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제161화
혼자 낄낄거렸다가도 짧은 한숨을 내쉬는 광기 어린 천무린의 모습에도 다가가는 용기 있는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설화린이었다. 그녀는 다가가서 천무린을 바라본다.
“괜찮아요?”
“뭐가?”
“굉장히 화가 나 있어서요.”
“화가 나지. 찢어 죽일 놈이 바로 내 코앞에 왔다니까. 안 그래도 그 늙은 할아방탱이 죽탱이를 꽂고 싶어서 안달이었는데!”
……늙은 할아방탱이? 죽탱이를 꼬, 꽂아?
설화린과 당지운, 게다가 악교운을 비롯한 쥐소굴의 두 굴주마저 천무린을 황당한 눈길로 바라봤다.
대체 이 인간의 머릿속엔 뭐가 들어 있을까.
무려 무형노괴다.
그런 거마(巨魔)의 죽탱이를 꽂겠다고 욕하는 인간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이 인간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리고 한 사람은 또 누구라고?”
“아, 예. 그게 저…….”
“이, 이검? 이검이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뭐야, 그 듣보잡은? 그런 듣보잡한테 이렇게 박살 난 건 아니겠지, 설마?”
……예. 그 설마가 맞습니다.
공야찬과 조수강은 대놓고 한숨을 푹 내쉬는 천무린을 바라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어야만 했다.
그자가 얼마나 강한지 당신이 알기나…… 하느냐고 말문을 열려는 순간.
“오호라, 그 녀석들한텐 개기지도 못한 놈들이 나한테는 주먹을 꽉 쥐네? 허허, 이것 보게. 개가 제 주인을 물려고 하다니.”
그 말에 화들짝 놀란 두 사람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이미 늦었다.
공간에서 휙 꺼지듯 사라진 천무린의 신형이 두 사람의 앞에 나타났다. 막을 새도 없이 주먹이 수많은 권영을 일으키며 다가왔다.
퍼버버벅!
“절대로.”
퍼버버벅!
“내가 시킨 대로.”
퍼버버벅!
“정보를 안 넘겨주고.”
퍼버버벅!
“내 말 안 따라서 이러는 건.”
퍼버버벅! 콰앙!
“아니야. 하하, 알지?”
거침없고 무자비한 손속이었다.
그런데.
‘대, 대체 이 말, 말도 안 되는 속도는 무, 무어냐고!’
‘쿨럭, 쿨럭.’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원체 천무린의 뛰어난 무위를 잘 알고 있었지만, 전과 비교도 할 수 없게 강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닥치는 대로 패는 것 같은데, 주먹이 꽂히는 곳마다 급소다. 두 사람이 환장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그래서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타격을 덜 받는 방법밖에는 달리 답이 없었다.
“낄낄낄, 내 말을 진작에 따랐으면 좋았을……! 아, 아니야. 절대 그래서 이렇게 때리는 건 아니야. 알지?”
아니라면서 속이 후련한 표정을 짓는 천무린을 보라.
‘……저게 인간이냐.’
‘요상단 안 먹었으면 오늘 진짜 골로 갔겠는데.’
당장 눈깔이 뒤집히며 죽기 직전까지 간 두 사람은 혼미해져 가는 정신을 겨우 붙잡아야만 했다.
끄륵, 끄륵.
“하여간, 사파 새끼들이나 다름없는 이놈들을 거두는 게 아니었는데. 야! 너희들 키우는 살수 애들 있지? 고것들 다 내놔. 내가 홀라당 먹어 버리려니까.”
꼬로로록.
살수라니. 그것을 어떻게……!
정보원들 중에서도 최대한 가려 뽑은 녀석들이다. 제아무리 멸마신군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알아낼 순 없으리라 생각했건만.
졸지에 몇 년을 공들여 키운 녀석들을 홀라당 뺏기게 생겼다.
“사, 살수라니요…….”
“염병하네.
허나, 3초간의 정적 뒤에 대답하는 것은 곧 긍정을 의미했고.
“내가 이런 놈들을 뭐 하러 살려 뒀을까. 아휴. 그래, 전부 부족한 내 탓이지. 내가 잘못했네! 내가 잘못했어!”
