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6화
제206화
“전욱이!”
“예! 장주님!”
“남만으로 가게.”
“결국 결정을 내리신 것입니까?”
“……일 년하고도 반년이 지났네. 더 길어지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너질 수도 있다네.”
위사검은 드디어 결단을 내린 듯 전욱에게 내용을 전달했고, 전욱은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장주님.”
“최대한 빨리 부탁하네.”
“충! 최선을 다해 움직이겠습니다.”
그렇게 전욱은 쏜살같이 천가장을 벗어나 남만으로 향했다.
“장주님, 두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천성검대 부대주를 불러 주게나.”
“……알겠습니다.”
천성검대 부대주 역시 정파 무림에서 절정 고수로 이름을 널리 알린 무인이다. 하지만 그는.
“……불가(不可)합니다. 천성검대는 오로지 상명하복, 대주님의 명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단호히 거절했다. 급박한 상황인 것은 사실이나 운남의 천가장이라는 이름값은 결코 천성검대에 미치지 못한다. 그것을 아는 부대주는 자신들의 명예를 위해서도 위사검의 명으로 움직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다.
“명령이 아니라 부탁입니다. 적어도 천성검협은 살려야 되지 않겠소.”
“…….”
굳게 다문 입술이 고집 센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 모습에 답답해진 공야찬이 역팔자로 눈썹을 꺾으며 소리쳤다.
“이보시오! 이와 같은 상황에 그깟 자존심이 그리도 중요합니까! 당신들이 직접 나서서 상황을 보면 알 거 아닙니까. 당신들의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신창 어르신과 천성검협 대협이 직접 나섰다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
공야찬의 분노에 찬 음성에도 천성검대 부대주, 팽경은 달리 대답하지 않고 바로 몸을 돌렸다.
“우리가 알아서 나설 것이오.”
그렇게 말만 남긴 채.
덜컥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밖으로 나간 그를 보고 공야찬은 눈앞에 보이는 탁자를 부서져라 세게 후려쳤다.
콰앙!
“흥분을 가라앉히게.”
“장주님은 화도 안 나십니까!”
“안 날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화를 낸다고 해서 이 상황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생각해야 한다네.”
그리 말하는 위사검의 표정도 결코 밝지 않았다.
천성검대가 나서 주지 않는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남만에서 그들이 되도록 빨리 돌아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거기다 적진 한가운데에 있는 두 사람에게 제발 변고가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수밖에.
* * *
하후성과 신준건은 뚫어 놓은 포위망을 통해 땅을 박차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빠져나왔……!”
멈칫.
그리 말하며 앞서 나아가던 하후성은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며 뒤돌아봤다.
“……어, 어르신?”
분명 같이 움직일 줄 알았던 신준건이 어느새 뛰쳐나온 교룡검 풍산과 거산도 전위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뭘 멍청히 서 있는 건가! 어서 운남에 가서 알리게!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어, 어째서?”
“어이! 누굴 호구로 보나? 쪽수는 맞춰야지! 늙탱이 혼자 두고 어딜 가! 젊은 놈이!”
하후성이 주춤하는 사이, 교룡검 풍산이 거치검을 거칠게 휘두르며 단박에 하후성을 향해 나아가려 하자.
후우우웅!
채애애앵!
크게 횡으로 휘두른 창날이 맞부딪쳐 왔다.
타다닥.
뒤로 물러난 풍산은 저릿해진 자신의 손목을 힐끗 내려다보고는 씨익 웃었다. ‘바다의 이무기’라는 별호가 괜히 붙은 것이 아니라는 듯 그는 그간 보였던 느슨한 모습을 버리고 짙은 살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나아갈 길목을 차단한 신준건은 그 살기를 맞받았다. 그리고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력을 담아 소리쳤다.
“어서 가라고 하지 않는가! 뭘 멍청히 서 있는 겐가! 자네가 가지 않으면 우리는 몰살당할 걸세!”
빠득.
사자후를 듣고 퍼뜩 상념에서 깨어난 하후성이 몸을 돌렸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간과한 것이 있었다.
