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제171화
설화린은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듣고 홍과 당지운을 번갈아 봐야만 했다.
설마.
당지운이?
당최 이게 무슨 말인지.
그러나.
당지운을 바라본 순간, 설화린은 홍의 말이 그저 헛소리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당지운의 두 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가 감겼다.
그런 그, 아니 그녀의 굳어 버린 표정에 설화린에게는 당혹감이, 홍의 입가엔 미소가 짙어졌다.
“풋……! 요년 얼굴을 보아하니 제 동료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몰랐던 것 같은데. 호호호호.”
홍의 웃음소리가 귀를 틀어막아야 할 정도로 커졌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서로 다른 이유로 흔들렸다.
설화린은 설마 하는 반응으로.
당지운은…….
“……내가 무슨 계집이란 말이냐?”
흔들리는 눈빛을 바로하고 정색한 얼굴로 대꾸했다.
“호호. 이런, 이런. 우습구나.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것을.”
규화보전으로 신체적인 변화가 가장 극심하게 변한 홍이니만큼.
성별이 남자에서 여자로 바뀔 수밖에 없는 순간을 겪는 홍이니만큼.
더없이 예민하여 알 수밖에 없는 홍이기에 당지운의 본모습을 바로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부정하는 당지운의 모습에 묘한 미소를 띠던 홍의 신형이 퍽 하고 사라지더니 순식간에 당지운의 앞에 나타났다.
움찔.
당지운은 놀라 홍의 움직임에 그저 한 걸음 물러나 대응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나.
놓칠 리 없는 홍의 양손에 손톱이 세 치나 길어졌다. 동시에 그대로 내리그으며 당지운의 앞섶을 찢어발겨 버렸다.
“……!”
구음백골조의 손아귀는 그녀에게 상흔을 남길 생각이 없었는지 그저 옷의 앞섶을 찢어 버리는 데 그쳤다.
그러나,
“호호호호. 어여쁘구나. 어여뻐. 그리 좋은 몸뚱이를 두고 어찌 사내 흉내를 내고 다녔더냐.”
앞섶이 벌어진 틈으로 당지운의 뽀얀 피부가 보였고, 가슴팍을 단단히 동여맨 붕대가 그녀의 비밀을 가려 주고 있었다.
흡사 자신의 치부라도 들킨 듯 이를 악문 당지운이 양손으로 자신의 속살을 가리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갑작스럽게 밝혀진 자신의 정체에 당지운의 당혹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악교운도.
천무린도.
설화린도.
생도 어느 누구도 모르는 자신의 비밀을.
오로지 당백진을 제외하고는 모르는 이 비밀을.
들켜 버린 이 순간, 당지운, 아니 당지혜는 흔들리는 두 눈으로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러나.
사라락!
“……조금 있다가 들을게요. 정신 차려요.”
그 모습에 황급히 날아오다시피 한 설화린이 입고 있던 경장을 찢어 당지혜의 앞섶을 황급히 가려서 동여맸다.
“……화린?”
“이해할 수 없지만, 뭔가 이유가 있을 테니까 구태여 묻진 않을게요.”
설화린의 눈엔 어떠한 의문도 서려 있지 않았다. 그저 그랬어야만 할 이유가 있었겠지 싶었다. 정체를 숨겼다는 사실보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과 함께 그동안 말 못 했을 당지운의 답답함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설화린은 구구절절 묻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에 당지혜는 오히려 눈시울이 붉어졌다.
“호호호. 감동을 해야 하는 거니? 그러나 이를 어쩐다니. 둘 다 이 자리에서 죽을 텐데 말이야. 호호호. 너희를 도와줄 인간들은 모두 정신이 팔려 이쪽은 신경 쓰지도 못할 것 같은데.”
홍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초승달처럼 가늘어진 그녀의 두 눈에 더없는 희열이 어렸다.
정체가 밝혀진 순간부터 당지혜는 사내아이로 자신을 감추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을 뿐이었다.
사천무관을 비롯하여 북해빙궁에서도 소문난 미모를 자랑하는 설화린이었으나, 그에 전혀 밀리지 않는 당지혜의 미모에 홍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당지혜와 설화린.
설화린과 당지혜.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북풍한설 속에서도 피어나는 빙화의 아름다움으로 뭇 사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설화린과는 달리, 푸석해진 머리칼과 치렁하게 늘어뜨린 옷을 입은 당지혜는 맨얼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은 장담할 수 있었다.
