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27화 (27/524)

황금가 (27)

곤륜산

“말해라.”

나직한 목소리가 어둠으로 들어찬 공간을 갈랐다.

목소리에는 상대를 누르는 어떤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평생 동안 명령을 내려 본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위엄이었다.

“해왕海王이 발굴을 시작할 모양입니다.”

“진식을 파훼할 방법을 찾았단 말이냐?”

“최근에 그는 세 명의 강신술사를 고용했습니다. 진식을 뚫고 들어갈 방법이 없다면 굳이 그들을 고용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지금 세 명이라고 하였느냐?”

“그렇습니다.”

“세 명이 전부 같은 장소로 가더냐?”

“아닙니다. 한 명은 태산으로 향했고, 다른 한 명은 남해 보타산으로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곤륜산으로 향했습니다.”

“세 곳 중 어디가 진짜라고 생각하느냐?”

“그중 한 곳만 진짜일 수도 있고 세 곳이 전부 진짜일 수도 있습니다.”

“세 곳이 전부 진짜라는 건 무슨 소리냐?”

“전설에 의하면 삼천인三天人은 통로를 진식으로 막아 버린 후 헤어졌습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 해진도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셋이 나눴을 수도 있다는 거구나.”

“그렇습니다.”

“강신술사들이 삼천인의 발굴에 성공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거라 생각하느냐?”

“삼천인을 발굴한다고 해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팔왕가에 의해 유지되던 균형이 해왕가 쪽으로 쏠리게 될 테고, 그 쏠림 현상은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규모는 어느 정도가 될 거라고 보느냐?”

“중원, 세외, 동영, 조선이 참전하는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우리가 승리할 확률은?”

“정확한 건 해 봐야 하고 많은 변수가 생겨나겠지만, 현 상황에서 분명한 건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양패구상한다는 거냐?”

“어떤 변수도 집어넣지 않았을 때를 가정한 결괍니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면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만일 칠왕가가 힘을 합쳐 해왕가를 치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렇게 되면 그 사건은 선례로 남게 되고 다른 왕가들 또한 해왕가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전쟁이 더 빨리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이구나.”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해왕이 그걸 모를까?”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왜 도발을 하는 거라고 보느냐?”

“일단 찔러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려고 그런다는 거냐?”

“네.”

“하면 우리 대응은?”

“불필요한 짓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 줘야 할 걸로 보입니다.”

“해왕가는 건들지 말고 발굴 작업을 못 하게 하라는 게냐?”

“현재로선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인 걸로 보입니다.”

“우리가 너무 약하게 나간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느냐?”

“하지만 해왕가는 다시는 칠왕가를 떠볼 생각을 못 할 겁니다.”

“좋다. 그럼 경고는 언제 하는 게 좋겠느냐?”

“세 명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처리해야 할 걸로 압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이라…….”

보고를 받던 자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실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이윽고 보고받던 자의 입이 열렸다.

“궁금하지 않으냐?”

“무슨 말씀이신지…….”

“그 전설이 사실인지 아닌지 궁금하지 않으냔 말이다.”

“그건…….”

“전설을 열면 세상을 지배하는 힘을 얻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우린 지난 천 년 동안 그 전설이 실현되는 걸 두려워했다. 그건 바로 ‘전설을 여는 자, 그 역시 전설의 먹잇감이 되고 말 것이다.’라는 말 때문이었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될지 궁금하다는 말이다.”

“…….”

보고하던 자는 아무 말도 못 했다.

한동안 그 상태를 유지하던 사내는 단어 선택을 신중하게 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전설의 실현 여부와는 상관없이 외부로 드러나는 것만으로도 싸움은 시작될 테고, 싸움은 전쟁으로 발전할 겁니다.”

“결국엔 전쟁이 일어나고 말 거다?”

“네.”

“확인만 하고 없애 버리면?”

“일곱 분이 전설의 실체를 확인하신단 말입니까?”

“나는 왠지 그렇게 하고 싶구나.”

“그럼 해왕가와 함께하시는 게…….”

“그건 안 된다. 해왕가는 맹약을 어기고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그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한다. 해왕가에 대한 경고와 전설의 확인은 전혀 다른 사안으로 취급해야 한다.”

“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평생 동안 그들에 대해 연구를 했던 귀운자는 그들이 깨어나면 중원이 멸망할 거라는 예언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막기 위해 천수십병을 만들었고요.”

“우리 팔왕가는 그가 만든 천수십병을 가지고 있다.”

“…….”

보고하는 자는 또다시 말을 못 했다.

주인의 호기심을 막을 방법은 그에게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강신술사들이 물건을 가지고 나오는 즉시 바로 회수하도록 하겠습니다.”

“각 천왕들에게 만나잔다고 전해라.”

“천왕지회天王之會가 얼마 안 남았는데…….”

“그 전에 만나야 한다.”

“알겠습니다.”

“물러가라.”

“그럼.”

보고하던 사내는 소리 없이 물러났다.

“사람들은 모른다, 마魔의 조종이라 부르는 천마가 그들의 제자라는 사실을. 천마가 창안했다고 하는 수많은 마공이 그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거라는 걸. 마왕상에 왜 뿔이 달려 있는지,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용龍이나 봉황鳳凰, 주작朱雀, 현무玄武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신격화되었는지. ‘전란의 시대’가 어떻게 종식됐는지를. 나는 그것들이 전부 알려지는 걸 바라진 않는다. 다만 아득한 과거에 그런 시대가 있었고, 우리 팔왕가가 아니었다면 지금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걸 알려 주고 싶을 뿐이다. 이 세상의 구원자는 우리였다는 걸 말이다.”