눈을 까뒤집는 천무린의 모습을 바라보던 공야찬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의 다리를 부둥켜안았다.
“아이고! 멸마신군님, 걔들마저 없으면 저희는 뭐 먹고살라고 이러십니까. 제발 걔들만큼은 건드리지 않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육중한 덩치다. 어쩌면 거산도 전위와 비슷할 정도의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공야찬이 땅바닥에 바짝 조아려 천무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웃을 수 없었다.
그의 살고자 하는 간절한 의지가 모두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애원이라면 웬만하면 마음이 약해질 법도 하건만.
“……아하, 그러셔? 근데 댁이 뭘 먹고 살든 말든 내가 뭔 상관이야. 제 주인도 몰라보고 등쳐먹으려다가 헛짓거리가 들킨 놈들이 말이야.”
그 말에 공야찬은 절로 눈을 질끈 감았다. 막무가내인 천무린을 도저히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조수강을 노려봤다.
뭐?
호랑이를 등에 업은 여우가 되자고?
개뿔!
호랑이 등을 타려다가 우리가 여우 모피가 되겠구먼!
이런 씨앙!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공야찬이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어찌할 생각이냐?”
구원의 목소리는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악교운의 짧은 한마디에 씩씩거리던 천무린이 거짓말처럼 고갤 돌렸다.
“뭘 어떡해요. 족쳐야지.”
족친다고? 뭘 어떻게 족친단 말인가.
여태 천무린의 장난을 받아 주던 악교운의 표정이 짐짓 진지하게 바뀌었다. 정색한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에서 장난기는 일절 보이지 않았다.
“거산도 전위가 강했고, 그를 상대로 양패구상(兩敗俱傷)을 할 정도로 네가 강해진 것은 알고 있다. 아마 천하를 뒤져도 너만큼 강하기는 쉽지 않겠지.”
“엣헴, 뭘 또 그렇게 띄워 주기까지. 나 참, 뭐 필요한 거 있어요?”
“…….”
꾸욱.
악교운의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아하하. 농담, 농담. 사람이 왜 그리 딱딱해요?”
그 모습에 천무린이 한 걸음 물러나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요? 제가 강해졌는데, 그게 왜요?”
“……그런 거산도마저도 무형노괴에 비하면 몇 수 아래다. 질적으로 수준이 다르다는 말이지. 무형노괴라는 이름값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 말에 공야찬과 조수강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거산도 전위는 녹림의 차기 군주이자 벽력왕에 이어 다음 녹림의 왕이 될 확률이 높았다. 무려 칠십이채의 산채를 거느리는 왕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단 뜻.
그렇다고 한들.
현 천마신교의 육장로라는 직위와 아미파의 멸문지화를 일으킨 무형노괴랑은 비교가 불가하다.
단적으로 말하면, 거산도 전위는 뒷날 절대 고수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후기지수일 뿐이지만 무형노괴는 이미 강호에 크게 명성을 떨친 절대 고수라 할 수 있었다.
그런 후기지수에 불과한 자와의 승부에서도 양패구상.
그런데 이미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중원 무림에서 떨친 드높은 악명으로 따지면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밀리지 않을 거두(巨頭)가 바로 무형노괴가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하다. 지원을 받자꾸나.”
그 말에 천무린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무 말이 없으니 괜스레 불안해진 악교운이 말을 이어 갔다.
“하북의 소림이 근처에 있다. 그도 아니면 섬서의 화산과 종남도 있으니 그리로 가면 된다. 그리로 가서 원군을 요청하여 무형노괴를 포박하면 될 것이다. 소림의 십팔나한(十八羅漢)이나 화산의 매화검수(梅花劍手)들이라면 혈전을 벌이더라도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게다.”
이미 생각을 마친 악교운이었다. 그의 계획 아래, 무형노괴란 거두는 그리 상대해야만 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우선순위란 게 있잖아요. 그런 놈한테 발목 잡혀서 될 일이에요? 나 참.”