그 수수한 아름다움은 아직까지 피어나지 않은 또 하나의 꽃봉오리라고 말이다. 불과 몇 년 안에 설화린과 다른 아름다움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될지도 모른다고.
홍의 열망 어린 시선에 당지혜는 속에 담았던 당혹스러움을 털어 내고 한숨을 푹 하고 내쉬었다. 그리고 설화린을 돌아본다.
“……화린아,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해.”
“네?”
갑자기 억울하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이렇게 밝혀질 거였으면 진작에 꾸미고 다닐걸.”
“……에?”
“이대로 죽기엔 너무 억울하잖아?”
당지혜가 손아귀에 쥔 비수들을 빙그르르 회전시켰다.
“추악한 저 마귀할멈한테 죽기엔.”
그 말에 설화린이 설핏 미소를 띠었다. 당지운, 아니 당지혜의 두 눈에 포기가 아닌 살아남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설화린의 양손에도 눈꽃이 소담스레 피어났다.
“그래요. 당연한 소릴.”
“호호. 정신 나간 년들. 나에게 감히 대항하겠다는 것이냐.”
두 여인이 나란히 서서 마주하자 홍은 코웃음을 쳤다. 그 모습에 당지혜가 빙긋 미소를 띠며 설화린을 힐끗 쳐다보고는 홍을 노려본다.
“대항? 대항이 아니라 퇴치지, 퇴치.”
“그렇죠. 당신의 손에 죽기엔 우리가 너무 꽃다워서 말이에요.”
합심한 두 여인의 모습에 홍은 지겹다는 투로 혀를 찼지만.
단전 속에서 흐름이 끊긴 듯한 규화보전의 내력에 속으로 이를 악물어야 했다.
여래신장을 통해 역근세수경의 기운이 홍의 규화보전을 여전히 찍어 누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규화보전의 기운이 더욱 강성해지면 충분히 밀어낼 수 있을 테지만, 그러려면 몇날 며칠은 요양해야 하리라.
한시라도 빨리 이 두 여인을 처리하고 규화보전과 구음백골조를 완성시켜야만 한다. 그래야 지난날의 굴욕 따윈 대번에 잊고서 중원 무림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채 마치기도 전에 당지혜의 양손이 허공으로 비수들을 쏘아 냈고, 그것들은 마치 장대비처럼 홍을 향해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흥! 고작 그런 장난감으로 나를 해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홍의 양손에 길어진 세 치의 손톱은 하나하나가 응축된 검기(劍氣) 이상의 기운을 발현하여 비수들을 모두 튕겨 내 버렸다.
그러나 튕겨 내는 비수 속에 담긴 자그마한 주머니들이 손톱에 찢겨서 모조리 터져 나와 독연(毒煙)이 홍의 주변을 감쌌다.
홍이 옷소매로 황급히 바람을 일으켜 독연을 걷어 냈지만, 어쩔 수 없이 코로 들어간 소량의 독연은 홍의 움직임을 약간이나마 경직시켰다.
“독은 강자도, 약자도 가리지 않아! 네가 아무리 지독한 마공을 익혔다고 해도 변함없는 사실이지!”
쩌저적!
동시에 허공을 얼려 버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홍의 정면을 향해 날아오는 빙백신장의 눈꽃.
경직된 움직임을 유발하는 독에 이은 빙백신장의 조화는 충분히 위협적이었지만.
“……호호, 이따위 독?”
홍의 왼쪽 손아귀가 구부려졌다 펴지며 횡으로 그어 버리자, 정면에서 날아오는 눈꽃이 힘없이 사그라들었다.
“고작 이 정도 한기(寒氣) 따위로는 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단다. 이년들아.”
홍은 의기양양하게 입가를 비틀었다. 하지만 당지혜와 설화린은 포기하지 않고 비수와 빙백신장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의 전부임을 증명하기 위함인지.
마지막 발악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녀들의 행동에 홍은 고개를 저었다.
눈앞을 가득 채운 비수들의 향연이 펼쳐졌고.
전신을 에워싸는 한기의 폭풍에도 홍은 여유로웠다.
푸슈우우우!
쩌저적!
