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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41화 (41/171)

# 41

학사환생 041화

천신우는 느끼고 있었다.

주변의 분위기가 또 한 번 바뀌었음을.

비무대 위에서 자운검을 늘어뜨린 채, 숨을 고르는 자신.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황보세민.

아직 서로 검을 맞부딪친 것도 아닌데 주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이 싸움에 집중하고 있음을 느끼며, 천신우가 천천히 자운검을 들어 올렸다.

마침 공증인 공덕이 선언했다.

“지금부터 천씨세가와 황보세가 문파대전 제3시합을 시작하겠소이다.”

시합이 개시됐지만 방금 전과는 다른 전개가 펼쳐졌다.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로를 응시하는 천신우와 황보세민.

먼저 입을 연 것은 황보세민이었다.

“시작하지.”

“그럴까요.”

대답과 동시에 천신우가 벼락처럼 달려들었다.

황보세민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날렸다.

차차차차창!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단 한 번의 격돌에 십여 차례가 넘는 공방이 오갔다.

잠시 뒤로 물러난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운검 끝에서 시작된 떨림이 팔을 타고 전해진다.

‘과연 황보세가 최고 수준의 실력자답군.’

반대편에 내려선 황보세민의 눈빛 역시 한층 깊어졌다.

‘정말이지 대단하군.’

상대가 누구든 절대 방심하지 않는 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신우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강했다.

주변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황보성이 패배할 때만 해도, 술렁였던 사람들이 지금은 한없이 조용하다.

황보세민이 질 수도 있음을, 그로 인해 황보세가가 추락할 수도 있음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황보세가 입장에선 심각한 문제지만 황보세민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책임감과 부담감.

그게 싫어 중책도 마다한 황보세민이다.

그저 이 싸움을 즐길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승리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다음 순간 황보세민이 더욱 속도를 올렸다.

따다다다다당!

눈에 담기도 힘들 만큼 눈부신 공방전이 펼쳐졌다.

“……!”

모두가 입을 벌린 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만큼 천신우와 황보세민이 주고받는 공격은 빠르고 매서웠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했다.

물론 의미는 전혀 달랐다.

순수한 즐거움에서 나오는 황보세민의 미소에 반해.

천신우가 지은 것은 회심의 미소였다.

‘실력은 충분히 봤으니 이제부턴 판을 바꿔보자고.’

천신우가 황보세민에게 쇄도했다.

방금 전처럼 받아치려던 황보세민이 깜짝 놀랐다.

천신우의 자세에서 허점을 발견한 것이다.

‘무슨 속셈이지?’

승부사 기질이 있는 황보성이라면 과감하게 허점을 공략했을 것이다.

하지만 황보세민은 한 번 더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망설임으로 인해 주도권은 천신우에게 완전히 넘어갔다.

차앙!

황보세민의 검이 뒤로 밀렸다.

허점이 생겼다는 건, 그만큼 천신우가 방어보다 공격에 집중했다는 뜻.

과연 천신우의 공격은 방금 전보다 훨씬 위력적이었다.

한 번 기세를 잡자 천신우는 그야말로 폭풍처럼 몰아쳤다.

목, 가슴, 사타구니, 노리는 곳마다 치명적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서걱!

기어이 황보세민의 옆구리가 얕게 베였다.

“……!”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이제 막연한 추측이 아니다. 천신우의 승리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생각에 힘을 싣듯, 천신우의 자운검이 다시금 황보세민의 어깨를 스쳤다.

핏!

전해지는 통증에 황보세민이 인상을 찡그렸다. 사실 지금도 그에겐 선택할 기회가 있었다.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과감하게 내줄 것은 내주고 반격을 가하면 됐다.

허벅지를 내주는 대신, 천신우의 옆구리라도 베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황보세민에겐 그런 과감함이 없었다.

당연히 공방이 펼쳐질 때마다 피해는 쌓여만 갔다.

그 모습을 귀빈석에서 지켜보던 황보세가 가주는 답답함을 금치 못했다.

‘멍청한 자식! 뭐하고 있는 거냐!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배짱싸움에서 밀리다니!’

천신우의 실력은 분명 뛰어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황보세민이 저렇게 일방적으로 밀릴 정도까진 아니었다.

