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제192화
오늘 하루도 어김없이 떠도는 소문들을 취합해 진상을 밝히고 정리하여 쓸 만한 정보로 가공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공야찬의 얼굴이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핼쑥해져 있었다.
촤락. 촤락.
어느 누가 무슨 말을 했다더라.
웬 여인네가 다른 놈이랑 궁둥짝을 맞췄다더라.
이런 시답잖은 소문부터 수많은 유언비어와 허구를 가려 내 정보로 탈바꿈하는 작업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이런 소문들이 정보가 된다니.
자칫 허황되어 보이지만, 공야찬은 그걸 실제로 해내고 있었다.
물론 낙양에 있는 쥐소굴 자체를 없애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었다. 정보꾼과 연결망은 그대로 두고 온 터라 공야찬은 이곳에서 정착하기 위해 그리 큰 공을 들이지 않고 중원 무림 내에 있는 정보망을 빠르게 구축할 수 있었다.
‘혹시 몰라서 낙양에 두고 온 것이 정말로 신의 한 수였다……. 후우.’
촤라락.
우연히 넘기는 수많은 정보 서류들 중에 하나가 눈에 띄었다.
“……녹림?”
미친!
녹림의 정보인데, 고작 이런 자잘한 소문으로 분류된 서류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니. 제아무리 허황된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지금 시기가 어떤 시기인데.
“……녹림의 거산도 전위가 이동 중이라고.”
공야찬의 두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거산도 전위는 호량채의 우두머리이면서 벽력왕 금태도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고작 서른 남짓한 나이에 초절정 고수의 반열에 올라 어지간한 이들은 범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고강한 무인이 되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단독으로 움직이다니.
“……이유는 하나겠지.”
벽력왕의 명이 있었거나.
그게 아니라면…….
“벽력왕의 명이 있었겠지.”
벽력왕 금태도가 명령하지 않았는데, 거산도 전위가 움직인다?
절대 불가했다.
정보에 빠삭하고 여태 녹림에 대한 정보를 꾸준히 수집해 온 결과.
녹림은 절대 단독 행동을 할 수 없는 구조였다. 말 그대로 녹림의 왕인 벽력왕이 확고한 군주 체제를 확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 사파의 시발점과 종착점은 장강수로채와 녹림칠십이채다.
그 외에 사파의 인물들로 거물급이 제법 존재하고 있다고는 하나, 수룡왕과 벽력왕 앞에서는 그 명성이 흐릿해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괜히 왕이라는 별호가 붙은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움직이는 곳이 장강이라니…….”
장강과 녹림은 물과 기름 같은 사이.
서로 절대 어우러질 수 없는 사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장강에 벽력왕이 다른 누구도 아닌 거산도를 보낸 것은 아주 의외였다.
‘거산도를 내팽개친 건가. 혹 주군에게 졌다는 이유로?’
절레절레.
‘아니, 죽어도 그럴 일은 없다. 만일 그랬다면 진작에 죽였겠지. 그건 벽력왕이 벌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렇다는 건…….’
고뇌 끝에 결론을 내린 공야찬은 확신했다.
“……장강과 녹림이 모종의 이유로 만난다는 것. 수룡왕 파건량이 벽력왕과 함께 어우러질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득이 되는 부분까지 도려내며 서로 학을 떼는 사이도 아니긴 하지.”
사파(邪派).
의와 협을 논하는 정파와 정반대의 성향을 띠는 무리로, 이익이 되면 무엇이든 하는 사특한 자들이다.
자신에게 득이 된다면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라도 손을 잡을 수 있는 이들이 있는 곳이 바로 사파다.
중원 무림의 젖줄이라 불리는 장강을 차지한 장강수로채의 주인 파건량.
중원 무림의 전토를 호령하는 산중의 왕인 녹림칠십이채의 주인 금태도.
