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1화
제191화
천무린을 비롯한 8기수 열세 명의 생도와 5기수 소화진, 7기수 이백과 진량, 그리고 악교운과 담진, 배단아까지 사천무관과 관련한 이들이 모였고.
천살대주인 이검과 천살대 서른 명, 그리고 천가장의 두 호법이 된 이용과 이호 형제까지.
총 오십여 명이 넘는 인원들 중 무려 절정급 고수가 열 명이 넘는 데다 당장이라도 절정을 넘보는 이들이 대다수다.
아마 한 단계씩만 끌어올리더라도 어지간한 문파는 하루 반나절 만에 지워 버릴 수 있을 전력이 될 터.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있었다.
힐끗.
천무린은 자신의 등 뒤에 선 이들을 훑어보았다. 녹포를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 두 장년의 사내는 척 보기에도 만만치 않은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독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사천당가에서 당백진이 자랑할 만큼 독초를 잘 다루고 영단과 독단의 제조에 최고 전문가라고 평가받는 이들이다.
“……백부님? ……그리고 숙부님?”
당지혜의 얼떨떨한 음성만 들어도 그들이 사천당가에서 얼마나 높은 지위를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본디 사천당가는 혈연으로 이루어진 세가답게 당씨 성을 쓰는 이들로만 구성되어 있었고, 그중에서도 당지혜는 사천당가 가주의 여식이기에 두 사람은 현 사천당가 가주의 형제들이라는 소리이니까.
“하하하! 이리 보니 어찌나 어여쁜지. 확실히 아우를 쏙 빼닮아서 그런지 한 미모 하는구나!”
덥석.
만 가지의 독을 직접 건드려 보고 심지어는 입에 갖다 대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독초와 독에 관하여는 천하의 어느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다고 자부하는 독만재(毒萬材) 당유덕은 자신의 조카를 보는 것이 그리 좋은지 너털웃음까지 터뜨리며 연신 싱글벙글하였다.
“형님도 참……. 둘째 형님의 얼굴을 닮았다니요! 척 보기에도 형수의 얼굴을 고대로 박아 넣었구먼. 그보다 지운…… 아니. 지혜야. 마음고생을 하느라 힘들었지. 결국엔 밝혔나 보구나.”
“네! 백부님! 숙부님! 어쩌다 보니……. 헤헤.”
당지혜의 쑥스러운 미소에 그녀의 숙부이자 독만재와 더불어 독에 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리독향(萬里毒香) 당적패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릴 적 마음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낫게 해 주고자 자신들의 아비이자 당지혜의 할아버지인 당백진이 사천무관에 지혜를 입관시키고 나서는 보려야 볼 수도 없었던 조카였다.
그때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다행히 눈앞의 당지혜는 들판에 핀 들꽃처럼 수수한 아름다움을 지닌 어엿한 여인으로 성장하지 않았는가. 일견 홀가분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동안 속앓이를 하고 있던 자신들의 형제이자 현 사천당가의 가주인 당하운이 어찌나 기뻐할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
그렇게 북받쳐 오른 감격에 겨워 당가의 두 장년인이 당지혜에게 정신이 팔린 나머지 이쪽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을 보고 되레 불안함을 느끼는 이들이 있었다.
“……너무 시간을 많이 까먹는 거 아니냐? 걱정되는데…….”
“왜? 남만은 바로 코앞이라고 하던데.”
“……위 어르신 말씀을 못 들었냐. 이 멍청아. 더운 남만의 야생에서 수련 장소를 마련하기가 어디 쉬울 거 같아? 깊이 들어가야 그나마 식수도 구하고 식량도 구하는 거지.”
송무와 태강, 황태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송무의 표정이 한 곳을 응시한 채 턱을 덜덜 떨고 있었다.
“이 새끼, 왜 이래?”
“어제 뭘 잘못 처먹었나. 왜 덜덜 떨고 X랄이야.”
“……얘들아.”
“왜?”
“뭔데?”
“저, 저기…….”
송무가 가리킨 곳에는 한 사람이 입가를 비틀어 올리고 있었다.