단 한 번만 과감하게 응수한다면 천신우의 공세를 늦출 수 있을 텐데.

황보세가 가주의 간절함이 전해졌을까.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던 황보세민이 이를 악물며 검을 휘둘렀다.

솨아악!

“와아!”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올 만큼 매서운 공격이 천신우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지금까지 입은 피해를 모두 만회하고도 남을 회심의 공격!

그러나 그 순간, 천신우는 황보세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땅이 푹 꺼지듯 극단적으로 자세를 낮춘 것이다.

‘이렇게 나오기만 기다렸다.’

천신우는 등으로 바닥을 쓸다시피 몸을 비틀었다.

당연히 황보세민의 검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크게 빗나갔다.

뒤이어 날아드는 자운검의 궤적 역시, 황보세민의 예측범위를 한참 벗어났다.

푹!

아래서 뻗어진 천신우의 검이 황보세민의 턱을 찌르는 소리였다.

순간 주위에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철커덩, 황보세민이 검을 떨어뜨렸다.

그제야 천신우도 검을 회수했다.

만일 칼날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만 더 파고들었더라면, 황보세민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천신우는 정확히 치명상을 입히지 않는 선에서 검을 멈춘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황보세민이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실력이었다.

땅에 떨어뜨린 검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던 황보세민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졌다.”

“고생하셨습니다.”

천신우는 엉덩이와 등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그의 시선이 황보세민을 지나 아주 잠깐 귀빈석에 머물렀다.

천무흔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쥐고 있던 의자팔걸이는 이미 부스러진 상태였다. 그만큼 흥분한 것이다.

반면 황보세가 가주는 얼굴이 굳어진 채, 말이 없었다.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겠지.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제3시합 역시 천씨세가의 승리로 끝났소. 따라서 이번 문파대전의 최종승자는 바로.”

공증인 공덕은 천신우를 스윽 바라보고는 선언했다.

“천씨세가요! 본인은 무림맹을 대표하여 이번 문파대전의 결과가 제대로 이행되는지 지켜볼 것이외다.”

마치 벼락이 내리친 것처럼 장내는 충격에 휩싸였다.

기어이 천씨세가가 황보세가를 꺾어버린 것이다.

‘설마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이야! 그것도 접전도 아닌 일방적인 승리라니?’

‘이렇게 되면 천씨세가와 황보세가의 입지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겠군.’

‘한동안 시끄러워지겠어.’

대놓고 떠들진 않았지만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뻔했다.

“큭!”

결국 황보세가 가주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를 붙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보세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온 하북팽가 가주마저도 그를 외면했다.

“…….”

황보세가 가주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당장 문파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덕담을 건네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들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벌써부터 오대세가에서 밀려난 기분이었다.

수치심과 모멸감을 견디지 못한 황보세가 가주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버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천무흔에게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축하드리오.”

“사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본인은 천씨세가의 재도약을 믿어 의심치 않았소이다.”

“하하하! 이젠 정말 천씨세가가 날아오를 일만 남았군요.”

마주치면 눈인사 정도나 나누던 사람들이 지금은 먼저 와서 자세를 낮춘다.

천무흔은 실감했다. 오늘 일로 세상이 천씨세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이 모두가 천신우 덕이었다.

천무흔은 비무대를 내려가는 천신우를 뿌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장하다. 내 아들.’

* * *

비무대 아래.

천신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의기소침한 동생의 머리 위에 천신우가 손을 턱하고 얹었다.

“괜찮아. 나는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천신혁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며 물었다.

“저, 정말이십니까?”

“물론이야. 누구나 큰일을 앞두고 두렵고 긴장되는 건 당연해. 하지만 넌 도망가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존중받아 마땅하지.”

그제야 천신혁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휴우. 저는 언제쯤 형님처럼 될 수 있을까요.”

“벌써 잊은 거냐? 얼마 전까지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형의 망나니 시절을 떠올렸는지 천신혁이 멋쩍게 웃는다.

“그런 나도 해냈는데 나보다 뛰어난 네가 못할 이유가 없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천신혁은 재능이 있다. 좌절하지 않고 착실히 준비한다면 분명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천신우가 해준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천신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뒤늦게 생각났는지 환하게 웃는다.

“형님!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정말 멋진 승부였습니다!”

천신우도 미소로 화답하는데 누군가 그를 불렀다.