이 두 세력이 집어삼킨 사파의 세력이 대체 얼마던가. 두 세력에게 먹히고도 다른 사파인들은 납득하고 인정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이미 이 두 세력 아래 고개를 조아린 사파의 군소 세력만 하더라도 수십, 수백만에 달했다. 명문 정파처럼 무공의 깊이가 얕고 근본이 없는 사파의 특성상 더욱더 강자존(强者尊)에게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고로 벽력왕의 목표는.”
눈을 질끈 감은 공야찬이 한숨을 푹 하고 내쉬었다.
생각하기도 싫었지만.
‘벽력왕은 사소한 원한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인물.’
분노의 방향은 단 한 곳으로 정해져 있다는 의미였다.
여태까지 참은 게 참 용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공야찬은 침음을 흘리며 천무린을 떠올려야 했다.
“부디…… 주군께서 그 위험을 넘을 수 있는 기량을 갖추고 오시길 바랄 수밖에.”
* * *
“제법이야, 제법. 여기까지 직접 올 생각을 다하고 말이야.”
능글맞은 목소리.
짐짓 즐거워 보이기까지 하는 말을 내뱉은 사내는 치렁치렁해진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감사합니다.”
앞선 이와 달리, 육중하고도 절로 감탄이 나올 만큼 섬세하게 육체를 단련시킨 이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흐음.”
다른 이들이 봤다면.
지체 높은 이와 그의 수하가 나누는 대화쯤으로 볼 법한 상황이겠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가 다름 아닌 거산도(巨山刀) 전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놀라서 까무러치고 말 터였다. 녹림의 차기 군주이자 녹림의 왕이 신임하는 사내가 벽력왕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인다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너무 딱딱한 거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오가며 얼굴을 본 정이 있지. 나 그렇게 박정한 사람은 아닌데.”
당연하다는 듯 느긋하게 말하는 이는 자리에 앉아서.
만지작, 만지작.
자신의 머리를 빗어 주고 있는 시녀들의 둔부를 어루만지며 탱글탱글한 감촉을 즐겼다. 잔뜩 얼굴이 붉어진 시녀들이 남성의 머리칼을 세심하게 빗고 있었다.
“어때, 너도 만져 볼래?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아이들인데, 제법 손맛이 좋아.”
“……아닙니다.”
“하여간. 누가 그 산적 새끼가 밀어주는 놈 아니랄까 봐.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다니까!”
콰콰콰콰!
그 말에 숙이고 있던 전위의 고개가 빳빳하게 세워지더니 그의 몸속에서 우악스러운 들산의 기운이 휘몰아쳤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주군이자 녹림의 군주를 욕되게 하는 발언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으므로.
그 기운 때문에.
“꺄앗!”
“어맛!”
쿠당탕.
시녀들이 깜짝 놀라 사색이 된 표정으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숨을 헐떡였다. 그런 모습을 본 사내의 눈빛이 전위에게로 향하더니.
“푸하하하하, 왜? 고놈 욕 좀 했다고 나랑 한판 해 보려고?”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게 아닌가.
“저 우직한 모습마저도 참 똑같아. 고놈 어릴 때랑 아주 닮았어. 왜 어여삐 여기는지 알겠구먼. 쩝.”
초절정의 고수가.
그것도 한 번의 패배로 더욱 완숙한 경지로 올라선 전위가 본격적으로 뿜어대는 기세를 정면으로 맞고도 느긋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인 사내는 쓰러진 시녀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몸을 일으키자.
솨아아아.
거칠게 요동치던 전위의 기세가.
‘……!’
심해 속에 잠긴 것처럼 순식간에 소멸해 버렸다. 단지 몸을 일으켜 세운 것만으로 초절정의 고수가 뿜어내는 기운이 이토록 깨끗하게 사라지다니.
전위는 몹시 당황스럽다. 전력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일으킨 기운은 스스로도 강하다고 여긴 기운이었거늘.
전위의 표정이 일순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지만, 굳이 티를 내진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 유일한 유희를 못 즐기게 하면 어떻게 하냐?”
“꺄악! 채, 채주님!”
“역시~ 우리 빈이. 매일같이 운동한다더니 둔부가 아주 살아 있어.”