아직 절정이 되지도 못한 아이들이다. 그러나 본래의 홍은 이 두 여인에게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만큼 보잘것없는 무공을 지녔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저 여인들이 보여 주는 무위가 어디 눈에나 들어오는가?
아니.
그럴 리가.
저 벌레만도 못한 무공과 암기는 홍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이 자신이 익힌 규화보전과 구음백골조라는 희대의 마공의 힘이다.
홍은 장담할 수 있었다.
이 마공들이 완성되는 순간,
자신은 다른 세상을 사는,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필적하는 인물이 될 수 있으리라고.
제갈세가에서 벗어나,
제갈벽의 그늘에서 벗어나,
그에게 충성을 바치고 그 얼마나 오랜 기간 이 순간을 그려 왔던가.
제갈벽은 자신의 남성성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차마 건드릴 수 없었던 규화보전과 구음백골조의 위치를 파악하고 이 상황을 만들어 내느라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그래서 더없이 기꺼웠다.
자신의 선택은 옳았다.
보여 주리라.
이 가엾은 여인들에게 자신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리고 여인들에게 자신에게 몸을 바치고 가죽을 바쳐 세상을 희롱하는 여인이 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를.
세 치(9.09cm)에 불과했던 구음백골조의 손톱이 무려 아홉 치(대략 30cm)로 쭉 늘어나더니 규화보전의 마기에 휩싸여 날아오는 암기들과 눈꽃의 가운데를 그대로 내리그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두 여인에게 그대로 미쳤다.
“흡……!”
“……헙!”
그리고 동시에 비수에 꽂혀 있던 독주머니들이 펑펑 하고 터지면서 홍의 움직임을 막아섰지만, 이미 날아오는 다섯 갈래의 마기는 두 여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마기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눈앞에 당도한 다섯 갈래의 마기를 피하는 것조차 요원한 일.
황급히 끌어올린 빙백신공(氷白神功)의 기운과 당백진의 독문무공인 삼양귀원공(三陽歸元功)을 끌어올린 설화린과 당지혜가 그 마기에 대항했다.
콰가가가가!
“……끄으으.”
“푸화아!”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오면서 두 여인은 속절없이 다섯 갈래의 기운에 밀려 땅거죽에 중심을 잡고 있던 두 다리가 뒷걸음질쳤다.
투다다닥!
절정의 반열에도 오르지 못한 두 여인이 힘을 합쳐 막기에는 더없이 거대한 기운. 독과 암기, 빙백신장이라는 무공으로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벌어 보려 했던 두 사람이었지만, 자신들의 내력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새삼 절실히 느끼며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리고 양손에 침투하는 마기를 보면서 두 여인의 눈가에 절망의 그림자가 어렸다.
그 순간.
콰앙!
황금빛의 기운이 뇌격(雷擊)처럼 내리꽂히며 두 여인을 옥죄던 다섯 갈래의 기운을 그대로 박살 내었다.
그 모습에 설화린과 당지혜는 기쁨에 어린 눈으로 기운이 날아온 곳을 바라봤다.
“……당신!”
“무, 무린?”
그러나.
투콰아앙!
두 여인의 앞에 포탄처럼 날아가 땅에 처박히는 천무린이었다.
“무, 무린아!?”
“헙!”
피 칠갑을 한 채 산발이 되어 본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게다가 한쪽 어깨가 뒤틀린 채였다.
“끌끌, 나를 앞에다 두고 다른 데 신경을 쓰다니. 아주 미친놈이로구나.”
무형노괴가 사뿐히 허공에서 내려앉아 천무린을 노려봤다. 그리고 그 모습에 두 여인은 저도 모르게 황망한 눈길로 천무린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 당신?”
천무린의 뒤틀린 왼쪽 어깨만 봐도 무형노괴로부터 당한 일격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걸 알고서도 자신들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다니.
그 모습에 천무린이 피식 웃으며 별거 아니라는 듯 탈골된 왼쪽 어깨를 맞춘다.
뚜두두둑!
모골이 송연해질 만한 소리였지만, 천무린은 두 여인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그만하면 됐다. 너희도.”
“하, 하지만!”
“기껏 네가 다 잡아 놓은 녀석이……!”
소리치며 당지혜가 가리킨 곳엔.
“녀석은 내 기운을 느끼자마자 전력으로 도망쳤어.”
이미 홍은 온데간데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