”
그녀가 본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구라다는 무릎을 꿇은 채 목이 잘려 있었다. 그건 동영 최고 무사 집단인 사무라이의 죽음이다.
그의 죽음으로 상황을 추측해 볼 수 있었다.
구라다는 그곳에서 누군가와 싸웠고 패했다. 그런데 누군가는 사무라이이거나 사무라이 전통을 잘 아는 자였다. 구라다는 그에게 사무라이의 죽음을 원했고, 그자는 들어준 게 분명했다.
구라다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마치 오랫동안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린 것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구라다에게 과연 짐은 무엇이었을까?
과연 누가 구라다의 목을 쳐 무사다운 죽음을 맞게 해 주었을까?
여기까지 오는 내내 생각해 보았지만 해답은 없었다.
“짐작 가는 자도 없느냐?”
“없습니다.”
소라는 고개를 저었다.
“구라다가 거기로 간 이유도 모르고?”
“네.”
“그렇구나. 가자.”
헌원중천은 통로를 따라 몸을 날렸다.
그들이 떠나고 한 식경 후. 두 사람이 조금 전 헌원중천 일행이 서 있던 곳으로 왔다.
그들은 척사랑과 태월령이었다.
척사랑과 태월령은 금장생을 찾는 걸 포기하고 헌원중천 일행을 쫓기로 했다.
“저 길 끝에 그 녀석이 있나 봐요.”
태월령은 통로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우리가 그 사람을 잘못 봤나 봐요.”
척사랑이 말했다.
“왜요?”
“조금 전에 그자들이 나눈 이야기 들었잖아요.”
“구라단가 하는 자가 죽은 걸 말하는 건가요?”
“네. 그자가 쫓던 사람은 장 소협이었어요. 그랬던 자가 시체로 발견되면 가장 먼저 장 소협을 의심해야 해요.”
“백사의 작품일 수도 있잖아요.”
“백사가 죽였다면 목에 구멍을 내는 게 아니라 잘랐겠죠.”
“그러니까 장생을 쫓는 자고, 죽었는데 백사의 솜씨가 아니니까 장생일 수밖에 없다는 건가요?”
“그가 무공을 익혔을 거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기는 한데…….”
태월령은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금장생을 의심한 건 월아천 사건이 일어났을 때였다.
금장생의 짓이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금장생이 강력하게 오리발을 내미는 바람에 흑지 무인들이 그렇게 한 거라고 단정하고 말았다.
그렇게 단정했던 이면에는 금장생이 했다고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즉, 복잡한 게 싫어서 그냥 넘어갔던 거였다.
“나는 무인 장생보다 강신술사 장생이 더 마음에 들어요.”
태월령은 싱긋 웃었다.
“그가 무인이라고 해도 상관없다는 말인가요?”
“네.”
“하긴 그렇긴 하죠.”
척사랑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인인데 속이고 있다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테다. 극악무도한 악인도 아닌 것 같은데 굳이 신경 쓸 이유가 없다.
“그만 가요.”
태월령의 신형이 전방으로 쏘아져 갔다.
이어 척사랑도 태월령을 쫓아 몸을 날렸다.
* * *
“그럼 저는 가면 되는 겁니까?”
금장생은 물었다.
“그러네.”
백리장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말고 다른 길은 없습니까?”
금장생은 계단을 가리켰다.
“없네.”
백리장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끙! 저걸 언제 다 올라가냐. 삼천육백쉰 개나 되던데.”
금장생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하지만 말만 그렇게 했을 뿐 행동은 달랐다.
그는 도망치는 사람처럼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리고 금세 백리장광 일행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멈추게.”
십 장 정도를 올라갔을 때 백리장광의 목소리가 금장생의 발목을 잡았다.
금장생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강시가 움직이질 않네.”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제종을 꺼냈다.
딸랑!
“이제부터 네 주인은 거기 있는 그분이다. 그분의 말을 들어라!”
금장생은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백리장광을 보며 말했다.
“이제 들을 겁니다.”
“나를 따라와라!”
백리장광은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백사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백리장광은 금장생을 돌아보았다.
“저도 제강이 처음이라…….”
금장생은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 백사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유를 모른단 말인가?”
백리장광은 물었다.
“이 대협과 구 대협이 데려온 강시는 어떻습니까?”
“그 강시들은 내 명령을 잘 듣네.”
“거참!”
금장생은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한편 구석으로 가서 백사를 불렀다.
백리장광이 부를 땐 꼼짝도 하지 않던 백사가 금장생이 부르자 바로 다가왔다.
‘너 뭐 하자는 거냐?’
금장생은 눈빛으로 물었다.
하지만 백사는 눈만 마주칠 뿐 대답이 없었다.
‘말 안 할 거야?’
금장생은 눈을 부라렸다.
―나는 계약자의 말만 듣는다.
그러자 여자 목소리가 금장생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너냐?’