“노, 놀리지 마세요!”
그러면서 쓰러진 시녀를 일으켜 세워서는 얼굴이 한층 더 벌게진 그녀의 둔부에 다시금 손을 가져다 댄다.
누가 보면 그저 욕정 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저 그런 무뢰배 같았다.
말 그대로 여자 엉덩이에 미친 녀석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움직일 수가 없다.’
심해 속에 갇혀 가벼운 호흡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이 정도로 격차가 날 줄은.
주물럭, 주물럭.
“그래서 용건이 뭔데? 할 말 있어서 찾아온 거 아냐?”
“…….”
“뭐야, 말하기 싫어?”
주물럭거리는 손길을 멈추지 않던 남자는 전위의 시뻘게진 얼굴을 보고 나서야 뭔가 생각났다는 듯 피식 웃었다.
“파하아!”
그리고 그제야 전위의 숨통이 트이며 깊은 심호흡을 했다. 심해의 수압에 갇혀 죽을 뻔했던 고통이 그의 전신을 엄습했다.
“왜 쫄고 그래? 여기서 너 죽이면 전쟁밖에 더 치르겠냐. 그렇게 귀찮은 일은 하기 싫다. 산적 새끼들이랑 그만 엮이고 싶다. 난 여기 있는 애들이랑 노는 게 훨씬 재밌어.”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기운 앞에 전위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지만, 남자는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였다.
‘…….’
전위는 그리 멍청이가 아니었으므로 자신의 기운을 삽시간에 사라지게 만든 이를 보고 전처럼 행동할 수 없었다.
전위의 표정에서 눈앞에 선 이가 누군지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남자가 누군지.
“야야, 산적 새끼가 나 그렇게 쳐다보는 거 싫어. 뭐 새삼스레 그런 눈으로 바라봐? 아무리 내가 좀 생겼기로서니 그렇게 쳐다보면 내가 뭐가 되냐.”
정말 무게감이라고는 1도 없는 인간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연상되는.
“자고로 말이야. 날 그렇게 볼 수 있는 사람은.”
만지작. 만지작.
“이렇게 예쁜이들이 아니면 안 돼. 그것도 아니라면…….”
씨익 웃은 남자가 형형한 안광을 터뜨렸다.
“좀 많이 재밌는 일을 벌인 인간 정도랄까. 너처럼 약골들 말고.”
그렇다.
눈앞에 선 이 사람이 바로.
‘……수룡왕 파건량.’
사파의 양대 거인(巨人)이자 당대 사파제일인을 두고 자웅을 겨루는.
수룡왕(水龍王) 파건량이었다.
“넌 내게 무슨 재미를 줄 수 있느냐?”
* * *
“……그게 무슨!”
위사검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정면을 응시한 위사검의 시선에 퀭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공야찬이 보였다.
“조만간 녹림과 장강이 손을 잡고 사천무관을 공격해 올 가망성이 큽니다. 어르신.”
“무슨 근거로 그리 말하는가?”
“……사건의 발단은 녹림의 후계자를 꺾은, 바로 이곳에 이유가 있겠지요.”
“그렇긴 하나, 그 이유만으로 대뜸 쳐들어올 수 있겠는가? 그리 쉽게 전쟁을?”
“오히려 여태 전쟁을 일으키지 않은 게 더 용한 일이었습니다.”
“…….”
“녹림을 한데 묶은 벽력왕입니다. 그런데 벽력왕 자신이 신임하는 후계자가 정파 무림의 생도에게 처참히 무너졌는데, 그걸 그냥 두고 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자신들을 따르는 녹림채 산적들과 주변 사파인들의 시선이 어떻겠습니까.”
“그야…….”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녹림이 쳐들어오는 게 당연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장강이 왜 그들과 손을 잡는단 말인가?”
“그것은…….”
공야찬이 그 말에 대한 답을 하기 전.
“어, 어르신!”
이곳으로 뛰어 들어온 이는 조수강과 전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