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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40화 (40/171)

# 40

학사환생 040화

“이 무슨…….”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칼날 파편들을 바라보며 혈염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어서일까.

지금까지의 기억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도를 처음 손에 얻었던 날. 수많은 상대를 베었던 환희의 순간들. 자신에게 쏟아지던 경의와 찬사…….

그러나 다음 순간, 혈염자는 현실로 돌아왔다.

어느새 고요해진 비무대 위에서, 그는 손잡이만 남은 도를 쥐고 풍뢰권과 마주하고 있었다.

뒤늦게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심장에서 시작된 떨림이 팔다리로 순식간에 번져간다.

그런 혈염자를 보며 풍뢰권이 혀를 찼다.

“못난 놈.”

퍼억!

풍뢰권이 대뜸 혈염자의 배를 걷어찼다.

“컥!”

무기가 멀쩡했더라도 막을 수 없는 공격이었다.

혈염자는 손도 쓰지 못하고 비무대 밖으로 날아갔다.

돌발 상황에 지켜보던 사람들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쿠우웅!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객석 한복판에 혈염자가 꼴사납게 처박혔다.

그 순간, 팔짱을 끼고 관전하던 천신우는 보았다.

그 짧은 사이 사람들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하는 것을.

의자 팔걸이를 움켜쥔 천무흔의 손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반면 황보세가 가주의 입가는 경악과 분노로 파르르 떨리고 있다.

그런 황보세가 가주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은 무림맹 공증인이었다.

“제1시합은 천씨세가 풍뢰권의 승리요!”

차분하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

과연 무림맹 부지부장에 어울리는 존재감이었다.

물론 천신우와 몇몇을 제외하면 풍뢰권의 압도적인 무위에 넋이 나간 상태였다.

“풍뢰권이 도대체 누구지?”

사람들이 내뱉은 의문은 아까와 같았지만 의미는 전혀 달랐다. 모두가 엄청난 실력을 보여준 풍뢰권의 정체를 진심으로 궁금해했다.

그러나 풍뢰권은 그들의 의문에 대답해 주는 대신 비무대를 내려왔다.

“마차는?”

마치 화장실에서 볼일 보고 나온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태도.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혈염자를 일격에 날려 버린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는다.

물론 천신우도 풍뢰권 못지않았다.

“입구에 대기시켜놨습니다. 나중에 뵙지요.”

마치 이런 결과를 예상했다는 듯이 담담한 얼굴.

오히려 지금까지 냉정을 유지하던 무림맹 공증인의 표정에 당혹감이 묻어났다.

“지금 자리를 뜨면 기권처리요.”

공증인을 맡은 공덕은 무림맹 제16지부 부지부장. 오대세가 가주들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거물이다.

하지만 풍뢰권은 공덕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리를 떴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천신우가 풍뢰권을 대신해 대답했다.

“그렇다면 기권처리 해주십시오.”

“……!”

모두의 눈이 경악으로 물든다.

공증인을 맡은 공덕조차 눈을 가늘게 떴다.

문파대전은 1대1 비무이긴 하지만 혼자서 내리 셋을 꺾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풍뢰권이라면 충분히 혼자서 황보세가 참가자 전원을 꺾고도 남을 터.

“진심인가? 일단 결정하면 돌이키지 못하네.”

“물론입니다.”

사실 천신우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풍뢰권은 단 한 번의 비무만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알겠네.”

공덕이 단상에 올라 선언했다. 천씨세가에서 동의하는데 공증인이 왈가왈부하는 것도 웃겼다.

“천씨세가의 요청으로 풍뢰권은 기권처리 되었소. 원래는 곧바로 다음 시합을 이어가야 하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으니 10분간 쉬어가겠소이다.”

* * *

휴식시간임에도 사람들은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했다.

워낙 충격적인 사건의 연속이었기에.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긴. 천씨세가만 쪽박이지. 보아하니 풍뢰권 믿고 문파대전을 벌인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기엔 천씨세가 대공자 표정이 너무 자신만만하던데.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닐까?”

“글쎄다…….”

풍뢰권의 막강한 실력과 갑작스러운 기권을 놓고 온갖 추측이 오가는 가운데.

황보세가 가주는 비무대 뒤쪽에 마련된 간이천막에서 문파대전 참가자들을 만났다.

의원에게 치료를 받던 혈염자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면목이 없습니다.”

“이미 지난 일이오.”

어느 누가 예상했을까. 천씨세가에서 영입한 고수가 그렇게 막강할 것이라고.

“그리고 아직 끝난 것도 아니잖소.”

사실 풍뢰권이 혈염자를 쓰러뜨렸을 때만 해도, 황보세가 가주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조차 풍뢰권이 어떤 무공을 펼쳤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으니까.

당초 예상과 달리 풍뢰권은 아예 격이 다른 고수였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풍뢰권은 혈염자를 쓰러뜨린 직후 자리를 떴다.

내막이야 어쨌든 황보세가 가주 입장에선 죽다 살아난 셈이었다.

혈염자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풍뢰권만 없다면 해볼 만합니다.”

