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제170화
무형노괴와 격전 중인 천무린.
이검과 대치 중인 악교운까지.
여기서 무력감을 느끼는 한 명이 있었으니, 바로 설화린이었다. 기껏 천무린을 돕겠다고 따라왔으나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과 깊은 자괴감을 느끼는 그녀였다.
꽈악.
‘이래서는 안 돼.’
두 주먹을 쥐었다. 무력감과 자괴감을 털고 일어나야만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분명…….
그리고 그런 설화린의 시선이 한 곳을 응시했다.
움푹 파인 곳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며 겨우 일어나는 한 여인을.
아니, 여인인지 사내인지 모호한 그 사람을 바라보다가 설화린은 당지운에게 시선을 옮겼다.
“우리도 할 몫을 해야죠.”
“……우리가? 저자를 감당할 수 있을까…….”
당지운은 자신이 없었다. 비록 천무린에게 속절없이 무너지긴 했어도 저자가 보여 준 추악하리만치 섬뜩한 마공과 마기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 자를 막아선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저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일이 아닐까 하고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게 되는 당지운이었다.
고민에 빠진 당지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설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럼 다녀올게요.”
담담히 말한 그녀가 한 걸음 나서자, 당지운이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녀의 옷소매를 잡았다.
“가, 가서 어떻게 하려고? 아무리 저자가 다쳤다고 해도 이기는 건 불가능해. 아까 악 교관님도 물러서는 거 봤잖아.”
“……맞아요. 불가능할 거예요.”
“그런데 왜……?”
당지운의 물음에 설화린이 설핏 미소를 띠더니 손가락으로 천무린이 있을 법한 곳, 그리고 악교운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가리켰다.
“지금 제가 맞이해야 할 상황만 말이 안 되나요? 두 사람도 이미 말이 안 되는 상황을 겪고 있잖아요. 저라고 못 할 거 있나요?”
“…….”
“그리고.”
설화린의 두 눈에 독기가 서렸다. 그녀의 손끝에 하얗게 맺히는 서리.
그 속도는 느릿했지만 피어나는 눈꽃은 그녀가 여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여실히 보여 주었다.
“저도 사천무관의 생도잖아요. 언제까지고 보호 아래 있으려고 여기에 있는 거 아니니까.”
“…….”
그녀의 당찬 미소가 당지운의 눈에 들어왔다. 당지운은 자신이 잡고 있던 설화린의 옷소매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다녀올게요.”
지체하지 않고 그녀는 몸을 날렸다. 그녀가 행할 것은 단 하나.
비척거리는 홍의 앞길에 등장하여 도망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뿐.
사뿐히 지르밟듯 경신법을 펼친 설화린이 금세 홍의 앞으로 다가섰다.
“……거기까지예요.”
그녀의 음성에 꺾이다시피 한 홍의 고개가 들려 그녀를 바라봤다. 죽어 있는 눈빛이 설화린과 마주했다.
“더 나아갈 수 없고, 도망갈 수 없어요. 당신은 제가 막을 테니까.”
“……호호.”
설화린의 말에 일그러져 있던 홍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죽어 있던 눈빛에 생기가 맴돌았다.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아름답구나. 아름다워.”
그녀의 말에 설화린이 움찔했다. 홍의 말에 담긴 아름답다는 의미가 사뭇 다르게 들려왔다.
“어찌 저리 아름다울 수가 있는지. 한두 해만 더 지나면 천하일미(天下一美)가 되겠구나. 꽃봉오리가 막 피어날 것 같은 싱그러움까지. 호호호호. 탐나는구나. 탐나.”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설화린이 가진 미모에 대한 칭찬이었다. 칭찬은 끝없이 흘러나왔고.
“호호호. 부럽다. 부러워. 내가 네 아름다움을 10분의 1만 가졌어도. 그러기만 했어도…….”
