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제132화
허.
그 말에 천무린 역시 헛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악교운이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무심했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 말 후회하지 마세요. 아끼는 놈 아작 날 수도 있으니까.”
더없이 천무린을 믿는단 소리이기도 했다.
천무린이 만들어 가는 사천무관의 변화가 더없이 기꺼운 악교운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로 인해 소화진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꽈앙! 꽈앙!
천지가 개벽할 만한 소리가 떨어 울리더니 소화진에게 접근한 천무린의 주먹질은 멈출 새가 없어 보였다.
몇 번이나 검에 내력을 불어넣어 그 평범하기 짝이 없는 권격을 쳐 내고 흘려 냈다.
과연 소검귀라는 별호가 붙을 만한 실력이었다. 단순히 강약을 따지더라도 사일검룡 이백보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대번에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천무린에겐 딱 그 정도의 감상이었을 뿐이었지만, 소화진은 아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소검귀 소화진은 입을 다물고 권격과 각격을 막는 데 치중했지만, 그러면서도 이 말도 안 되는 위화감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해야 했다.
낭창하기 짝이 없는 표정과 입가에 머물고 있는 특유의 미소는 더없이 가벼워 침착함이나 차분함과는 거리가 먼 녀석이었거늘.
본격적으로 임하기 시작한 천무린이 보여 주는 광기 어린 기세에는 소화진이 감당할 수 없는 거력(巨力)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물러서려는 마음을 바로잡는 소화진이었다.
무릇 무인이란.
제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시간을 거스를 순 없는 법이다.
검을 휘두르는 시간?
소화진은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검을 휘두르는 데 집중했다.
내력을 쌓는 시간?
검을 휘두르는 시간과 잠을 자는 시간 말고는 내력을 쌓았다.
즉.
천무린보다 몇 년을 더 살아온 소화진이, 그리고 더할 나위 없는 재능의 축복을 받았다고 하는 소화진이.
이렇게 힘없이 무너진다는 건 도저히 말이 안 된다고 느꼈다.
“……후.”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기 위해 한숨을 토해낸 소화진의 검 끝으로 푸르른 기운이 감돌며 주변으로 은은하게 기세를 퍼뜨렸다.
청명한 기운이 퍼져나가면서 도도하게 흘러가자,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과연, 청성제일의 기재라더니 정말 대단해! 청성을 이끌어 갈 최고의 기재라고 평가받는다고 하더라고!”
송무의 감탄과 흥분이 섞인 말에 다른 생도들이 삐뚜름한 표정을 지었다.
“또, 또. 이 새X는 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입수하는 거야. 너 이 새X, 바른대로 말해. 어디 정보통 두고 있는 거지?”
“아니면 들어오기 전에 어디 정보 단체에서 일이라도 하고 온 거 아냐?”
“하기야 청성파에서 여태 이 정도까지 촉망받는 기재가 탄생했다고 들어 본 적은 없는 거 같아.”
생도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뒤로하고 소화진은 넘실거리는 푸른 검기를 선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에 감탄한 것은.
‘……재능만큼은 역시인가.’
다름 아닌 악교운이었다. 일방적으로 밀리는 것 같은 형국에서도 제 검을 올바르게 잡고 있는 모습만 봐도 소화진은 남다른 인물이었다.
천무린이 꼬집은 것처럼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마음은 별개로 치더라도 수련할 때만큼은 오로지 몰입하여 전념하는 소화진이었다.
그렇다 보니 제 실력을 발휘할 때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파악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새 절정의 경지에 다다랐군.’
절정이라는 경지에 발돋움한 소화진이었다. 그의 나이를 감안해도 저 정도의 검기는 고작 성년이 지난 이가 지니기에는 실로 엄청났다.
쌍용검 파평을 꺾었다는 천무린.
그리고 절정의 기운을 보여 주는 소화진.
“타핫!”
굽이굽이 퍼져 나오는 청명한 기운을 담은 검이 천무린을 향해 뻗어 갔다. 정면으로 뻗어 가는 검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투로로 향했고, 당장이라도 천무린의 가슴팍을 두 쪽으로 쪼갤 듯싶었다.
무당처럼 부드러움을 담은 것도.
화산처럼 화려함을 담은 것도.