“해볼 만한 정도가 아니오.”

황보세가 가주가 제검단주 황보성을 돌아봤다.

천신우에게 동생 황보진을 잃은 황보성은 복수심을 불태우는 중이다.

따로 지시하지 않더라도 천신우의 팔다리 하나쯤은 자르려고 하겠지.

‘설령 황보성이 패배하더라도 문제없다.’

황보세가 가주의 눈길이 의자에 앉은 사내를 향했다.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쓴 채로 눈을 감은 그는 바로 가주의 친동생 황보세민.

그는 자타공인 황보세가 최고수였다.

만일 그가 권력에 욕심이 있었다면 가주가 되고도 남았으리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런 황보세민이 버티고 있는 이상, 황보성이 지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풍뢰권이라면 몰라도 천신우 정도를 꺾지 못하겠소?”

천신우의 동생 천신혁은 애초에 논의대상이 아니었다.

천신혁의 실력은 형보다 훨씬 뒤처지는 것으로 알려졌기에.

“그러니 걱정 말고 몸이나 추스르시오. 문파대전이 끝나고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를 열 것이니.”

풍뢰권의 퇴장으로 다시 자신감을 되찾은 황보세가 가주였다.

* * *

마차 안에서 발 뻗고 누워 천씨세가로 돌아가던 풍뢰권이 입을 벌리며 하품했다.

“지금쯤이면 시작하겠구나.”

풍뢰권의 말소리를 들었는지 마차를 몰던 무인이 입맛을 다셨다.

천씨세가의 명운이 걸린 문파대전을 보지 못하니 짜증 날 수밖에.

“끌끌. 애송이들 재롱잔치 따위 봐서 뭐한다고.”

“…….”

천씨세가를 싸잡아서 무시하니 발끈할 법도 했지만 애써 침묵하는 무인이었다.

밉보였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는 것이다.

풍뢰권이 피식 웃었다.

“그리도 궁금하냐?”

혹시 마차를 돌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인이 곧장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럼 특별히 내가 알려주마. 두 번째 시합은 3분. 마지막 시합은 20분. 알았으면 신경 쓰지 말고 마차나 제대로 몰아라. 돌부리에라도 걸리면 당장 요절을 낼 것이야.”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어떻게 압니까. 조금만 알아듣기 쉽게…….”

무인이 아쉬운 소리를 했지만 정작 돌아온 것은 코 고는 소리였다.

드르렁!

그새 풍뢰권이 잠들어버린 것이다.

“…….”

할 말을 잃은 무인은 아쉬운 마음에 멀어지는 장원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제 문파대전 제2시합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 * *

문파대전이 열리는 장원.

단상 위로 무림맹 공증인 공덕이 올라왔다.

“시간이 됐소. 천씨세가의 천신우와 황보세가 황보성은 비무대 위로 올라오시오.”

천신혁이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형님! 힘내십시오!”

“그럼 다녀오마.”

천신우는 심호흡하며 비무대 계단을 올랐다.

확실히 처음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여전히 풍뢰권이 안겨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표정들.

이해는 간다.

지금 시점에서 풍뢰권은 천신우가 넘지 못할 벽이니까.

그래도 사람이기에 욕심이 생긴다.

‘풍뢰권에게 쏟아졌던 환호를 내게 향하게 만들 수 있을까.’

쉽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있다.

그만큼 착실히 준비해 왔으니까.

무공수련뿐만이 아니다.

문파대전 상대로 나올 가능성이 높은 황보성과 황보세민에 대해서도 철저히 분석했다.

전생의 기억과 무림의 평가를 종합해가며.

‘황보성은 성질이 급하고 공격적이다. 게다가 동생의 죽음으로 내게 원한을 품은 상태. 그걸 이용해 역공을 펼친다면 어렵지 않게 상대 가능하다.’

문제는 역시.

‘황보세민.’

천신우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마교의 침공 당시 황보세가가 기회주의적인 행태를 취하자 바로 은거해 버렸지.’

그것만 봐도 황보세민이 어떤 성격인지 알기 쉽다.

어떤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치기보다 회피하는 유형.

‘이런 인간은 순수한 비무에서라면 실력을 발휘할지 몰라도, 생사가 걸린 싸움엔 약하다.’

막연한 추측이 아니었다.

실제로 전생에서 황보세민은 수많은 비무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막상 실전에선 고전한 기록이 있었다.

‘진흙탕 싸움으로 끌고 간다면 내가 유리하다.’

물론 천신우도 학사 출신이라 실전경험이 많다고 보긴 힘들다.

하지만 성격만큼은 황보세민과 정반대였다.

전생에서도 불의를 보면 절대 참지 않고 달려들었던 천신우다.

그로 인해 손해도 많이 봤다.

능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하다가 좌천당한 것도 그런 성격 탓이었다.

무림맹 고위인사의 비리를 파고들다가 보복인사를 당한 것이다.

‘뭐, 다 지난 얘기지.’

잠시 옛 기억을 떠올렸던 천신우가 피식 웃으며 비무대 위에 올라섰다.