푸념 같은 독백이 천천히 어둠 속으로 퍼져 나갔다.

* * *

수어린이 금장생을 찾아온 건 닷새 후 자정 무렵이었다. 천야로부터 그녀가 왔다는 말을 듣고 옷을 챙겨 입었다.

“저것들을 전부 차고 가실 겁니까?”

천야는 탁자 위에 늘어놓은 암왕칠구를 가리켰다.

“저는 귀신이 정말 싫습니다.”

금장생은 암왕칠구를 하나씩 착용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연습을 해서 그런지 금세 착용이 끝났다.

“그들은 어디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도사관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나서 물었다.

“접객실에 있습니다.”

“가시죠.”

“네.”

두 사람은 접객실로 향했다.

접객실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금장생이 들어가자 일제히 일어났다.

‘저자……?’

가장 먼저 금장생의 시선을 끈 사람은 특이한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는 자였다.

그가 입은 옷은 모자와 상의, 하의가 하나로 된 일체형이었다. 기다란 포대에 모자와 소매를 달면 저런 모양이 될 것 같았다.

모자는 아주 깊어 고개를 약간 숙이자 턱 아래쪽만 보였다. 키는 상당히 커서 금장생도 작은 키가 아닌데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다.

문득 천수총에서 보았던 의자가 떠올랐다.

저 정도 덩치 사내가 앉으면 적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이한 사내의 관찰을 끝낸 금장생의 시선이 바로 옆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허리춤에 대도大刀를 찬 무인이 서 있었다. 나이는 삼십 대 초중반으로 보였는데 이상한 옷을 입은 사내보다 덩치가 더 컸다. 안광이 날카롭고 표정은 거의 없었다.

“장생입니다.”

금장생은 먼저 인사를 했다.

“나는 북궁창이오.”

먼저 도를 찬 사내가 인사를 했다.

“나는 카밀이다.”

이어 모자를 쓴 자가 고개를 까딱했다.

“카밀이면 서역인인가 보죠?”

“그렇다.”

“그렇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하죠.”

인사가 끝나자 수어린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다녀올게요.”

금장생은 천야를 돌아보며 말했다.

“몸조심하십시오. 그리고 이거…….”

천야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뭔데요?”

“며칠 전에 사장님이 만들어 달라고 했던 겁니다.”

“아! 돈 목걸이.”

금장생의 얼굴이 문득 밝아졌다.

그는 얼른 천을 펼쳤다. 그러자 금자 다섯 개에 구멍을 뚫어 끼워 넣은 목걸이가 나왔다.

“고맙습니다.”

금장생은 목걸이를 바로 목에 걸었다.

“안 갈 건가요?”

밖으로 나간 수어린이 말했다.

“대두화상이 와야 합니다.”

“나는 이미 와 있네.”

밖에서 청명진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군요.”

금장생은 밖으로 나갔다. 청명진인이 수어린 옆에서 있었다.

“출발합시다.”

금장생은 바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는 마구간에서 이두마차 한 대를 끌고 나왔다. 이틀 전에 수어린이 가져다 놓은 마차였다.

금장생, 청명진인, 수어린, 카밀은 마차에 타고 북궁창은 마부석으로 탔다.

“가자.”

북궁창은 가볍게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자 마차가 천천히 이동했다.

마차의 속도가 빨라진 건 망루를 나선 후였다. 북궁창이 휘두르는 채찍에 힘이 가해지자 마차는 빠른 속도로 달렸다.

* * *

“마지막으로 금장생이 떠났습니다.”

석관영은 고개를 숙인 채 보고했다. 그 앞에는 붉은색 주렴이 쳐져 있었다.

“다른 자들이 모를 거라 생각하느냐?”

“숨길 수 없다는 걸 주공께서도 알고 계신 걸로 압니다.”

“맞다. 내가 아무리 비밀리에 일을 처리해도 그들은 알고 말지.”

“어쩌면 이번 일로 우린 제거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아무런 대비도 없이 이번 일을 벌였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럼?”

석관영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수천 년 세월 동안 우리 팔왕가가 유지돼 온 비결이 뭔지 아느냐?”

“불가침조약을 맺은 걸로 압니다.”

“맞다. 다른 가문을 절대 쳐서는 안 된다는 맹약을 했다. 그리고 그 맹약을 어긴 가문은 나머지 가문이 힘을 합쳐 없애기로 했다.”

“그리고 전설의 발굴도 다른 가문을 치는 것과 같은 상황으로 간주한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랬지. 하지만 거기엔 허점이 있다.”

“허점이라면……?”

“다른 한 가문을 치기 위해서는 모두가 찬성해야 한다는 단서 조항이 달려 있다. 즉, 우리를 치기 위해서는 일곱 가문의 왕이 모두 찬성표를 던져야 한다는 거다.”

“반대하는 왕이 있을 거라는 말이군요.”

하지만 주렴 안에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문제는, 그들이 방해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는 거다.”

“암역暗域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할 거란 말입니까?”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게 아니라 자기네들이 들어가려고 할 게 분명하다.”

“천역天域으로 들어가는 건 방해하지 않겠군요.”

“맞다. 그들은 지켜볼 게다. 그러다가 천역에서 나오는 순간 행동을 취할 거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천역의 출구가 어딘지 모른다.”

“출구는 우리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체를 발굴한 그들이 어디로 와야 하는지는 알지.”

“여기란 말이군요.”

“맞다. 너는 우리 가문의 모든 힘을 이용해서 그들의 귀환을 도와라. 그들 세 명은 반드시 이곳으로 와야 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주공.”

석관영은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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