소림처럼 강건함을 담은 것도.
종남처럼 굳건함을 담은 것도.
점창처럼 쾌속함을 담은 것도.
개방처럼 변화무쌍을 담은 것도 아니었지만.
청성파의 검은 구파일방 중에서도 명문이라 일컫는 이들보다 어느 하나 뛰어나지 않았지만, 단 한 가지 점에서 달랐다.
“청운적하검?”
천무린의 눈매가 별안간 가늘어졌다. 뻗어 오는 검기는 절정의 고수의 그것과 같았지만, 특별함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살의(殺意)?’
아니, 살의 따윈 전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검 속에 담긴 살기는 대체.
「 아니, 교주님! 청성파 나부랭이들이라고 했습니까? 아이고, 나 환장하겄네. 구파일방 중에서 제일 까다로운 게 청성파 말코 새X들이라고예! 」
정마대전을 벌일 당시, 천무린을 따르던 검마대주가 청성파를 봉문시키고 와서는 이를 악물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던 그는 검마대원 수십 명을 잃고서는 그런 말을 꺼냈던 것이 기억났다.
「 무슨 헛소리냐. 청성파 따위가 무슨? 이 새X야, 부하들 다 잃고 와서 한다는 말이 고작 그따위 소리냐. 」
「 아오! 당연히 알지예! 청성파가 무슨 위명이 있겠냐마는! 교주님은 가능합니꺼! 살의도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검술을 펼치는 게! 청성파 새X들이 얼마나 악랄한지 한번 겪어 보면 알게 될 껍니더! 」
당시 검마대주의 말을 그저 투정이라 치부하고 흘려들었는데, 지금 겪어 보니 확실히 달랐다.
살의 없이 살검을 펼칠 수 있느냐고.
천무린은 지금도 살의만 담으면 저승사자의 저주 때문에 온몸이 격통에 시달리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살의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단순히 떠올리는 것만으로 의지가 담아지는.
상대방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단 한 순간이라도 든 순간, 의지로 표명되는 것이 사람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의지 없이는 살검을 펼칠 수도 없다는 뜻이지.’
살의를 담지 않는다는 건 상대하고 있는 무인에게 묘한 안정감을 주기 마련이다. 어차피 나를 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정감과 위안을 말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이 모두 살검이라면?
무인으로서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되는 순간을 방심하게 되는 셈이었다.
쐐애애액!
단숨에 가슴팍 앞에 도달한 검을 쳐 내기 위해 천무린은 용수철처럼 허리를 뒤로 튕기듯이 넘겨야만 했다.
피잇!
스쳐 지났다 싶을 정도의 검결이었건만, 가슴팍 정중앙이 한 치 베였다. 앞섶이 핏물에 적셔지며 천무린의 입가에 헛웃음이 지어졌다.
“……허.”
제아무리 살의가 없었다지만, 감각까지 무디게 행동한 것은 별개이니까.
그 와중에 소화진의 입이 오물거렸다.
“온건하고, 악랄하며, 음흉하고, 악독하게.”
“뭐냐, 그건?”
“청성파의 사대 요결이다.”
“이거야 원. 오대세가에 사천당가가 있으면 구파일방에는 청성파가 있다 이거냐.”
청성파. 본격적으로 도가(道家)의 정통적인 성향을 따르기 전에는 근본이라 일컫는 사대 요결처럼 악랄하고 악독하게 자객들의 살법과 방술, 부주법까지 사용하는 도관이었다.
그렇다 보니 다양한 특징이 담긴 조합으로 형성된 청성파였고, 그 뿌리로부터 검을 익힌 소화진이었다.
천무린의 입가가 비틀린다.
“후후후, 생각보다 좋은데.”
대다수의 무공을 모조리 익혔다지만 청성파의 무공은 별반 특별할 게 없어서 관심이 덜했던 천무린이었다. 비구니들의 소굴이라는 아미파는 더욱더 볼 게 없었고.
“근데 살의 없이 살인을 할 수 있다면야 나한테 더없이 좋은데.”
지금의 천무린은 마음껏 살인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살의를 표출하지 않고도 누군가를 살인할 수 있다니. 그게 가능하다면 천무린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무공이 아닌가!
“흥! 네놈이 좋고 안 좋고가 무슨 상관이더냐?”