“……저, 저 새끼. 누, 눈 돌아갈 거 같아. 다, 당장이라도 저 당가 어르신들을 마구 쥐어 팰 기세야.”
“조, 조졌다. 누가 감당할래……?”
“누가 감당하겠냐? 우리가 다 덤벼도 안 되는 거 봤으면서!”
남만으로 넘어가는 시간이 지체될까 조마조마하던 송무와 태강, 그리고 황태는 결국 봐 버렸다. 천무린의 입가가 비틀려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가뜩이나 위사검과 공야찬, 조수강이 직접 마련해 놨다는 폐관 수련장까지 도달하는 데 한나절이 걸린다고 했는데 말이다.
여기서 이렇게 재회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으니……. 절로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후후후.”
“…….”
“저 새끼 웃기 시작했어.”
“하, 씨.”
“……마구 쥐어 팰 생각에 신나 버린 것 같은데.”
“…….”
발을 동동 구르던 생도들은 하나같이 초조한 나머지 입술을 뜯고 있었다. 삽시간에 굳어 버린 그들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 줬다.
천무린이 작심하고 패기 시작하면 그 누가 말리겠는가. 독만재? 만리독향? 이름 꽤나 날렸다는 사천당가의 무인들이겠지만, 번데기 앞에 주름잡는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겠지.
그러나.
“독초와 영단을 만드느라 힘들어 뒈져 갈 텐데……. 뭐, 저 정도쯤이야. 내 깊은 아량으로 봐줄 수 있지. 낄낄.”
“…….”
“뭐, 물론 제때제때 영단이 안 나오면 뒈지게 맞는 거겠지만. 안 그래도 남만에 식량이랑 식수가 부족하다고 들었는데.”
“…….”
“아무리 당가 새끼들이라도 하루 온종일 독초만 뜯어먹고 살 수는 없을 테니까. 낄낄.”
……말 그대로 악마 새끼였다.
“남만을 다 돌아다니면서 독초란 독초는 다 골라내서 독단으로 만들고, 가진 영초들과 묵린혈망의 내단으로 조합을 잘 이뤄야겠지. 낄낄. 제대로 못 만들기만 해 봐, 어디.”
남만의 땅덩어리 크기가 대체 얼만지는 알고 저리 말하는 것일까.
송무는 뭐라 입을 열려다가 저도 모르게 고갤 저었다.
……절레절레.
저놈에게 그런 상식이 통할 리가 있나.
통했으면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저놈은 한다면 하는 놈이니까.
“껄껄껄! 옳지! 내 조카! 잘한다!”
“호호호! 백부님!”
“끌끌끌! 그러니까 형님이 말이다! 당가에서……!”
“에에? 정말이요?”
그리고 이런 상황을 모르는 당가의 두 양반은 그저 오랜만에 조카를 만나 연신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휴양차 놀러 온 인간들처럼 밝은 표정을 지은 채 말이다.
……송무는 생각했다.
될 대로 되라지.
이젠 나도 모르겠다.
* * *
힘.
권력.
명예.
권위.
재능.
공평하다고 여기지지 않는 이 세상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공평하다고 평가받을 수 있는 단 하나.
그것은 바로 시간이다.
재산과,
명예와,
성별과,
나이랑 무관한.
누구에게나 공명정대한 시간은 동시에 동일한 ‘양’이 제공된다. 단, 동일하게 제공되는 만큼 시간을 얼마나 적절히 활용하는가, 즉 시간의 농도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어중간한 노력으로 임하지 마라.”
어중간한 노력으로는 시간의 농도가 짙어질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일행에게도.
천무린 본인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무신이라는 전생의 과거와 경험이 녹아들었고.
천마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리에서 수많은 무공을 접하고 익히며 받아들였다.
옛 무위를 되찾기 위해 악에 받쳐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한참 멀었다.
매 순간이 그의 목숨을 간당간당하게 만들었다.
한 번은 선천지기까지 고갈하여 꺼져 가는 촛불처럼 생명력이 다할 뻔했고.
또 한 번은 갖고 있는 무공과 경험만으로는 부족하여 삼대 금기 무공 중 하나인 흡성대법의 요행을 빌려서 겨우 살아남았다.