그러면서 자신의 얼굴에 마른세수를 하던 홍은 문득 자신의 골격과 신체가 일부 망가진 것을 깨달았다. 능공천상제와 여래신장의 무수한 난격(亂擊)에 의해 주저앉은 코뼈와 처져 버린 피부와 늘어져 버린 얼굴이.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자신의 흉측해진 괴이한 몰골에.
“……끄아아아아아! 이럴 순 없다. 이럴 순 없어.”
터져 나오는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최강이라 생각했던 무공은 빛나는 청년에게 짓밟히고.
아름답다고 여겼던 외모는 눈앞의 여인에게 크게 밀린다.
불공평하다.
불공평해.
“으드득.”
이가 절로 갈렸다. 그리고 그 분노는 지금 바로 눈앞에 있는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흡.”
설화린에게 규화보전으로부터 회복된 마기(魔氣)가 일순 집중되었다. 꿈틀거리기 시작하던 기운이 금세 설화린의 발목과 가슴께를 집어삼키며 천천히 전신을 옥죄기 시작했다.
입이 절로 벌어질 만큼 불쾌하고도 끈적한 기운이 설화린의 빙백신공에 부딪쳤다.
꾸욱.
‘……이런 기운을 직접적으로 맞이한 당신은 대체…….’
사지가 덜덜 떨려 왔다.
직면한 규화보전의 마기는 그녀가 상대할 수 있을 수준이 아니었기에.
하지만.
주륵.
설화린의 아랫입술이 윗니에 물려 핏물이 울컥하고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마기로부터 잠식되어 가는 그녀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행동이었다.
“……호호, 내 너의 그 아름다운 육신을 가져야겠다. 가져서 나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어떠니? 너도 좋지 않니? 그런 벌레만도 못한 무공 따위로 이 강호를 살아가는 것보다야 나에게 너의 육신을 주고서 너의 몸으로 이 중원 무림을 맘대로 이끌어 가는 게 어떠냐?”
호호, 웃는 그녀의 반응에 설화린은 대답 대신 빙백신공을 5성까지 끌어올리며 마기에 저항했다.
쩌저저적!
손아귀에 맺힌 눈꽃이 녹아든다 싶더니 그대로 앞으로 쏘아졌다. 그 모습에 홍이 기이한 각도로 틀어져 있던 팔꿈치를 맞추고는 손가락을 구부려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카가가각!
빙백신공에 이어 빙백신장(氷白神掌)을 펼친 설화린의 무공을 구음백골조로 손쉽게 막아 버린 홍이었다.
“이깟 벌레만도 못한…….”
“그이라면 이렇게 말할 거예요.”
“…….”
“닥치라고.”
설화린의 양손에서 뻗어 나온 빙백신장이 연속해서 홍에게 쏘아졌다. 허공에서 피어나는 한기는 홍의 구음백골조에 닿을 때마다 아스러져 허공에 흩어졌지만, 설화린은 개의치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단 한 방이라도 먹이겠다는 그녀의 안간힘에 홍은 혀를 차며 구음백골조를 펼쳐 대번에 눈꽃들을 아주 박살 내 버렸다.
“호호. 고년, 성격도 제법이구나. 하기야 여인은 표독한 맛이 있어야지. 그것까지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
이번에도 설화린은 대답을 하지 않고 빙백신공에 집중했다.
손바닥이 올곧게 펴진 상태에서 아름답게 피어난 눈꽃 한 송이가 손끝에서 맴돈다. 그런 그녀의 빙백신장으로 빚어 낸 눈꽃이 소담스레 피어나고, 또 피어났다.
“호호호, 소용없다고 하지 않았니? 너무 그렇게 질리게 굴면 남자들이 싫어한단다.”
홍의 표정에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설화린 따위는 당장에 찢어 버릴 수 있다는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설화린이 싸늘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당신에게 육체를 줘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면 콱 혓바닥을 깨물고 자결하고 말 거예요.”
“……호호. 아이야, 어찌 그러니? 허나 혹 그런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홍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면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 음침한 미소에 설화린의 손바닥에 뜬 눈꽃이 잘게 떨렸다.