금장생은 물었다.
간혹 말을 걸어왔던 목소리의 주인이 맞느냐는 질문이었다.
―맞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계약자라는 거야?’
―그렇다.
‘너와 나는 계약 같은 거 한 적 없어.’
―정말 없느냐?
‘그렇다니까.’
―그런데 왜 내 심장에 네 이름이 새겨져 있는 거냐?
‘그게 무슨 말이지?’
―우리 종족은 누군가와 계약을 하게 되면 심장에 계약자의 이름이 새겨진다. 그걸 ‘권능의 이름’이라 하는데, 오직 그 이름의 주인만이 내게 부탁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너는 내 말만 듣는다는 거야?’
―그렇다.
‘그래서 저분을 따라가라고 했잖아.’
―그건 곧 저자의 이름을 내 심장에 새기라는 것과 같은 명령, 아니 부탁이다. 그 부탁은 들어줄 수가 없다.
‘수용 불가능한 명령이라는 거야?’
―그렇다.
‘천생 내가 같이 가야 한다는 거네?’
―그렇다.
‘난 강신술사야. 무인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그대는 악마수의 선택을 받은 자다. 전사가 아닌 자는 절대 악마수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전사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어. 내 적성엔 강신술사가 맞아.’
―아무튼 그댄 내 계약자가 됐고, 내가 원하는 이상 함께 가야 한다.
‘내가 싫다…… 끙!’
금장생은 얼굴을 찌푸렸다.
계단에서 장상문의 문주 이추혼과 천당사의 사주 구육상이 내려오고 있었는데 그들은 산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금장생은 이추혼의 귀신을 보며 물었다.
―내가 보이는가?
이추혼의 귀신이 물었다.
‘네.’
―저들이네.
이추혼의 귀신은 백리장광 일행을 가리켰다.
‘살인멸구를 당한 겁니까?’
―그러네.
‘그럼 나도 계단으로 올라갔다면 두 분처럼 당했겠군요.’
―그랬을 거네.
‘지금 상황에서 살기 위해선 저 안으로 들어가야겠네요?’
―협조하는 척하다가 기회를 봐서 빠져나가게.
‘그럴 수밖에 없겠네요.’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우리를 낙양으로 데려다주게.
‘강시로 제강해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러네. 그렇게만 해 주면 장상문과 천당사를 자네에게 주겠네.
‘사업체를 제게 넘기겠다고요?’
금장생의 눈동자에 광채가 어렸다.
―우리 둘은 부인은 물론이고 자식도 없고, 왕래하는 친척도 없네. 그리고 우리 둘이 없으면 장상문이나 천당사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망하고 말 거네.
‘사업체를 준다면 생각해 봐야겠네요.’
―우리 장상문의 순수익은 월 이천 냥이네.
―우리 천당사의 순수익은 천오백이네.
‘거래하겠습니다.’
수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금장생은 곧바로 수락했다.
―고맙네.
‘그런데 두 업체의 총관들이 절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죠?’
―그건 나중에 알려 주겠네.
“어떻게 됐는가?”
그때 백리장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제가 따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자네 명령이 안 통한다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더…….”
“여기 계단이 있습니다!”
한 번 더 해 보라고 말하려는 순간 메아리가 들렸다.
동굴로 들어온 누군가가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발견하고 소리친 것이었다.
“해가 무인들이 매복해 있을지 모르니까 주의하면서 내려가도록 한다!”
“존!”
“으음!”
백리장광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계단 위로 시선을 주었다. 그러다가 다시 금장생을 보았다.
“좋네. 강시를 데리고 따라오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앞으로 갔다.
금장생은 백사를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저자를 조심하게.
―몸조심하게.
‘걱정 마십시오. 제가 돌아올 때까지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세요.’
금장생은 귀신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응?’
문 앞에 도착한 그의 눈이 커졌다.
문에는 손바닥 자국 세 개가 삼각형 형태를 이루며 찍혀 있었다.
“저 표식에 손바닥을 대야 하네.”
백리장광은 손바닥을 가리켰다.
“강시 손바닥을 대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러네. 그 강시는 가운데네.”
“알겠습니다. 백사, 이쪽으로 와.”
금장생은 백사를 불렀다. 그러자 백사가 한가운데로 가 섰다.
“일호와 이호는 이쪽으로 와라!”
백리장광이 나직하게 소리치자 광장 한편 그늘에서 강시 두 구가 나왔다.
백사와 달리 두 강시는 퉁퉁 튀었다. 밖으로 나온 강시들은 백리장광의 지시에 각각 문 앞으로 가 섰다.
“이제 강시의 손바닥을 표시에 대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금장생은 백사에게 말했다.
그러자 백사는 손바닥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곳에 자신의 손바닥을 댔다.
이어 나머지 두 강시도 백리장광의 지시에 의해 손바닥을 댔다.
꿀꺽!
백리장광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