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65)
‘너구나.’
금장생은 백사를 보았다.
하지만 백사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너 맞지?’
금장생은 다시 물었다.
이번에도 역시 백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았다.
금장생은 재빨리 백사 주위를 살폈다. 귀신을 찾기 위해서였다.
‘분명히…….’
“그래서 나도 익힐 수 없을 거라고?”
그의 생각이 끊긴 건 태월령의 질문 때문이었다.
“신을 절실하게 믿는 사람만이 익힐 수 있답니다.”
금장생은 다시 물을 부어 주며 말했다.
“신?”
“네.”
“혈마가 그렇게 말했어?”
“네.”
“나도 종교를 가져 볼까…… 그런데 아무 신이나 상관없는 거야?”
“그건 저도 잘…….”
금장생은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 귀를 기울였다. 이번에도 누군가가 말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만해도 돼.”
태월령의 말에 금장생은 물통을 내렸다.
“등 닦아 줘.”
태월령은 수건을 금장생에게 내밀고 돌아섰다.
금장생은 그녀의 등을 닦아 주었다.
“크아악!”
“아악!”
느닷없이 비명이 들려왔다.
“응?”
금장생과 태월령은 서로를 보았다.
“옷을 빨리 입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할 것 같아.”
태월령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둘러 옷을 입었다.
“백사, 따라와!”
그사이 금장생은 백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는 척사랑이 긴장한 얼굴로 천지 밖을 살피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금장생은 물었다.
“적이에요.”
“얼마나 되죠?”
“사백에서 오백 사이요.”
“마적인가요?”
“그런 것 같아요.”
창! 창창창! 창창!
“크악!”
“아악!”
“으악!”
대륙황가 낙타가 몰려 있는 천지 왼편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저쪽으로 가 봐야 하는 거 아냐?”
밖으로 나온 태월령이 비명이 들려온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륙황가 진영 왼편에서 공격을 해 온 듯, 아직 이쪽은 조용했다.
“저야 뭐, 가 봐야…….”
금장생은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가 자리를 뜬 사이에 적이 이쪽으로 오면 어떻게 할 건데?”
“이 녀석이 있잖습니까.”
금장생은 백사를 가리켰다.
“그런데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태월령이 물었다.
“천산까지 가려면 아직 많이 남았잖습니까?”
“도와주지 않으면 함께 못 갈 수도 있다는 거야?”
“저 같으면 쫓아낼 것 같은데요.”
“그럴 수도 있겠네. 사 소협, 가요.”
“무슨 일이 생기면 저쪽으로 오세요.”
척사랑은 왼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요.”
태월령과 척사랑은 싸움이 한창인 곳으로 몸을 날려 갔다.
“이쪽으로는 안 오겠지?”
금장생은 백사를 보며 말했다.
“우리는 여기 앉아서…….”
금장생은 하늘을 보았다.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얼굴로 떨어졌다.
“행운의 징존가?”
여간해서는 비를 보기 힘든 곳이 사막이다. 그런데 비가 내린다는 건 행운의 징조가 분명했다.
삭! 삭삭! 삭삭!
문득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모래가 바람에 쓸리는 것과 흡사한 소리였다.
만일 비가 오는 데다 바람까지 자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그런 소리였다.
“아무튼 거길 나오고 난 뒤부터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아.”
금장생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와 백사는 천지를 이루는 숲과 사막의 경계에 이르렀다.
그는 나무 뒤에 숨어서 사막 쪽을 바라보았다.
이십여 장 너머에 오십 장 높이의 사구가 자리해 있었다. 그 사구 위에는 상당히 많은 자들이 엎드린 채 이편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저기로 갈까?”
금장생은 백사를 보며 말했다.
척!
금장생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 본능적인 행동인지 몰라도, 백사는 전에 금장생이 주워 준 암흑창이란 이름의 막대를 뽑아 들었다.
‘아무래도 저거…….’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휙! 휙휙! 휙휙!
이윽고 사구 너머에 있던 자들이 이편을 향해 몸을 날려 왔다.
저벅! 저벅! 저벅!
백사는 사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끙!”
금장생은 백사를 따라 걸었다.
“너 이거 사용 방법 알아?”
백사 옆으로 간 금장생은 왼팔 소매를 걷어 건틀릿을 보여 주며 물었다.
―힘을 악마수에 집중한 다음 ‘죽음을!’이라고 말하면 된다.
“이런 제길!”
금장생은 욕설을 내뱉었다.
이번에 들려온 목소리는 태월령에게 물을 끼얹어 줄 때 들었던 목소리와 달랐다. 최소한 예순 살 이상 먹은 노인 목소리였다.
‘누구요?’
―나다.
‘네가 누구냐…… 설마.’
―그 설마가 맞다. 나는 ‘악마수’다.
‘맙소사.’
금장생의 멍한 눈으로 건틀릿을 보았다.
오래 살진 않았지만 산전, 수전, 공중전, 수중전을 다 겪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자아를 가진 무기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물론 신검, 신도로 불리는 녀석들은 주인과 교감을 한다고 했다.
‘정말 당신입니까?’
―당신?
‘목소리가 늙어서요.’
―나는 악마수다.
‘저는 금장생입니다.’
철컥! 철컥!
바로 그때 옆에서 쇳소리가 들려왔다. 금장생은 고개를 돌렸다.
“헐!”
그는 멍한 얼굴로 백사의 팔을 보았다.
백사가 들고 있는 암흑창 양쪽 끝에서 각각 길이가 반 장에 달하는 칼날이 튀어나온 것이다.
칼날은 은색이었다.