“네 가죽을 벗겨서 인피면구(人皮面具)로 쓰고 다닐 것이다. 최상품의 가죽이야. 아주 탐이 날 정도로.”
홍의 눈빛은 거짓이란 단 하나도 없다는 듯 이글거렸다.
인피면구(人皮面具).
인간의 얼굴 가죽을 가공해서 만든 가면을 말하는 홍의 독심(毒心)을 일부 들여다본 설화린은 동요하는 마음을 붙잡기 위해 계속해서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을 느껴야 했다.
한평생을 새외와 사천무관에서 대부분을 보낸 그녀가 이와 같은 탐욕과 욕심에 눈이 멀어 버린 사특한 이야기를 어디 들어 본 적이나 있었겠는가.
뒷골목 무뢰배들의 갖은 희롱이나 협박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악독한 마음에 설화린은 수없이 정신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 자신의 손바닥에서 중심을 잡고 있던 눈꽃도 바스러져 갔다.
“……호호, 그러니까 이제 그만 죽어라. 네년 얼굴을 보는 맛이 제법 났다만, 이제 더는 필요가 없겠구나.”
손톱이 세 치 이상 길어진 홍의 손가락이 쫙 펴졌다 구부려지더니, 그의 신형이 섬전과도 같은 속도로 설화린에게 쇄도했다. 내리긋는 순간, 대번에 다섯 갈래로 찢어지리라.
“아니지. 아니야. 네년의 얼굴에 상처를 낼 수는 없으니.”
설화린의 코앞까지 당도한 홍이 주먹을 쥐어 구음백골조가 아닌 단순한 내공이 담긴 주먹으로 변환하여 뻗어 갔다.
그 모습에 벙찐 설화린은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리고 그 물러남이 곧 자신의 실수라는 것을 깨닫고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이대로…… 이대로 죽을 수는 없…….’
바로 그때.
피슈우우!
파바바바박!
찰나의 순간, 구음백골조가 아닌 무공을 펼치느라 주춤한 순간.
수많은 비침과 비수가 허공에서 소낙비처럼 홍의 굽은 등판을 향해 내리꽂혔다.
“……마귀할멈, 사천당가에 극독을 써도 그 얼굴이 되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꿈에라도 나올까 봐 무서워 죽겠어.”
당지운이 살포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고는 손가락 끝에 묶인 실을 잡아당겨 홍의 등판에 꽂힌 수많은 비수들을 회수했다.
“어때? 제법 따가울 텐데.”
당지운의 말마따나 홍은 표정을 구긴 채 자신의 등에서 따끔한 고통이 점차 심해지는 것을 고스란히 느껴야만 했다.
“……독(毒)?”
“학령초(鶴靈草), 신선폐(神仙廢), 산공독(散功毒), 군자산(君子散), 학정홍(鶴頂紅), 금선사(金線蛇). 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야.”
무려 6가지의 극독을 섞어 배합하였다. 최적의 배합을 찾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이 6가지의 극독이면 대라신선이 찾아오더라도 죽음을 피하진 못할 터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홍의 굽은 등이 울긋불긋해지기 시작하더니 극독의 효력이 발현되는 듯했다. 그 모습에 홍 역시 경직된 움직임을 보이면서 천천히 고갤 꺾어 당지운을 바라볼 뿐이었다.
평소였으면 절대 쓰지 않을 극독이었으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할아버지도 이해해 주시겠지.”
당지운은 자신이 있었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한, 그리고 당백진을 통해서 듣기로도 이와 같은 극독의 조합에서 살아날 수 있는 인간은 없었다.
애초에 적중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적중된 순간부터는 별 도리가 없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상식선에서는 그랬다.
허나.
“……호호호.”
홍의 굽은 등에서 끈적한 마기가 흘러나오며, 울긋불긋 끔찍하게 변했던 등판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홍의 시선은 설화린을 벗어나 당지운을 직시했다.
“……네년, 왜 남자인 척을 하고 있느냐? 네년도 이년 못지않게 아름답구나.”
그 말에 당지운은 저도 모르게 얼어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