콰아앙!
몸을 돌린 하후성 앞에 당도한, 육중한 덩치에 걸맞게 태산 같은 기운을 내뿜는 인물. 풍산이 신준건과 격돌하는 그 찰나의 순간, 이미 전위는 신형을 옮기고 있었다.
“……납치된 거다. 너희는.”
그 말에 하후성이 당혹스러운 눈빛을 보내다가 말고.
“후우.”
차분하게 한숨을 내쉬고 잡고 있던 검을 땅바닥에 꽂았다.
푸욱.
찌지직.
그러고는 치렁치렁한 자신의 머리카락을 수습하더니 옷깃을 쭈욱 하고 찢어서 그것으로 머리를 묶는다.
“음?”
거산도 전위가 그 모습을 바라봤다.
“도망가지 않는 건가?”
“도망?”
묶은 머리칼을 단정히 하고 하후성이 후련하다는 미소를 보인다.
“작전상 후퇴라면 모를까 도망은 아니지 않을까, 거산도 전위.”
“그런 걸 보고 도망이라고 하는 거다, 천성검협.”
“오히려 후련하다. 안 그래도 어르신만 두고 가려니 맘이 편하질 않았는데 말이야.”
“가지 않으면 너희도 죽고 이 소식을 모르는 운남 역시 오늘 안에 함락되겠지.”
“……난 믿는다.”
하후성의 말에 전위가 말없이 자신의 거도(巨刀)를 뽑았다. 그 모습에 하후성 역시 기수식을 취하며 나직이 말을 덧붙였다.
“녀석들은 그리 멍청하지 않아서 말이야. 아마 나와 어르신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될 거다.”
“오는 족족 죽일 뿐이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전투태세를 갖췄다. 서로의 기세가 불처럼 타오르더니 두 사람만의 공간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초절정 고수들의 싸움이라고 말하는 듯.
“역시 젊은 게 좋군. 허허.”
결국 하후성을 빠져나가게 하지 못했지만, 신준건은 차라리 잘되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짧은 감탄을 내뱉었다.
“우리도 그림이 제법 좋은데 말이야. 강호의 노고수와, 막 떠오르는 샛별 같은 신진 고수와의 대결. 제법 괜찮지 않나?”
교룡검 풍산의 말에 신준건은 어깨를 으쓱이며 혀를 찼다.
“떠오르는 샛별? 신진 고수? 대체 누굴 말하는 건지 당최 모르겠군.”
“늙은이가 낭인 바닥에서 오래 굴렀다더니 입심 하나는 인정할 만해. 한 번을 안 지는군.”
“어디 입심만 그렇겠는가. 나이를 먹는다는 건 경험한 것이 많다는 뜻이지.”
“흐흐흐, 그럼 어디 한번 그런지 확인해 볼까.”
교룡검 풍산은 흡사 물결을 타고 오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거치검을 휘둘렀다.
짙은 어둠 속에서 격돌하는 네 고수였지만, 어둠 따윈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듯 유연하게 움직였다.
꽈앙! 꽝!
상산창법(常山槍法).
삭월참(削月斬).
콰앙!
푸르게 빛나는 창끝에 모인 기운이 달조차도 벨 듯한 기세로 위로 향했고, 내리쳐 오는 거치검과 맞부딪쳤다.
촤르르르륵.
풍산이 무려 세 걸음이나 물러났고, 신준건은 제자리에 멈춘 상태로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거치검. 제법 성가신 병장기로세.”
격돌하는 그 순간, 미끄러지듯 창대를 탄 거치검이 신준건의 팔뚝을 훑고 지나간 것이다.
물러난 풍산과, 미미한 경상이지만 상처를 입은 신준건.
둘 모두 이번 일격으로 이득을 못 본 것을 느꼈다.
‘수룡왕 다음으로 제일가는 고수라더니.’
‘뒷방 늙은이로 봤더니 무슨 내력이…….’