악교운의 우려와 달리 천무린은 무형노괴를 지칭하지 않았다. 오히려 악교운을 한심하게 바라보자, 악교운이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무형노괴를 아까 방금 족치자고…….”
“제가 언제요?”
으응? 아까 분명…….
“무형노괴? 당연히 족쳐야 하긴 하죠. 근데 그놈보다 먼저 족쳐야 할 놈이 따로 있잖아요.”
천무린이 히죽 웃었다. 그의 웃음에 사악함이 깃든다.
“……설마?”
이 모든 사건의 발단.
“그놈부터 족치러 가야죠. 운남이라고 했나? 거, 새끼 더럽게도 멀리 갔네.”
그렇다. 천무린은 제갈벽의 심복을 지칭하고 있었다.
제갈벽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고, 제갈강의 죽음마저도 그 연유를 알고 있을 것이며, 무형노괴가 찾고자 하는 것을 갖고 있는 사람.
모든 것은 그자를 잡아내느냐, 잡아내지 못하느냐로 직결되었다.
“자, 잠깐!”
“소, 소협!”
화들짝 놀란 공야찬과 조수강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천무린을 바라봤다.
“그, 그리 가시면 저희는 어찌합니……!”
“얼씨구? 지금 내 바짓가랑이 잡은 거냐?”
천무린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짓가랑이를 잡고 있는 공야찬을 걷어차 날리며 짜증 어린 표정을 지었다.
“뭐, 내가 여기 오면 너네 살리느라 그놈이랑 바로 한바탕 해 줄 줄 알았나 보네? 완전 미친놈들이네, 이거?”
“……어, 어? 그, 그래도 이리 가시면…… 저희는…… 어찌합니…… 까.”
조심스레 말문을 여는 공야찬과 조수강에겐 눈앞의 멸마신군은 곧 희망이자 구원의 동아줄이었다. 그들에게 남은 희망이 무엇이 있겠는가.
아무리 빨리 고수들을 섭외한다고 해도 한계는 명확했다.
돈으로 부릴 수 있는 고수들도 한계가 있고, 그 고수들조차 무려 무형노괴쯤 되는 고수와 부딪치면 제 목숨이 한 줌 먼지처럼 사라질 것을 잘 알 터.
그러나.
“어디 같잖은 잔대가리를 굴려 가면서 날 이용해 먹으려 들어? 콱 뒈지려고.”
천무린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또 구해 주면 보따리 내놓으라고 할 새끼들인 거 이미 다 알았는데, 뭘.”
……또 구해 주다니, 대체 언제 구해 줬단 말인가.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내부를 온통 뒤집어 놓고 삥을 뜯어 그 돈으로 도박을 한 것은 물론이요, 안 그래도 없는 인력을 파견시켜 정보까지 달라고 했으면서.
“눈빛들 보게? 에잉! 쯧. 됐다, 됐어! 그냥 무형노괸지 무형노군인지 모를 그 새끼한테 사지가 찢기고 대갈통이 박살 나 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러면서 몸을 일으킨 천무린이 대번에 자리를 뜨려고 하자, 공야찬이 그제야 소리쳤다.
“멸, 멸마신군의 직속 정보 단체로 들어가겠습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 말에 천무린조차 멈칫하면서 한참 동안 공야찬과 조수강을 바라봤다.
뻐억!
그러다가 고개를 꺾어 조수강을 바라보더니 공야찬을 걷어찼다.
“꾸엑!”
“저놈은 아니라는데? 웬 미친 소리를 하느냐고 너를 쳐다보잖아.”
삐딱선을 탄 천무린의 음성에 화들짝 놀란 조수강이 아니라며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 공야찬과 마찬가지로 주군의 예를 갖추며 품속에서 자그마한 패를 꺼냈다.
“구, 굴주를 상징하는 패이옵니다. 며, 멸마신군의 직속 단체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천무린이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바라봤다.
“하, 참나. 이러면 누가 좋아할 줄 알고?”
그러면서 조수강이 준 상징패를 지그시 바라본다.
그래, 그리 좋아할 리 없지. 내가 그런 쓸데없는 감투를 좋아할 리가!
하지만 원래 이성과 본능은 다른 법.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는 천무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