“천 공자.”

뒤를 돌아보자 단아한 옷차림의 유설화가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옆에 서 있던 유설화의 사촌여동생 유설아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녀에게 천신우는 생명의 은인이기에.

천신우 역시 가벼운 목례로 화답하고는 물었다.

“정말 오랜만이군요.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유설화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했다.

“지나가다 들렸어요.”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천신우가 문파대전에 참가할 거란 사실을 알고 일부러 이곳을 찾았다.

더군다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가슴을 졸여가며 천신우의 싸움을 지켜봤던 그녀다.

하지만 지금 유설화의 얼굴은 평소처럼 무표정했다.

“축하드려요. 멋진 승부였어요.”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풍뢰권이라…… 정말 굉장한 분이더군요. 어떻게 그런 분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는지 궁금하네요.”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은근슬쩍 귀를 쫑긋 세우는 모습.

천신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인연이 닿았을 뿐입니다.”

그럼 그렇지. 속사정을 말해줄 리가 있나.

혹시나 했던 사람들이 멀어져간다.

유설화는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실망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다쳤네요?”

천신우의 손등에 살짝 긁힌 상처를 발견한 유설화다.

천신우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긴요. 그러다 흉터 생겨요.”

평소 갖고 다니던 고약을 천신우의 손등에 발라주려던 유설화가 멈칫했다.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약병을 건네는 모습.

“이거 바르면 금방 아물 거예요.”

천신우가 미소 지었다.

“고맙습니다.”

“그럼 이제 가볼게요.”

유설화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사실 천신우에게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가 문파대전에 참가한다기에, 직접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은인이니 그 정도 의리는 지켜도 되지 않겠는가.

얼굴 보고 이야기도 했으니 이제 됐다 싶었다.

하지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유설화의 발걸음을 붙들었다.

“조만간 찾아뵙지요. 그럼 살펴 가시길.”

유설화가 우뚝 멈춰 섰다.

“그 말씀은 유가장을 방문하신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유가장주님께 긴히 상의드릴 것도 있고 해서.”

“그렇군요. 그럼 그때 봐요.”

다시 가던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 유설화.

그러나 그녀의 얼굴엔 아까와 달리 은은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때까지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기만 하던 천신혁이 넌지시 물었다.

“형님. 유가장은 무슨 일로 찾아가시는 겁니까?”

“그럴 일이 있다.”

천신우는 유가장의 협조를 받아 의무대를 만들 계획이었다.

사실 지금도 천씨세가 무인들은 항상 상비약을 휴대한다. 거기에 더해 기본적인 응급처치도 익혔다.

‘하지만 중상을 입을 경우 의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지.’

평상시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상자를 의방으로 이송하기도 수월하고, 여차하면 작전구역 근처에 의원을 대기시키면 되니까.

하지만 마교의 침공이 시작되고 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의무대 창설은 바로 그때를 대비한 포석이었다.

물론 그걸 모르는 천신혁은 다른 쪽으로 생각했는지 환하게 웃었다.

“하하하. 혹시 좋은 일이라면 반드시 저에게 먼저 알려주셔야 합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를 바드득 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천신우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남들의 반응에 일일이 신경 쓸 시간이 없다.

‘문파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니 이제 결실을 거둬들여야겠지.’

잠시 후 있을 협상에서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

천신우 앞에 놓인 과제였다.

* * *

문파대전이 끝난 장원.

무림맹 제16지부 부지부장 공덕이 상석에 앉은 가운데.

천무흔과 황보세가 가주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천씨세가가 문파대전에서 승리한 대가를 받아내는 자리.

서류를 검토한 공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배상금 문제만 합의를 보시면 되오.”

황보세가 가주는 이미 한수에서 일으킨 사건을 인정하고 공식사과하기로 합의했다.

세가연합의 다른 세가들에 공문을 돌리고. 천씨세가엔 직접 방문해 사과하는 식으로.

치욕스럽지만 자존심을 굽히면 해결될 문제.

그러나 배상금 문제는 달랐다.

사전에 합의한 배상금 액수를 바라보는 황보세가 가주의 표정이 어두웠다.

“…….”

문파대전 패배는 생각도 하지 않았기에 천씨세가에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한 그였다.