그러나 찰나의 잡념을 떨치고 두 사람은 금세 다시 맞붙기 시작했다. 신준건은 자신의 병기가 창이라는 장점을 내세워 압박하기 시작했고, 풍산은 거치검라는 특이한 병장기에 익숙지 않은 신준건에게 거리를 좁히며 쇄도하기 시작했다.
쾅쾅쾅!
“저기는 벌써 시작했나 보군.”
“내 선공을 양보하지.”
거산도 전위의 말에 하후성은 짧게 웃고는 검 끝에 푸르스름하게 맺힌 검기를 만들더니.
“사양치 않고 먼저 가지.”
하후성의 검이 대번에 십여 줄기의 푸른 검기를 발출한다.
파바바바박!
표홀하면서도 강맹한 특유의 검술이 펼쳐지자, 전위 역시.
“후우웁!”
쾅!
진각을 밟으며 대도(大刀)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사람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완력과 충만한 내력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거대한 도기는 흡사 태산을 닮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꽈가가가강!
거대한 도기와 수십 줄기의 검기가 맞부딪치자 주변의 공기가 거칠게 터져 나갔다. 힘과 속도, 속도와 힘의 대결이었다.
고오오오오!
내력이 넘실거리며 실린 검과 도가 맞부딪치면서 휘어질 듯한 기세를 보여 주었지만, 하후성과 전위는 한 치의 물러섬 없이 격돌했다.
“과연! 거산도 전위가 녹림의 다음 군주라고 하더니 제법이구나!”
“십대 고수라는 명성이 괜한 것은 아니었군.”
호각(互角).
난무하는 검기와 도기의 향연 속에서 두 사람은 제 몸에 생겨나는 상처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씨익.
좀 전까지 굳은 표정이었던 두 사람의 입가엔 여태까지 보이지 않았던 미소가 지어진다.
“저쪽은 제법 즐거운 모양이야.”
“아이고, 오지랖도. 빨리 황천길 마차에 태워 줄 테니 걱정일랑 마쇼.”
교룡검 풍산의 말에 신준건이 창대를 꽉 쥐더니 꼿꼿이 앞으로 내밀고는.
“이것부터 막고 말하게나!”
상산창법(常山槍法).
십팔연격뇌조(十八聯擊雷鳥).
섬뜩한 뇌기가 머금어진다 싶더니 벼락처럼 열여덟 번의 찌르기로 교룡검 풍산을 찔러 댔다.
푹푹푹푹!
살이 뚫리는 듯한 소리가 잇달아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신준건의 두 눈은 침잠하듯 가라앉았다. 분명 살이 뚫리는 듯한 소리가 났지만, 자신의 손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비장의 한 수를 자꾸만 꺼내 드는데, 얼마나 더 남았는지 알고 싶네.”
멈칫.
“이형환위(二形換位).”
기존에 알고 있던 이형환위와는 다른 방식이었다. 흡사 창으로 물을 찌르기 한 듯한, 그런 오묘한 느낌.
“안 쓰고는 피할 수가 없어서 말이야.”
느물느물한 표정을 버리고 굳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는 풍산이었다.
“좋군. 후후.”
“괜히 신창이란 별호가 붙은 게 아닌 모양이야. 내 인정하지.”
풍산은 여태 누군가를 이리 쉽게 인정한다고 말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진지하게 흘러나왔다.
“……이거 좋아해야 하는 건가. 허허.”
“그래서 말이지.”
풍산이 입으로 호각 소리를 냈다.
척, 척, 처억.
네 사람이 격전을 치르고 있는 곳에서 수십 걸음이 물러난 장소에서 수많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늘 반드시 너희 둘을 죽여야겠다고 판단했다. 후후, 내가 준비한 선물이 마음에 들까 모르겠어.”
“……너무 과한 선물이로군.”
“글쎄, 신창과 천성검협이라면 이 정도 선물이 아니면 안 되겠다고 판단한 거지. 영광으로 알라고.”
교룡검 풍산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꽈악.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신준건은 자신이 쥐고 있는 창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