달이 없어서 그렇지, 만일 달빛이 있었다면 황홀한 광채를 뿜어냈을 게 분명했다.
“아무튼 가 보자.”
금장생은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백사도 금장생과 보조를 맞추며 나아갔다.
“응?”
사중손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에 오기 전 북막의 막주를 만나 작전을 짰다.
북막 무인 오백 명이 북쪽에서 공격을 시작하고, 싸움이 한창일 때 자신들은 남쪽에서 기습을 하기로 했다.
작전은 순조롭게 이행됐고, 천지 남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게르가 한 채 서 있기는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정도 크기의 게르면 세 명에서 네 명 정도가 기거할 수 있고, 그 정도 인원은 설사 무인이라고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공격 명령을 하달하였고, 부하들은 사구를 넘었다.
그때 그들이 나타났다.
많은 수도 아니고 단둘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무인 이백 명이 달려오면 자신들의 무위에 상관없이 도망쳐야 한다. 설사 배짱이 좋은 자라고 해도 동료들에게 달려가 도움을 청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저 둘은 도망치지도, 동료들에게 달려가지도 않는다. 오히려 무기를 뽑아 들고 이편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미친 것들!”
사중손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전광, 추선일, 처리해!”
그는 선두에서 달려가고 있는 부하를 향해 소리쳤다.
“존!”
파앗! 파앗! 파앗!
나직한 대답과 함께 열 명이 금장생과 백사를 향해 쏘아져 갔다.
‘힘을 집중하고 ‘죽음을!’이라는 명령만 내리면 됩니까?’
금장생은 왼팔을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힘을 끌어 올리면 악마수는 피를 머금은 것처럼 붉게 변한다. 그럼 도살 준비가 끝났다는 걸 뜻한다. 문제는…….
‘문제가 있나요?’
―네가 끌어 올린 힘이 내게 가해진 봉인을 풀 수 있느냐 하는 거다.
‘지금 봉인된 상태인가요?’
―그렇다.
‘그런데 어떻게 깨어난 겁니까?’
―내가 깨어난 건 암흑창의 기운 때문이다.
‘암흑창 때문에 깨어났다는 건가요?’
―그렇다.
‘그럼 깨어나는 것과 봉인이 풀리는 건 다른 건가 보죠?’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만일 봉인이 풀리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저들을 다 죽이지 못하게 될 테고, 넌 죽겠지.
‘겁나네요.’
―일단 힘을 끌어 올려 봐라.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왼팔에 힘을 모았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금장생은 전면을 흘끔 보았다. 이편을 향해 달려오는 자들과의 거리는 이제 십 장밖에 남지 않았다.
무공이 강한 자라면 한 번 도약하면 도달할 거리다.
아니, 모래밭이니까 육 장에서 칠 장밖에 날지 못한다. 그럼 한 번 더 도약을 해야 한다.
시간을 벌었다.
그는 다시 힘을 주입했다.
쑥!
느닷없이 뭔가가 몸 내부의 혈도를 따라 이동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파앗! 파앗! 파앗! 파앗!
그 순간 달려오던 자들은 두 번째 도약을 시작했다.
그들의 눈은 살인에 대한 광기로 번들거리고 온몸에서는 질식할 것 같은 살기가 넘실댄다.
“초보들!”
금장생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맺혔다.
살인을 많이 해 본 자들은 저렇게 흥분하지도 않고 진득한 살기를 쏟아 내지도 않는다. 그들은 담담한 얼굴로 다가와서 무기를 휘두르고 멀어진다.
“전장에서 가장 먼저 죽는 자들은 늘 초보들이지.”
금장생은 왼팔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스악!
바로 그때 백사의 암흑창이 허공을 갈랐다.
슈캉!
서걱!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달려들던 자의 무기가 잘렸다. 그리고 두 조각으로 분리된 몸에서 피가 쏟아졌다.
슈캉! 슈캉! 슈캉!
서걱! 서걱! 서걱!
“괴물이네.”
순식간에 다섯 명을 해치운 백사를 보며 금장생은 빙긋 웃었다.
스아악!
“나도 급하게 됐네.”
금장생은 내밀었던 왼팔을 위로 올렸다.
그를 향해 달려들던 자가 내리그은 검이 머리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죽음을!”
금장생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핑!
그러자 건틀릿의 약간 튀어나온 부분에서 붉은 물체가 튀어 나갔다.
스악!
붉은 물체는 대번에 적의 목을 훑었다.
“컥!”
나직한 비명과 함께 적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분리된 머리와 몸통이 지면으로 추락했다.
“혈반血盤이네.”
금장생의 눈은 붉은 물체를 좇았다.
붉은 물체는 손바닥 절반 크기로 원형이고, 종이처럼 얇았다. 너무 어두워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척!
날아갔던 혈반이 돌아와 건틀릿 안으로 들어갔다.
“멋지네.”
금장생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문득 엄청난 무기를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억!”
그사이 마지막 남은 자가 죽어 나갔다.
“내가 한 명 없앨 때 너는 아홉 명이나 없애 버리는구나.”
금장생은 어이없는 얼굴로 백사를 보았다.
백사가 어렵지 않게 상대했다고 해서 적이 약한 건 결코 아니었다.
한 번에 십 장을 날아갈 정도로 강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힘 한번 써 보지 못하고 전부 당한 것이다.
금장생은 전면을 보았다.
이백 명 중 열 명을 없앴을 뿐이다. 적은 아직도 백아흔 명이나 남아 있었다.
“시작했으니까 끝을 봐야겠지.”
금장생은 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