소화진으로서는 무슨 말을 하는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청성의 무공을 쓸 수 있는 것처럼 말을 하다니.
그런데.
뚜둑.
손가락이 기이하게 꺾였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며 바르게 펴졌다. 그리고 손바닥에 은은하게 물들어 가는 탁한 색깔의 기운.
그 기운과 손바닥의 모습에 소화진의 두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최, 최심장(催心掌)?”
그 말에 악교운 역시 눈에 이채를 띠었다. 최심장이라고.
4대 도문이라고 불리는 청성파에서 무엇이 가장 유명하냐고 묻는다면 세 가지를 들 수 있었다.
첫째, 청성파가 건립된 청성산이요, 둘째, 청운적하검이요, 그리고 셋째, 바로 악랄하기 짝이 없는 장법으로 꼽히는 최심장(催心掌)이다.
“네놈이 어떻게 최심장을……!”
“어떻게 펼치느냐고? 그냥 쓱 보니까 펼쳐지던데.”
소화진의 어금니가 다시금 꽉 물렸다.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악랄하고 악독한 최심장이지만, 그만큼 호전적이고 실전적인 장법이 바로 최심장이었다.
마음대로 익히고 싶다고 해서 어설프게 따라 할 수 있는 장법이 아닌 셈이었다.
그 모습에 천무린이 자신의 앞섶을 바라보며 고개를 젓더니 입을 열었다.
“나약해. 아직도 많이.”
전생의 무신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의 몸은 더없이 나약하기 짝이 없었다. 고작 애송이의 검기 하나에 살의를 못 느껴서 피나 흘리고 있으니.
스스로에게 내뱉는 말과 함께 천무린이 스산한 눈빛을 띠었다. 하지만 한탄하고 있을 새가 없었다.
왜냐고?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의 정신 상태를 뜯어고쳐 줘야 하거든.
“살의를 담지 않아도 살인을 할 수 있다고. 고맙다. 덕분에 좋은 걸 알았다.”
그러곤.
쐐애애액!
매의 발톱처럼 쇄도하는 천무린의 손바닥에 소화진은 정신을 바짝 차리며 검을 들었다.
“흥! 멍청한!”
검기를 줄기줄기 뻗어 내고 있는 이 검결에는 무엇이든 닿아도 벨 수 있는 자신감이 담겨 있다.
네가 아무리 뛰어난 무인일지라도 똑같은 살과 피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면 감히 이 검기를 피해 내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그러곤 청운적하검의 경쾌하면서도 날렵한 검 끝을 표홀하게 뻗었다.
타앗!
“억!”
검 끝에 짓눌리는 무게감에 소화진은 경악성을 터뜨렸다.
천무린의 발이 땅을 박차더니, 어느새 공중제비를 돌아 검기가 감도는 소화진의 검면을 가볍게 발로 튕겼다. 그러고는 몸을 팽이처럼 팽그르르 돌아 소화진의 뒤로 넘어갔다.
파앗!
그 충격에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었지만, 소화진은 수많은 역경을 이겨 낸, 사천무관 생도들 중 제1인자다. 몸이 따라가며 돌아간 천무린을 향해 검을 뻗어 가고 있었다.
카가가가강!
하지만.
“본능과 감은 합격. 근데 아직 멀었어.”
최심장을 펼친 천무린의 오른손이 다가오는 소화진의 검면을 타고 뱀의 요사스런 움직임처럼 몸을 바짝 붙어 접근했다.
파앗!
검게 물든 오른손이 대번에 소화진의 심장을 물어뜯기 위해 달려드는 뱀의 머리처럼 꺾였다.
그 모습에 헛바람을 들이킨 소화진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최심장이 무엇인가. 청성파에서도 소문난 가장 악독한 무공 중 하나다. 애초에 심장을 부순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무공인 만큼 적중되면 오장육부 중 하나는 오늘부로 제 기능을 잃을 터였다.
그럴 순 없었기에 결국.
타앗!
검을 회전시키며 동시에 몸을 던진 소화진이었다.
나려타곤(懶驢打滾).
그래, 굴러 버렸다.
체면을 목숨처럼 여기는 무인이자 자존심이 하늘과도 같은 소화진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려타곤을 펼치고야 말았다.