“웃는단 말이지?”

먼저 비무대에 올라와 있던 황보성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래, 지금 많이 웃어둬라. 그게 네 마지막 웃음이 될 테니.”

때마침 공증인 공덕이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천씨세가와 황보세가 문파대전 제2시합을 시작하겠소이다.”

그와 동시에 천신우가 손짓했다.

명백한 도발에 황보성의 입꼬리가 말아져 올라갔다.

“가지가지 하는구나.”

파앗!

비무대 바닥을 박찬 황보성이 순식간에 천신우에게 달려들었다.

쉬이잉!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검을 바라보며 천신우는 미소 지었다.

예상대로 황보성은 움직임이 컸다. 아무리 위력이 실린 공격이라도 명중시키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 법.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천신우의 반격이 이어졌다.

몸을 비틀어 황보성의 공격을 피한 다음, 자운검을 사선으로 찔러갔다.

피잇!

황보성 역시 마지막 순간 몸을 젖혔지만, 천신우의 검이 뺨을 스치는 것까지 피할 순 없었다.

황보성은 뺨에 흐르는 피를 손가락으로 스윽 문질렀다.

“그래, 이 정도는 되니 내 동생을 죽였겠지.”

손가락에 묻은 피를 혀로 핥으며 황보성이 매섭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평소처럼 예리한 맛이 없었다.

일격마다 엄청난 위력이 실렸지만 그뿐이었다.

연거푸 피해낸 천신우가 귀신처럼 황보성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동작이 커질 때마다 왼쪽 어깨가 열린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촤악!

“이런 씨발!”

어깨가 찢어진 황보성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검을 내리쳤다.

사실 어깨의 상처는 깊지 않았다. 움직임에 제약이야 있겠지만 생명에 지장이 생길 정도는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실전이 아니라 시합이다.

출혈이 계속되면 공증인이 일방적으로 시합을 중단시킬 수도 있었다.

‘그전에 끝내야 한다.’

그런 조바심이 담긴 황보성의 검을 천신우가 막아내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애초에 황보성보다 실력이 앞서는 천신우였다.

따당!

경쾌한 소리와 함께 황보성은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어깨에 이어 손아귀마저 찢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황보성은 끝끝내 검을 놓치지 않았다. 엄청난 정신력이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스윽.

목젖에 닿는 차가운 금속성.

황보성은 천천히 눈을 내렸다.

어느새 천신우의 검이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패배.

실제로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미 웅성거리고 있었다.

혈염자에 이어 황보세가 고수가 또다시 패배에 몰리자, 당황할 수밖에.

다들 말은 아꼈지만, 표정에서 속마음이 드러났다.

‘천씨세가가 이렇게 강할 줄이야!’

‘맙소사. 도대체 천씨세가의 저력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과는 별개로 황보성은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황보성이 목에 겨눠진 검을 쳐내고 천신우를 베는 광경을 머릿속에 그리던 순간이었다.

“거기까지.”

중후한 음성이 비무대 위에 울려 퍼졌다.

천신우에게 달려들려던 황보성이 움찔했다.

공증인 공덕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보성은 침을 꿀꺽 삼켰다. 시선만으로 몸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기분이었다.

결국 힘없이 검을 늘어뜨리는 황보성의 귀로 공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2시합은 천씨세가 천신우가 승리하였소. 제3시합에 출전할 참가자들은 준비하시오.”

시합이 끝났음에도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아직 여운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문파대전은 별도의 휴식시간 없이 진행하는 것이 원칙이기에. 아까 풍뢰권의 사례가 특이한 경우였다.

휴식 없이 연달아 시합에 임하면 체력부담이 따르는 것은 당연.

따라서 승리한 진영에서도 체력안배를 위해 참가자를 교체해 주곤 했다. 지금처럼 참가인원에 여유가 있을 경우에 한해.

그런데 인부들이 비무대를 정비하는 동안, 천씨세가에선 인원교체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정확히는 천신우가 아직 비무대에서 내려가지 않고 있었다.

자연히 사람들의 이목이 천신우에게 집중됐다.

“무슨 생각이지?”

천신혁이 천신우보다 약하다고 해도 교체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조금이라도 체력을 회복할 수 있기에. 게다가 상대인 황보세민이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확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설마…….”

모두의 의문이 커져가던 그때.

천신우는 천신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무대 아래.

의연한 표정의 천신혁이 보였다.

그러나 천신우는 알았다. 천신혁이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음을.

동생을 탓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천신혁이 황보세민과 맞선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언젠가는 너도 이 무대에 설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게 오늘일 필요는 없겠지.’

이윽고 비무대 정비가 끝나자 공덕이 입을 열었다.

“제3시합 참가자들은 즉시 비무대 위로 올라오시오.”

마침 천신우와 천신혁의 눈이 마주쳤다.

입을 달싹거리는 천신혁을 향해,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제란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법.

천천히 몸을 돌린 천신우는 마지막 상대인 황보세민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천신우의 입가에 떠오른 건 선명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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