……추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래서는 이번 생에서 굳힌 신념을 절대 지켜 낼 수 없다.
벽력왕 금태도.
수룡왕 파건량.
천마신교 다섯 장로들.
그리고…… 놓쳐 버린.
놈인지 년인지 모를 기괴망측한 인간까지.
그들이 가진 시간의 농도보다 자신이 보내는 시간의 농도가 더욱 진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단순한 세월의 힘을 이길 순 없을 테니까.
그리고.
또 하나.
천무린 혼자만 강해져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모두가 강해져야 한다.
싸울 때마다 동료들의 약함이 약점이 되어 천무린의 집중력이 흩어져서도 안 되고, 신뢰라는 바탕이 이루어지려면 기본적으로 같이 싸우는 이들이 강해져야만 했다.
설화린과 당지혜가 홍에게 당하기 직전, 천무린의 신경이 분산되는 바람에 싸움이 더욱 어려워졌던 것을 떠올려 봐도 그렇다.
당시의 어려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는데, 천무린은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천마 시절이었던 본인의 옆에는 고갤 돌리면 죄다 화경의 고수 혹은 초절정급뿐이었다. 그런 곳에서 검을 휘둘러 댔으니 현재의 상황에 더욱 괴리감이 생길 수밖에.
허나.
지금은 그래선 안 된다.
모두가 강해질 수 있도록 시간의 농도를 더욱 진하게 만들어야 한다. 천가장에 속한 모든 이들이 함께 강해지는 것.
꾸욱.
천무린의 손아귀가 세게 쥐어졌다.
* * *
누구는 세월이 빠르다며 야속하다 하고.
또 누구는 세월이 가지 않는다고 지루해한다.
그런 이들에게도 막상 하루가 지나고 나면 덧없을 터. 하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분명히 변하는 것도 있었다.
바로 지금의 천가장처럼 말이다.
“……캬! 이번에도 쌀 한 가마니는 내 공짜로 가지고 가네!”
“어이쿠야! 내 겨우겨우 쌈짓돈을 모아 와서 한판 할까 했더니만!”
“에헤이! 그러니까 잘 보고 거시라니까.”
“예끼! 이 사람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도 유분수지! 지금 나랑 해 보자는 겐가!”
상인들로 보이는 이들이 왁자지껄하게 외치고 있었고, 그곳에서 전욱은 손사래를 치며 돈을 잃은 이의 울분을 달래 주었다.
“어허, 이번만 기회가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자자.”
쌈짓돈을 잃은 이의 품속에 동전 몇 푼을 넣어 주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위로가 된 것인지 성난 목소리로 외치던 이가 금방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가장을 떠났다.
한때는 적랑오객의 막내로 한량의 삶을 보내던 전욱이 어느새 천가장의 일원으로 제법 능수능란하게 천가장의 일부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일부란 다름 아닌 도박장이었다.
“크으,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참으로 쏠쏠하구려.”
“하구려? 하구려는 반말이고, 이 새꺄.”
쥐 수염을 한 작달막한 몸집에 정보를 다루는 데는 탁월하고 눈치가 빠른 조수강이 전욱의 엉덩방아를 차는 시늉을 하자, 전욱은 이를 받아 주면서 넘어지는 척을 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합에 미소를 띠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여간 시간 참 잘 갑니다.”
“그러게 말이야. 벌써 그들이 폐관 수련을 위해 남만으로 떠난 지 반년이 지났단 말인가.”
“그 덕에 제가 이리 잘 먹고 잘 살고 있지만요.”
“그건 그래.”
푸하하하하.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천가장이 나날이 번창해 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가슴이 뿌듯해졌다.
오가는 이들이 많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는 문파가 어디 있으랴, 하는 자긍심이 들면서 서로 기쁨을 나누고 있는 그때.
“……가, 각주님! 크, 큰일 났습니다!”
천가장의 일원 중 한 명이 헐레벌떡 서한 하나를 들고 뛰어 들어오는 모습에 두 사람은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원래 위기란.
편안할 때 찾아오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