자연히 천씨세가에서 황보세가에 요구하는 배상금 액수도 올라갔지만, 문제 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문파대전에서 패배하기 전까지는.

하지만 이젠 상황이 바뀌었다.

“솔직히…….”

황보세가 가주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배상금을 당장 일시불로 지급하긴 힘드오.”

재정 면에서 천씨세가보다 나은 황보세가다.

하지만 근래 이래저래 벌여놓은 사업이 많았다.

사업이란 것은 대개 안정되기 전까진 수입보다 지출이 큰 법.

“그러니 시간을 주시오.”

“시간을 드릴 수야 있소. 하지만 무림맹 규정에 따라 이자는 지급하셔야 하오.”

천무흔은 덤덤하게 대꾸했지만 황보세가 가주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무림맹에서 정한 배상금 이자는 일반적인 경우보다 훨씬 이율이 세다.

고의로 배상금을 지급하지 않고 시간을 끄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함.

높은 이자를 지불하느니 기존에 벌여놓은 사업을 포기하는 편이 나을 정도였다.

협상이 지지부진하던 그때.

천씨세가 실무자 자격으로 동석한 천신우가 입을 열었다.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공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허락이 떨어지게 무섭게 천신우가 준비한 서류를 꺼냈다.

“그건?”

“지급능력이 없을 경우를 대비해 천씨세가에서 준비한 제안입니다. 한번 읽어보시지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한 황보세가 가주다.

천신우가 주도한 천씨세가의 제안은 크게 다섯 가지.

세부조건을 읽어 내려가던 황보세가 가주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감히 연성단에 눈독을 들여?’

황보세가 비전의 영약 연성단은 애초에 거래불가 대상이다.

그런데도 천씨세가는 연성단을 제안서에 넣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안서엔 황보세가 소유의 알짜 사업체들이 주르르 나열되어 있었다.

마치 계란을 장바구니에 담듯 대수롭지 않게.

홧김에 제안서를 덮어버리려던 순간.

황보세가 가주는 그나마 협상의 여지가 있는 제안을 발견했다.

“여기 운서의 물류창고는 우리 황보세가에서 중점적으로 추진 중인 사업이오만.”

천무흔은 천신우가 사전에 일러준 핵심을 잊지 않았다.

“지금까진 그랬겠지.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잖소.”

천씨세가의 한수 지역 진출이 기정사실화된 지금.

교역의 중심이 기존의 운서에서 한수로 이동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한수의 물길을 이용하면 운서를 경유하는 교역로보다 운송비용이 대폭 줄어들기 때문이다.

“어차피 물류창고가 애물단지로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요.”

황보세가 가주 입장에서도 반박하기 힘들었다.

작년에 물류창고를 대폭 확장하라고 지시한 스스로가 저주스러울 지경이니까.

“그렇다고 물류창고에 산적한 물건을 지금 당장 처리할 수도 없을 테고.”

황보세가 가주가 깊은 한숨과 함께 물었다.

“그래서 여기 적힌 가격대로 쳐주겠다는 거요?”

“그렇소. 어차피 우리 천씨세가가 새로 물류사업을 시작하면 물량을 확보하기 쉽지 않을 터. 그럴 바엔 좀 더 값을 치르더라도 황보세가와 서로 돕고 사는 게 낫지 않겠소.”

방금 전까지 문파대전을 벌인 사이에 돕고 살자니?

가당치도 않았지만 황보세가 가주는 거절하기 어려웠다.

천씨세가에서 제시한 인수가격이 생각 이상으로 후했기 때문이다. 물류창고를 건설하고 물량을 채워 넣는데 들어간 돈을 상쇄하고도 남는 수준.

게다가 물류창고에 쌓아놓은 곡물은 추수철이 시작되면 값이 떨어진다.

어차피 지급해야 하는 배상금이라면 물류창고와 함께 털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동석한 황보세가의 실무자도 동의했다. 사실 배상금을 지급하려면 이보다 더한 제안이라도 받아들여야 할 판이다.

“알겠소. 제안을 받아들이지.”

황보세가 가주가 배상금 명목으로 물류창고를 통째로 양도한다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순간.

천신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걸려들었군.’

다가올 여름.

대홍수로 곡물 가격이 폭등하면 황보세가 가주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천신우는 벌써부터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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